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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룻 2:17-23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룻 2:17-23 / 룻은 밭에서 저녁때까지 이삭을 주웠다. 주운 이삭을 떨어 보니 보리가 한 말이나 되었다. 18) 그것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겨 온 것도 시어머니에게 드렸다. 19) 시어머니가 물었다. `얘야, 오늘 어디서 이삭을 주웠느냐? 어디서 일했어? 너에게 이토록 잘해 주신 분이 있다니, 여호와께 복받았으면 좋겠다.' 룻이 어느 집 밭에서 일하였는지를 시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오늘 제가 이삭을 주운 밭의 주인이 보아스라고 하더군요.' 20) 그러자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여호와께서 그분께 복을 듬뿍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분이 돌아가신 남편과 자식들에게 그렇게 잘해 주시더니 이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들에게도 이토록 잘해 주시는구나. 그분은 우리 집안과 가까운 분이라 우리를 떠맡아 주셔야 할 사람 가운데 한 분이야' 하고 말하였다. 21) 모압 여인 룻이 `또 그분이 자기 집 곡식 거두기가 다 끝날 때까지 자기 집 일꾼들과 꼭 같이 다니라고도 하시더군요' 하고 말하자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그래, 얘야, 다른 밭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그 집 아낙네들과 꼭 붙어 다녔으면 좋겠다.' 하고 일렀다. 23) 그래서 룻은 보리와 밀 거두기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집안의 아낙네들을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우며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나오미는 롯이 가져온 많은 곡식을 보며 호의를 베푼 사람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곡식을 어디서 얻었는지 묻습니다(17-19). 그 사람이 보아스인 것을 알게 된 나오미는 그가 이전부터 그의 집에 한결같은 자비를 베푼 자이며, 가까운 친척으로 율법에 따라 자신들을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20).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집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17-20) 텅 빈 것 같고 비통했던 나오미의 삶(1:20-21)에 롯을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보게 된 나오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혜 베푸심을 찬양합니다. 나오미는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기업을 무를 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은 계대결혼과 같이, 지파 내 친족의 경제적 손실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신 25:5-10). 인간적인 공허함을 느끼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채우십니다. 어쩌면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할 새로운 기회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삶을 지휘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21-23)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우리가 인지할 수도 있고 눈치채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때에라도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문들을 닫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우연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지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삽니다(잠 16:9).
적용: 요즘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당신의 일상 가운데서 찾아봅니다.
음식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서비스, 특히 특별한 서비스입니다. 요즘 맛있는 음식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흔치 않지요. 때로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은 간혹 너무 많은 비용을 청구하는 탓에 서비스에 대한 기억을 부정적으로 만들곤 합니다. 음식의 맛이 어느 정도 이상만 되면 사람의 뇌는 맛보다 다른 것들에 더 집중하고 그 경험들을 위주로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좋았는지 아닌지에 따라 음식점이나 카페를 좋게 기억할 수도 나쁘게 기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장소가 그렇지 않을까요?
< 설 교 >
기업 무름
룻 2:17-23 / 은석교회
믿음은 믿음이 있는 자의 마음을 든든하게 합니다. 흔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을 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일에 있어서 걱정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든든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보다는 자신이 믿는 믿음의 대상에 더 신뢰가 갈 때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절대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는 나약한 미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의 대상은 나약한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분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단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허락하에 되어지고 있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보여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된 우리에게 있어서 믿음은 과연 어떻습니까? 참으로 조그만 일에서도 믿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낙심하고 흔들리는 모습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신앙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대해서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실패하면 행복도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 역시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는 어디서도 행복의 조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들이라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나해도 남편, 아들과 함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시각이지만 나오미와 룻에게는 그러한 조건까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 무엇도 의지할 것이 없는 약자로 전락합니다.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나오미와 룻이 어떻게 살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 힘든 일이지만 분명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이것을 발견함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맛을 아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룻이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밭으로 갔을 때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해서 '이방인이 자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는가?'라고 하면서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자된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섭섭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것은 은혜의 양으로 보면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자체로 본다면 룻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자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즉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은혜의 양에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다는 것에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에 대한 신자의 마음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은혜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타인과 비교하면서 은혜의 양을 생각하고 많다 적다는 판단을 하면서 섭섭함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양을 생각한다는 것은 은혜를 세상의 것을 받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에게서 은혜는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 자체였습니다. 무시받고 천대받아 마땅한 자신에게 다가오고 호의를 베푸는 것, 이것이 룻에게 은혜로 여겨졌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들을 위해서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에게는 은혜의 양이란 없습니다. 다만 받을 수 없는 자가 받았다는 감격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나오미와 룻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7,18절에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주은 이삭을 떨자 한 에바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한 에바란 지금의 단위로 계산하면 약 12되쯤 됩니다. 밭에서 주은 이삭이 12되 되었다면 보아스가 룻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주워온 이삭으로 떤 보리의 양을 보자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룻이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라고 답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호의를 베푼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나오미 역시 룻이 주워온 이삭에서 호의를 베푼 자의 은혜를 발견했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는 인생으로 전락한 사람입니다. 우린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거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일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의 밭에 가서 남의 일해서 얻은 것의 부스러기를 주워서 먹고산다는 것은 가장 낮은 위치가 되어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주운 것을 바라본다면 아마 눈물이 흐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고 살아가는 신세가 된 것에 대해서 한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운 이삭을 보면서 그 밭의 주인에게 복을 빈다면 그것은 주워먹는 자신의 신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제 자신과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어떤 신세에 처했든 어떤 입장이 되었든 자신의 신세나 입장을 바라본다면 베풀어진 것에 대해 절대로 감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신세 한탄만 있을 것입니다.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는 원망만 여러분의 가슴을 칠 뿐입니다.
