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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부하라 유적지
아르크 성채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부하라 지도자가 거주하던성이었습니다. 성채 옆에 볼로 하우즈 (Bolo-Khaus)라는 사원이 있습니다. 사원에는 아담한 미나렛과 연못과 함께 호화스럽게 꾸며진아이반(avian: 여름에 사원 건물, 주로 기등이 있는 테라스같은 모양)이 있습니다.
중아아시아 고전 건축의 걸작품이라 칭송받는 사마니드 영묘는 공원에 위치합니다. 이 영묘는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묘로 905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영묘에는 사마니드 왕조 (879-999년) 중 사마니 왕조를 세운 사람 이스마일 사마니와 그의 아버지, 아들들이 안장되었습니다. 사마니드 영묘는 세게에서 유일한 기술로 건축되어 하루 중 태양의 위치에 딸 벽의 무늬가 변합니다.
칼랸 미나렛 카라하니드 왕조 (990-1138년)의 이슬란-한 지도자가1127년에 세운 미나렛 (minaret: 이슬람 사원의 일부를 이루는 첨탑)이로 ‘높은 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하라의 상징인 건축물입니다. 높이 46미터 가량의 미나렛은 사기 타일로 꾸며졌습니다. 미나렛 옆의 칼랸 사원 (16세기)에서는 한꺼번에 만 명 이상이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거개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칼랸 미나렛은 커다란 2 개의 돔이 눈에 눈에 듸는 미르 - 아랍 (Mir-Arab)이라는 신학교와 접해있습니다. 이 신학교는 아직도 학교의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칼랸 미나렛과 칼랸 사원, 그리고 호화스러운 신학교는 한데 모여 보이 - 칼란 (Poi-Kalyan) 이라는 응장한 앙상블을 이룬다.
우상, 마약 묘약,와 향신료 - 아토르 무역이 발생한 아라비아 정복하기 전에이 자리에 시장이 있었습니다. 달 (Moh) 여신의 사원도 있었습니다. 나중에,이 사원의 장소는 모스크의 건설로 대체했습니다. 그것은 절반 빠르게 성장하는 문화 침착에 이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모스크 제목 "마곡"의 첫 번째 부분은, "구덩이"를 이미합니다.
12 세기에 새로운 건물은 남쪽에서 고유 한 흑백 장식으로 포털을 보존되었고 같은 계획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15 세기에 손상되었습니다. 장소 세기 모스크 부흥은 반 지하 홀에 이르는 인해 새로운 방향 포털에서 스크립트로, 다시 1546 년.
차쉬마 아유브 (Chashma Ayub)영묘 12세기에 샘위에 지어졌습니다. 이 영묘에는 누구도 안장되지않았지만 영묘라고 불립니다. 괸광객들은 샘물을 직접 마셔불수 있으며 건물 안에는 부하라의 “물”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타멜란의 손자, 울룩벡, 천문학 자에 의해 만들어진 세 메드레세에서 가장 오래된는 메드레세입니다. 그것은 높은 포털 베시탁(peshtak) 장식 직사각형 건물로 마당 과 전면 액세스 도어를, 해당합니다. 신학교(darsxona)의 한 쪽 끝에서, 스윙 복도 (mionxona)에 의해 두 갈래 입구는 다른 쪽 끝 모스크, 보관되었습니다. 입구 위에 2 층에 위치한 도서관 (kitobxona)가 발생했습니다. 아케이드는 2 높은 아케이드에 해당하는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포탑 (guldasta)는 양쪽에서 닫습니다.
메드레세의 건설적인 부분과 장식 독점 엄격 준수와 함께 깜짝 놀라게합니다.
