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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예루살렘의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성문은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1537년에서 1542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북쪽 성벽이 먼저 완성되었고 뒤이어 동쪽과 서쪽, 남쪽벽이 쌓아졌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4,018km이다. 성벽을 따라 8개의 성문과 성위에 34개의 탑과 24개의 망루가 있다. 성문중 욥바문, 다메섹문, 시온문은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성문들은 적의 침입시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나’자 형으로 만들어졌다
욥바문(Jaffa Gate), 다윗의문, 아브라함의문, 헤브론문
욥바문은 성 서쪽에 있는 유일한 문이다. 이 성문은 십자군 문이 있던 자리에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서 세워졌다. 욥바문이라는 이름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욥바항구에 이르는 길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졌다.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에는 옆에 다윗 망대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문이라고도 불리웠다. 아랍어로는 ‘바브 엘 카릴’(헤브론 문)이라고 하는데 ‘엘 카릴’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문’이라고도 한다. 문 정면에는 ‘슐레이만 대제가 1538년 이 문을 세웠다’라고 아랍어로 쓰여 있고 그 밑에 최근의 문구로서 1970년에 보수를 마치고 나서 “예루살렘성이 보수됨”(느4:7)이라고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쓰여 있다. 1898년까지는 욥바문과 다윗망대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으나 독일 카이자르 빌헬름 2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차가 들어오기 위해 이를 헐어내어 길을 만들어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1917년 영국 알렌비 장군이 영국군의 선두에 서서 이 욥바문을 통해 걸어서 들어왔다. 이 욥바문은 1948년에 봉쇄되고 이 옆에 방어벽이 세워졌었다. 1967년 6일 전쟁 때 회복되어 다시 사용되고 있다.
시온문은 성의 남쪽 성벽 서쪽에 있다. 시온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시온문’이라 부르고 시온산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을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아랍어로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도 한다. 문의 바깥쪽에서 보면 많은 총알 자국이 있다. 이는 1948년 독립전쟁 동안 아랍인과 싸울 때 아랍군인이 쏜 총탄 흔적이다. 시온문은 1968년 6일 전쟁 후 회복되어 보수되었다. 입구 위쪽에 이 문을 세운 슐레이만 대제를 기념하는 터어키 문구가 있다.
오물성문은 남쪽 성벽 동쪽에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오물들을 이 문을 통해 키드론 계곡이나 티로포에온 계곡에 버렸다하여 ‘오물문’이라 한다. 오물성문 맞은편에는 다윗이 초기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다윗성이 있다. 오물성문을 나와 계속해서 곧장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에 다다른다. 1948년 욥바문이 봉쇄되었을 때 이 문이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이 문을 통해 서쪽벽과 유대인 지역을 갈 수 있어 유대인들과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는 성문이다.
황금문은 성벽과 성전의 동쪽에 있는 유일한 문으로 지금은 굳게 막혀 있다. 황금문이란 이름은 이 문이 호화롭게 꾸며져서 붙여졌다. 황금문은 두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자비의 문’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이라 한다. 이 황금문은 많은 전설이 있다. 유대인들은 에스겔 44장 1-3절의 언급과 같이 메시야가 올 때에 이 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또한 회교인들도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는 이 황금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부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 부활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황금문 근처에 묻히기를 원한다. 현재 황금문 근처는 물론 건너편 감람산 기슭까지 묘지로 가득 차 있다.
스테반문(Stephen‘s Gate), 양문, 여호사밧문, 사자성문
이 성문은 감람산을 마주보며 동쪽 성벽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서 성문 양쪽에 한쌍씩의 사자가 조각 되었다고 한다. 어느날 슐레이만 대제의 꿈에 4마리의사자가 나타나서 대제를 삼켜버리려 했다. 꿈을 해몽한 사람에 의하면 슐레이만 대제가 거룩한 성을 허술하고 퇴락한 채로 남겨두면 이 사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했다. 그래서 곧 성벽을 건축하고 이를 기념하여 꿈에 나타났던 사자들을 문 양쪽에 한쌍씩을 조각해 놓았다. 히브리어로는 ‘사자성문’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초대 교회의 스테반 집사가 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하여 ‘스테반 문’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문을 지나갔다. 이 문을 나와 남쪽 기드론 골짜기에 희랍 정교회 소속의 스테반교회가 있다. 이 문의 또 다른 명칭은 여호사밧 계곡으로 통한다고 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호사밧 문’ 이라 부르고, 마리아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고 해서 아랍인들은 ‘마리아 성문’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매주 금요일에 이 문 근처에서 양(羊) 시장이 열려 오래 전부터 ‘양문’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통해 감람산, 베다니, 여리고 그리고 요단강으로 간다. 1920년 영국군이 차량이 통행할 수 있게 입구를 확장했고,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은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 문은 동쪽으로 헤롯문과 서쪽으로 새문 중앙에 있다.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크고 인상적인 문이다. 다메섹문이란 이름은 세겜을 거쳐 다메섹도시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 히브리어로는 세겜문. 아랍어로는 ‘바브 엘 아무드(원주기둥성문)’라고 부른다. 로마시대에 이 다메섹문을 중심으로 두개의 길이 뻗어 나갔는데 그 하나가 성전 서쪽벽 앞으로 지나갔고 다른 하나는 시온문이 서쪽으로 좀 옮겨졌지만 시온문으로 통했다. 이 문은 적의 갑작스런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중각을 이루고 있고 원래는 쇠가 덮여있는 나무로 된 삼중의 문이었으나 현재는 한 쌍의 문만 남아있다. 문을 지키던 군인들의 방 두개는 가게로 사용된다. 문 위에는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이 문을 세운 슐레이만 대제를 기념하는 문구가 아랍어로 쓰여져 있다. 다메섹문 밑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서쪽으로는 십자군 시대의 교회를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성안으로 통하던 옛 문이 있고, 들어가 볼 수도 있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궁전이 이 성문 근처에 있었다고 하여 이렇게 불린다. 유다인들은 '사아르 헤페라힘(꽃들로 장식된 성문)', 회교도들은 '바브 에즈 사히라(초소의 문)라고 부르고 있다.
