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
양구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주말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청평사를 품고 있는 오봉산을 찾았습니다. 나 홀로 산행!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아무도 없는 텅 빈 산을 홀로 걸었습니다. 혼자 걷는 산행은 태초의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두 시간을 걸어 정상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한 무리 등산객을 만났습니다. 산이라는 공간은 모르는 사람과의 간격을 금방 좁혀주는 신비한 매력이 있습니다. 통성명하는데 한 분이 양구 백자박물관 관장님이라고 하더군요. 족보를 캐 보니 내가 담임하고 있는 학생의 학부모였습니다.
손에 명함을 꼭 쥐여 주면서 백자박물관에 들러달라 하시더군요. 장마가 걷힌 유월 말 친한 선생님과 함께 백자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양구에는 흰 백자를 만드는 질 좋은 백토가 매장되어 있어 고려 때부터 백자 생산지로 사용되었는데 멋진 백자에 비하여 그리 유명해지지는 못한 곳이기도 하지요.
초벌구이의 반제품에 그림을 그려 재벌구이하여 완성되는 작품 중에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계영배가 그것인데요.
계영배(戒盈杯)는 잔에 7부 이상 술을 부으면 술이 밑으로 새어버리는 술잔입니다. 과음을 경계하라는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요. 서툰 솜씨로 그림을 그리고 호인 청사(靑蓑)라고 쓰고 나서야 박물관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찾은 계영배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한 "공이 이루어지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다"라는 말처럼 단순한 술잔이라기보다 과욕을 부리려는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삶의 좋은 지침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재미있는 술잔이 있습니다. 일단 노털카 잔이라고 해서 술잔의 아래가 빗살무늬토기처럼 뾰족하여 아무리 균형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식탁에 절대로 세울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술잔이지요. 그러니 잡고 있거나 마시거나, 둘 중 하나밖에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또 술잔의 아랫부분에 구멍을 뚫어 놓은 술잔이 있습니다. 식탁에 놓을 수는 있겠으나 손을 떼는 순간 술이 술술 새어 나와서 식탁을 어지럽히고 귀중한 술이 새어나가니 노털카 잔 중 하나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술잔은 계영배 외에 겸손의 술잔이 있습니다. 겸손의 술잔은 아랫부분에 사이를 두고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어서 양손의 엄지를 이용하여 구멍을 막지 않으면 술을 받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지요. 그러니 아주 겸손하게 술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술을 좋아했던 조상 중에는 정철이라는 유명한 분이 계셨지요. 그는 술과 함께 문학을 영위한 사람입니다. 특히 그의 장진주사는 침으로 유명하지요.
정철은 청렴하고 똑똑하였지만, 지독한 음주 습관 때문에 관료 사회에서 내내 손가락질받았습니다. 대낮에도 만취한 탓에 사모가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임금이 불러도 술이 깨지 않아 등청하지 못한 적도 있었지요.
참다못한 선조는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철은 술에 취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선조가 그의 집을 방문해 보니 술잔을 두들겨 바가지만큼 크게 늘려서 그것으로 한잔을 마셨던 것이지요.
그의 장진주사 일부를 싣습니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수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 메고 가나 오색실 화려한 휘장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풀, 속새 풀,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회오리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제 뉘우친 들 어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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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복> 님의 글입니다. 私的인 내용도 있지만, 그대로 옮겼습니다.
술좌석 弄으로 죽는게(死亡) 별거 아니라고, 四忘이면 死亡이라 하며 낄낄대곤 했죠. 술 끊으면 一忘, 담배 끊으면 二忘, 色 끊으면 三忘, 숨 끊으면 四忘, 즉 死亡이라고.....
정운복 님은 아직 술은 안 끊은가 봅니다.
작년 5월 1일에 담배를 손에서 놓았으니, 1년은 넘었습니다. 아직 담배 냄새에 유혹을 느끼긴 합니다만, 버텨봐야죠. 계영배를 갖고 싶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젠 그도 강 건너간 이야기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아주 친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소주 한 잔으로 족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