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아비 황제(皇帝) -
한편, 헌제(獻帝) 와 황후(皇后)는 이각(李傕)의 군사에게 이끌려 미오성(郿塢城)에 무사히 도착은 하였으나 그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장안을 떠나 한낮이 될 때까지 무지막지한 군졸들에게 무참한 학대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음식이라곤 상한 것들뿐이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황제(皇帝)를 수행하는 시종들에게는 상한 음식이나마 제대로 주지 않아서 모두가 굶어 죽을 판이었다.
헌제(獻帝)는 그런 참담한 광경을 보다 못해 하루는 이각(李傕)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일렀다.
"시종들이 굶어 죽을 판이니 쌀 한 자루와 쇠고기 몇 근만 보내라."
이각(李傕)은 그런 전갈을 받자 화를 내며 이렇게 떠들어댔다.
"이 난시에 끼니를 제대로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알 일이지 무슨 요구가 그렇게나 많은가?" 신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무엄한 언사였다.
헌제(獻帝)는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참다못해 소리 높여 꾸짖었다.
"역적(逆賊) 놈이 아무렇기로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러자 태위 양표(太尉 楊彪)가 국궁 배례를 하면서 아뢴다.
"폐하! 이각(李傕)은 성질이 포악한 놈이오니 노여움을 참으소서 모든 것을 참고 때를 기다려야 하옵니다.
"....." 헌제(獻帝)가 고개를 수그린 채 말을 못 하고 눈물을 짓자, 옆에 있던 시종들도 옷자락으로 눈물을 씻었다.
마침 그때 성 밖이 무엇인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무슨 소리냐?" 시종이 밖을 살피고 들어오더니 아뢴다.
"곽사(郭汜)의 무리가 성 밖에 몰려와 폐하를 자기네에게 내놓으라고 야단입니다."헌제(獻帝)는 그 소리를 듣고 땅을 치며 한탄하였다.
"아아, 앞문에는 호랑이가 있고 뒷문에는 이리가 있어서 짐을 볼모로 싸우고 있으니 짐의 신세는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 무렵 이각(李傕)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 밖으로 달려나가 곽사를 맞아 싸우려 하였다.
그러자 곽사(郭汜)가 이각(李傕)을 보고 이렇게 외친다.
"이 반적(反賊) 놈아! 천자는 네놈의 천자가 아니라 천하의 천자이거늘 너 같은 반적 놈이 어찌 천자를 납치해 갔느냐! 이 곽사(郭汜)가 만인을 대신해 너 같은 놈은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각(李傕)이 대답한다.
"천하의 악당 곽사(郭汜) 놈은 듣거라! 네놈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내가 천자를 보호하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천자에게 창을 겨누는 네놈이야말로 천하의 역적(逆賊)이다!"
곽사(郭汜) 또한 지지 않고 떠들어 대는데,
"이놈아! 천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무슨 놈의 개수작이냐! 개수작 그만하고 나와 단둘이 싸워서 생사를 겨루자!"
"좋다! 네깟 놈쯤은 내 상대도 안 되지!"
이각과 곽사(郭汜)는 군사들을 물리치고 단둘이 성 밖에서 맞붙었다. 창검을 부딪치기를 이십여 합 그러나 승부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양쪽 군사들은 제각기 결전의 북을 치며 위세를 북돋웠다. 그래도 싸움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이때에, 성중에서 말을 달려 나와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두 분 장수는 싸움을 거두시라는 어명(御命)이 내렸소. 만약 이 명에 거역을 한다면 역적(逆賊)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으실게요."
그렇게 외치며 싸움을 말리는 사람은 태위 양표(太尉 楊彪)였다. 애초에 이간계(离间计)로써 그들 두 사람을 싸우게 만들었던 장본인(張本人)인 양표(楊彪)였던 것이다. 어명(御命)이라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우는 통에 이각은 양표(楊彪)의 말을 아니 들을 수가 없었다.
실상인즉 천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터였지만 겉으로는 대의를 존중하는 듯이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자를 되찾기 위해 싸움을 걸어온 곽사(郭汜)의 입장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어명(御命)이었다.
"이놈아! 무조건 화해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곽사(郭汜)는 크게 화를 내며 양표(楊彪)와 그를 따라온 주전을 비롯한 조신들에게 모조리 포박을 지웠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소? 화의(和議)를 중재(仲裁)하려던 우리에게 결박(結縛)을 지우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양표(楊彪)가 항의(抗議)를 하였으나 곽사(郭汜)는 한 마디로 일축(一蹴)해 버린다.
"잔소리 말라! 이각(李傕)은 천자를 볼모로 잡고 있으면서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나는 너희들을 볼모로 잡아둘 생각이로다!"
"오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오. 조정(李傕)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두 분이 한 사람은 천자(天子)를 위협(威脅)하고 한 사람은 조신(朝臣)들을 위협(威脅)하고 있으니 이래 가지고서야 세상이 무슨 꼴이 된단 말이오?"