예루살렘
주전 6세기초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공했다.1년반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정복자들은 불을 질러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이렇게 해서 400년동안 계속되었던 유다왕국은 막을 내렸다(주전 587년께). 이렇게 유다왕국이 몰락하는 와중에 예루살렘은 초토화되는 비운을 맞았다.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예루살렘의 기나긴 수난의 역사의 시작일 뿐이었다.예루살렘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제국들과 군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었다.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희랍 로마 비잔틴 이슬람 십자군 마멜루크 오스만튀르크 영국 등 세계를 주름잡던 세력들은 예루살렘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었고 그들의 족적은 지금도 예루살렘 도처에 남아 있다.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거를 지나온 것처럼 지리적으로도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니다.우선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쪽과 서쪽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이다.면적으로는 동예루살렘이 약 70㎢이며 서예루살렘은 이보다 작은 45㎢ 정도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일어났던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동예루살렘은 아랍 사람들이,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할하는 구역이 되었다.정치적으로 동예루살렘은 소위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의 일부가 되었고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토에 속하게 된 것이다.이렇게 예루살렘은 동서로 확연히 분할되고 서로 왕래조차 금지된 상태가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동과 서로 구분된 예루살렘에는 제3의 구역이 되는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이 있다.구 예루살렘이야말로 예루살렘 전체에서 그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오랜 역사의 묵은 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곳이다.구 예루살렘은 높이가 14m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도(古都) 예루살렘의 풍모를 엿보게 하고 있다.그러나 이 성벽은 30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서는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지금으로부터 약 460년전이 되는 1540년 오스만튀르크의 술레이만 황제 때 축성된 것으로 성의 총 길이는 4㎞ 정도이다.성벽으로 둘러싸인 구 예루살렘의 면적은 1㎢밖에 되지 않아 오늘날 예루살렘 전체 면적의 1%도 채 되지 않는다.그러나 이곳이 바로 구약시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했던 역사적 예루살렘으로 그후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졌던 역사의 무대이다.20개월전 지금은 이스라엘 총리가 된 샤론의 방문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성전산도 구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다.그런데 구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동 예루살렘에 속해 있어 오늘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지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왜 예루살렘이 오늘날 중동문제 태풍의 핵이 되는지를 살펴보겠다.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동과 서로 분리되어 있어 이스라엘의 주권은 서예루살렘 지역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이스라엘의 염원은 동서 예루살렘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길이 52m, 넓이 24m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다섯 개의 복도가 있으며 이스라엘의 빨간 돌로 만든 네 줄의 기둥이 있다. 1936년에 4세기 때 모자이크의 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나무 바닥 아래 깔려 있었다. 교회의 윗부분에는 십자가 모양의 벽이 있고 모자이크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십자군 시대의 유일한 유물이다. 예수탄생 장소 위에 있는 희랍정교회의 성가대석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손으로 깍아서 만든 것 이다. 10.7m와 3m 되는 사각형 모양의 동굴로 내려가는 두 개의 입구가 있다. 라틴어와 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 (여기에 예수께서 나셨다)라고 새긴 은으로 만든 별이 예수의 탄생 장소를 표시한다. 구유는 그 옆에 오른쪽으로 있다. 구유 위에는 촛불대에 그을려 까맣게 된 돌을 볼 수 있다. 4세기에 원래의 동굴 천정은 석조공에 의해 교체되었다. 동굴 벽은 1874년 프랑스의 대통령인 막마혼이 화재 사고를 대비해 아스베스토스를 기증하여 덮이었다. 동굴 안에 중앙 제단 아래에는 은별 장식이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다. 마태복음의 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동방 박사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녹 2:8-11). 성경에 목자들이 있었던 정확한 장소의 언급은 없으나 기독교 전승은 베들레헴의 동쪽으로 약 3km 지점을 말하고 있다.
바실리카의 작은 입구는 [사랑의 문]이라 불리고 있다. 하들리아누스 황제는 135년에 그리이스 이교를 이 땅에 들여와 아드니스에게 숲과 동굴을 바쳤다. 33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숲을 개간하여 바실리카를 세울 것을 명하고,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자신이 그 공사를 감독했다. 각각 11개의 원기둥 열에 의해, 나눠진 5신랑식이 바실리카는 오늘날 기초부가 남아있고, 바닥면에는 오늘날에도 조그만한 모자이크가 보인다. 2세기후에 파괴된 바실리카는 그후 복구되어, 후진과 [탄생의 암실]로 통하는 옆계단이 더 있고,안뜰이 배랑으로 바뀌었다. 614년의 페르시아군의 점령시에 바실리카는 기적적으로 파괴를 피했다. 이것은 파풍을 장식하고 있던 모자이크 속에 3박사들이 페르시아 의상을 입고 있는 것에 침략자들의 시선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후 긴 쇠퇴의 시대가 계속되고, 1646년에는 트루코군이 포환을 만들기 위해 지붕의 납을 녹였다. 동시기, 그리스도교 사람들은 바실리카 입구를 매우 좁게 [불경의 족]이 말로 바실리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합의했다. 이 문은 겨우 1m 20cm 높이로 [사람의 문]이라 불리고,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치 실제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받는다. 내부에는 크린트식의 기둥머리를 한 아름다운 홍석 회암의 우아한 원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지금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이름이 쓰여진 성인들의 프레스코화의 흔적이 보인다. 중앙 신랑에는 이땅, 1169년에 형성된 금의 땅 모자이크의 흔적도 남아 있다. 모자이크는 그리스도 조부와 최초의 7회 공회의를 나타내고 있지만, 후자중에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은 최초의 콘스탄티노플리 만으로 나케아 에페소스 등은 단편이 남아있을 뿐이다. 제8번째와9번째의 창 사이에는 바질리우스 픽틀이라는 작자의 생명이 있다. 탄생의 암실은, 그리이스 정교회의 관할하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벽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작은 예배당 안의 [그리스도 탄생의 제단]에는 그리스도교 각 종파가 소유하는 11개의 은제 램프가 있고, 또 은제 별모양이 예수가 탄생한 장소를 표시하고 있다. 별 위에는 라틴어로 <여기에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났다.-1717>라고 새겨져 있다. 암실의 측면에느니 2개의 제단이 있다.하나는 막 태어난 갓난아이가 놓여진 [구유통의 제단]으로 성 헬레나가 발견한 점토의 구유 대신에 은제로 된 것이 놓여졌다. 그 측면에 있는 또 하나의 제단은 갓난아이를 경배하로온 [동방의 3박사 제단]이다.
