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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마 누엘 원문보기 글쓴이: 임마누엘
예배학적 측면에서 본 설교의 문제점과 갱신을 위한 제안
이 호 형 박사
Ph.D.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
現 한일신학대학교 강사
시작하는 말
우리 개신교회의 예배와 설교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예배는 없고설교만 있다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형식으로서의 예배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예배는 설교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개신교인들은 예배하면 설교를 잘 듣는 것을 생각하고 좋은 설교를 들으면 은혜롭게 예배를 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고 또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 우리 개신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예배는 설교를 위한 무대 내지는 설교를 위해 필요한 들러리 같은 형식으로 취급당한다. 달리 말하면 설교는 예배의 꽃이요 영광으로 인식되어 설교가 있으므로 예배는 예배로서 의의를 지니게 된다. 이리하여 설교가 예배의 존재 이유가 되는 주객 전도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 우리 개신교의 현실이다.
설교가 예배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현 상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점은 너무나 많은 설교 때문에 설교자들이 당하는 설교에 대한 부담과 아울러 설교의 질적인 저하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를 중시하는 개신 교인들의 신앙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가지 잘못된 신학적 이해이다. 즉 설교를 중시하는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복음에 대한 왜곡과 더불어 기독교의 본질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예배에서 설교의 위치와 역할을 논함에 있어서 성서와 복음의 본질과 설교의 역할, 그리고 예배의 의미와 또 복음 선포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역할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먼저 설교를 강조하는 개신 교인들의 신앙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잘못된 이해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이런 주제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고 나아가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고 능률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1.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서와 설교의 의미와 역할
개신 교인들이 설교를 중시하는 근저에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깔려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느냐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되고 바로 여기서 개신교는 전통적인 교회의 성서 이해에서 멀어져 개신교로서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어떻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느냐의 문제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 설교를 중시하는 개신교의 신앙의 문제점을 바로 잡는 좋은 계기가 되겠으나 여기서는 그렇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시하면서 받아드리는 개신 교인들의 성서관이 어떻게 설교에 영향을 끼치고 또 어떻게 복음을 왜곡하게 되는 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즉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시하면서 그 말씀을 선포하는 개신교의 설교가 사실은 복음적인 설교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 그렇게 성서를 절대시하는 신앙은 크리스트교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진 신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성서를 절대시하는 개신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성서의 말씀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말씀을 동일시하게 된 결과 우리의 신앙이 복음에 입각한 신앙이라기 보다는 구약의 신앙과 혼합된 짬뽕식의 신앙생활이 되어 버렸다. 좋은 예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면서 강조하는 성전 제사에 입각한 예배관이 그렇고 또 교인의 2대 임무로 강조하는 십일조 생활과 성수 주일이 바로 이 영향 아래서 구약을 똑같이 강조한 결과 일어난 일이라고 하겠다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신약 교회에서의 안식일과 주일: 복음적 주일 개념의 정립을 위하여," 기독교 사상. 1996년 4월호를 참조할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성서를 똑같이 강조한 결과 구약을 설교할 때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사건과 인간 구원 사건의 핵심인 그리스도 사건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빠져 버린 개신교의 설교는 기독교의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성서의 모든 말씀에 똑같은 가치를 두는 개신 교인들의 실제적인 신앙 중심에는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만이 크게 부각되지, 그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는 온전한 계시인 그리스도의 위치는 모호해지게 된다. 사실 개신 교인들의 입과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부수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한국의 개신교는 개혁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다는 의미에서 改新교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개혁한 改神교라고 불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하나님을 말하고 강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 하나님이 인간과 모든 창조물을 구속하고 우주를 다스리도록 한 그리스도가 개신교의 신앙 중심에서 벗어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표현이다.
이렇게 성서를 절대시하면서 성서의 모든 말씀을 동등하게 여기는 개신 교인들의 신앙의 근저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서가 지닌 역할에 대한 확실한 복음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리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요한 복음의 기자가 말한 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인간 구원의 성취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그 첫 번째 의미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통적으로 교회는 가르치기를 신약은 구약을 배경으로 구약은 신약의 빛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신약은 물론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설교는 그것을 구약을 본문으로 삼든 신약을 본문으로 택하든지 관계없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알리시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여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원 경영과의 관계성 아래서 선포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가 되고 교회의 설교가 된다.