신자로서 참으로 낮아진 마음은 남이 흘린 것을 주워 먹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마음이 곧 평안이며 천국이며 참된 만족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푸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베풀어진 것을 보지 않고 베풀어지기만 바라고 살았기 때문에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을 거두심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요즘 우리나라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은총을 은총으로 알고 살았습니까? 몇 달 비가 오지 않음으로서 전국이 난리입니다. 겨우 몇 달 비 오지 않음으로서 이 정도인데 1년, 아니 아합 왕의 시대처럼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비참한 현상들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번 가뭄으로 해서 신자된 우리는 한 방울의 물도 곧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 심정도 농사꾼이 아니라면 절실하게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보여지는 물을 기뻐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베푸셨던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과 같은 낮아진 마음으로 살아가십니까? 낮아진 마음은 높은 마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곧 베풀어진 은혜를 은혜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낮아진 마음인 것입니다.
신명기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사십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이 나오미와 룻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그들을 실패의 길로 인도하셨고, 이제 오늘 우리들 역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험한 광야의 길로 실패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나오미는 어떤 말을 합니까? 20절에 보면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베푼 것으로 말합니다. 물론 생존한 자에게 베풀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 즉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지 않습니까?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은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지 사실 죽은 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사망한 자에게 베푼 은혜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에 나오는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업 무를 자'란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말합니다. 고엘이라는 것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고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을 계속해서 보존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엘에 해당된 사람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가난한 혈족의 땅을 되찾아 주는 일이고(레 25:25.26),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서 복수를 책임져야 하고(민35:12,19,21), 친족의 홀로된 여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민 5:8)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엘로서의 자격은 가까운 혈족으로서 자원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을 무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무르는 고엘된 자는 타인의 기업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미는 보아스를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음으로서 끊어져 버린 가문의 기업을 되찾아 주고 갚아줄 자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한 자에게 베푼 은혜인 것입니다. 이미 사망한 자가 어떻게 기업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업이 보아스로 인해서 되찾아지고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가 보아스에게서 본 것은 이삭을 줍도록 한 은혜만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는 은혜를 보았던 것입니다. 산 자이면서도 죽은 자에게까지 베풀어지는 은혜를 보는 그 마음이 낮아진 나오미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와 같은 룻과 같은 낮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신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 마음을 가꿀 수가 없습니다. 우린 항상 높은 것을 기대하고 높은 것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고, 산자에게만 베푼 것이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란 다만 지금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보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기업의 끊어짐을 뜻합니다. 기업을 이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와 룻은 기업 없는 자로 전락해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끊어질 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한 위기에 보아스가 개입됩니다. 그리고 사망으로 끊어진 기업을 되찾고 갚아줍니다. 과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창세기를 보면 처음의 인간에게는 생명나무가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생명에서 끊어진 자가 되었습니다. 즉 사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의 등장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서 끊어진 생명이 되찾아지고 생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은 산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모두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고엘이십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하게 된 우리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시고 생명에 참여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고엘의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생명에서 끊어진 우리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산자에게나 사망한 자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신자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기업이 끊어진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보아스를 자신의 기업을 무를 자로 보면서 은혜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처한 처지가 무엇입니까? 비록 세상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신자인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빈곤하고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보면서 때로 한탄하고 섭섭해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정작 세상의 처지는 생명에서 끊어져 있습니다. 그 처지를 보는 자가 참된 신자의 눈을 가진 자이며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망한 자에게까지 베풀어진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세상에 있는 것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이 아닌 든든함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외침으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 진심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리스도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은혜의 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감히 은혜 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로 감사할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하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수단을 가진 사람을 부르셔서 가난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
룻 2:17-23
룻기는 이삭줍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삭줍기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선행조건이 레위기,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와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23:22).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9-22).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0-11). 이 책 3장의 “출 22:21-27”, “출 23:10-11” 부분을 보라.
이 율법의 토대는 사람이 그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풍성함의 수단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정은 (십일조와 제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 가문의 제사장만 제외하고) 절대 양도할 수 없는 항구적인 땅의 분깃을 소유해야 한다(민 27:5-11 36:5-10 신 19:14 27:17 레 25장).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은 곡식을 기를 수단을 가졌다. 그러나 외국인과 과부와 고아는 땅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은 가난과 학대에 빠지기 쉬웠다. 이삭줍기법은 그들에게 밭 가장자리에서 추수 초기에 덜 익은 곡식이나 산물과, 정해진 어떤 해에 윤작으로 비어 있던 들판에 솟아난 것은 무엇이든지 추수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고살 기회를 줬다. 모든 땅 주인은 값을 받지 않고 이삭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이 구절은 이삭줍기법에 대한 세 가지 토대를 제공한다. 가난한 자를 향한 너그러움은 (1) 하나님께서 사람이 손으로 하는 일에 복 주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신 24:19). 또한 (2) 잔인하고도 모질게 학대하는 애굽의 노예주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기억에 힘입어(신 24:22a), (3)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의 문제다(신 24:22b). 우리는 이런 세 가지 동기를 보아스의 행동에서 모두 볼 수 있다. (1) 그는 룻을 축복해 줬고, (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기억했으며, (3) 룻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긴 것을 칭찬해 줬다(룻 2:12).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땅과 추수를 얼마나 완전하게 시행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보아스는 하나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게 그것을 지켰다.
이삭줍기법은, 적어도 그 법이 실제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놀라운 복지망을 제공해 줬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는 사람이 일해서 그분의 결실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구걸을 하거나 노예로 살거나 성매매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천박한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결혼, 입양, 또는 출신 국가로 돌아가게 해주는 기회를 대비해서 일반 농장 일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존감, 신체조건 및 일하는 습관 등을 유지했다. 지주는 기회를 제공하긴 했으나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강제 노동은 없었다. 그 혜택은 번거롭고 부패하기 쉬운 관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라 어디에서나 지역별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삭줍기법을 성취하려는 지주의 인격과 양심에 달려 있었고,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처했던 환경을 낭만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의 경우에, 이삭줍기법은 의도했던 대로 작용했다. 이삭을 주울 기회가 없었더라면,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가난을 알고 난 후에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굶게 내버려 뒀거나 미리 만들어 놓았던 음식(빵)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을 것이다. 전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후자는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는 해주겠지만, 그들이 더욱 보아스에게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룻은 추수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곡식을 사용해 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줬다. 또한 룻의 기술과 능력을 활용해 룻과 나오미는 장기간의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을 착취에 덜 취약하도록 만들어 줬다.