베들레헴 동쪽 언덕 밑으로 약 2km 되는 곳에 현재는 벧자홀이라는 아랍인 동네가 있다. 이 동네에 있는 들판이 룻이 이삭을 줍던 보아스의 밭이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곳에 기념 교회가 세워졌다
시온산은 예루살렘 서쪽 산등성이로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해 있다 힌놈계곡에 의해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는 중앙 계곡에 의해서 삼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는 해발 765m의 등성이 산지이다. 성경에 의하면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이곳 시온산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성경에 언급된 처음 시온산은 모리아산의 성전산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시온산은 구약시대에 부르던 곳 과는 다른 곳에 있다. 왜 현재의 장소가 시온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주후 4세기경에 지형학적인 실수로 인해 현재까지 시온산으로 불려지고 있는 듯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해서 잘못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2000년 가까이 시온산이라고 불러 왔기에 지금도 유대인은 물론 회교도와 기독교도 시온산으로 부르고 있다. 시온산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예루살렘과 성지 전체를 대표하는 시적인 이름으로 쓰여 왔다. 또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온산은 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요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온주의의 “시온으로”라고 하는 것은 이들을 강력하게 결속시킬 수 있는 표어가 되어왔다. 1267년 람반(Ramban)이 시온산에 회당을 세움으로서 이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 공동체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근거는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다윗무덤이 이곳에 생겼고 유대인들의 다윗무덤 순례는 12세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후 15세기에 기독교인들은 다윗무덤 윗층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이 건물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시온산에서 추방되었고 건물은 회교도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시온산을 방문했다. 이때 그의 방문을 위해 시온산으로 오르는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고 ''''교황의 길''''이라 이름을 붙였다. 시온산 지역에는 마가의 다락방, 마리아 무덤 교회,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베드로 통곡 교회 등이 있다
시나클룸(Cenaculum, 식당)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 곳이며 성만찬식의 기원이 된 곳이다. (막 14:12-16, 눅 22:7-13). 같은 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다(행 2:4-1). 초대 기독교인들은 본부를 시온산으로 삼았고 1세기에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는 군사작전 지역의 바깥에 위치하여서 주후 70년과 135년의 파괴 위기를 면하였다. 비잔틴들에 의해 교회는 확대되었고 이사야의 예언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과 관련지어 성 시온 이라 일컬었고 이름의 유래가 된 것 같다. 614년에 페르시아군이 교회를 파괴하고 십자군들이 12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1176년에 다윗 왕의 무덤이 아래 층에 모셔지고 윗 층은 회교도가 뽀족탑과 기도 장소를 간단히 세워 회교 사원으로 변형시켰다.
이 곳은 이스라엘에서 서쪽 벽 다음으로 최고 성지 중의 하나이다. 1172년에 투델라의 랍비 벤자민이 예루살렘에 방문 했을 때 이 묘를 모시었다. 묘는 돌로 되었고 아름다운 수를 놓은 천으로 씌어져 있으며 아름다운 은 관에 보관된 유대교 성경 토라로 치장되어 있다.
예수님의 고뇌와 기도의 성소로 된 이곳에 비잔틴들이 379년에 예배당을 지었다. 이 예배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제일 먼저 파괴된 교회중의 하나이다. 12세기의 십자군들이 교회를 재건한 후, 다시 파괴 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하나로서 1919~24년에 완성되었고 16개 국가가 헌금을 모아 지었기 때문에 만국교회라 불리 운다. 교회의 천정에 그 여러 나라의 표지가 새겨져 있다. 교회 안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보라색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어두운 빛과 내부장식은 조용한 기도 시간을 갖는데 적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 중앙에는 예수께서 고뇌했다는 바위가 놓여져 있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새 모자이크는 원래의 것의 복사이다. 정면에는 네 명의 상이 각각 글귀가 새겨진 책을 들고 서 있다. 벽에는 예수의 고통과 세상의 고통을 하나님께 바치는 정교한 모자이크가 있다.
겟세마네 동산
올리브산 아래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은 성지에서 가장 감동 깊은 장소 중의 하나이다. 현재에도 이 동산은 20세기 전처럼 보여진다. 기드론 골짜기의 반대편에 위치하며 예수 당시 때처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곳의 올리브 나무들은 아마도 그때의 것인지도 모른다. 세례 요한은 이곳을 기드론 시내 근처의 동산이라 했다. 예수께서 즐겨 찾으셨던 곳이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이르러 (눅 22:39).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를 순종하는 그의 생애의 최대의 간곡한 시간이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유다가 대제사장의 하인들과 와서 그의 선생을 배반하였다.(마 26:7, 막 14:44, 눅 22:47, 요 18:2). 모든 제자들은 도망가고 예수님은 홀로 남아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슥 13:7)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예수는 체포되고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 그 다음날 십자가의 형을 선고 받았다. 겟세마네 동산에는 8그루의 올리브나무가 있는데 그들의 나이는 확실치 않다. 몇몇 식물학자들은 올리브 나무들이 약 3000년 됐다고 주장한다. 요세푸스는 디도 장군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면서 모든 나무들도 함께 없앴다고 서술하고 있다. 만약, 이 나무들이 그 때의 파괴를 살아 남았으면 예수 당시의 나무인 것은 분명하다. 아니면, 예수께서 고뇌의 밤을 기도로 보내셨을 때의 나무들의 새싹임이 분명하다. 올리브나무는 죽지 않는다(Pliny). 아직도 이 나무들은 열매를 맺고 있다.
이 못은 히스기야 왕이 지었는데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받는 물 저장소이다. 이 못은 기독교인 들에게는 성지인데 예수께서 소경에게 눈을 바른 진흙을 씻으라고 한 장소이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7). 5세기에 못 위에 교회가 세워졌으나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 된 후 현재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사도행전 1:9-12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올리브산 위게 가셔서 축복을 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올리브산 정상은 승천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사도행전에 제자들은 에루살렘을 떠나 안식일 여행을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 여행은 약 900m에 한정하는데 이 거리가 승천 장소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이기도 하다. 4세기에 교회가 세워지고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2세기에 십자군들이 또 교회를 세웠다. 현재의 예배당은 십자군 때의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승천 당시 발자국이 남아있는 바위가 안에 보존되어 있다. 후에 모슬렘들이 바깥에 벽을 쌓고 현재의 둥근 모양의 지붕을 만들었다.
