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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룻 3:6-13
6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룻 3:6-13 / 룻이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킨 대로 하였다. 7) 보아스가 저녁을 먹고 나서 마음이 흐뭇하여 곡식단을 쌓아놓은 가리 곁에 잠자리를 정하고는 그곳에 누웠다. 룻이 가만히 다가가 그 발치께를 들치고 누웠다. 8) 보아스가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웬 여인이 발치께에 누워 있는 것을 알자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9) `누구요?' 보아스가 소리치자 `어르신네의 비녀인 룻이에요. 어르신네는 우리 집안을 맡아주셔야 할 분 아닌가요? 이 몸을 어르신네 옷자락으로 감싸주세요' 하고 룻이 말하였다. 10) 그제서야 보아스가 이렇게 말하였다. `모압댁, 여호와께 복받길 바라오. 댁이 어지간하면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갈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구려. 이렇게까지 지성으로 어머님을 모시려고 하다니! 이전보다 어머님을 모시는 효성이 더 갸륵하구려. 11) 모압댁, 두려워하지 말아요. 모압댁이 내게 말한 대로 내가 다 하리다. 모압댁이 현숙한 여인인 줄은 온 마을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 12) 모압댁이 말한 대로 내가 모압댁 집안을 책임져야 할 사람인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나보다도 모압댁 집안에 더 가까운 일가붙이가 있어요. 13) 하여튼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요. 내일 아침에 그 가장 가까운 일가붙이에게 어떻게 할는지 물어 보아야겠소. 만일 그 사람이 모압댁 집안을 책임져야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하면 내가 모압댁 집안을 꼭 책임지도록 하겠소. 이것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두고 내가 맹세하는 말이오.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오늘 밤은 여기서 눈을 붙이도록 하시오'
본문에서 룻은 조언대로 보아스에게 기업 무르는 제도에 호소하여 청혼을 합니다. 시모 나오미의 조언을 따른 것입니다. 이 때 보아스는 기업 무를 제도와 그 책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하며 그 제안을 수락합니다.
나오미가 기업 무를 자 보아스에게 하는 완곡한 청혼(6-9) 룻은 보아스의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 나오미가 조언한대로 이행합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추수를 마치고 먹고 마신 후 흐뭇한 마음으로 곡식더미 곁에 가서 누워있습니다. 이를 본 룻은 보아스의 곁에 가서 이불을 들고 거기 들어가 눕습니다. 이 때 보아스는 놀란 채 누구인지 묻습니다. 이때 룻은 보아스가 나오미와 자신의 기업 무를 자임을 밝히며 완곡한 방법으로 청혼합니다.
청을 받아들이며 책임 이행을 맹세하는 보아스(10-13) 그렇게 청을 한다고 해도 보아스가 받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어질고 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단순히 그런 보아스의 착한 심성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제도 즉 레위기 25장, 민수기 27장에 선포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왔던 기업 무를 제도인 고엘을 지키겠다고 맹세합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던 제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산의 손실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도덕적, 혈통적인 생각보다 신앙적 결단을 보여준 모습입니다. 사사 시대,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시대, 이런 보아스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룻기입니다. 이에 모세의 율법에 다음과 같이 있었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딸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그의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민 27:8-11) 등입니다. 어떠한 말씀이라도 그것을 순전한 믿음으로 지켜나갈 때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도 모든 인간에게 복이 됩니다.
적용: 당신의 선행은 보아스처럼 성경에 근거한 행동인가요? 아니면 단순한 동정과 연민의 행동인가요?
예수님은 우리를 성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주후 70년 이스라엘 성전이 허물어지면서 우리를 성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배의 형식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적당한 처소를 찾는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덤에 갇히는 존재가 아닙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
룻 3장 6~9절 / 이한규목사
이 세상에 은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얼마든지 지금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존재로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기를 잘 단장하라
룻은 외적인 단장에서 힘썼다. 외적인 단장도 중요하다. 외모를 지저분하고 고리타분하게 한 채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우울하게 보이면 은혜와 행복도 다가서기 힘들다. 마음이 밝으면 밝은 행동이 나타나지만 거꾸로 밝은 행동을 하면 마음도 밝아진다. 내적인 단장과 외적인 단장을 겸비하라.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과 미소와 기쁨을 잃지 말고 최대한 나를 가꾸어 행복하게 보이라. 그것은 위선이 아니라 남의 마음을 밝게 하는 일종의 헌신이다.
