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신라의 왕성이다. 그래서인지 경상북도 전역에 집성촌이 있으며 대경권 즉 경상북도권역에 서울 수도권보다도 훨씬 많다.
경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추존왕 김알지이다. 김(金)이라는 성씨는 그가 탈해 이사금 시절에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설화적 성격이 짙으므로 많은 학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 실제로 김씨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는 첫 국왕은 제24대 진흥왕이다. 한편 최초의 김씨 국왕은 제13대 미추 이사금이며, 제17대 내물 마립간 때에 김씨 왕조 지배의 기틀이 잡혔다.
신라인들은 (경주) 김씨의 시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여겼으며, 이는 《삼국사기》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소호(少皥)는 ▨허(▨墟)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金天)은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김인문묘비』
또한 태조 성한왕이라는 인물이 『김인문묘비』와 『문무왕릉비』, 『흥덕대왕비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투후 김일제도 김씨 성과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학계에서는 태조 성한을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소수설로 최초의 김씨 임금인 미추 이사금을 지칭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2.1. 족보 위조 의혹
조선조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내려지면서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지고, 일제 강점기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각 씨족들이 너도나도 족보를 발간하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도 없이 시호나 군호를 붙이고 선계를 경순왕대까지 끌어 올리는 등 족보 위·변조가 극에 달하였다.
2.1.1. 《김은열 묘지명》
조선 후기인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서술한 《김은열 묘지명》에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후 고려 태조의 딸들을 후비로 맞아들여 8남을 더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일(鎰) · 굉(鍠) · 명(鳴) · 은열(殷說) · 중석(重錫) · 건(鍵) · 선(鐥) · 종(鐘)이라 한다. 또 2자 굉(鍠)의 묘지석도 발견되었는데 , 2자 굉(鍠)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고려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이 있는 신하[有功之臣]였기에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수보하면서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보국대안군 은열공 묘지명》을 추기하였는데, 여기서는 2자 '굉'을 '황'(湟)으로, 3자 '명'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의 시호를 '보국대안군'이라고 지어내는 등 가필을 넘어 거의 작문 수준에 가깝게 서술하였다. 이후부터 경주 김씨 일문의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공통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찬(撰)한 사람도 없고, 배위(配位)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으며,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 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정사는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된 사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현재 이러한 묘지명은 신빙성이 없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2.1.2. 《신라경순왕전비》
이후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은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를 세웠는데, 여기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제1자부터 3자인 일(鎰) · 굉(鍠. 또는 황(湟)) · 명(鳴. 또는 명종(鳴鍾))을 배척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비문에 경순왕은 전비(前妃) 박씨와의 사이에 태자(太子)·차자(次子) 이외에 제3자 '영분공'(永芬公)을 더 두었는데, ‘영분공파’ 파조라 한다. 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金禮謙)은 그의 5세손이라 한다. 또 제4자 은열(殷說)은 고려조에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에 봉해졌다고 하며, ‘대안군파’ 파조라 한다. 평장사 김봉모(金鳳毛)는 그의 6세손이라 한다.
2.1.3. 현재
이후 경순왕 제3자 '김명종'이 영분공의 시호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또 경순왕 제4자 '김은열'이 보국대안군에 봉해졌다고 주장하며 '경주 김씨 대안군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이와 같이 경순왕 후손이라는 일부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조선조 말에 와서 상계를 경순왕 왕자대 까지 끌어 올려 시호와 군호를 붙였다.
영분공파: 파조 영분공 김명종(金鳴鍾)
대안군파: 파조 대안군 김은열(金殷說)
3. 다른 본관과의 관계
사실 경주 김씨는 월성 김씨(月城 金氏)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경주 김씨로 알고 있는데 가족관계등록부에 월성(月城)으로 나온다고 멘붕은 금지. 애초에 지명이 경주 월성이다. 실제로 집성촌과 족보에서는 스스로를 경주 김씨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족보도 경주 김씨 종친회의 관리 아래에 있으므로 월성이라고 분파가 아니라 같은 씨족으로 대우받으며 시조와 왕릉에 대해서는 같이 제사도 올린다. 이 때문에 합법적으로 동성동본이 결혼할 수 있었으며, 종친회와 가깝지 않는 이상 욕먹을 리도 없었다.