유대교의 최고 성지이다. 제2성전의 마지막 유적이기 때문이다. 서쪽 벽은 헤롯 대왕이 주전 20년 경에 지은 성벽의 일부분이다. 디도 장군은 주후 70년에 성전을 파괴한 후, 이 벽만 남기어 후세에게 로마군의 위력을 과시하려 했다.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비잔틴 시대에는 일년에 한번씩 허락되어 와서 성전 파괴와 방랑하는 유대민족을 위해 통곡하였으므로 통곡의 벽이라 일컫는다. 성전 벽에서 기도하는 전통은 수 세기를 이어왔다. 1948~1967년에는 서쪽 벽이 요르단 국가에 속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방문은 불가능 했었다. 6일 전쟁 후 통곡의 벽은 예배와 함께 전 민족의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큰 뜰이 건설되어 수천명의 순례 객을 수용할 수 있기도 하다. |
지붕이 러시아풍의 이국적인 모습이 이채롭다. 지붕이 금색이다. 이곳은 실제 러시아 황제의 어머니 마리아가 뭍혀 있고 막달라 마리아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고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하고 또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말씀하셨던 장소이다. (마 24:1-3, 눅 21:5-7). 아름다운 건물로써 베들레헴의 예수의 탄생장소와 예루살렘의 예수 무덤을 기념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이 올리브산 정상에 예수님의 예언과 재림에 관한 말씀을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를 지었다. 그러나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고 다시 십자군에 의해 12세기에 재건 되었다. 십자군의 패배 후 교회는 다시 파괴되고 모슬렘들에게 점령되었다. 1868년에 Aureliade Bossi de la Tourd Auvergne 공주가 이 장소를 사고 프랑스에 기증을 했다. 1875년 공주는 갈멜(Garmel)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을 지었다. 교회의 복도 벽에는 78개국의 언어로 주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공주는 이곳에 묻혀있다. 1910~1911년 초대 교회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벳바게교회
승천교회와 주기도문교회 중간의 길로 내려가면 벳바게 교회가 나온다
벳바게란 말은 ''무화과나무의 집'' 또는 ‘무화과나무의 밭’이란 뜻을 갖고 있다. 현재 벳버게는 감람산 정상에서 동쪽 베다니쪽으로 10분 정도 걷게 되면 닿을 수 있다. 베바게에는 4세기와 십자군 시대 때에 교회가 있었고, 현재의 교회는 1883년 프란치스카 교회에서 건축한 것이다. 이곳 벳바게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출발하신 장소이며, 또한 나사로가 죽은 베다니로 가실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마중나왔던 곳이다.
예루살렘과 베다니의 중간인 이곳 벳파게 순례객들이 비교적 없어 아주 한산해 보이며, 교회문도 늘 잠겨 있다. 방문코자 할 때는 문 주위에 있는 종이나 벨을 울리면 문을 열어준다. 아랍인 지역에 있고 담에는 낙서가 있어 지저분하고 문도 잠겨 있어 애써서 찾아 온것에 비해 다소 실망하지만 일단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벽에 나사로의 부활 모습, 예수님의 입성모습, 그리고 입성행렬의 그림은 다소 흥분이 된다. 교회안 제단 옆에 크기가 1m정도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실 때 딛었던 바위라고 한다. 현재에도 종려주일이면 경찰들의 호위와 보호를 받으며 수천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종려주일 행진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이 행진은 일찍이 4세기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전통이다.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을 넘어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에 가는 길은 감람산을 넘어 벳파게를 지나 IKm정도 걸어 내려가든지, 아니면 아랍인 버스정류장에서 43번 버스를 타고 감람산 남쪽을 돌아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현재 베다니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1948년 이후에 정착한 아랍사람들이며 대부분이 가까운 예루살렘에서 일을 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베다니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건너편 지역으로써 세례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곳이며(요1:28), 특히 예수님께 사랑받던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고향으로서 이곳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나사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생긴 마을로서 아랍어로는 ''엘 아자리에'' (el-Azariye)라고불리고 있다. 이는 곧 ‘나사로의 고향’이란 뜻을 지닌 라틴어 ‘라자리온’과 흡사한 호칭이라 하겠다. 베다니에는 다음과 같은 성지가 있다.
베다니 나사로교회(Franciscan Church of St. Lazarus)
나사로의 무덤을 나와 밑으로 20m정도를 내려가면 은색 둥근 지붕의 프란치스카 교회가 있다. 주후 4세기와 6세기에 있었으며 이때의 유적이 교회 뜰과 교회안의 모자이크 바닥에서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1954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발루지(Barluzzi)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발루지는 이외에도 많은 교회를 성지에 건축한 유명한 건축가이다. 교회의 전체구조는 가운데 둥근 지붕을 중심으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교회 앞 정면에는 장식된 모자이크가 있고 좌측에 종탑이 있다. 둥근 지붕 안에는 비둘기를 모자이크한 48개의 금도금한 접시가 장식되어 있다. 교회 안에는 북쪽과 남쪽에 두개의 제단이 있는데, 관의 모양을 한 돌에는 나사로의 죽음과 부찰의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벽에는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예수님의 발 아래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여자의 장면이 네벽에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교회앞 뜰에는 1964년에 이곳을 방문한 교황 피우스 6세(Pope Pius VI)을 기념해서 동상이 있다. 교회를 나와서 다시 나사로 무덤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좌측에 1965년에 십자군 시대의 교회터 위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소속 나사로 교회가 있고 골목을 끼고 맞은편에는 교회와 고아원이 있다. 그리고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우뚝 솟은 십자군 시대의 탑이 있다.
나사로의 무덤위에 두 교회가 서 있다. 첫번째 교회는 지진으로 무너지고 두 번째 교회는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2세기에 십자군들이 세 번째 교회를 세웠다. 라틴 왕국의 멸망 후 모슬렘들이 이 성소를 차지하였다. 19세기에 와서 겨우 프란치스칸들이 장소를 살 수가 있었다. 1949년에 오래된 집들을 재건한 후 4세기 때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십자군 교회의 버팀벽을 앞마당에서 볼 수 있다. 현재의 교회는 1952년 전 교회의 기초 위에 지어졌다.
