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보름날 약밥 제도 신라 적 풍속이라
묵은 산채 삶아 내니 육미를 바꿀소냐
귀 밝히는 약술 이며 부름 삭는 생률이라
먼저 불러 더위팔기 달맞이 횃불혀기
흘러오는 풍속이요 아이들 놀이로다 |
'농가월령가'(정학유) 정월 령에 세시 풍속이 나온다.
절식으로 약밥, 나물, 귀밝이 술, 부름과 더위팔기, 달맞이 등의 풍속 이야기다.
1년에 12번 있는 보름 중에 명절(名節)로 치는 보름은 넷이다.
상원(上元)인 정월 대보름, 중원(中元)인 백중(百中,음력 7. 15), 추석(秋夕, 음력 8. 15), 하원(下元,음력 10. 15 )이 그것이다.
그 넷 중 예로부터 대보름을 가장 크게 쇠었다. 민속학자 최상수의 <한국의 세시풍속>을 보면 1년 세시풍속 189건 중 40건이 대보름과 관계가 있어 전체의 1/5이 넘는다고 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대보름을 소정월(小正月)이라 하여 양력으로 바꿔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옛어른들이 왜 이토록 대보름을 크게 생각했을까?
달의 움직임으로 하는 음력을 사용하는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첫 번째 뜨는 보름달은 1월 1일 설날보다 더 가시적(可視的)이어서
중요한 뜻을 부여한 것 같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이 중시되던 옛날, 태양은 양(陽)으로 남성이요, 달은 음(陰)으로 여성이었다.
하늘은 양(陽)이요 땅은 음(陰), 그래서 달과 대지는 음(陰)이어서 지모신(地母神)으로 출산력(出産力)을 가졌다고 믿었다.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기다리는 봄철 농사를 앞두고 풍년을 달에 빌었던 것이 대보름이었다. 달은 물을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대보름 절식(節食)으로는 오곡밥(쌀 ,조, 수수,팥, 콩 )을 먹는 것이나, 쥐불놀이로 쥐를 쫓는 것이나, 달집을 태워
풍년을 기원하는 것 등을 보면 금방 수긍이 간다.
대보름 전날이면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 놀이가 쥐불놀이다. 논두렁 받두렁의 마른 풀에 붙어있는 농사에 해가 되는 잡균을 불태워 죽이는 것이지만,
깡통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게 구멍을 뚫어 불을 넣고 원을 그리며 돌리는 멋은 우리의 기억을 옛날 어린 시절로 돌려주기도 한다.
대보름의 절식으로 오곡밥과 나물인데 왜 그걸 먹을까? 4~50년 전만해도 보리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천고마비의 가을철을 지나 봄보리가 오기 전까지 식량이 부족하여서 영양관리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오곡에 꼭 끼어야 하는 것이 찹쌀과 콩이다. 찹쌀은 귀하기도 하지만,멥쌀보다 영양가가 높고 노화를 막아 주고 또 소화를 잘 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곡밥을 보름밥, 농사밥리라고도 하였다.
콩도 밭에서 나오는 고기란 말이 있듯이 담백질이 41%나 있기 때문이다. 나물을 먹는 이유도 위와 같다.
상원날인 대보름 절식으로는 원래 약밥을 먹었는데 약밥에는 대추, 밤, 잣, 꿀 등이 들어가서 서민에게 부담이 되어
오곡밥으로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개보름 쇠듯한다는 말이 있다.
달[月]이 음이라면 견공(犬公)은 양에 해당한다.
'양극음(陽剋陰)'이라 해서 개는 대보름 떠오르는 달빛을 해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양의 기운을 줄이기 위해서
대보름에는 개를 일부러 굶겼기에 생긴 말이다.
대보름이 되면 달맞이를 간다.
횃불을 켜들고 뜨는 달을 남보다 먼저 보기 위해 뒷동산에 올라간다.