달의 모양을 한 별의 왕궁이라는 뜻으로, 시내에서 외곽 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부하라 한국의 마지막 왕인 알림 - 한(Allamxon)왕의 사치스러운 별장으로 ‘여름 궁전’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집회실, 별궁, 하렘 등 여러 건물들이 있습니다. 궁전 가장 깊숙한 곳에는 하램과 하우즈(khauz: 연못)가 있는데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써 사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왕은 하우즈에 물을 가득 채우고 하렘의 후궁을 그날 밤 상대로 정했다고 합니다. 요즘 하렘 건물은 수자나(수를 놓은 장식보)박물관으로 사용됩니다.
)라비 하우즈란 (하우즈khauz는 ‘연못’이라는 뜻입니다)광장과 연못 증심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 엣날의 건축물입니다. 1620년에 만들어진 연못은 고대도시의 중앙광장에 위치하며 깊이는 약 5 미터 정도입니다. 연못 주위에는 16-17세기에 지어진 노드르 디반베기 (Nodir Devonbeghi) 신학교와 하나카. 그리고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아카데미였던 구겔다쉬(Kukeldash) 라는 큰 신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또한 광장에는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던 현자 호자 나스레딘(Khodja Nasreddin)의 동상이 있습니다.
광장은 17 세기 쵸 마이너, 포 첨탑의 특별한 기념이 열린에 마을의 북동 부분에 라비 하우즈(Lyabi-Khauz), 뒤에 그것은 풍부한 투르크멘어 할리프 니야즈(Khalif Niyaz) - 쿨라의 돈에서 세워진 잘 보존 된 구조입니다. 마드라스 건축 연대는 1807 년에 관한 아카이브 문서에서 오는 이미 17 세기 말에 존재했던, 지금까지의 할리프 니야즈 쿨라 메데레세로, 정확성이 필요합니다.
쵸 마이너의 건설 특이점은 혼란. 때로는 쵸 마이너 만 손실 메드레세의 게이트로 간주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의식 및 거주: 더 세심한 검토함으로써, 쵸 마이너도 현재의 상태로는 자족 복잡하며, 건물은 적어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하라 근치 카스리 오리폰(Kasri Orifon)이라는 시골에 위치하며 14세기에 지어졌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학교를 세운 바하우딘 낙쉬반디(Bakhauddin Nakshbandi)의 영묘입니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있는 도로인 줄리- 말릭 사막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카라반-사라이 (실크로드 시대의 대상 숙소) 이자 성채인 이 건물은 1069-1079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정문만 남아 있지만 엣날에는 건물 구석마다 미나렛이 있었습니다. 뜰을 둘러싸는 2층의 건물에는 방이 있었는데 이 방까지 자기로 만들어진 수로관으로 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광장과 맞닿아 있는 대문은 높이가 18미터, 넓이가 12미터에 달합니다. 카라반-사라이 맞은편에 사르도바(:돔의 반지하에 물을 모으는 일종의 저수지)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대상들이 물을 사용 했습니다.
고대한 부하라 오아시스 센터 중 하나는 4 세기에 2 BC의 말에 나타납니다 라프 샨의 낮은 범위에 위치해, 바이켄트 도시입니다. 바이켄트 요새는 국경과 위대한 실크로드 무역 점과 훌륭한 전략 역할을했습니다; 그것은 코레 즘과 북한의 국가들과 인도, 박트리아, 그리고 나흐샵(Nashkhab) 연결. 바이켄트에 절정 성장은 8 세기 AD에 6 주위에 빠집니다. 중앙 아시아의 다른 도시와 달리 바이켄트은 주지사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실크 무역 번영 원래 "상인 공화국" 이었습니다. 8 세기에 도시의 거의 모든 대중은 유목민에 의해 파괴되고, 도시는 약탈했습니다. 그 후,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부하라
'정의 도시'
부하라 유적지
1.쉬토라이 모히하사 궁전
'쉬토라'는 별을 뜻하고, '모'는 달, '하사'는 장소를 뜻한다. '달과 별의 궁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궁전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만들어진 여름궁전으로 부하라 칸국 최후의 칸인 아림 칸이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대부분의 부하라의 건물이 푸른색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반해 이 궁전의 입구는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어 새로움이 느껴진다. 제일 호화스런 궁전은 정원을 둘러싼 듯한 흰 궁전으로 외부는 유럽양식으로 만들어졌으나 내부는 부하라 양식의 화려한 문양이 돋보인다. 궁전내 응접실 등에는 보석, 무기, 침구류, 양탄자, 악기, 일본의 화병 등이 장식되어 있다.