오늘날 빈곤에 대한 공적, 사적 대응과 사회적, 정치적, 신학적 논쟁에 있어 이런 이삭줍기에 담긴 구제원리는 마음에 새겨둘 만하고, 열렬히 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크리스천끼리도 개인 대 사회의 책임, 사적인 수단 대 공적인 수단, 수입의 분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룻기를 잘 살펴봐도 이런 의견 차이가 해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공유된 목표와 공동의 토대를 분명하게 밝혀줄 수는 있다. 오늘날 사회에 문자 그대로의 이삭줍기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를 돌봐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이 타인의존이나 착취에 의해 질식당하는 삶을 사는 대신 생산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갖게 해줄 수 있을까?
개개인을 인도하셔서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 (룻2:17-23)
영감을 받은 보아스는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이삭줍기 율법은 지주에게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에 얼마간의 산물을 남겨 놓을 것만 요구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잡초가 무성한 밭이나 높은 감람나무 위에서 산물을 수확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하고 불편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얻은 산물은 대개는 땅에 떨어졌거나 덜 익은 것으로 질이 안 좋았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기 일꾼에게 일부러 너그러운 행동을 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들은 가장 질 좋은 이삭을 벤 다음 그루터기 위에 놓아두어서 룻이 그냥 줍기만 하면 되게 해 놓았다. 보아스의 관심은 법으로 규정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진정으로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워야 하며 자기 일꾼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룻이 수확한 것은 그녀와 나오미 것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일손의 하나로 여겨줬고, 더군다나 그녀가 추수한 것에 따른 일정한 비율의 몫을 확실히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했다(룻 2:16).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일할 기회를 찾는 실직자가 있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보아스 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수 있을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도록 어떻게 우리는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사회의 자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형성해서, 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보아스처럼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축복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할 수단과 책임이 중산층에게 주어져 있는가? 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른 근로자와 앞으로 근로자가 될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결실이라는 축복을 안겨 주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믿음으로 사는 여자
룻 2:17-23 / 김도완목사
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찬양받는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이 시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우울한 날 지나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으로 다 지나가는 것이며/지난 것은 소중한 것이라네.” 삶이 여러분을 속이는데 정말 슬퍼하지도, 노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 룻은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삶을 향해 왼뺨을 내미는 여자입니다.
룻기로 돌아왔습니다. 2주 전 은혜로 사는 남자 보아스를 만나보았다면 오늘은 믿음으로 사는 여자 룻을 만나봅니다. 룻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먼저 그녀가 고난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그녀는 삶에게 속고 뺨맞은 여자입니다. 부픈 꿈을 안고 결혼했지만 자녀 하나 갖지 못 한 채 젊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아버지와 아주버님까지 졸지에 세상을 떠나더니 늙고 가난한 시모를 따라 남의 나라에서 외국여자로 극빈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의 밭에 나가서 눈총을 받으며 얼마 안 되는 이삭을 주워와 입에 풀칠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아침에 일어나고 싶겠습니까? 진학이나 취업, 사업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무시와 조롱, 미움과 비방을 받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만사가 귀찮고 아침에 눈뜨기가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심정을 한 번쯤은 겪어 보셨지요? 그녀도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2.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런데 2장에서 룻은 그런 삶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는 듯 보입니다. 2장 2절에서 그녀는 시어머니가 보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합니다.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남의 밭에서 눈총과 무시를 받아가며 이삭을 줍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먼저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일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한탄한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대신 먼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 이르기까지 여러 날이 지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다른 날과 달리 룻이 많은 이삭을 주워온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이삭줍기는 요즘으로 치면 최저시급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그녀가 어떤 태도로 하는지 7절이 보여줍니다.
(룻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움막)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녀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태도로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딴 것 주워서 어느 세월에 자리잡겠나’ 할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이삭 하나도 하잖게 보지않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슬렁슬렁 주운 다른 이보다 크게 많은 이삭을 주웠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때문에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보아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룻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15kg)쯤 되는지라.
한 에바 약 15kg의 곡식은 당시 남자 일꾼의 한 달치 품삯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양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그녀는 혹독한 고난과 슬픔을 겪고도 여전히 삶을 사랑했습니다.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쉽지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도는 아무리 혹독한 고난으로 아무리 처절한 자리로까지 추락해도 그런 인생에도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심과 마침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상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이는 룻처럼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삭을 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를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십니다.
레오나드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catch me if you can’에는 가난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주인공이 이솝우화를 인용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두 마리의 쥐가 우유통에 빠졌지. 한마리는 포기하고 빠져 죽었는데 다른 한마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허우적대며 마지막 힘이 빠지기 전까지 헤엄을 쳤어. 그러자 우유가 점점 굳더니 버터가 되었지. 그 쥐는 굳은 버터를 딛고 우유통 밖으로 나와 살았어. 내가 바로 그 쥐야.’ 우리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길이 안 보인다고 포기하면 정말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눈을 열어 길을 보여주십니다. 삶이 아무리 여러분을 속이고 뺨을 후려쳐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길을 여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은혜를 만나거든
룻의 믿음은 삶을 대하는 태도 뿐 아니라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룻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녀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만은 신세지기를 거부합니다. ‘내가 왜 당신 도움을 받아? 내가 거지야?’ 자신이 은혜가 필요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최고의 교만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누구 도움도 없이 성공했고 앞으로도 도움같은 것 안 받아.’ 마귀를 타락시킨 교만이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로 결정한 아담과 하와의 교만입니다. 자기 힘만으로 살수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로 태어났습니다. 가족과 친지와 공동체의 은혜로 자라고 교육받고 일터를 찾았습니다. 지금도 동료와 고객과 사회의 은혜로 벌어먹고 삽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은혜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합니다. 룻은 또한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10절입니다.