"이놈아! 잠자코 있지 못하고 무슨 잔소리냐?"
곽사(郭汜)가 칼을 뽑아 양표(楊彪)의 목을 후려치려 하자 중랑장 양밀이 가까스로 만류하며,
"이각(李傕)을 제거하지 못하고 조정(李傕)의 원로를 주살하는 것은 후일에 크게 불리합니다." 하고 말리는 것이 아닌가.
곽사(郭汜)는 양밀의 말을 쫓아 양표(楊彪)와 주전(朱儁) 두 사람만은 포박을 끌러 주면서 놓아 보내고 나머지 조신들을 모조리 가두어 두게 하였다.
주전(朱儁)은 이미 노인인지라 곽사(郭汜)에게 풀려나 미오성(郿塢城)으로 들어온 직후 양표(楊彪)를 보며 눈물로 한탄한다.
"우리가 사직지신(社稷之臣)으로서 군주를 구하여 모시지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가겠소." 주전(朱儁)은 대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치고 피를 토하며 분사(憤死) 하고 말았다.
태위(太尉) 양표(楊彪)는 헌제(獻帝)를 배알하며 잠시 전에 있었던 이각과 곽사의 접전을 보고 하고 주전의 자결 소식을 알렸자.
그러자 헌제(獻帝)는 눈물을 흘리며,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어느 쪽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있구나. 이제는 노신(老臣) 주전마저 잃었으니 도대체 짐은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그러자 양표(楊彪)가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폐하, 어느 쪽도 의지하지 마시고 이 성에서 달아나야 하옵니다. 이대로는 이용만 당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빠져나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성 밖에는 곽사 군까지 버티고 있는데." 하며 절망 어린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표(楊彪)는,
"얼마 전에 연주와 형주, 남양의 원술과 기주의 원소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니 조만간 무슨 소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옛 도읍인 낙양으로 피신하심이 옳을 듯 하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낙양으로 피신할 방법을 찾아 보라." 천자는 기어코 미오성(郿塢城) 탈출을 승낙하고야 말았다.
그러자 양표(楊彪)는,
"알아보니 이 성에는 바깥으로 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었습니다. 마침 이각 군이 성 밖의 곽사 군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으니 기회를 보아 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소. 빨리 손을 쓰도록 하시오."
그날 밤이었다. 양표(楊彪)는 늦은 밤에 천자를 깨웠다.
"어찌 되었느냐?"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감시병은 없느냐?"
"어렵게 술을 구해 모두 잠들게 해 놓았습니다."
천자는 양표(楊彪)의 안내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미오성(郿塢城)의 비밀문인 후문(後門)이 열리고 천자와 황후를 비롯한 측근 조신과 시종들이 탄 마차가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낙양을 향하여 북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시각 이각은 밤늦게 몇몇 측근 장수들과 함께 술 한 잔을 하고 있었다.
이각이 경계를 담당한 장수에게 물었다.
"아직도 곽사 군은 성 밖에서 아우성이냐?"
"예, 황제를 내놓지 않으면 성을 공격하겠답니다."
"멍청한 놈들! 이 미오성(郿塢城)은 동탁 태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지은 거야, 간단히 함락되지 않아. 실컷 떠들게 내버려 둬라 오늘은 술맛이 다른 날보다 좋군!" 이각은 곽사를 무시하는 말을 하며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바로 그때, 연락병 하나가 급히 달려들며 외쳤다.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웬 소란이냐?"
"폐, 폐하께서 성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무엇이!"
이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바보 같은 놈들! 대체 감시병들을 뭘 하고 있었느냐! 빨리 뒤쫓아서 황제를 찾아와라!"
술자리에 함께 있던 장수들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거처로 달려갔다.
이각이 외친다.
"황제가 곽사의 손에 들어가면 우린 반란군이 된다. 속히 황제를 뒤쫒아라!" 이각을 비롯한 몇몇 장수들이 후제문을 통하여 황제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곽사의 척후병이 성문 근처에 숨어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다가,
"어라? 이각 장군과 부하들이 성을 급히 빠져나오고 있어.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그렇다면 저들에 휩쓸려 들어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군."
그리하여 곽사의 척후병은 이각의 군사들 후미에 섞여 들어갔다.
"이봐, 어디를 이리 급하게 가는 거지?" 척후병은 말을 달리며 옆에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황제가 달아나 버렸대. 그럼 우린 반란군이 되고 말잖아."
곽사의 척후병은 그제서야 이각의 군사들이 성 밖을 빠져나와 황급히 달려나가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척후병은 그 길로 자기 본진을 찾아가 황제가 미오성을 빠져나와 이각 군이 그를 추격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곽사는 크게 놀라 병사를 동원하며,
"이럴 때가 아니다. 즉시 황제를 이각보다 먼저 찾아야 한다!" 하며 군사를 몰고 어둠속으로 달려나갔다.