경주 김씨계에서 분적된 성씨로는 김녕 김씨(후 김해 김씨), (구) 안동 김씨, 상산 김씨, 수원 김씨, 청도 김씨, 원주 김씨, 전주 김씨, 안동 권씨, 수성 최씨 등이 있다. 이 성씨들의 인구를 다 합하면 약 600만 명이 넘는다. 또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등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로는 경주 김씨 외에도 의성 김씨, 후 강릉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등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본관을 바꾸어 분적한 가문 중에서 일부 계층은 분적한 본관이 아닌 원래의 경주를 본관으로 칭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다음이 있다.
전주 김씨 ↔ 경주 김씨 평장사공파: 파조 김봉모(金鳳毛)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김천서(金天瑞)
충선공파(忠宣公派): 김경손의 3남 김혼(金琿)
병판공파(兵判公派): 김남보(金南寶)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김남분(金南賁)
김녕 김씨
백촌공파(白村公派): 김문기
익화군파(益和君派): 김인찬
고려 말과 조선 시대로 접어들며 신라 김씨 일부 후손들이 신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했으며, 대표적 파조들은 다음과 같다.
벽상공신내사령공파: 파조 김예겸(金禮謙)
두계공파(杜溪公派): 김인경(金仁鏡)의 현손 김충유(冲裕)
수은공파(樹隱公派): 김인경의 현손 김충한(金冲漢)
시어사공파(侍御使公派): 김인경의 현손 김충보(金冲保)
참찬공파(參贊公派): 김인경의 현손 김충익(金冲益)
밀직공파(密直公派): 김인경의 현손 김충원(金冲源)
강릉공파(江陵公派): 5세손 김서
부사공파(府使公派): 김인경의 현손 김상한(金相漢)
현감공파(縣監公派): 김인경의 현손 김정심(金正深)
병판공파(兵判公派): 김덕재
참판공파(參判公派): 김광재
태사공파: 파조 김인관(金仁琯)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시조 김인관의 9세손 김자정
도사공파(都事公派): 김초
감사공파(監司公派): 김장(金廧 :전서공의 분파)
상촌공파(桑村公派): 9세손 김자수
판관공파(判官公派): 김영년
좌랑공파(佐郞公派): 김영원
사승공파(司丞公派): 김영전
공평공파(恭平公派): 김영유
우재공파(愚齋公派): 10세손 김한
송재공파(松齋公派): 11세손 김수량
남곡공파(南谷公派): 16세손 김의
판도판서공파: 파조 김장유(金將有)
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 파시조 김장유의 손자 김을식
감사공파(監司公派): 손자 김을돈
직장공파(直長公派): 손자 김을당
공조판서공파(工曹判書公派): 손자 김을귀
이조참의공파(吏曹參議公派): 손자 김원기
장군공파: 파조 김순웅(金順雄)
계림군파(雞林君派): 파시조 김순웅의 13세손 김균
공호공파(恭胡公派): 계림군파 파조 김균의 손자 김종순
현령공파(縣令公派): 13세손 김능
연동파(蓮洞派): 13세손 김의
봉산파(鳳山派): 13세손 김세보
춘고공파(春皐公派): 14세손 김순
호장공파: 파조 김위영(金魏英)
태사공파(太射公派): 손자 김부일(金富佾)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손자 김부식
사공공파(司空公派): 손자 김부의(金富儀)
상서공파: 파조 김여진(金麗珍)
목사공파: 파조 김소(金邵)
판서공파: 파조 김의(金義)
판서공파: 파조 김덕재(金德載)
직장공파: 파조 김수구(金壽龜)
상호군파: 파조 김중약(金仲約
분파된 후손들 중 태사공파 지파인 상촌공파가 가장 번창하였고, 그 다음에는 장군공파 지파인 계림군파, 벽상공신내사령공파의 지파인 수은공파 순이다. 특히 김씨들 중에서 이름 중간에 '학' 또는 '관' 자가 들어가는 항렬이면 대부분 계림군파이고, '택' 자가 들어가는 항렬이면 상촌공파이다.
첫댓글 옛날에는 장손이 제사를 드렸지만 해방 후 근대에 들어서 형편이 되는 집이 제사를 드려도 무방했다. 제사를 드리게 되면 문종에 딸린 토지와 집을 받게 되는데 선산도 관리하게 된다. 제사비용은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가족들이 돈을 모아서 비용을 충당했다. 만약 제사를 못지내게 되면 집과 토지는 문중에 반납해야 한다. 본인이 옛날에 살던 집이 너미집이라고 했던 것이 문중에 딸린 집을 의미했다. 이제는 제사도 다른 사람이 지내는데 30년 넘게 제대로 된 인물이 나오지 않아 제사고 뭐고 다 포기하고 우리집안은 완전히 콩가루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