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안목왕)
인구의 절반이 이렇게 정기적으로 피를 흘리고 있지만, 생리대를 눈에 띄게 해서는 안 된다니 대단한 아이러니다. 희고 순결한 이미지로 덧칠된 생리대이거늘 일단 그게 생리대인 이상 불결함의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 가방에서 꺼내 주머니에 찔러 넣는 짧은 순간에도 주변을 휘휘 둘러보게 만드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엄마는 생리대를 담을 작은 파우치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역시 웃기긴 마찬가지였다. 남녀 합반인 교실에서 가방의 파우치를 꺼내 화장실로 향한다는 건 ‘쟤, 생리 중이구나.’ 하고 모두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결국 이론적으론 생리대를 숨기기 위해 파우치에 담고 그 파우치를 가리기 위해 더 큰 파우치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결국 등산 배낭을 메고 화장실에 가야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등산 배낭을 메고 화장실에 가는 중학생을 보면 다들 생각하겠지. ‘쟤, 지금 생리 하는구나.’
p.246 피, 땀, 눈물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망가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고민하고 고뇌하다 무너지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굴이 반반할수록 그 신세 망치기는 수월하며, 한없이 높은 콧대는 무너지기 위한 복선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합당한 결과처럼 여겨진다. 안나 카레니나, 보바리 부인, 테스, <여자의 일생>의 잔느, <주홍글씨>의 헤스터,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해나까지. 별처럼 무수한 이름들을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다. 이 이름들을 그러모아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붙여본다. “행복한 여자의 모습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여자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래서 난 언제나 여자가 무엇을 이루고 해내는 서사에 매료된다. 에세이 <와일드>도,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도>, 영화 <매드맥스>도, 나이키 우먼의 짧은 광고 클립마저도 매번 나를 울게 한다. 앉은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든다.
p.140 그가 흰색 분필만 쓴다고 해도 모든 색을 챙겨두는 마음
녹색 티셔츠의 손에 나를 위협할 흉기가 들려 있었다면, 이미 초범이 아니었던 그가 그날따라 과감했더라면.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사이 세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알량한 골조였음을 깨닫는다. 어디서도 허가받지 못할 만큼 허술한 설계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럴 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음이 운처럼 느껴진다. 으슥한 밤이거나 밝은 아침이거나 어떤 옷을 입거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지금껏 나를 돌본 것은 일말의 직감과 엄마의 기도, 그러니까 운이 다였다. 그 이후에도 그랬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집까지 누군가 따라왔을 때, 나는 골목과 골목 사이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뛰어올라 문을 열고 다시 잠그기까지의 순간, 조용한 복도에 발소리가 울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럴 때면 망가진 센서등이 고맙기만 했다.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혹여 밖에서 지켜볼까 두려워 불도 켜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숨죽여 잠을 청하던 밤, 여기가 정글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p.184 단순하게 무너지는
첫댓글 글 너무 좋아... 내 장바구니로 꺼져
영업완... 넘 잘읽었어 나도 바로산다..!
…..👍
글이 쉽게 읽히고 넘 좋다 ㅠㅠ 사야지..
글 너무 잘쓴다 사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