(룻 2: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자신이 보아스의 하녀 중 하나와도 같지못한 이방여자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보아스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자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정도는 당신에게 별 것 아니니 대단한 은혜라 할 것도 없지 않아요?’ 겸손의 또다른 면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 곧 진짜 은혜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이방땅인 두로를 방문하셨을 때 한 이방여자가 와서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제자들에게 이에 대해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그녀를 유대인 들의 비하하는 표현으로 모욕하시는 척 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때 그녀가 보인 반응을 예수님은 큰 믿음으로 칭찬하셨습니다.
(마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녀는 자신이 율법에 무지한, 개나 다름없어 은혜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은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절망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은혜를 간청합니다.
4. 그 앞에 엎드리라
이런 큰 믿음이 룻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방여인들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혹은 남자는 이방인과 여자에 비해 차별적인 사회적 지위와 대우를 누리느라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헛된 자만심에 눈이 멀어 살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헐벗고 빈곤하고 가련하고 절망적 존재인지를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교만에 눈먼 이들을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자신이 은혜가 필요한 절망적 존재임과 그 은혜는 감당하기 힘든 과분한 것임을 깨닫지 못 하는 이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영원한 멸망을 피할 길이 없는 절망적 죄인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값으로 베푸신 감당키 힘든 은혜입니다. 당연히 받을만한 은혜가 아닙니다.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을 자격없는 죄인이 누립니다. 이 은혜 앞에 꿇어 엎드려 간청하지 않는 자는 눈먼 자입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영혼입니다. 멸망의 폭포 앞까지 휩쓸려 내려가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이 그런 영혼을 구원합니다. 추악한 모든 죄를 남김없이 씻고 예수님이 이루신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겠다고 초청하십니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고난의) 불로 연단한 (믿음의)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보혈로 씻은 의의)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죄악의)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진리의)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간구하여 영원한 생명을 거저받아누리는 믿음의 자녀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 2:17-23
첫 날에 벌어진 기적
룻이 추수철에 떨어진 이삭을 주으러 나간 첫 날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연히 도착한 곳이 인자하고 믿음이 좋은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자기 여종과 같이 대우해주었고 앞으로도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맘껏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본문은 종일 수고한 룻에게 보인 나오미의 반응인데 신앙적으로 특별히 기도에 대하여 새겨봐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두 과부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방이 막히고 아무 대책이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굶어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었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만 이을 수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은 감내해야할 처지였습니다.
과부가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홈리스가 길거리에서 동냥하거나 동전을 주워서 싸구려 햄버거로 식사를 해결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룻이 주워 온 곡식의 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추수 현장에서 단을 털어서 알곡만 갖고 왔는데 한 에바 약 22리터 정도 되었습니다. 한국은 곡물 한 되가 1.8리터니까 12되인데 두 여인이 아껴 먹으면 몇 주도 버틸 수 있는 양입니다. 정상적으로는 도무지 주울 수 없고 유대인도 아닌 모압 여인으로선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양을 주어왔습니다. 거지가 우연히 아주 인자한 부자를 만나 백 달러짜리 지폐를 여러 장 받은 정도의 큰 횡재였습니다.
나오미는 유력한 집안으로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남편과 두 아들까지 죽고 돌아왔기에 고향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룻은 모압 여자니까 어차피 멸시 받을 것을 각오했고 나이든 시모가 힘들 것까지 감안하여 혼자서 주으러 나갔습니다. 거기다 나오미에게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드렸는데. 그날 낮에 보아스가 넘치도록 나눠준 볶은 곡식을 남겨서 가져온 것입니다.(룻2:14) 나오미로선 룻이 자기를 부양하려고 모든 현실적 난관을 각오하고 따라와 준 것만도 대단한데 자상한 마음씀씀이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른 아침 며느리 혼자 내보낸 후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첫날이니까 문전박대 받지 않고 율법대로 행하는 인자한 주인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주울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내심으론 성추행을 당하지 않고 성한 몸으로만 돌아와도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결과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로선 그 날 하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고 두 번이나 거푸 룻이 만난 밭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줍도록 허락한 자가 있다니 자기 기도에 대한 응답이 분명했으므로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덧붙였습니다.