정원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고 형형색색의 꽃이 피었으며, 공작이 돌아 다녀 지금도 충분히 화려했던 당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을 수영하게 했던 연못과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라스, 300여명의 후궁을 살게 했던 하렘 등도 있다.
이 궁전을 지을때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칸은 4마리의 양을 여러 곳에 방목하도록 했다. 그후 4마리의 양을 조사해보니 이곳에 방목했던 양이 가장 많이 살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가장 공기가 맑고 건강에 이로운 곳이라 생각하고, 이곳에 궁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까운 사실은 칸이 궁전이 완성되자마자 건축가들의 손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한다. 더 이상 이와 똑 같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2500년의 세월을 간직한 부하라는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최대의 관광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사마르칸트와 히바의 이름값에 밀려 아직은 그렇게 관광객의 수요가 많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부하라를 방문해보면 아직도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순박한 정을 느낄 수 있다. 마을 주민들도 모두 친절하고 성심 성의껏 대해준다. 아직은 개발이 되지 않아서 고층 빌딩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며, 시설도 열악하지만 진정한 우즈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흙색의 멋스럽고 고풍스러운 전경이다.
부하라는 현재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주의 주도로서 '보하라'라고도 한다. '부하라'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사원'이라는 뜻으로 부하라가 이슬람교의 성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전성기에는 300여개의 모스크와 167개의 메드레세가 있었으며, 이슬람 공부를 위해 각지에서 올라온 약 2만여명의 학생들이 부하라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최고 이슬람 성지로서 9~10세기에는 과학 · 문예의 중심지였으며, 16세기에는 과거 부하라 칸국의 수도로서, 이슬람 성직자의 양성기관이 있었고, 수많은 이슬람 사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최대의 종교도시로 유명하였다. 이슬람 수피즘의 대가인 아흐메드 야사비와 낙쉬반디가 부하라에서 이슬람을 연구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부하라 출신의 이맘 부하리(810~870)는 '하디스'를 저술했다. 하디스는 전 세계 무슬림들이 공부하는 대표적인 예언자 언행록이다. 아라비아의 메카에 갈 수 없다면 부하라에 가서 하지(성지순례)를 수행하라는 말이 전해내려 올 정도로 부하라는 이슬람의 중심지이다.
현재 인구는 약 23만명(2009년)으로 우즈베키스탄 중부지역의 문화중심지이며, 저지대에서 산출되는 가스와 농산물 가공, 모피 가공의 중심지이다. 주요 산업은 직물 · 피혁 · 유지 등이며, 융단, 금속조각, 목각 투조 등의 공예품도 활발하다.
당나라 때 이곳을 방문한 현장은 부하라를 1천 7백리의 크기에 동서는 넓고 남북은 좁은 장엄한 나라로 묘사했다. 안국으로 알려진 부하라는 고선지와 함께 당나라의 번장이 되어 고선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안록산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무다리야 강에서 흘러 들어온 2개의 운하가 부하라를 가로 지르며 생명선의 역할을 한다.