성서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앞에서 언급한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가 옆으로 밀려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기독교의 본질을 생각하도록 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고 크리스트교 신앙의 중심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나 기독교가 기독교인 까닭은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며 어떻게 자신을 알린 하나님이냐는 데 있으며 바로 거기서 유대교와 본질적으로 갈라서게 된다. 즉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경영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만이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도 신앙과 행위의 중심에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성령 하나님을 말하면서 3위1체의 하나님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비록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 하나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언급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을 우리는 새롭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기준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를 볼 때 비록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더라도 가치와 의미에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도록 한다. 즉 모든 성서는 성서의 중심 되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안에서 그 가치와 경중이 나누어져야 하고 또 그런 것으로 받아 들여 선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신앙이었다.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제일 귀중하게 여겨 예배와 말씀 선포의 중심에 두었다.
성서는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 경영을 증거 하는 책이기 때문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말씀을 중시하다 보니 성서 자체를 중요시하는 성서 숭배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성서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개신 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그 성서가 증거 하는 복음의 사건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문자로서의 성서의 말씀이 신앙의 대상으로 변해 버렸으며 개신교의 설교도 이렇게 문자로서의 성서의 말씀에 대한 강해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더 그렇게 되어 있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 자체를 문자적으로 중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개신교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건이 아니라 문자적인 말씀에 대한 해석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강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설교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건이지만 말씀을 선포한다는 말은 성서의 모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정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와 그 구원 사건을 선포한다는 의미로 받아 드려져야 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예배 설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예배의 본질
앞에서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 그 일차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말을 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에서는 보편적으로 예배를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왜, 어떻게 하나님에게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왜라는 질문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시고 거룩한 분이니까 피조물들인 인간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한다. 물론 이 주장은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대교의 주장과 혹은 창조신을 믿는 다른 종교인들의 대답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이 된다. 왜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송을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대답은 그리스 도교적인 대답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그리스도 사건과 관련된 대답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왜 하나님에게 예배를 통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느냐?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와 모든 창조물을 구원하는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 속에는 어떻게 라는 질문과 예배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마땅히 그 은총에 대한 감사가 제일 우선 가는 주제로 등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여 새롭게 하는 은총에 대한 감사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엄위하심에 대한 외경 감으로 인한 경건의 마음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존재의 근거로부터 떨어졌다가 은총으로 다시 연합하게 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충만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감격이 충만한 예배는 당연히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는 철저히 준비된 사람,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이 참여하여 축하할 수 있는 제한적인 예배임을 알 수 있다. 즉 아무나 예배에 참여하여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한다고 그것이 기독교의 예배가 되지 않는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를 함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순서와 또 특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예배로 엄격히 구분하였던 것이다. 즉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서의 선포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전반부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복음의 사건을 상징으로 선포하면서 현재 사건으로 새롭게 체험하도록 하는 성찬의 예배에는 세례를 받아 무흠한 그리스동인들만 참석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던 것이다.