나사로 무덤(St. lazarus Tomb)
나사로가 묻혔던 무덤을 중심으로 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은 비잔틴 시대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엽에 지진으로 무너졌고 십자군 때 세워졌던 교회 역시 1187년 살라딘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14세기경에는 이 자리에 회교사원이 들어섰다. 그 후 회교인들과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 간에 잦은 마찰로 인해 16세기경 프란치스카 교회에서 현재의 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마치지붕을 뚫듯이 무덤위에 두껍게 덮여있는 바위를 파내어 만든 통로이다. 좁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옆에 부착된 손잡이를 잡고 27개의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더라도 시신을 눕혔던 자리는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내려다 볼 수 있게 윗쪽에 조그마한 창구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밑에 포복자세를 해야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입구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체구가 작아야만 가능하다. 무덤 바로 옆에 회교사원과 첨탑이 있다 원래의 입구는 교회와 무덤 사이에 지은 회교 사원으로 인해 막혔다. 17세기는 프란치스칸들이 현재의 입구를 만들기 위한 허가를 받았다.
예루살렘성은 유다의 해발 760m의 돌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성 서쪽과 남쪽으로는 힌놈의 골짜기로 내려가며, 동쪽은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올리브산과 갈라져 있다. 기드론 골짜기 상류에 왕들의 무덤이 있어 왕들의 무덤 골짜기로도 불린다. 전면의 돌무덤은 스가랴 예언자의 것이며, 뒤쪽은 아랍인 공동묘지이다.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싸고 많은 무덤이 있는 것은 [최후의 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육신과 함께 부활하겠다는 신앙심 때문이다.
기드론 계곡은 올리브산과 예루살렘 시를 분리한다. 이 계곡을 예수께서 여러 번 지나다니신 곳이다. 미문을 통해 성전에 올라가실 때 겟세마네 동산이나 나사로의 집 베다니에서 밤을 새우실 때 올리브산을 오르기 위하여 이 계곡을 건너셨다. 목요일 밤에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로 가시기 위하여 이 계곡을 제자들과 함께 건너셨다. 기드론 계곡에는 네 개의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스가랴의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기드론 계곡에서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기드론 계곡에는 예부터 유대인, 모슬렘, 기독교인들의 큰 묘지가 형성되어 있다.
'여호사밧의 골짜기' 라고도 하는데,기드론 골짜기는 천연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갖고 있다. 성경에는 마지막 심판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10분정도면 이곳에 다다를 수 있고 여기서 감람산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기혼샘은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샘으로 예루살렘에 있어서 중요한 물의 원천으로 오늘날은 '처녀의 샘' 이라고 불린다. 기혼(Gihon)이라고 하는 히브리 명칭은 원래 이 샘이 한 자연동굴로부터 매일 2-5회 정도 분출되는 간헐천이라는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할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여부스족들이 지하에 만들어둔 수구 즉 기혼샘물을 끌어오는 도랑을 통해 침투하여 성을 정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5:8)
브엘세바(Beer Sheva)는 예루살렘에서 약 85km 남쪽에 위치한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유대인의 현대 도시이다. 네게브지역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큰 도시로서 네게브의 도시라고도 한다. 브엘세바의 뜻은 “맹세의 우물” 이라고도 하고 히브리어의 뜻 그대로 “일곱 개의 우물”(브엘=우물, 세바=일곱)이라고도 한다. 성경에서 브엘세바는 하나님이 여러번 나타나신 곳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아들 이스마엘 에게 큰 민족을 이끌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셨다(창 21장). 또한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파고 정착한 이삭에게 밤에 나타나셔서 복을 주어 자손이 번성케 되리라는 약속을 주신 야곱이 요셉을 보기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도중 브엘세바에서 희생을 드릴 때 "애굽으로 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46:3)는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이세벨에게 쫓겨 브엘세바로 피신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나타나사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우라는 명령을 주신 곳(왕상 19장)이 바로 이브엘세바이다. 구약에서 브엘세바와 관계된 일은, 먼저 아브라함이 우물을 판 증거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암양을 주고 약조를 한 후 이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하였다(창 21장).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출생하였으며(창 조장), 사무엘의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었다(삼상 8:2). 흔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국토의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구약 시대에 브엘세바는 남단 경계로 보았다(삼하 17:11).
카렌 카이며 레 이스라엘 거리(Keren Kayemet Le-Israel St.) 남쪽 끝에 별로 볼품은 없지만 아브라함의 우물이라고 하는 건물이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곳에 우물 문제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맺은 곳이다(창 21장).
텔 브엘세바에 있는 제단뿔 이다. 성경에 제단뿔을 잡고 기도했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제단
으로 이것은 모형이라고 한다. 실제의 것은 박물관에있다. 그것도 발견당시는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 돌을 집짓는데 사용하기도 했고 요시아, 히스기야 종교개혁때 파괴가 되었다.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 해도 브엘세바가 성소이기에 지방인 이곳에서 예배하고자 하는 악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종교개혁때 파괴되었다. 또 원제단에 뱀모양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방 우상종교와 혼합되어 우상숭배한 흔적이라 한다.
텔 브엘세바 유적지
텔 브엘세바 (Tel Beersheba)
고대 도시인 텔 브엘세바는 현대 브엘세바 도시의 동북쪽으로 약 5Km정도 떨어져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다. 성경에서 나오는 브엘세바로 보고 있는 텔 브엘세바에서는 고대사막 지역의 도시 성벽과 집들의 잔재를 볼 수 있다. 이 직역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땅이 분배될 때 유다지파에게 주어졌었다가 후에 시므온 지파에게 넘어간 곳이다(수 15:28, 19:2). 사무엘이 늙은 후 그의 아들들이 이곳에서 사사가 되었다(삼상 8:1-2). 현재 이곳은 주후 3세기경 로마 시대 때까지 사람이 살았었고 그 이후에는 폐허로 남아있다.
