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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 15:1-16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7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내용분해 : A.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두번째 변론을 시작함(1절)
B. 욥의 주장들이 모두 허황되고 무익한 것이라 비난함(2-3절)
1. 소위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이나 늘어놓고
어찌 바람 같은 소리나 배에 채우고 있는가 (2절)
2. 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한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명이 되겠는가 (3절)
C. 자기 의 주장을 사수하는 욥을 거듭 정죄함(4-13절)
1.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불경건하다고 비난함 (4절)
•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4a절)
•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는구나 (4b절)
2. 욥의 말이 사악한 마음에서 발원된 것이라 정죄함 (5-6절)
•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5절)
•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6절)
3. 완강하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욥을 독선적이라고 비난함 (7-11절)
•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7절)
•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8절)
•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9절)
•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10절)
•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11절)
4. 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을 행하고 있다고 정죄함 (12-13절)
• 어찌하여 네가 그토록 흥분하고 네 눈을 번뜩거리며(12절)
•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13절)
D. 인간은 모두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임을 강조함(14-16절)
1.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기에 의롭겠느냐(14절)
2.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15절)
3.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16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날을 허락해 주시고,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예배를 위해, 우리를 건지시고 지키시며, 우리를 강권적으로 역사하신줄 믿습니다. 이제 이러한 하나님께, 우리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며, 우리의 예배를 거룩한 산 제사로 올려드립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욥기 15:1-16절 말씀으로 자기 의를 고집하는 욥의 불경건 정죄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보편적 부패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제4-27장은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과 관련한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은 총 3차 3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즉 총 3차 논쟁은 각 논쟁마다 세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변론을 하는데, 친구들이 변론할 때마다 욥이 반박 변론을 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논쟁의 형식이 3차 3주기의 형식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3차 논쟁 중에는 세 친구 가운데 마지막 주자인 소발의 변론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27:13-23을 소발의 변론으로 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소발의 변론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욥과 친구들 간의 제1차 논쟁은 제4-14장까지 이어지며, 제2차 논쟁은 제15-21장까지 이어지고, 제3차 논쟁은 제 22-27장까지 이어집니다.
한편 제2차 논쟁이나 제3차 논쟁에서 친구들의 변론은 전체적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 첫번째 논쟁에서의 변론과 비교해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즉 친구들은 첫번째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세적이고 도식적인 인과응보론에 입각해서 예기치 못한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을 정죄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에 있어서 갈수록 점점 강경하고 노골적이 된다는 것뿐입니다. 말하자면 본서의 저자는 내용상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을 연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자는 왜 굳이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는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을 이렇게 연속적으로 다루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오류와 한계를 안고 반복되는 인간의 논쟁을 통해, 인간 논리의 한계성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절대주권자요, 의로운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이후에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며 의지할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제2차 논쟁은 제1차 논쟁과 마찬가지로 욥의 논쟁 상대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그리하여 먼저 제 15-17장은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과 그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데, 이를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제 15장의 두 문단은 엘리바스의 두번째 변론을 보도하는데, 여기서 엘리바스는 먼저 자기 의를 끝까지 주장하는 욥을 불경건한 자로 규정하여 정죄하고, 인간이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는 근거로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 보편적 부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1-16절). 그리고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강조를 통하여 욥에게 회개할 것을 강요합니다 (17-35절). 이러한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은 제1차 변론의 논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주장이 첫번째 변론 때보다 강한 어조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엘리바스는 두 차례의 변론에서 모두 전통적 사상에 입각한 기계적 인과응보론에 근거하여 욥의 고난이 그의 죄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으나, 첫번째 변론에서는 비교적 부드러운 어조로 의인에 대한 상과 악인에 대한 벌을 공평하게 강조하여 욥으로 하여금 고난의 원인이 그의 죄에 었으므로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반면, 두번째 변론에서는 강한 어조로 악인의 비참한 생애와 종말을 강조함으로써, 친구들의 충고를 거절하고 자기의 의를 거듭 주장하는 욥의 행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행위로서,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엘리바스의 두번째 변론은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욥의 고난을 인과응보의 차원에서 이해한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 가운데 인간 존재의 근원적 · 보편적 부패에 대한 주장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태초 아담의 범죄 이래 아담의 혈통 가운데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죄 아래 있게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모두 죄에 오염되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는 어떠한 선도 행 할수 없는 부패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로마서 3:9-18 에서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실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는 인정을 받은 욥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욥이 비록 자기의 절대적 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 해도, 지나치게 자기의 의를 주장한 것은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고 허물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간과한 그룻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오직 칭의(稱義), 곧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실 때에만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으며, 우리가 욥을 의인으로 부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일 뿐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여기심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롬 3:26.28 ; 5:1).