왜, 누가, 어떤 태도로 예배하느냐의 문제를 통해서 우리는 이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의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는 축제라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아남네시스인 기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첫 번째 가는 요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아남네시스인 것이다. 예배에서 설교가 하는 가장 큰 역할은 바로 이 구원 사건을 선포하는 것을 통하여 다시금 새롭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역사적 사건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 구원 사건의 실재는 지금도 여전히 그 효력을 가지고 역사하고 있는 사건이요 또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롭게 더 큰 깊이로 체험되어지는 사건이다. 고로 기독교 예배에서는 단순히 지나간 사건을 회상하듯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 때문에 흐려진 구원의 실재를 아남네시스를 통하여 생각하고 생각만 할 뿐 아니라 지금의 사건으로 현재화한다. 성찬의 중요한 역할은 바로 세례를 통하여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바로 그 파스카의 신비를 지금의 사건으로 다시금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이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기독교 예배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여 선포하고 또 그 사건에 대한 상징 행위인 성찬에 참여하여 현재적인 사건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축하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예배의 핵심인 설교와 성찬은 바로 이 본질을 드러내어 선포하고 새롭게 체험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요 기쁘게 하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3. 말을 사용하는 설교가 지닌 문제점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기독교의 예배는 결코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듣는 시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말씀도 문자적인 성서의 모든 말씀이 아닌 것임을 앞에서 언급하였다. 비록 말씀을 선포하는 사건이 예배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이 말씀의 선포는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으로서 말씀 선포이다. 그럼에도 말씀의 선포가 예배와 동일시되고 나아가서 예배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개신교의 예배는 예배학적인 측면에서 복음의 사건에 대한 감사의 축제라고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성서의 모든 말씀에 같은 가치를 두고 하는 설교는 성서 주석이지 복음의 선포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성서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똑같은 비중을 두고 하는 설교가 중심이 된 예배는 예배의 본질에서나 복음 선포의 측면에서 기독교의 본질과 멀리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설령 설교가 복음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설교만 가지고 복음의 사건을 온전하게 전달해서 체험하도록 하며 그 의미를 깊이 깨달아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복음의 선포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통한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이끌어 가고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곳에서 살도록 하기에는 말에만 의존하는 설교로써는 거의 불가능하다. 비록 설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라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전달한다고 하더러도 그것이 인간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 말이 지니고 있는 제약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사용하는 말의 가장 보편적인 용법이 정보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그 실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가리키고 그 실재의 개념을 다루고 그 특성들의 부분들을 묘사할 뿐, 그 실재 자체를 전달하거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말이 정보의 전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말 역시 상징으로써 말이 가리키는 여러 가지 감정이나 말로써 표현되는 실재들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별히 눈에 보이지 않거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대상은 말을 사용하여 그것을 지목함으로 인식할 수 있다. 또 말을 잘 구사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여 사고나 신념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을 사용하여 그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언어의 마술사란 그렇게 많지 않다.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주로 이용되는 말은 인간의 여러 감각과 인지 기능 중에 이성의 작용과 크게 관련되어 있어 많은 경우 말을 사용하는 정보의 전달은 이성적인 이해로 그치게 된다. 이성적인 동물로써 인간 활동은 언제나 이성적인 이해를 기본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성정인 이해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제는 이성적인 이해보다는 전인적인 경험을 더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특별히 생각과 가치관과 태도와 관습을 바꾸어 새롭게 살도록 하는 복음 사역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이렇게 주제가 이성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경험을 요구하는 것일 때 말의 역할이 으뜸가는 역할을 차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말로써 듣기만 하는 것으로 복음의 실재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말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사용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말로만 복음을 설교하게 될 경우 복음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성적인 이해의 산물로 취급당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말만을 사용하여 이성에 호소하는 복음 전달의 문제점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고 듣는 것으로 마치 그 내용을 자신의 삶에 구현한 것처럼 생각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말이 지닌 이런 기만적인 요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들 바로 야고보서의 저자이다. 그는 말로만 복음이 전해지고 듣는 것으로 끝나고 복음을 생활화하는 노력이 결여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말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온 몸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체득하게 되는 복음의 진리를 말로 듣기만 할 때, 인간의 이성은 들고 이해한 것으로 마치 온몸으로 체득한 것처럼 믿게 된다. 그리하여 머리로만 이해한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의 삶 속에 구현하여 자신의 것이 된 것인 양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듣기만 하여 머리로 이해하게 될 때 일어나는 속이는 현상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말로써 선포하는 것으로 인간의 온전한 구원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인간이 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렇게 인간이 된 사건이 바로 복음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은 바로 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말로써 아니라 말보다 더 중요하고 힘이 있는 삶 그 자체가 됨으로 자신에 대한 온전한 계시와 인간을 위한 구원 경영을 이루게 되었다. 하나님조차도 말로써 안된다는 것을 알고 온몸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마땅히 우리도 말의 한계를 깨달아 적절한 방법으로 말을 사용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온전한 복음화를 위하여 말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4. 효과적인 설교를 위하여
