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절: '내 마음' 이라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사야 자신도 모압의 멸망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어 부르짖어 운다는 것이다. 부르짖다에 사용된 동사 히브리어 '자아크' 는, '소리지르다', '큰 소리로 부르짖다', '도움을 요청하다' 는 뜻을 가지고있다. 이사야는 멸망당하는 모압을 위하여 하나님께 애끓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 취해야 할 자세 일 것이다. 이사야는 심판을 외치면서도 중보자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죄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본을 보여주는 것 이다.
6-7절; 니므림 물은 모압의 맑은 샘으로서 6,7 개의 수원을 가지고 있어서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물이 '마르고' 라고 표현되어 있다. 평상시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던 니므림 물마져 마르고 처량한 모습으로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는데, 그런 와중에도 평소 집착하던 재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 오히려 재물은 짐이된다.
9절: 모압 사람들이 재난에서 모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들마저 사자의 밥이 되게 하실 것이다. '사자' 는 히브리어 '아르예' 인데, 이는 대적의 손을 빌려 모압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도 완전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24:18;암 5:19)
나의 묵상
모압이 아끼던 니므림 물이 바싹 말라버렸다. 그들에게는 생수의 근원과도 같았던 니므림 물이 마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심판이 코 앞에 닥쳤는데 쌓아놓은 재물을 포기 하지 못하고있다. 그들의 조상 롯이 심판의 때에도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듯, 이들 또한 롯의 길을 가고 있다.
육신의 소욕에 붙잡혀 심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모압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진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며,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한다. 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 모시던 그모스는 어차피 모압의 멸망과 동시에 무로 돌아가 버릴 만물 안의 우상 일 뿐이다.
지금 이사야의 마음이 불타고있다. 영혼들을 향한 애끓는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판의 선지자인 동시에 중보자의 부르심을 받았다. 심판을 외치지만 영혼들을 향한 긍휼이 가득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사야의 모습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시고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그로인해 우리는 죄를 범할지라도 이제 변호자 예수그리스도의 보호를 받게된다. (요일2:1)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는 실로 너무나 부요하다. 이러한 영적 유산을 이어 받은 성도는 중보자의 부르심 가운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역을 쉬면서 믿지 않는 영혼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었다. 그런데 복음의 부요함을 깨닫고 나니 하루 빨리 사역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하지만 열정 만큼 회복 되지 않는 몸의 한계로
날마다 말씀 앞에 앉아 주님의 발치에서 그저 듣고만 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아도, 듣고 앉아 있는것 만으로도 이렇게 행복 하다니....
로마서 4장5절 말씀처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새롭다.
묵상기도
주님,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을 내게도 부으소서.
먼저 은혜를 입은자, 전해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전하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는데,
나의 상황은, 그저 주님 앞에서 듣는 것 외에
하는게 없습니다.
그러나 모압이 자랑하던 니므림 물은 마르나
주님으로 부터 흐르는 샘물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샘물에 발을 담그니 부족함이 없나이다.
만물안의 것들은 아무리 자랑해도
풀의 꽃처럼 시들어버리리니,
오직 영영히 서는 말씀을 붙잡고
오늘 하루도 살게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