나를 단장하지 않고 함부로 굴리면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셔.”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나를 잘 가꾸는 모습은 부지런함과 책임감과 사려 깊음의 표시다. 하나님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마음만 잘 가꾸고 외모와 태도는 가꾸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전인적인 단장을 통해 나를 잘 가꾸려고 힘쓰라. 솜씨, 말씨, 마음씨도 행복의 씨지만 맵씨도 행복의 씨다.
2. 담대히 은혜를 구하라
룻은 자기를 여종으로 낮추고 존경하는 말로 보아스를 크게 높여주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은혜를 구하며 청혼해서 끊어진 대를 이어달라고 했다. 성경은 왜 당시에 보아스가 중년이 넘도록 혼자였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마 그때까지 성공을 위해 뛰다가 결혼을 못했을 수도 있고 일찍 아내를 잃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곡식더미 끝에서 혼자 잠자던 보아스의 허전한 마음은 룻의 존경하는 마음과 적극적인 사랑으로 꽉 차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자 보아스의 마음이 순식간에 열려 결국 룻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잘 알려 준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찬 성도가 적극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모습을 보기 원하신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예쁜 믿음과 마음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은혜 받기 전에 대개 있는 것은 주님을 향한 열망과 간절함이다. 천국과 행복은 소극적으로 행동할 때 얻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추구할 때 얻는다.
3. 서로 허물을 덮어 주라
이불 안으로 들어온 룻을 발견하고 보아스가 깜짝 놀라자 룻이 “당신의 옷자락을 펴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했다. 그때 보아스가 자신의 옷자락으로 룻을 덮지 않았다면 룻은 성읍에서 순식간에 매장되었을 것이다. 수치스런 큰 허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 룻이 “당신의 옷자락을 펴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했는데 그 말은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저를 덮어주세요.”라는 말이다. 결국 보아스는 룻을 사랑의 품으로 덮어 주었고 그날 밤은 두 사람에게 생애 최고의 밤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은혜를 주시는가? 주님의 보혈로 인생의 큰 죄와 허물이 덮인 사랑에 감격해 서로 허물을 덮어줄 때다. 나의 허물을 덮어 주시며 1만 달란트의 엄청난 빚을 탕감해 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고 내게 허물을 보인 사람의 1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 주라.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라. 미워하고 원망하는 감정이 들면 먼저 나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미운 사람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그를 내어 드리고 평안을 찾으라. 하나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용서하고 잊으라. 원수 같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책임지는 생활
룻 3장 13절 / 최성규목사
룻기 3장 13절에는 “책임”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 이행했습니다. 그 결과, 기생 라합의 아들이었던 그가 다윗 왕의 증조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책임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자유와 책임, 권리와 책임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임질 것을 가르치고, 각자가 책임 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책임지는 생활에 대해 알아봄으로, 우리 모두 이기적인 방종의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첫째, 기독교인의 책임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전도해야 할 책임,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것은 모든 인류와 민족을 복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창 18:1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기 위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경을 바로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고, 성도들은 성도대로 성경적인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빛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십자가를 지고 낮아짐의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됩시다.
둘째, 부모의 책임
에베소서 6장 4절에는 부모의 두 가지 책임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녀가 노여움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부모는 기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양은 올바른 태도와 가치관에 관한 학습입니다. 훈계는 그릇된 태도에 관한 교정입니다. 지식 교육보다 인격 연마가 먼저입니다. 자녀에게 신앙심을 심어주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효를 가르침으로 자녀의 인격을 바로 세웁시다.
셋째, 자녀의 책임
자녀가 어릴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책임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에게는 효를 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신세대도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합니다. 요구만 하거나 보호받기만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자녀 때문에 어른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효의 마음으로 부모, 어른, 스승을 모시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맑고, 밝고, 깨끗해질 것입니다.
넷째, 스승의 책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은 바꿔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승은 잘못된 그림자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선생은 있으나, 스승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을 인정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모든 것을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인정해주셨고, 세워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 갑시다. 참된 스승이 있는 곳에 미래의 꿈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다섯째, 제자의 책임
고려청자의 맥이 끊긴 것은 준비된 제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지식만을 배우는 자가 아니라, 스승을 배우는 자, 곧 스승을 닮는 자입니다. 제자는 스승과 공부하기 전에, 동행해야 합니다. 삶을 나눔으로 인격을 연마해야 합니다. 인격 없는 지식은 죄를 짓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정 성공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다면, 스승을 통해 바른 인격과 바른 삶을 배웁시다.