이삭과 리브가의 묘
헤브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을 지나 약 35km 지점에 있는 전형적인 아랍인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가운데서 세겜 다음으로 가장 큰 아랍마을이다. 헤브론은 해발 927m의 고지대로서 유대지방에서는 제일 높은 지대이기도 하다. 본명이 ''기럇아르바''인 헤브론이 성경에 처음 언급된 곳은 창세기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수풀에 이르러 거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그 후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당시 헷족속인 에브론에게서 400세겔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사고 가족의 매장지로 삼는다 (창23장).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이곳에 묻었다. 이 막벨라 굴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3대 족장 부부가 묻혀 있다고 믿고 있어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이다. 모세가 보낸 열두 정탐꾼은 이곳을 정탐했으며, 가나안 점령시 여호수아에게서 헤브론을 받은 갈렙은 원주민인 아낙자손을 쫓아낸다(수14장). 그리고 이곳에 유다지파를 위한 도피성이 위치한다(수20:7). 왕국 초기에는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자 다윗이 헤브론으로 와서 유다 장로들에게 의해서 왕이 되고 7년 반을 이곳에서 통치했다(삼하 2장).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이곳에서 왕이 되어 다윗왕을 모반했다(삼하 15장).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는 이곳에 에돔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마카비 혁명이 성공하고는 헤브론에서 에돔 사람들이 쫓겨났다. 그 후 헤롯 왕은 헤브론을 재건하고 건축광으로서의 기질을 이곳에서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막벨라굴의 웅장한 묘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현재의 헤브론은 사마리아만큼 아란풍이 물씬 나는 아랍인 도시이다. 거리를 걷노라면 큰 부대에 양털을 사고파는 양털가게와 양가죽을 이용해 만든 물통, 그리고 두건을 둘러쓴 아랍인 아낙네들의 모습과 풍경이 유대인사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여름에는 많은 비가 내리지 않으나 아침저녁 내리는 이슬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다. 특히 헤브론 산 포도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유명하다. 또한 토산품으로서 흙을 구워 만든 꽃병에서 찻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저렴해서 기념품으로도 적당하다.
막벨라 굴(The Cave of Machpelah)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레아, 이렇게 이스라엘의 3대 족장부부가 묻혀있는 곳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59m, 너비 34m. 그리고 높이 18-20m의 웅장한 규모로 원래 있던 막벨라 굴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기독교인은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다음 가는 성지요, 회교도들 역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까닭에 메카, 메디나, 그리고 예루살렘의 바위 돔 다음으로 이곳 막벨라 굴을 성지로 여기고 있다. 주전 20년경에 헤롯왕은 막벨라 굴을 막아버리고 건물을 지었는데, 처음 건물은 지붕이 없었다. 6세기 후반에 이삭의 무덤을 둘러 비잔틴교회가 세워졌었고 유대인들의 회당 건축도 허락되었다. 638년 아랍이 정복했을 때 비잔틴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고, 1100년 십자군이 헤브론을 점령했을 때는 모스크가 다시 교회로 변했고 유대인 회당이 파괴 되었으며, 수많은 유대인과 회교인이 학살되었다. 1260년 맘룩이 헤브론을 정복했을 때 유대인의 막벨라 굴 접근이 허락되었으나 7번째 계단 이상을 올라설 수 없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헤브론을 정복했을 때 이 계단을 없애버렸으나 지금도 흔적을 볼 수 있다. 1967년 6월 7일 수요일, 낮에 이스라엘군은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탈환하고 그날 저녁 베들레헴을 정복했다. 전열을 정비하고 헤브론으로 진군을 서둘렀다. 새벽에 군대 랍비 고렘은 전투대열을 이끌고 헤브론에 첫번째로 도착한 유대인 장교를 찾았다. 이를 찾지 못한 랍비 고렌은 운전병에게 그의 차를 전투 대열 선두에 달리게 했다. 마침내 헤브론에 도착하고 항복의 깃발이 창문마다 나부끼는 가운데 6일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 없이 헤브론을 정복하게 되었다. 1967년 국방장관 다이얀은 회교인이 통제하게 두되 유대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하였다. 67년 이후 막벨라 굴은 서로 구역은 따로 있지만 한 건물 안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예배하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또한 유대인과 아랍인의 충돌을 막기 위해 막벨라 굴 안까지 구석구석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기관단총을 메고 경계근무를 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수세기에 걸쳐서 소규모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아랍인과 평화적인 관계에서 헤브론에 살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인 시온주의 운동과 동유럽으로부터 이주민들이 몰려오면서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929년 8월에 이스라엘 전국을 휩쓴 아랍인들의 난동이 있었다. 헤브론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도망해 갔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아랍인들은 물론이요 동료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 유대인들은 헤브론에서의 유대인 사회 회복을 목적으로 정착을 시작했다. 헤브론에 유대인사회를 재건설하려는 종교 유대인들은 목숨을 무릅쓴 극단주의자들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조직이 잘된 이들은 막벨라 굴에서 약 1Km정도 떨어진 기존 아랍인들 사회인 헤브론에 유대인 지구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지위를 높이며 확장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약 40여 유대인 가정이 아랍인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 이들은 헤브론 투데이(Hebron Today)라는 소식지를 발간하면서 방문하는 유대인이나 여행객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아낌없이 전달한다. 이들은 또한 국내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해외의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지지와 재정적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헤브론의 유대인과 아랍인들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하고 긴장된 가운데 있느냐는 1994년 2월 한 유대인이 몰려있는 아랍인을 향해 기관단 총을 난사해 150여 명을 죽게 한데서 잘 보여주고 있다.
기브온
히위 족속의 성읍으로 언덕위의 북쪽은 현재의 마을이고 남쪽은 고대의 유적이다. 솔로몬은 즉위 후에 기브온의 성소에서 봉헌하고. 꿈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왕상 3:4-15).
미스바로 부터 촬영한 이 사진에는 석회암층이 아름다운 단구 위에 마을이 있다. 성경의 기브온은 (1)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 이 성 위에서 해를 머물게하고 싸워 이겼다(수10:12-14,사28:) (2) 사울이 이 성 사람을 많이 죽인 까닭에 3년간 기근이 있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왕의 허락을 받아 사울의 자손 7명을 죽임(삼하21:1-6). (3) 다윗이 제사장 사독으로 이곳 성막에서 매일 번제를 드리게 함 (대상16:39). (4) 솔로몬이 이곳에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지혜, 부귀 장수함을 주신 곳이다. (왕상3:4-10).