룻은 그날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시모에게 말씀드렸는데 나오미가 밭의 주인이 보아스라는 말을 듣자 다시 여호와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베푼 그가 보아스와 여호와 둘 중에 누구인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 앞에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당연히 복 받을 자는 보아스입니다. 이어서 동일하게 ‘그’라는 대명사로 받았기에 의미의 흐름상 보아스가 복을 받아야만 할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만약 그가 여호와가 되면 죽은 자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는데 거꾸로 여호와가 은혜를 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보아스가 룻을 넘치도록 도와주었기에 자기도 도움 받았고 그럼 사실상 엘리멜렉 집안에 은혜를 베푼 셈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큰 은혜를 베푼 보아스에게 감사와 축복을 한 후에 그가 자기들 근족 중의 한 명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룻이 마침 기업 무를 자 중에 한 사람을 만난 것은 전혀 기도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게 당신만의 계획을 갖고 자기들에게 간섭하고 있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근족이라는 말을 듣자 룻은 보아스가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우라고 말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젊은 모압 과부가 유대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껏 섬기는 효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순전히 따르는 믿음 때문에 도와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룻은 너무 과분한 배려인지라 완전히 납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지금 그가 나오미의 근족이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왜 그런 말과 대우를 해주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도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왕이면 근족에게 계속 신세지는 것이 좋지 다른 밭에 가면 이만한 양은 절대 주울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
본문의 상황에선 나오미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 국물부터 마신다는 속담처럼 룻을 보아스와 계대결혼 시킬 꿈에 부푼 것은 아닙니다. 우선 룻이나 나오미나 그런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단지 이삭만 주울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오미가 그는 너와 계대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고만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남편과) 가장 가까운 남자친척을 뜻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고엘이 감당해야 할 임무는 크게 넷이고 계대결혼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친척이 살해당했을 때는 방심하다 실수로 죽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엘이 피의 복수를 해도 정당했습니다.(민35:19-21) 또 빚을 갚으려고 팔았던 가문의 재산을 다시 돈을 주고 사야하고(레25:25), 빚을 갚기 위해 종으로 팔려간 친척도 다시 사야 했습니다.(레25:47-49). 그리고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면 그 남자 형제들이, 그마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인척이 미망인과 결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신25:5-10) 고엘은 한마디로 가문의 이름과 기업을 유지해 나갈 재산과 자식이 없을 때에 가장 가까운 남자 형제 내지 친척으로 대신 책임지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말하자면 나오미가 고엘이라고만 언급한 것은 단순히 위급하면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붙여주셨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야 할 처지니까 엘리멜렉이 대대로 내려온 기업을 모압으로 이주하면서 다 팔았거나 빚을 져서 남에게 넘어갔을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보아스와 룻의 계대결혼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 저녁만은 룻이 가져온 곡식에 놀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보아스의 나이, 외모, 성격 같은 신상정보를 전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보리 추수는 대체로 사월 중순에 시작되고 밀 추수는 유월 중순에 행하니까 약 두 달이 걸립니다. 절기로 따지면 유월절에서 맥추절까지 7주간 정도 됩니다. 맥추절은 유월절 7주 이후니까 7X7=49 다음의 오십일 째가 되므로 오순절로도 불립니다.
단순 수치로 계산해보면 안식일에 노동을 쉬었다 치면 룻은 43일을 일했고 첫날 주운 양 6.7되의 43배는 약 29말이나 됩니다. 두 여인이 다음 해까지 먹고도 남으며 여유분을 팔아서 생계비용에 보태어도 됩니다. 사실상 보아스는 나오미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대신 책임져 준 셈입니다. 그가 종들더러 단에서 룻 몰래 얼마를 빼어서 흘리라고 명령할 때부터 이미 근족으로서 의무를 행해야겠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달간 나오미나 룻 쪽에서 그와 계대결혼을 해보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와 마찬가지로 나오미와 룻에게도 이기적인 욕심이 없었고 어떤 계략을 사용해서 보아스라는 근족을 이용하려는 의사도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기록 그대로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한” 것뿐입니다. 룻은 매일 보아스가 이미 종들에게 지시해놓은 은혜에 따라 묵묵히 감사함으로 이삭을 주웠고 시어머니를 성실하게 섬겼던 것입니다. 보아스도 자신이 할 바를 이미 다했으니 구태여 룻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오미와 룻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은 날이 갈수록 더 깊고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사방이 완전히 캄캄했었는데 첫날부터 여호와의 소망의 빛으로 완전히 밝아졌고 두 달 내내 자기들 주변을 환하게 비춰주었습니다. 아침마다 룻이 보아스의 밭으로 나가기 전에 두 여인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서 보아스를 축복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간절한 소망
그런데 두 달의 추수가 끝나고 결국은 보아스가 정식으로 나오미의 고엘이 되어서 룻과 계대결혼하게 됩니다. 물론 룻으로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계획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의 결과입니다. 그와 동시에 나오미의 두 달 간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 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기도한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서 응답해준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의 성품과 믿음에서부터 그런 응답을 받을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었고 또 그러니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 다음날부터 행한 기도의 내용이 첫날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첫날은 말씀드린 대로 어떻게든 인자한 주인을 만나서 이삭을 조금이라도 주울 수 있게 해달라고, 최소한 불쌍한 며느리에게 나쁜 일은 생기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이삭을 주워왔고 고엘이 될 수 있는 인자가 넘치고 믿음이 좋은 근족까지 만났습니다. 기도한 내용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확히 말해 기도하지 않은 복까지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기도 응답을 받은 것으로 솔로몬을 꼽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1, 13)
흔히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정성과 세속적인 것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해석입니다. 이미 그는 왕이 되었으므로 온 나라 전체에 최고로 부귀하고 영광스런 자가 되었습니다. 명령만 하면 무엇이나 차지할 수 있기에 굳이 그런 것들을 구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젊은 나이에 왕이 된데다 다윗의 적손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렀고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밧세바에게서 두 번째로 태어난 서자 왕자였으니 우리야와 함께 고생한 신하들이 당연히 우습게 여기다 못해 미워할 것입니다. 그에게 최고 큰 고민은 어떻게든 신하들을 잘 통솔하여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일뿐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갖추었으나 하나 아쉬운 것이 정치적인 지혜와 경륜이었기에 오직 그것을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한 것입니다. 왕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겠다는 열정과 소망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서 기도한 그대로 응답 받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니까 자연히 부강해지고 인근에 그의 이름이 높아진 것입니다.