여섯째, 기업가의 책임
오늘날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사꾼이 아니라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업가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키워야 하고, 나라를 위한 회사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꿈을 팔고 문화를 팔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업가 정신이 필요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도전해야 합니다. 실패를 무릅쓰고 도전할 때, 고용 증대,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일곱째, 근로자의 책임
경제가 어려운 것은 근로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근로자는 일을 덜 하려고 하지 말고, 더 하려고 해야 합니다. 쉽게 하려고 하지 말고, 더 잘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할 때, 예수님께 칭찬받고, 사람에게 인정받습니다(마 25:23). 두 달란트 가져간 종이 네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가져간 종은 열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셨고 더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여덟째, 사회 운동가의 책임
많은 사회 운동가와 단체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많은 일을 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새 시대를 맞는 이 시점에서 사회 운동가들은 스스로에게 ‘사회 운동 그 자체도 변화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남에게만 변화하라고 하기 전에 자신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사회 운동가와 단체들 스스로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외침은 허공을 치는 공허함입니다. 또한 변화하려면 비판만 하지 말고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많은 사회 운동들이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아홉째, 국민의 책임
국민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에게만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대한민국을 책임진다는 의식으로 살아갈 때, 나라가 바로 섭니다. 그럴 때, 정치 지도자들이 아무렇게나 일하지 않습니다. 부정을 저지르지도 못합니다. 아이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 것처럼,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잘 못하고 있다면, 국민인 우리가 잘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국민 모두 책임의식을 가짐으로, 나라를 건강하게 만듭시다.
열째, 국가 지도자의 책임
국가 지도자는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았고,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본이 되었습니다(고전 11:1). 국가 지도자는 말하는 것보다 행동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모든 것에 본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이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나가야 합니다. 국민은 그런 노력을 다 알기에, 조금 실수해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해줍니다. 본이 되는 지도자를 선택하고, 또한 그들을 끊임없이 응원해줍시다. 살 맛 나는 나라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책임지는 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이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임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주시고, 책임질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맑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멋진 남자 보아스
룻기 3:7-13 / 염두철목사
우리는 지난 번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의 재혼을 위하여 조언을 한 내용과 이에 순종하였다고 먼저 결론을 내린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오미의 조언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만남을 위해 목욕하고 화장하고 옷을 차려 입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장소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그 자리로 들어가서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워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조언대로 그대로 행했습니다. 룻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순종은 주님이 주실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선뜻 내키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위험 부담이 있고 가능성이 희박한 곳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상식적인 일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고, 어려운 일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의 조언에 따라 룻이 행동으로 옮겨 보아스를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종하기로 결단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부딪혔던 것입니다.
한 밤중에 여인이 남자가 자고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웬만한 담대함이 아나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룻은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룻과 보아스, 그리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배후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친족의 의무를 요청하는 룻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지혜롭고 아리따운 룻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보아스가 자고 있는 발치에 가서 눕는데 성공했습니다. 룻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보아스의 동정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겠습니다.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아무 것도 모르고 잠을 자던 보아스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보니 어떤 여자가 발치에 누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깜짝 놀라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본문 9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누구냐는 물음에 룻은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어떤 부도덕한 여자가 야밤에 남자의 이불 속으로 들어왔을까 생각하면서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을 들어보니 룻이었습니다.