2.나지르 지반베기 메드레세
1622년 나지르 지반베기에 의해 간설된 신학교로 정면 입구의 선명한 색황이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그림으로, 태양의 중심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사마르칸트의 쉬르도르 메드레세의 그림과 같은 것이라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우상숭배를 부정하는 이슬람의 교리에 반대되는 예외적인 것으로, 당시 집권자들의 종교를 뛰어넘는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했다. 정면입구로 들어서면 지금은 안마당에 차이하나가 있고, 마당을 둘러싼 방은 선물가게와 공방이 되어있다.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나지르 지반베기는 부하라 왕국의 고위 관료로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인이 되어 결혼식을 올릴 때 신부에게 아주 검소한 귀걸이 하나만을 선물한다.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어 좋은 선물을 기대했던 그의 부인은 매우 실망을 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지낸다. 수년이 지나고 나지르 지반베기는 메르데세와 모스크 등 각종 건축물을 완공한 후 부인에게 말한다. "결혼식 때 당신에게 귀걸이 하나만 선물했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완성하였소. 이 모든 건축물이 진정한 나의 결혼 선물이오." 성수기에는 매일 저녁 7시에 정원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우즈벡 전통 음악 연주와 춤, 그리고 패션쇼가 진행되기도 하는데, 한 여름 밤에 우즈벡의 춤과 음악에 빠져보자. |
3.타키
타키는 큰 거리의 교차점을 반구형 지붕으로 덮은 노천시장으로 휴게소와 같은 역할도 했다. 16세기 당시의 타키는 전문상점의 요소가 강해 희귀하고 고가의 보석류 판매, 여러 가지 재질 모양의 모자류 판매, 금의 판매를 위해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흰 터번을 쓴 사람과 긴 비단옷을 입은 사람, 비싼 모피 모자를 쓴 사람등 많은 민족들이 모여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물품 교역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중요한 정보교환의 장소였다. 교차점의 반구형 지붕은 크고 높으며 외광이 잘 들어오게 하기 위한 많은 창이 있다. 그리고 낙타를 타고도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입구가 매우 높다. 부하라에는 '자르가론 타키', '사라폰 타키', '텔팍 푸루스한 타키' 등 다양한 타키가 남아 있다. |
4.칼란 미나레트
'칼란' 이란 타직어로 '크다'라는 뜻으로, 이름에 걸맞게 높이가 46m에 이른다. 그래서 부하라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부하라의 상징이다.
1127년에 칼란칸 왕조 아루스 칸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부하라의 흥망을 지켜본 산증인이라 일컬어진다. 탑의 기단부 직경은 9m, 토대부분이 지하로 10m 들어가 있다. 탑은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원통형으로 탑의 벽면은 14층으로 나누어 여러 가지 벽돌을 다르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장식했다. 벽돌들은 햇빛에 구운 갈색 벽돌이며, 달걀의 흰자와 낙타 젖으로 반죽하여 쌓았다고 한다. 미나레트는 모스크의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리로 이어져있다. 내부에는 105개의 나선계단이 있으며, 관리인과 잘 협상만 하면 올라갈 수도 있다.(현재, 공식적으로는 금지하고 있다)
나레트는 사막의 등대로써 사막 여행객에게 있어 중요한 길잡이였다. 또한 18세기 경에는 '공개 처형장'으로 꼭대기에서 자루에 넣어진 사형수를 던졌기 때문에 '사(死)의 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최후의 사형은 1884년에 행해졌다고 한다. 이 미나레트는 마을 전체가 붕괴된 대지진에도 흔들림이 없었고 파멸을 몰고 다니는 징기스칸에게도 파괴되지 않았던 것으로 많은 전설을 안고 있다.
징기스칸이 와서 이 탑을 올려다보다 그만 모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생각없이 허리를 숙여 모자를 주우려하던 징기스칸은 "이 탑은 나의 머리를 숙이게 한 멋진 탑이다. 그대로 두어라" 라고 말했다 한다.
5.마고키 앗타리 모스크
부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마고키 앗타리 모스크는 아주 오래 전부터 묻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묻혀있던 것을 1936년 러시아의 고고학자 시슈킨에 의해 발굴 되어진 모습이다.
