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젠틀하고 멋진 남자였다.
대학졸업 후에 대기업에 입사했고 한평생 성실하게 근무했다.
그는 '전무'를 끝으로 33년만에 현업에서 물러났다.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의 성실과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나도 박수를 보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언제나 검소했고 매사에 겸손했다.
서초구에 있는 '한강뷰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농사 짓는 부모님이 시드머니를 보태준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그의 땀과 노력 그리고 검소함으로 일군 자산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의 집이 최소 40억은 넘는다고 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부동산에 관심이 없어 잘 모르고 있었지만 가끔씩 친구들 모임에 나가면 그런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부동산 얘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그의 아내 때문에 쓴다.
H가 퇴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아내가 취업하겠다고 했단다.
50대 후반이었고 평범한 가정주부였기에 대기업이나 정규직은 어려웠다.
그러나 식당, 마트, 카페, 작은 공장, 제과점, 건설현장 등 일자리를 열심히 찾기만 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집에 들어온 남편을 배려하여 본인이 자리를 비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자신도 사회생활이란 걸 해보고 싶어했단다.
평생 동안 남편 뒷바라지와 두 자녀 양육, 시부모와 친정부모 공양이란 그녀만의 쳇바퀴에서 과감한 탈피를 꿈꾸고 있었다.
그녀에겐 월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강남역 부근의 쾌 큰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갔다고 했다.
지금 취업한지 약 4-5개월 정도 된 새내기인데 정말로 신바람나게 일하고 있단다.
H 아내의 취업사실을 안 건 오늘 아침이었다.
부부동반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금년 7말8초에 '몽골'이나 '카자흐', '키르기스', '티벳' 중 한 곳을 선정하여 '힐링 트레킹'을 가기로 했었다.
각 모임에서 나의 역할이 대부분 그랬지만 역시 이번 여행도 내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국가별 한두 지역을 선택했고 총 7군데 코스를 내가 먼저 엄선했다.
각각의 특징과 장단점을 기록한 리포트를 어젯밤 친구들에게 보냈다.
검토해 보고 부부끼리 상의한 다음 '콘클라베 방식'으로 그 중 하나를 택일하여 내주에 예약하자고 했다.
7말8초에 떠나는 여행이라면 3월 초순이 적당하다고 봤다.
오늘 아침에 H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내가 작년 연말에 취업했다고 알려주었다.
나도 이 사실을 처음으로 들었다.
24년도에 L그룹에 입사한 아들이 그동안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금년 4말5초에 부모인 자신과 아내를 초대하여 세 사람이 함께 10여 일간 유럽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월차를 전부 그때 사용할 예정이기 때문에 7말8초의 여행은 어렵겠다는 내용이었다.
"자네가 여행경험이 많으니까 다른 회원들과 '해외 트레킹' 잘 다녀오고 아쉽지만 우리 부부는 이번엔 동행하지 못할 것 같네. 사실은 '월차문제'가 아니야. 유럽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휴가얘기를 꺼내지 못하겠다는 아내의 의견에 나도 깊이 공감하고 있어. 아내의 입장을 백프로 이해하고 있네. 내가 보기엔 박봉인데도 자신의 일을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몰라. 애사심도 넘치고"
"그래, 자네 의견을 잘 알았네. 다른 친구들과 맨투맨으로 다 소통한 후에 합리적으로 결정해 보자고. 오늘 중으로 매듭을 지을게"
오전 내로 친구들에게 모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H의 입장을 잘 설명했다.
'모임의 역사'도 길 뿐만 아니라 '우정'과 '배려심'도 남다른 친구들이라 이구동성으로 H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결정은 간단했다.
'해외 힐링 트레킹'은 26년 1분기로 연기되었다.
그땐 H 아내가 다시 원하는 만큼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H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친구들과의 논의 결과를 전달했고 26년 1분기에 다 함께 떠나자고 했다.
H는 무척 고마워 했고 또한 미안해 했다.
조만간에 소주 한 잔 사겠다고 했다.
"그랴. 애니 타임 오케이지"
인간의 행복은 '명성의 고저'나 '재산의 다소'로 좌우되진 않는다.
물론 얼마간의 상관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나 그런 요소들이 더더욱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은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기쁨과 행복감도 수직 상승하는 법이다.
나이나 성별에 따라 그 결과치나 아웃풋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삶에서 '소유'가 가장 소중한 요소도 아니며 또한 전부일 수도 없다.
명약관화한 삶의 원칙이자 지혜가 아니던가.
'이순'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중년여성의 원기왕성한 사회생활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중년 새내기 사원, 파이팅 !!!
사는 맛이 난다.
세월에 가속도가 붙어 급류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고 순식간에 나이가 들어간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거나 자신만의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당장 실행에 옮겨야 한다.
어떤 존재일지라도 시간을 이길 순 없으니까 말이다.
과감한 실천만이 답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