예루살렘 6마일 북쪽에 있으며 주전 11세기못이다, 직경 37피트, 깊이 82피트이다.
1833년에 미국의 지리학자 겸 성경학자인 Edward Robinson이 성경에서 고대 기브온으로 암시하는 곳인 el-Jib이 있는 팔레스틴 사람의 한 부락이 있는 곳에 갔다. 모든 다른 학자들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James B. Pritchard의 발굴은(1956-1962) 그곳에 있는 저장소에서 기브온이라는 히브리어로 쓰여진 31개 항아리의 손잡이를 발견하므로 사실이 밝혀졌다. 후기철기시대(1200-586 B.C.)에는 기브온이 고대의 이름을 밝혀주는 대로 포도주의 생산자와 수출자의 요지였다. Pritchard의 다른 발견물들은 복합물저장소였다. 고대의가나안에서는 비가 오지 않는 여름에는 특별한 물저장소를 만들어 주거지 주위에 두었다. 가끔 고대 도시가 세워진 언덕 밑에는 샘들이 있었으나 어떤 경우에는 그 도시들이 있는 고지에 물저장통이 있었다. 즉 그들은 물 근원을 찾아서 그곳에 굴을 파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성읍 안까지 물을 끌어들이고 그 물이 있는 바닥까지 넓고 깊은 우물을 팠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게셀, 하솔, 무깃도와 예루살렘에서 볼 수 있다. 기브온에서 Pritchard는 두가지 구별된 수조 조직을 발견했다. 그 첫째는 그 성읍이 건축된 그 언덕 밑에 있는 바닥까지 그 성읍 밖에 있는 물 근원에서 동굴을 파서 경사적으로 내려간 것이다. 그림에서 청색으로 표시된 경사로와 물통이다. 그 물통은 그 언덕 밑에 있는 샘에서 나온 물로 저장된다. 다른 하나는 기브온 기술자들에 의하여 건설된 우물형 저수조이다. 샘에서 물통에까지 물을 끌어들이고 그 통에까지 넓은 구덩이를 파서 계단을 밟아 회전하여 내려가고 물을 길어 가지고 올라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의 두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구덩의 큰 것은 입구를 37피트나 파서 내려간 모양이 깔대기와 같이 파내려가서 동굴을 통하여 끌어드린 물을 떠 가지고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것이다.
기브아
기브아는 히브리어로 구릉 곧 작은산, 언덕이란 뜻이다. 베들레헴 남동쪽 약 12km 지점이다. 기브아의 위치와 성읍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주장이 분분하다. 1841년 E. Robinson은 처음으로 기브아를 게바와 동일한 성읍으로 취급하였으며 그 위치를 Jaba (175-140)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Robinson은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여 기브아의 위치를 el-Ful로 그리고 게바의 위치를 Jaba로 바꾸었다. 1922-1923년 W. F. Albright는 기브아를 발굴하여 Iron Age 초기의 유물들을 발견하고 이곳을 사사기 18-20의 기브아로 이해하였으며 Iron Age Tower를 발굴하였는데 이것은 사울의 요새처의 기초석으로 이해하였다 (삼상11-15). 대부분의 학자들은 Albright의 이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1966년 Tell el-Ful을 발굴한 P. Lapp은 주장하기를 Iron Age (삿18-20)의 기브아는 매우 조악하다. 뿐만 아니라 Iron Age II는 주전 8-7세기 보다는 주전 7세기말-6세기에 해당한다고 해석하였다. 곧 주전 8세기말에는 기브아는 황폐된 채 남아 있었다는 것이 Lapp의 주장이다 (호5:8, 사10:29). 이와같은 Lapp의 발굴 결과에 부응하여 J. M. Miller는 Robinson의 원래의 주장을 기억하여 기브아와 게바는 동일한 성읍으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상의 기브아는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고향이다(삼상 10:26). 옛적에 성소가 있던 곳이므로 하나님의 기브아라 함 (삿 19:6) 이곳은 종교적 암흑기요 영적 혼란기였던 사사 시대의 윤리적인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레위인 첩 사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한 레위인이 첩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이 다른 남자와 간음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도망간 첩이 있는 장인의 집에 가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 들려 하룻밤을 쉬어 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불량배들이 몰려와 레위인과 동성애를 요구하였습니다. 막무가내인 그들에게 레위인은 결국 자기 첩을 내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밤새도록 고통을 당한 레위인의 첩은 처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죽은 자기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냈습니다. 그는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천하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사사 시대의 타락상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일, 그 첩의 간음행위, 만연한 동성애, 불량배들의 만행, 경악할 만한 사체 절단 행위 등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은 결국 처참한 악행과 심각한 부도덕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롬 1:24-32)
벧엘
예루살렘에서 서북쪽 세겜으로 가는길 19km 지점에 벧엘이 있다. 형 에서에게서는 장자권을 쟁취한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날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베개하던 돌을 취해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집”, 즉 벧엘이라 불렀다. 벧엘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창28:19) 그후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에 돌아오던 길에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 축복을 약속받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창35“6-15) 야곱 이전 족장시대부터 벧엘은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와 이곳 벧엘에 장막을 치고(창12:8), 단을 쌓았다(창 13:3). 또한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였으며 예배와 희생의 장소였다(삼상7:15). 솔로몬왕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음으로서 우상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상 12:26-33).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곳 벧엘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했다(암 7:10, 호 10:15). 남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아가 벧엘의 우상을 타파했다(왕하 23:4). 벧엘은 현재 베이틴(Beitin)이란 아랍인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끝 부분의 높은 언덕위에 벧엘이 있다.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있었으나 파괴되었고, 십자군 시대에 성벽을 구축하였다. 최근에 유대인 정착촌이 벧엘 근처에 형성되었다. 야곱이 베개하였다는 돌베개는 스코틀랜드에 옮겨졌다가, 현재는 영국웨스트 민스트 사원의 왕의 대관식 의자 밑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아이는 현재 에게해의 휴양도시 "아이발릭"이다 . 아이발릭은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 숲 가운데 있는 매력적인 항구도시이자 에게해의 인기있는 휴양도시이다. 나무와 돌들로 장식되어 있는 집들은 도시의 외관을 아름답게 한다. 아이발릭 해변의 물은 한여름에도 맑고 시원하며 해변의 모래는 금빛으로 빛난다. 아이발릭 근교에는 많은 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Cunda섬은 가장 유명하다. 쿤다섬은 아이발릭에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일몰이 유명하다. Cunda섬의 이른 아침은 작지만 유명한 그리스 지방의 음식점들이 해산물 음식을 만드는 냄새로 생기가 가득 넘친다. 또한 근처의 Seytan Sofrasi(The Devil''s Table)에서는 아이발릭만 안의 22개의 아름다운 섬들이 펼치는 장엄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이 곳은 용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언덕 위에 테이블 모양으로 보이는 암석이 있는데 이 것을 악마의 테이블이라 부른다. 악마의 테이블 근처에는 발자국이 있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그 발자국을 악마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성경상으로 창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 할 때 아이성 전투에 대해 말한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또 매복시키니(여호수아 8:12)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따랐더라 (여호수아 8:17)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는 아이 성 공략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성 뒤편에 군사 삼만을 매복시키고도 벧엘과 아이 사이에 또 오천 명을 매복시킴으로 싸움에 철저하게 대비한다. 반면 승리했던 아이 성의 왕은 이스라엘이 이차 침공에서도 쫓겨 가는 것을 보고는 승리감(자신감)에 도취되어 성을 지킬 군사를 남겨 두지 않고, 성문마저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쫓는다. 결국 아이성은 함락 되었다.