한편, 황제와 그를 따르는 시종과 조신이 탄 마차는 추격해 오는 이각 군과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황제 일행이 탄 마차는 단기필마(單騎匹馬)에 비하여 속도가 훨씬느렸기 때문이다.
황제가 불안을 느끼고 양표에게 말한다.
"이각에게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가?"
"폐하께는 아무 짓도 못 하겠지만 저희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기 있다! 조금만 더 따라붙으면 된다!" 황제 일행이 탄 마차를 발견한 이각이 뒤좇는 부하들을 독려했다.
바로 그 순간 홀연 마차가 돌진하는 전방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나며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말을 급히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헌제의 총희(寵姬)의 아버지인 동승 장군(董承 將軍) 이었다.
황제를 뒤쫓던 이각 군은 동승이 몰고 온 군사들과 한바탕 격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양군이 혼재한 틈을 이용하여 황제가 탄 마차는 이각 군의 추격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덧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황제의 마차를 뒤쫒던 이각 군을 따돌린 동승이 황제의 마차 후미에 따라 붙었다.
그리하여 황제 일행을 호위하여 계속하여 앞으로 앞으로 달려갔다.
한편, 뒤늦게 황제가 미오 성을 빠져나간 사실을 알고 추격에 나선 곽사는 우연히 이각을 만났다.
불과 어젯밤까지는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려고 덤볐으나 지금은 피차간에 불리한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다.
곽사가 이각을 보고 말한다.
"양표와 동승이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날에는 제후들에게 명하여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 할 것이니 사태가 그렇게 되는 날에는 우리는 삼족(三族)이 멸할 판이오."
이각이 그 소리를 듣고 대답한다.
"어차피 죽을 판이면 우리가 힘을 합하여 천자를 죽인 뒤에 천하를 양분하면 어떻소?"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두 도적은 쉽사리 뜻이 맞아 서로의 군사를 모아 가지고 헌제의 뒤를 따르니 어느덧 헌제 일행이 탄 마차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황제를 호위하며 쫓기던 동승의 눈에도 뒤쫓는 무리의 먼지 구름이 보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동승이 황제의 뒤를 따르는 마차를 향하여 외쳤다.
"마차 안에 실려 있는 금은보화를 비롯한 값나가는 물건을 모두 길에 버려라!" 그러자 마차 안에서는 비단을 비롯해 금은보석들이 길바닥에 버려지기 시작하였다.
"아, 이것 봐!"
"저길 봐, 금이다!"
"금과 은으로 장식된 비녀도 있다."
"야, 굉장한데!"
황제 일행이 탄 마차를 뒤쫓던 이각과 곽사의 군사들은 길에 떨어진 금은보화를 보고 말을 멈추고 제각기 뛰어내려,
"내가 먼저야."
"아냐 내가 먼저 집었어." 하며 서로 보물 쟁탈전에 돌입하였다.
"이놈들, 뭣들 하고 있느냐! 황제를 쫓지 않고!" 이각과 곽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봉급의 몇 년 치가 길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것만 손에 넣으면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이 짓 그만두고 편히 먹고 살수 있습니다." 하며 황제 일행의 뒤를 쫓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동승의 기지(欺智)로 이각과 곽사의 화급한 추격을 따돌린 천자 일행은 황하(黃河)를 눈앞에 두었다.
젊은 시종 몇이 절벽을 내려가 어디서 작은 배 한 척을 끌어왔다.날은 춥고 강물은 거칠었다. 게다가 강 언덕이 절벽이어서 배를 타러 내려가기가 결코 용이히지 않았다.
헌제는 발아래를 굽어보며 한숨을 쉬었고 황후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각과 곽사의 군사들이 뒤를 쫓는 함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위급한 사항이 시시각각 몰려왔다.
바로 그때 황후의 오빠인 복덕(伏德)이 어디선가 비단 십여 필을 얻어 왔다.
"이 비단으로 이 절벽을 내려가도록 합시다."
비단으로 천자와 황후의 허리를 묶어 언덕 위에서 조금씩 놓아 주며 절벽을 내려가게 하였다.
천하를 호령하던 천자의 몸으로서 실로 비참하기 짝없는 피난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배에 오른 사람은 천자와 황후를 비롯한 중요한 측근 십여 명뿐이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배를 얻어 타려고 제각기 물속으로 뛰어들며 배를 붙잡는다.
"놓아라! 놓지 못하느냐?"
동승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 뱃전을 잡은 시종들의 팔을 자르고 목을 잘랐다.
그로 인해 물은 삽시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헌제는 그 비참한 꼴을 보고 눈물을 지으며,
"아아, 내가 후일에 낙양으로 돌아가거든 너희들을 위해 반드시 위령제를 지내 주리라." 하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삼국지 - 74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