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직속 상사인 부장님과 대화하며 여러 번 울었다. 나는 곧 정 들었던 현재 부서를 떠나 다른 부서로 발령받게 된다. 이유인즉, 현 재 부서에서 2년 연속 승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조직에서는 내 역량의 문제라기보다 직무의 문제로 보고, 강점을 살 려 타 부서로 전환 배치를 제안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여태 공고히 쌓아왔던 모든 경험을 놓고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다는 건 막막하 고 두려운 일이다. 나도 나지만 팀장 역할을 했던 내가 빠진 우리 부 서는 부서장인 부장님을 중심으로 대격변을 맞아야 하니 너무나 걱 정된다. 내가 빠진 나의 정든 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강제로 맞선봐 시집가는 느낌이다. 지금은 그렇다. 오직 승진을 위해서 승진 가능한 보직으로 옮기는 게 맞는지, 누구 보다 일을 사랑하며 자부심을 갖고 임했던 내가 왜 금년 최종 승진 자 발표 명단에 오를 수 없었는지 의문투성이다. 세상에 태어나 모 든 걸 가지면서 사는 사람은 없음을 안다. 그래도 억울한 건 어쩔 수 없다. 오죽하면 승진에서 떨어지고 회사 후배에게 이렇게 푸념했다.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승진 운은 왜 이렇게 없을까?" 현명한 후배는 이렇게 답했다. "선배, 초고속 승진한 대신에 윗사람 과 맞지 않고 후배들도 못됐다고 생각해봐요. 그것만큼 최악도 없어 요. 인복 있는 게 최고예요. 모두가 선배를 응원해요. 이번에는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그 말을 듣고 그날 저녁, 후배와 눈물로 술잔을 채우며 그동안의 내 직장생활을 돌이켜봤다. 내 회사 책상은 가끔 폭탄을 맞은 듯 정신없다. 끝없이 일을 하고 있 는데, 계속해서 일이 생긴다. 정리가 미처 되지 않은 채로 상사의 부 름을 받고 새로운 업무에 투입되느라 내 본래의 일들은 뒤로 밀려 버릴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책상 위에는 늘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 이고, 좋지 않은 기억력을 보완하고자 적어둔 메모들을 산발적으로 배치하다 보면 책상은 깔끔할 수가 없다. 우리 팀의 이름은 총무홍보팀. 한 그룹의 본사 소속으로, 온갖 대소 사를 챙기고 행사를 치르며 계열사도 관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공을 치하받는 날은 없고, 뭐 하나 잘못되면 크게 욕먹기 일쑤다. 잘해야 본전이다. 근무하는 책상에 매일 폭탄이 떨어질지라도 나는 자부심 이 있었다. 내 업무와 팀의 역할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 이 있었다. 팀에 투입된 후, 두 팔 걷어붙이고 지난 8년간 개선해온 많은 것이 경영시스템을 조금이라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바꾸어왔 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다. 성과를 인정받 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불쌍해하고, 안타까워한다. 자꾸 밥을 산 다고 연락이 온다. 고위 임원 중 한 분이 승진 누락으로 낙심한 나를 위로하고자 밥을 사주며 이런 말을 전했다. "이 작가는 나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잖아. 난 평생 회사 만 보며 산 게 지금 좀 후회돼. 물론 회사 일에 전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작가는 글도 쓰고 강사 생활도 하니 얼마나 좋아. 승진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 누구보다 강한 카리스마 와 열정으로 회사를 사랑하는 분이 밝히신 뜻밖의 소회가 많은 생 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람이란 게 참 요상하다. 마음을 비우라는 소리를 들으니 반대로 마음이 채워진다. 일과 회사에 대한 애정이 급격히 식어 바닥을 찍 었는데, 그럼에도 누군가가 "아직도 일을 그렇게 사랑해?" 하고 묻 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예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다이어리에 음식점 이름과 메뉴가 빼곡히 적힌 달이 있었다. 하루하 루가 새롭고 벅차서 점심으로 먹은 메뉴마저 잊고 싶지 않아 꼬박 꼬박 기록해놓았더랬다. 회사에서 체험하는 모든 일이 신기하고 즐 거웠던, 회사 생활을 시작한 첫 달. 만나는 모든 사람과 주변에서 일 어나는 일이 좋았다. 회사원들은 대다수 '월요병'에 시달린다지만 그때의 나는 월요일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돌아오는 한 주에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까?' 그렇게 설레는 맘으로 회사 생활을 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셀 수 없이 많은 점심 메뉴가 나를 거쳐 가는 동안, 맡은 자리에서 묵묵 히 최선을 다했다. 일은 내게 수많은 배움을 줬고, 돈으로 살 수 없 는 경험을 하게 했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그래서 내 안을 꽉꽉 채워준 깨달음을 주었고, 든든하고 폭넓은 인간관계와 새로운 능력 들을 줬다. 해외여행을 수십 번 할 수 있는 금전적 여유를 줬고, 부 모님께 효도하며 든든한 딸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무엇보다 가장 감사한 것은 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동 료들을 선물 받았다는 사실이다. 직속 부하직원이 승진에 떨어졌다 고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며 진심으로 마음 아파해준 상사와 승진 누락 직후 여름휴가를 낸 내가 혹여 나쁜 생각을 하진 않을까, 식움 전폐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집 앞까지 먹을 것을 싸들고 와준 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퇴사해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회사 에 남은 나를 열렬히 지지해주며 격려의 말을 보내는 옛 동료들까 지, 내 곁의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 회사 생활은 이토록 소중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새 부서로 옮기고 나면 적응하느라 당분간 많이 힘들 것이 분명하 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단기간에 적응해 차질 없이 수행해야 하니 쉽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일들을 더 깊이, 더 넓은 시각으로 파 헤쳐야 할지 모른다.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어쩌면 감 당하지 못할 고통으로 매일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역량을 키우고 새 부서에 정을 붙이면서 자부심이라는 걸 또 갖게 되겠지. 그리고 새로운 직무를 사랑하게 되리란 희망을 가져본다. 언젠가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잘 버텼어. 너의 모든 사랑이 옳았어. 결코 헛되지 않았어"라고 말해줄 수 있길 바란다. 부디 사랑 이 두려움을 이기기를. 이청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