마고키는 '굴안' 이라는 뜻으로 둘레가 굴처럼 파여있어 붙혀진 이름이며, 앗타리는 '약을 판매하는' 이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모스크 주변에서 약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벽면은 세 층으로 나뉘어 있어 이 모스크의 역사를 말해준다. 아래에 조각된 조르아스터교의 아라베스크 무늬의 벽돌층, 그 위 불교양식의 기단 그리고 그 위에 이슬람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파괴되었을 때 그대로 그 위에 계속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그렇다. 한 곳에서 조르아스터교, 불교, 이슬람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벽면을 보면서 아랍군에 의해 파괴될 당시의 상황과 징기스칸에 의해 파괴당할 때의 상황을 떠올린다면 새로운 기분이 들것이다. 현재는 부하라 카페트를 전시하는 박물관의 역할도 하고 있다.
6.울루그벡 메드레세
1417년 울루그벡에 의해 지어진 메드레세로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학교이다.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에 있는 메드레세와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으며, 화려한 장식 또한 유사하다. 또 '무슬림에게는 교육열이 반드시 필요하다.' 라는 문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맞은편에는 울루그벡 메드레세 보다 약 200년 뒤에 지어진 압둘 아지스한메드레세가 있는데 더욱더 화려하고 색채도 다양하다. 서로의 메드레세를 비교해보면 이슬람 건축의 양식도 시간에 따라 변화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7.아르크 성
카페트 바자르를 지나 도로 족으로 나오면 매끈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성벽이 눈에 띈다. 16~20미터 높이의 성벽은 총 넓이가 3.9헥타르에 이른다. 그 옛날 성을 탈환하기 위한 병사들처럼 한번쯤은 성벽을 타고 올라가고 싶은 충동도 생긴다.
이 성이 언제 최초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7세기 훗자 하우톤 여왕이 이 성에서 아랍과 싸웠다는 문헌으로 비추어 7세기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으로 성은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거듭하다가 지금의 모습은 18세기 부하라 칸국 시대에 완성되었으며, 1920년 러시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왕들이 살았던 성이다.
성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성문이 나온다. 성문으로 들어가면 오르막길 양쪽으로 죄수들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는데 현재에는 인형으로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성내에는 모스크, 옥좌, 거실 등이 있으며, 작은 박물관에는 형은 집행하는 장면, 감옥, 노예들의 생활, 의료기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성벽의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부하라 마을들의 경치를 감상해보자.
1920년 구 소련 프룬제 장군에 의해 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현재의 성 뒤편은 그 당시의 모습을 보전하기 위해 펜스가 설치되어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관리인에게 말만 잘하면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의 전경은 한편의 그림과 같다. 칼란 미나레트 꼭대기에서 보는 경치가 '제1' 이라면 공사 중인 성의 뒤편에서 보는 경치가 '제2'쯤 될 것이다.
8.이스마일 사마니 묘
이슬람 초기 건축양식의 영묘로 892년에서 943년에 걸쳐 지어진, 중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이슬람 건축물이다. 9세기 말에 부하라를 점령, 수도로 정한 사만 왕조의 이스마일 사마니가 부친을 위해 지은 영묘지만, 그 후 그와 그의 자손도 묻혀 사만 왕조의 왕족영묘가 되었다.
몽골 내습으로 마을이 파괴되었을때 마고키 앗타리 모스크와 함께 거의 땅 속에 묻혔으며 주변이 모두 묘지였기 때문에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가 1925년에 발굴되었다. 햇볕에 말린 벽돌을 쌓아 올린 후 반구형 돔 지붕을 만든 단순한 구조지만 그 외관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벽면을 다양한 문양의 벽돌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쌓아올린 것이 볼거리로 음영이 있고 당시 건축가의 기술과 미의식에 놀랄 수 밖에 없다. 벽면의 햇갈의 강약, 각도에 따라 그 음영이 변해 다양한 느낌을 준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숨을참고 묘를 2바퀴 돈 후 소원을 빌면 반드시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실제로 해보면 숨을 쉬지 않고 2바퀴 도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