천일 새벽기도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의로운 내용으로 기도한다고 응답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기도 응답을 잘 받는 방법을 따지는 것부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 중에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두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선 응당 응답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첫날에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받은 근거도 솔로몬의 경우와 정확히 똑같습니다. 그녀에겐 자신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기를 따라온 이 착한 며느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 이제부터 행해야 할 유일한 일로 최대 관심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방 여인 과부로 룻이 베들레헴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대인과 재혼뿐입니다. 룻이 아직 젊고 성품과 효성이 좋다는 소문이 났고 용모도 아름다웠을 테니까 결혼하겠다는 유대 남자가 나설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지파에 시집가버리면 나오미와 룻은 완전히 남이 되어버립니다. 룻이 자기를 따라오지 않고 그냥 모압 땅에 남은 것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룻이 계대결혼 하여 가문의 이름과 기업을 이어가며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일은 율법에 규정된 제도이므로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나오미도 솔로몬처럼 자신에게 가장 절실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두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룻이 첫날 나갔다 와선 근족을 만났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평소 가깝게 지내며 알고 있던 친척 즉, 당장 계대 결혼이 가능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차 고엘은 따로 있었습니다.(룻4:1)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뭔가 반응을 하시는가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생계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룻의 장래를 두고 보아스와 연결된 하나님의 선하시고 확정적인 뜻을 보여 달라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진짜 중요한 기도 제목
거기다 나오미의 기도와 믿음에서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따로 있었습니다. 룻이 기어이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행한 신앙고백이 나오미의 머리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b, 17)
룻은 여호와만 믿고 시어머니를 따라갈 것이며 그러면 여호와가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모압의 이방 신들을 다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만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죽기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으니 나오미도 죽기까지 룻에게 보답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로선 베들레헴에서의 룻의 새 인생이 그 아름다운 신앙고백대로 실현될 수 있게 현실적은 물론 영적으로도 최선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출애굽 후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금을 모아서 애굽의 황소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음란하게 먹고 마시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 절일에 그랬습니다.(출32:1-6) 여호와가 크게 진노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로 다시 당신의 백성들을 새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출 32;11)
애굽에게 열 가지 큰 재앙을 내려서 이스라엘을 탈출시켜 놓고 다시 다 죽여 버리면 애굽이 왜 그런 헛고생을 했느냐고 조롱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애굽뿐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까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화를 내는 독선적인 신이라고 비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여보내겠다고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일방적으로 깨트리지 말아달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쉽게 바꾸면 하나님 체면이 너무 손상되니까 아무리 이 백성이 죽을죄를 지었어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했습니다.(출 32:32) 그 죄 많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모세는 자기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나오미도 틀림없이 이 가련한 며느리가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다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여호와만 바라보고 왔으니 제발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순진하고 풋풋한 믿음을 갖게 된 룻을 사람들은 몰라도 당신께선 실망시킬 수는 절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면 룻은 정말로 죽은 목숨이며 차라리 고향에 남아 있었던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압의 이방 신들보다 여호와가 못하거나 같은 수준이 되어서 모압 사람들은 물론 고향에 남은 동서 오르바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룻의 인생이 망가지면 나오미로선 남편, 두 아들, 자기를 부양하러 따라온 며느리까지 즉,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 모두를 실패하게 만든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들보다 오히려 자기가 더 저주 받은 인생이 되기에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없어집니다. 나오미도 모세처럼 차라리 자기를 죽이더라도 하나님더러 룻의 인생을 당신의 이름과 권능을 걸고 책임져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큰 죄악을 저질렀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고 나오미는 이방 여인의 순전한 신앙고백을 붙든 것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 주우러 나간 첫날부터 근족을 만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오미로선 자신의 평소의 소망 내지 기도에 부합하게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달 가까이 지나도 특별한 일도 그럴만한 징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룻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을 것이며 룻은 자기가 행할 바를 매일 최선을 다해 묵묵히 행했다고 본문은 결론 짓고 있습니다.
종말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지금 인류는 코로나와 지구온난화로 인한 종말 같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욕심과 죄악 때문입니다. 당장 눈앞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 자기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나라나 개인이나 서로 남들보다 앞서려고 무차별적 경쟁을 하니까 생존환경은 황폐해져서 온갖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극심한 자연재앙도 빈번히 발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악화될 것이며 시급히 적절히 대처하지 않으면 최악의 사태도 예상보다 더 빨리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 타락이 당신의 인내의 한계까지 차올라서 가히 심판하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그분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며 기도하는 신자들이 절실합니다. “이번 사태가 비록 인간의 죄악과 욕심 때문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 이런 처참한 지경인데도 손을 놓고 두고 보시기만 할 것입니까?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와야 분이 풀리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도무지 자격과 염치도 없지만 그래도 당신의 인자는 영원하시고 끝이 없지 않습니까? 어서 빨리 그 큰 긍휼을 내리셔서 이 사태를 선하게 인도해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자들부터 모세나 나오미처럼 평소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만 범사의 중심에 두며 그분의 일에 충성 헌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답게 매사에 당당하고도 거룩하게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자격이 최소한 담대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물론 마찬가지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여건이 되어져 가는 모습을 영적으로 잘 분별해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개입하심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점점 더 키워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완전한 긍휼이 임할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는 온갖 죄악이 들끓고 여전히 회개할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아니 그럴수록 하나님만의 권능과 은혜를 반드시 이 땅에 드러내달라고 당당하게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가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천하 만민이 보고 당신께 엎드리게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의 모습이 솔직히 어떠합니까? 자기가 소원하고 계획한 개인적인 일들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므로 반드시 이뤄주실 것이라 착각하고선 뜨겁게 기도합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자기 형통만 바라는 기복주의일 뿐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것이라 제대로 얻지도 못합니다(약 4:3).