룻의 대답을 듣자 보아스는 ‘룻이라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룻이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때 룻이 많은 의미가 담긴 짧은 말로 자신의 목적을 말했습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한 말은 청혼의 의미를 지닌 동시에 룻이 보아스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대답할 말까지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룻은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대답할 말까지 준비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말은 룻기 2장 12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했던 축복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처음 룻을 만났을 때 그에게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룻은 보아스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기 원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옷자락’과 ‘날개’는 원문에서는 같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은근하면서도 공식적인 결혼 요청이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결혼하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은 청혼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합니다.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는 말입니다.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또 나왔습니다. 룻기에서는 이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룻은 보아스에게 친족의 의무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아내로 맞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남편 가족의 재산을 회복하고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인 계대결혼입니다. 만약 어느 여인이 자식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 가문은 끊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그 남편의 형제 중에서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 보호해주고 대를 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형제가 없으면 그의 친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자가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 그 가문의 대를 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보아스 앞에 나아간 룻을 통해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우리에게 순종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내 뜻을 강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우리에게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룻은 보아스 앞에서 ‘당신의 여종’이라며 겸손해 했습니다. 룻은 보아스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갔지만 그의 발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하나님의 발치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우리에게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말은 룻의 간절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룻의 간절함이 보아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은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우리에게 응답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룻은 보아스 앞에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라는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우리의 소원을 분명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친족의 의무에 응답하는 보아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대담한 행동에 당황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룻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두었던 정숙하고 아름다운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이렇게 대담하게, 더구나 밤중에 자기 발치에 와서 사랑의 고백을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천지를 덮고 있었습니다. 보는 사람도 없는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가 룻을 껴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보아스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했던 것 같습니다. 보아스에게 룻의 행동은 결코 부도덕하거나 천박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견하게 느껴졌습니다. 룻은 오직 시어머니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런 모험에 도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축복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고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어찌 보면 룻으로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이 요부처럼 다가온 것처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룻이 수치감을 느끼게 않도록 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그 속내를 헤아려 그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충성된 행동임을 칭찬하고 복까지 빌어주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충분히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들과 결혼할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룻이 그런 상대를 원하지 않고 나이 든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보아스에게 있어서는 의외였습니다.
보아스는 이것을 인애로 설명했습니다. 보아스의 말 중에 ‘네가 베푼 인애’는 룻이 자기 조국과 부모를 떠나 그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베들레헴에 와서, 나오미에게 계속 효행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는 말은 룻이 젊은 과부로서 연소한 자에게 구혼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지도에 따라 기업 회복을 바라고 비록 나이는 많지만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 자신에게 구혼한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룻은 보아스의 칭찬의 말로 큰 격려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룻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니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그 때 룻이 두려움으로 긴장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밤에 보아스에게 거절을 당한다면 룻과 나오미는 큰 망신을 당할 뿐 아니라 베들레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치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행동에 따라 룻과 나오미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룻의 현숙함이 베들레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계속해서 룻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근거있는 객관적인 평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보아스 자신도 역시 룻을 현숙한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무게 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잠언 31장을 보면 현숙한 여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현숙한 여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여인입니다. 보아스와 성읍 사람들에게 룻이 현숙한 여인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룻이 반드시 집안을 일으키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했습니다. 본문 12절-13절을 보겠습니다.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느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룻을 칭찬하면서 자기보다 더 우선권이 있는 기업 무를 친족이 있으니 그가 포기하면 내게 기업을 무를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며 약속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와 다말이 무슨 사이인 줄 아십니까? 시아버지와 며느리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유다의 며느리 다발이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며느리에게 다른 아들을 내어주지 않자 그 며느리는 시아버지 유다를 상대로 대를 이을 자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계대 결혼의 풍습이 있었지만 이것이 제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이 자신에게 친족의 의무를 요청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보아스 역시 룻을 좋아하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룻을 흡족히 여기고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보아스의 확실한 대답은 룻에게 있어서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되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재빠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마치 보아스가 언젠가 이러한 상황이 오게 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룻의 요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보아스를 볼 때 보아스는 진정으로 하나님 편에서 준비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맞이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후 절차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룻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단호한 행동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보아스의 주도면밀한 업무처리에는 그만 손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많은 남성들이 나오지만 보아스처럼 완벽한 남성도 없습니다. 보아스의 성숙한 도덕성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보아스는 의인 요셉처럼 그녀를 범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처럼 축복하고, 친구처럼 격려하고, 친족처럼 약속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남성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보아스는 룻에게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사지 않게 하기 위해 룻을 보호해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따뜻하고도 세심하게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보아스의 마음 씀씀이를 살펴보게 됩니다.
아름답고 정숙한 룻, 그리고 신사다운 보아스의 태도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영적으로 볼 때 룻에게 있어서 보아스는 구원자입니다. 룻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보아스의 모습은 우리의 구속자 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는 삶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을 통해 룻과 보아스를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룻의 재혼을 위해 나선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룻이 담대하게 보아스 앞으로 나아간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가장 빨리 회복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나의 노력과 열심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역사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역사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