다음으로 16.17장의 네 문단은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데,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거니와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은 제1차 변론의 내용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도 제1차 변론에 대한 반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론은 제1차 변론에 대한 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고난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회복을 간구하는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다른 친구들의 변론에 대한 반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반론에서는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과 질책, 그리고 하나님의 방관자적인 듯한 태도로 인하여 욥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더욱 깊은 회의에 빠져드는 특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엘리바스의 제2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6 : 1-16의 문단에서 욥은 엘리바스가 그의 첫 변론과 전혀 다르지 않은 내용이되 보다 강한 어조로 자신을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한 데 대하여, 친구들의 무정하고 무익한 변론을 경멸하고, 자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한탄하게됩니다. 먼저 욥은 자신에 대한 동정심이 없는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 라고 하며, 고난 당하는 자신을 위로하기는 커녕, 도리어 정죄하기에 급급한 친구들에게 원망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공허하고 무익하다고 비난하고, 서로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기는 그들을 위로하였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들의 무정한 태도를 질책합니다(1-5절). 이어 욥은 자신의 슬픔이, 말이나 침묵으로 진정되거나 완화될 수 없는 참담한 것임을 토로하며, 그러한 슬픔과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가 되시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을 자신에게 행하셨는지를 고발하는 형식의 독백을 통해, 자신이 현재 당하는 극심한 영육간의 고통을 한탄하게됩니다 (6-16절).
다음으로 16 : 17-22의 문단에서는 자기 손에는 포학이 없고 자기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욥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줄 증인으로 하나님을 지목하며, 자기가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하여 주시기를 원한다는 소망을 피력함으로써, 자신의 무죄함을 더욱 강력한 어조로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17:1-10의 문단에서는 임박한 죽음과 친구들로부터 위로 대신 정죄만 당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위증을 밝혀,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호소하며, 끝까지 올바른 신앙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17:11-16의 문단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변호인이자 증인으로 지명하면서, 하나님께 속히 자신을 위하여 변호하여 주실 것을 호소하였으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앞에서 자신의 신앙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강한 의지를 피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좌절하며, 자신에게는 오직 죽음밖에 없음을 한탄합니다. 특히 그는 무덤을 ‘내 아비라, 구더기를 내 어미 내 자매라’ 칭함으로써 (14절)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음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변론에는 직면한 극심한 고난과 친구들의 무정한 변론으로 인하여 욥이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극도의 내적 갈등 속에서 고뇌하고 있음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는데,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욥이 이처럼 극심한 내적 갈동의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욥은 의롭게 섭리하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당연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하여 심각한 혼란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는 잘못을 범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만큼은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뢰가 그의 신앙을 좌절시킬 수 있다는 사단의 호언장담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독설, 그리고 친구들의 거듭되는 독설에도 불구하고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심각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거 및 이후 그가 회복의 은총을 누리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궁한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해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고, 또 욥의 궁극적인 상태가 보여주듯이, 인간 현존의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죄는 우리에게 변명과 구실을 찾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옐리바스는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라고 욥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은 본문을 '자네 혀는 용케도 그럴듯한 말을 골라내는군'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엘리바스는 나름대로 우정을 가지고 자기에게 충고하는 친구들의 권면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욥을 보면서 그가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그럴듯한 말을 잘도 지어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결코 그럴듯한 말로 자신을 변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욥은 지나치게 자신의 의를 강변하는 잘못을 범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욥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고난을 당할 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었고, 따라서 지어낸 말로 자신을 변호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응보론적 사상에 의해, 욥의 고난이 그의 죄의 결과라고 확신하는 엘리바스에게는 욥의 반론이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한 그럴듯한 말로밖에 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 잘못은 자기의 의를 강변한 욥에게보다, 그릇된 지식과 사상으로 욥을 정죄한 엘리바스에게 더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 한 가지는 엘리바스의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죄는 인간으로 끝없는 변명과 구실을 찾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죄인으로 하여금 항상 용케도 자신을 변호할 그럴듯한 말을 찾아내게 합니다. 아담의 경우를 보십시오.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거슬러 범죄하였을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죄는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인정하게 하기보다는 죄를 변명하게 하고, 전가하게 하였습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께서 왜 범죄하였느냐고 물으실 때 "당신이 주신 여자가 나에게 주어 먹게 되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변명하고 자신의 아내 하와와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신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의 원인을 돌려 죄책으로 부터 피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죄는 인권이 존중되고 사람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스스로를 변명하게 하고, 구실을 찾아내게 하고, 자신의 죄를 부모 탓으로, 환경 탓으로 전가하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서 자신의 죄를 무죄로 판결받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진노를 그 위에 쌓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변명하고 변호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훌륭한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감하여 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죄는 오직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행4:19)고 말한 베드로의 말처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죄가 우리로 변명과 구실을 찾게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따라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에는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해야 할것입니다. 물론 자기 죄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죄를 인정하고 자복할 때에만이 우리는 하나님께 사함의 은혜와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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