여러분 정말로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더러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지키라고 당당히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 전에 개인적으로 받은 분명한 소명이 있고 그 실현을 위해 목숨을 건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소명을 이루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이 깎인다고 담대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나를 통해서 내 주변의 불쌍한 자에게 당신만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러지 않을 양이면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하게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어서 염병 자연재앙 전쟁 등의 엄청난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만 명의 죽음을 당한 후라도 전백성이 옷을 찢고 재를 덮어쓰고 금식하며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정성과 열심을 본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징벌을 멈춰 주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코비나로 사망자가 70만 명이 넘어섰고 역사상 최악의 펜데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온 나라가 백신의 의무적 접종 여부 하나로 좌우로 분열되어서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이 되어 함께 기도해도 모자랄 판국에 교회마저 그 흐름에 휩쓸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적 최선책인 백신으로 언젠가 이 사태가 종식되겠지만 현대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정도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더 큰 재앙들이 닥칠 것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 신자를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었다는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그 큰 고난을 겪게 했지만 순전한 믿음의 며느리 룻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하나씩 분별해 나가며 그에 합당하게 기도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고, 오늘날 신자처럼 성경적 진리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며느리 룻이 생명을 걸고 자기를 섬기면서 여호와를 죽기까지 사랑하니까 자기도 무슨 희생을 당해도 좋으니 룻을 위해 최선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뿐입니다.
종말 같은 시대라고 따로 특별히 취해야 할 강력한 믿음의 방안은 없습니다. 나오미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매일 최선을 다해 섬기면 됩니다. 그마저 힘들면 기도라도 매일 해주면 됩니다. 누차 강조했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몫이고 현재의 주변에 힘든 이웃은 당장 신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텅 빈 곳을 풍성한 채움으로
홍석균 목사 / 룻기 2장 17~23절
룻기의 구성은 총 네 장으로 되어 있다. 1장은 몰락한 가정의 룻과 나오미, 2장은 기업무를 자 보아스를 만나는 룻, 3장은 룻이 보아스에게 인애를 받음, 4장은 룻과 보아스의 혼인잔치이다. 초반부에 너무나도 비참할 정도로 몰락한 가정이 소개된다. 그런데 반전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다. 사실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을 때, 나오미의 가정은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룻은 이방인으로 여호와에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다. 또 남편이 죽어 저주받은 여인이라고 멸시를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그 누구 하나 도와줄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후 어느 순간부터 양식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흉년으로 모압으로 이주 갔을 때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특히 룻이 밭에서 주어 온 이삭은 보리가 한 ‘에바’ 쯤 되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성인 한 명이 일일 거두었던 만나는 한 ‘오멜’이었다. 한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 분량이다. 즉 룻이 하루 거둔 양은 성인 십일 분량이었다. 배불리 먹고 받고 남는 양이었다. 텅 빈 인생에서 하나님은 풍성으로 채우신 것이다. 이러한 풍성은 어쩌다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어지라는 지속적 은혜였다(23절).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인색하게 주시는 것이라 화끈하게 책임져 주신다.
내가 살던 고향에는 동물원이 있다. 광장과 나무가 많아서 시간이 날 때면 어른이 되어서도 가곤 했다. 어느 날 의자에 앉아서 경치를 보고 있는데 세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엄마가 과자를 한 개씩 비둘기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자 열 마리 정도 되는 새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웠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과자를 주려면 좀 넉넉하게 주지 저렇게 하나씩 놀리듯이 주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 살쯤 되는 아이가 갑자기 어머니의 과자 봉지를 낚아채어 봉지째로 비둘기에 뿌려버렸다. 그러자 어디에서 인지 비둘기 떼가 몰려들어 수많은 비둘기들이 배부르게 먹게 되는 것을 보았다. 이걸 보면서 로마서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은 바 되어”(롬 5: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부어지면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 밤새 수고했지만 고기를 낚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는 만선(滿船)을 허락하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없어 주인이 쩔쩔맬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다. 힘겨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나오미와 룻이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길 바란다.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이렇듯 룻은 보아스를 통하여 이러한 풍성함을 받을 수 있었다. 보아스는 구속사적으로 ‘기업 무를 자’를 뜻한다. 기업 무를 자는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라 하여 혈통 유지를 위해 제정된 보상제도이다. 가까운 친족 중에 억울한 복수를 당했거나, 자손이 없이 죽었거나 경재정적인 파산을 당하였을 때, 친족 중에 유력한 자가 그들의 땅을 사서 돌려주는 일을 한다. 기업 무를 자의 제도는 받은 은혜가 풍성하면 나누는 은혜도 풍성하다는 ‘은혜의 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기업 무를 자는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고 사회적인 덕망과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기꺼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이다. 죽어 마땅한 인생 가운데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므로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자는 섬김에도 인색함으로 하면 안 된다. 생명을 구하는 일들에도 풍성함으로 해야 한다. 청년 사역을 하다 보면 제가 오히려 청년들에게 도전을 받을 때가 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 청년들이 가까운 역이나 젊은이들이 모이는 홍대거리에 가서 전도를 한다. 하루는 한 청년에게 왜 공부하랴 자격증 준비하랴 바쁜데 굳이 이렇게 전도하냐고 물었다. 그때 한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다. ‘받은 사랑이 많아서 전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억지로 섬기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길 원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짐으로 여겨질 때가 있는가? 섬기는 봉사가 힘겹게 여겨질 때가 있는가?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구원을 잠잠히 묵상하시길 바란다. 은혜의 풍성함을 먼저 누리시길 바란다. 그때 그 풍성함 만큼 기꺼이 사람들에게 나누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룻
룻기 2:17-23 / 염두철목사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서 인도하심의 은혜, 보호하심의 은혜, 위로하심의 은혜 그리고 풍성하게 채워주심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룻을 위하여 더 큰 은혜와 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우리에게도 공평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구원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주시기 원하는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룻에게서 그 답이 보입니다. 룻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룻이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그릇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룻은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세상적인 외적 기준으로 볼 때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룻에게는 아름다운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성입니다.
룻기 2장 7절과 오늘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 한 에바가 되는지라.”
성경은 룻이 ‘저녁까지’ 이삭을 줍는다는 말을 강조하며 표현함은 그녀의 성실함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성실은 환경이나 조건이 더 좋아졌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성공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부러워하지만 성실한 사람에 대해서는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성실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하여 작은 일이라고 해도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룻은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일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충성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보아스의 사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룻을 보고서 보아스에게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라고 칭찬을 담아 보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그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마25:21). 작은 일이라고 해도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룻은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엡 6:1-3). 룻이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것은 시어머니를 잘 공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룻에게서 어른을 공경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룻은 보아스에게서 받은 은혜를 시어머니와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운 것’은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사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룻은 그것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전부 갖다 드렸습니다.