BC 4000년 으로부터 BC 6세기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렀던 도시이다. 므깃도는 이집트와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해변의 길' (Via Maris) 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 할 수 있는 곳이어서 20회 이상의 국제 전쟁을 치루었던 곳이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 도시가 헬라어로 음역되어 '아마겟돈' (Armegeddon)으로 등장하는데, 종말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계 16:16)은 우연이 아니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 부조되어 있는 투투모스 3세의 승전 기록인데, 그는 BC 1468 년 므깃도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왕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에서도 이 도시는 여호수아에 의해 점령되지 못할 만큼 강한 가나안의 요새였으며 (삿 1:27 ~ 28), 아마도 다윗에게 정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솔로몬에 이르러 므깃도는 견고하게 수축되어 가장 강력한 북방 요새가 되었다 (왕상 9:15 ~ 19), 특히 솔로몬이 세운 마병장과 기병대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순사적 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국제로를 장악하여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므깃도는 BC 923년에 이집트의 시삭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아합 왕에 의해 재건 되었다. BC 609년에 요시아 왕은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28 ~ 30). 그후 이곳은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Allenby)장군이 터어키군을 패배 시켜 승리로 이끈 곳도 므깃도였다. 므깃도는 1925-39년에 시카고 대학의 동양 연구소(Oriental Institute)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1960년 니가엘 야딘(Yigael Yadin)도 발굴하였다. 이곳은 주전 3000년 부터 큰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만들었던 산당(High Place)식 신전을 발굴하였고, 또한 솔로몬 때 건설한 성벽, 성문, 관저들도 발굴되었다. 므깃도에서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마병장(Solomon's Stables)이다. 솔로몬은 그 당시 군사력의 상징인 기병대를 육성하여 '병거성(City of Chariosts)'과 '마병의 성(City of Horsemen)'들을 건설하였다. 므깃도는 이러한 병거, 마병성의 하나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솔로몬 시대의 성문은 그 이전의 구조와 다른 자형(字形)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맞는 성문을 고안해 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곳에서 발굴된 마병장에는 말들의 고삐를 매어 놓았던 구멍이 뚫린 돌들이 말구요와 함께 늘어서 있는 큰 장소를 발굴하였다. 약 450마리 정도의 말과 150대의 병거를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는 말에게 물을 먹이던 큰 물통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것을 '솔로몬의 마병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발굴된 지층은 솔로몬 왕 때의 주거 층이 아니라, 이보다 약 100년 후 아합왕 때의 것이다.(BC 869-850) 므깃도는 시삭에게 파괴되었다가 아합때 복구되었었다. 그러나 아합왕 때의 마병장은 그 이전 솔로몬 때의 것 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규모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므깃도에서 발굴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당시의 발전된 공업 기술을 볼 수 있는 우수한 수로 장치의 발견이다. 큰 통로가 바닥까지 내려 있고 그 통로의 끝에서 바위 구멍을 뚫고 도시 밖의 샘으로부터 도시 내부로 끌어 들이도록 되어 있다. 밖의 샘 입구는 포위하고 있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흙으로 덮여 있다. 이것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보관되어 있다.
텔 므깃도는 고대 근동 세계에 있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제국 사이에 대치점이라 할 수 있다. 므깃도는 수 천년 동안 공포와 두려움의 이름으로 사람의 머리에 각인되었다. 지중해 해변에서 이스르엘 평원으로 접근하는 좁은 길에 걸터 앉아있는 므깃도 성은 그 성의 주권자에게 나일과 유프라테스를 잇는 국제해안도로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주었다. 국제해안도로는 대상들이 오가는 무역로였는데 므깃도는 그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므깃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주전 6천년기에 도착하여 신석기 시대를 이루며 살았다. 이 시기에 바위 위에 긁어서 그린 인간의 모습은 이 첫 번째 정착민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으며 제의적 혹은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금석 병용기의 초기인 주전 4천년기까지는 므깃도의 주민들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실체 속으로 병합되기 시작했다. 좀 더 후기인 초기 청동기 시대의 출발점에서(약 주전 3300년) 므깃도의 신전들 중에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이른 신전이 그곳에 세워졌다. 이 시기가 보여주는 것은 므깃도가 처음으로 국제적인 접촉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원통형 도장이 인쇄된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와의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3천년기의 끝은 정착을 위한 건설의 시대였다. 거대한 성벽이 이 때 세워졌다. 므깃도의 유명한 제단이 있었는데 높이 1.5미터의 원형 돌 구조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희생제사로 사용되었던 단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세기들(centuries)에서 적어도 세 개의 신전이 제단으로 신성시된 지역과 확장된 지역에 더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