달님에게 소원을 빌기 위함이다. 우리 조상들은 대보름날의 달빛은 어둠과, 질병과, 재액을 밀어내는 힘이 있다고 믿어서 달님이 떠오르면 횃불을 땅에 꽂아놓고 합장하며
떠오르는 달에게 그 해의 소원을 빌었다. 우리 민족의 광명사상(光明思想)을 여기서도 엿볼 수가 있다.
보름날 아침에는 오곡밥을 먹고, 어른들은 수하 자녀들에게 귀밝이술이라는 이명주(耳明酒)를 한 잔씩 딸아주어 마시게 하였다.
이른 아침 식사 전에 귀밝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1년 동안 좋은 소식만 듣고 살면서 잡귀를 막는다고 믿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셨다.
어린이에게는 입술에 술을 묻혀 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귀밝이 술은 차게하여 마셔야 하는데 청주(淸酒)를 주로 마셨다
대보름을 앞두면 우리네 어머니는 호두 잣 밤 땅콩 은행 등 부럼을 사다가 정월 보름날 저녁에 이를 깨뜨리게 하였다.
이를 '부럼 깬다'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럼은 부스럼의 준말로 몸에 생기는 종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옛날에는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부스럼이 많았다.
그런 부스럼을 막아주는 영양소가 부럼에는 쌀보다 수십 배로 많아 이를 미리 먹어 일년 동안 부스럼을 예방하고자 하는 옛 조상의 지혜였다.
거기에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 하여 이를 단단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대개 나이 수대로 깨문다는데 이를 한두 개로생략가는 게 보통이다.
첫 번째 것은 먹지 않고 마당이나 지붕에 버리고 두 번째 것부터 먹는다. 깨물 때는 어금니로 한번에 깨물어 깨뜨려야 한다.
이가 없는 노인들은 무를 깨물게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두, 잣, 밤, 땅콩 같은 부럼의 단단한 껍데기가 연약한 피부와 절묘하게 어울려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답교(踏橋)라 하여 다리밟기 놀이도 있었다.
보름날 밤 그 고장에서 가장 큰 다리나 오래된 다리를 찾아가서,
자기 나이 수대로 왕복하면 다리에 병(脚病)이 없어진다는 풍속이다.
서울의 겨우 광통교(廣通橋)에서 시작하여 12다리를 찾아가 모두 밟으면 12달의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이라 다리가 그만큼 소중하였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란 나도 대보름이 되면 어렸을 적 더위팔기와 제웅치기가 생각난다.
더위팔기란 대보름날 해뜨기 전 이른 아침 친구 집에 찾아가서 '길동아!' 이름을 부른다.
친구가 멋모르고 대답하면 '내 더위 사라.' 또는 '내 더위 네 더위 먼 데 더위'하고 외치면 그 친구 길동이에게 자기 더위를 판 것이 된다.
그러니까 대보름날에 누가 부르면 대답 대신 '내 더위 사라.'하면 부른 이가 오히려 더위를 사가게 된다.
이렇게 응수하는 것을 학(謔)이라 하였다. 물론 동년배끼리의 이야기다.
제웅이란 음력 1월 14일 저녁에 액막이로 쓰기 위해 사람의 형상을 짚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옛 사람들은 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 해의 운수를 맡아보는 신 중에 제웅직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 해는 9년마다 한번씩 돌아오는데 남자는 10세부터 여성은 11살부터 들기 시작한다.
그런 나이의 해를 맞으면 액(厄)이 있는 불길한 해로여겼다.
그래서 제웅을 만들어 제웅의 머리, 가슴, 팔, 다리 에 동전을 넣고 일음과 출생년의 간지를 적어서 정월 14일 초저녁에 길가에 버리면
제웅의 동전을 가져 가는 사람이 그 액을 가져 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를 제웅치기라 하였다.
내 어렸을 때 눈다라끼가 나면 눈섶을 빼서 길가 돌틈에 넣어 지나가는 사람이 차고 가게 하였는데 같은 이치라 생각된다.
생각해 보면 바람직한 미풍양속은 아닌 것 같다.
설 세배나 풍속 등은 대보름까지 이어지는데,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설이 개인적 폐쇄적 수직적인 명절이라면,
대보름은 개방적, 집단적, 수평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