룻은 그날 얻은 소득을 가지고 가서 기쁨으로 보여주며 시어머니와 삶의 보람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보람은 독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부간의 화목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룻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룻이 은혜를 나누자 나오미가 묻습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입니다.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우리는 어려울 때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보기가 쉽습니다. 배고플 때 빵 한 조각이 눈앞에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지, 그것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양식을 어떻게 마련했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룻의 사람됨으로 볼 때 무슨 좋은 사연이 있지 않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룻에게 은혜를 베푼 자를 축복했습니다. 은혜는 나눌수록 풍성해지고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합니다. 언제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섭섭해 할까요? 한 집에 살면서도 자식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리고 소외될 때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밀려나 집에서 소일하게 된 노인들에게는 간단한 말 한 마디, 작은 관심 하나가 위안이 되고, 따라서 부모님과의 대화는 더없이 좋은 공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룻은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며 나오미를 공경했을 뿐 아니라 본문 19-21절을 보면 밖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나눔으로써 나오미를 공경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말하기가 싫어집니다. 룻이라고 해서 달랐겠습니까? 하지만 룻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하루동안 일어난 일들을 나오미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도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했던 말을 시어머니에게 그대로 다 들려주었습니다. 룻은 새로운 남자 보아스를 만나고 온 사실까지 낱낱이 나오미에게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 자신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비밀이 알려지면 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투명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적절히 비밀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밀이 많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폴 투루니에는 『비밀』에서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으면 정신적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룻에게는 비밀이 없었습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룻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룻은 겸손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앞서 13절에서 룻은 보아스가 은혜를 베풀 때에 이스라엘의 관습대로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은 저녁때에 집으로 돌아와서 시어머니에게 밭에서 주은 것을 보이고, 남긴 떡을 내어 드리면서 보아스가 베푼 친절을 상세히 알려 주었으나 보아스가 자신을 칭찬한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칭찬이란 2장 11절의 내용을 말합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겸손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영국의 간호사였던 나이팅게일은 1853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녀는 부상병을 간호하고, 1만 3천 명의 호열자 환자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군인들로부터 싸움터의 천사, 백의 천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영국 국민들은 그녀에게 ‘광명부인’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당시에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크리미아 전쟁은 영국과 터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의 종식으로 나이팅게일은 영국으로 귀국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귀국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 국민들은 그녀를 전쟁의 영웅들보다 더 존귀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명예스런 훈장이나 영광 받기를 즐겨하지 않은 나이팅게일은 영국으로 귀국하려던 예정을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항공사를 찾아가서 영국 행 비행기 표를 프랑스 행 비행기 표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프랑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영국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이 프랑스로 가게 된 배경에는 환영행사를 피하려 함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인들은 “역시 아름다운 천사야!”라며 다시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태도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지식, 권력, 명예, 재물로써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생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알고 보면 나오미도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그동안 룻에게 유력한 친족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풀자 비로소 그에 대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본문 19절 하반절, 20절입니다.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니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세상에는 비록 자신들은 실패하고 못살지라도 유력하고 훌륭한 친척을 가진 것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유력하고 훌륭한 친족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뽐내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부담을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부유한 친척을 뽐내거나 의지하는 일은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며 크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밭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나오미의 예감이 적중했습니다. 룻에게 은혜를 베푼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근친(近親)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기업을 무를 자’로 등장합니다. ‘기업을 무를 자’는 친척이 재산을 잃었을 경우 소유권을 회복시켜 주기도 하고, 친족이 흘린 부당한 피를 복수하며, 미망인을 아내로 삼아 대를 잇게 하기도 했습니다.
나오미가 기대한 대로 나중에 보아스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혼자 남게 된 친척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보살펴 줌으로써 근친으로서의 의무를 잘 수행합니다. 미리 말하자면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다윗 가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나오미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가 우리의 친족이며 우리 기업을 이을 자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 주었습니다. 이 말은 보아스가 어쩌면 룻의 남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아스는 구속자가 되고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욱 중요한 것과 같이 은혜보다 은혜를 주시는 분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룻은 어른의 말에 순종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며느리인 룻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룻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다시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으라’고 부탁합니다.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년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나오미는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유대 땅에 생전 처음 발을 디딘 모압 며느리가 밖에 나간 첫날에 그 보아스를 만나 이렇게 큰 호의를 입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 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셨으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고, 보아스가 룻에게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준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룻에게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년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룻은 앞서 보아스의 부탁의 말에도 순종하였고, 시어머니 나오미의 부탁의 말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룻은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룻은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은 화목한 가정위에 임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녀들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어른을 공경하는 믿음으로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고 그대로 행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크게 받았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대화는 다정하고 아기자기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나오미가 며느리를 향하여 사랑스런 목소리로 ‘내 딸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시집살이하는 며느리 못지않게 ‘며느리살이’를 하는 시어머니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역시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며느리는 며느리이고 결코 딸은 될 수는 없지만 딸처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대로 행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나오미의 말대로 룻은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추수가 끝날 때까지 룻은 보아스의 식구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뭔가 룻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기대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2-3개월 동안 추수가 진행됩니다. 계속되는 보리 추수와 함께 보아스와 룻의 조용한 사랑이 붉은 사과처럼 영글어 가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내심 자신과 룻에게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기 민족과 신을 버리고 온 모압 여인 룻이었습니다. 또한 평생 어머니를 모시며 살겠다고 따라온 착한 며느리 룻이었습니다. 이 룻에게 나오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룻이 재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기회는 깨닫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종종 기회가 다가옵니다. 나오미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주어지는 기회를 붙잡아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