복음 선포에 있어서 말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나 여전히 말은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설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말이란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지나치게 되면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 아무리 효과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너무 많이 자주 말을 하게 되면 더 말의 위력을 잃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서 주석적인 설교를 듣기 위해 개혁자들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들던 개혁시대의 상황과 그 이후 개신교회의 설교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17, 18세기의 상황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개혁자들의 설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전무하였다고 할 정도로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이 그 첫 번째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자들이 회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를 했을 때 청중들의 반응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시대 이후에는 처음으로 청중들은 자신들의 말로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혁자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청중들이 몰려들게 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 설교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개혁시대의 상황과는 아주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있다. 발달한 매스미디어와 서적의 범람으로 오늘날 우리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리기는커녕 너무나 많은 설교를 접하고 있어 웬만한 설교로써는 만족을 하지 않게 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우리의 상황은 말씀이 없어서 굶주렸던 개혁 시대와는 정반대로 말씀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복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말씀을 듣지 못해 풍요 속의 빈곤을 겪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설교를 너무 많이 듣기 때문인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라도 많은 설교를 하게 되면 자연히 그 효과가 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설교의 전성시대가 가능했던 또 다른 요인은 개혁자들의 청중들과 17, 18세기의 청중들에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대중들이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육이 그리 왕성하지 못했으며 신문이나 그 밖의 대중 매체들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들은 그 지역 제일 가는 지식인이었는데 대중들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만 들은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설교자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지식들을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발달한 대중매체는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느 분야든 간에 그 분야의 전문가의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여 지식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인들은 각 분야에서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양의 최신 정보를 전해들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즉 강단은 더 이상 지식적인 욕구를 총족시켜주는 장소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영화, 음악회와 각종 오락 프로그램들은 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감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웬만한 설교로써는 교인들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히려 설교자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곧 예배와 설교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현대적인 상황은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와 설교는 다른 어느 곳에서는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의 본연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하고 바로 그것은 진정한 복음의 축하를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지켜져야 할 것이 설교를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일 예배에서 한 번만 정식 설교의 형태로 설교를 하고 다른 예배에서는 다른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에서는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새벽 기도의 정신과 진행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초대교회의 일과 기도에 대한 역사적 연구: 새벽기도의 역사적 모형을 찾아서" 신학과 사회. 제9집. 1995년을 참조할 것). 주일 오후 예배는 찬양 예배로 대체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부교역자에게 맡길 필요가 있으며, 수요 모임은 철저히 성서 연구 모임으로 이끌어 갈 필요가 있다. 또 설교를 아껴야한다는 것은 설교를 절대로 길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목회자의 설교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짧게는 15분에서 길어서 25분을 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귀한 것은 귀하게 아껴서 사용할 때 그것은 귀한 것으로 받아드려지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 다음으로 고려되어야 할 점은 설교의 방법이다. 설교가 단순한 복음의 내용 전달이나 혹은 성서 말씀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선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역사를 새롭게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설교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그런 효과를 내는 것으로 선포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적당한 설교 방식은 이야기체식 설교가 될 것이다. 말로 하는 것 중에 청중들을 끌어 들여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바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체식의 설교란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기본 구조인 기(초기적 문제발단), 승(문제의 심화), 전(극적인 전환), 결(대단원) 혹은 설정된 상황과 문제 발단, 해결을 위한 탐구, 해결, 새로운 상황의 구조를 지닌 설교 양식을 의미한다.
맺는 말: 설교 사역 갱신을 위한 실천적 방안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버린 현 개신교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예배와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에 대한 철저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야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를 중심으로 예배와 목회 사역을 해야 하는 설교자들이 설교의 갱신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으로 제안하는 것이 설교 클리닉이다. 이 설교 클리닉은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여럿이 그룹을 만들어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며 전문가를 초대해서 클리닉을 받게 되면 가장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지만 노력만큼 설교 사역의 발전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것은 방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설교 클리닉은 각자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구체적인 처방을 내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역량과 목회적인 상황들이 고려되는 가장 이상적인 설교 갱신을 위한 방법이 될 것이다. 설교 클리닉을 통하여 설교자의 현장 설교와 연관된 모든 것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교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틀림없이 많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여 열매맺는 사역이 될 것이다.
첫댓글 뭔 설교라는걸 특권이요 의무처럼 주절주절...
예수님이 가르치지도 않고, 시키지도 아니한 멋대로의 예식을 마치 진리의 실천인양 '예배'라고 주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예배당 행사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네요.
무슨 박사나 신학 교수가 쓴 긴 글은 끝부분만 읽으시면 됩니다.
설교라는건 결국 성직자인 목사들 그들만의 리그죠. 성경에서는 설교라는게 없죠, 선포만 있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