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망하지 않을까
朴籌丙
두루 아는 얘기지만 『논어』에는 이런 대문이 나온다. 장저와 걸익이 짝이 되어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가 어딘지 묻게 하였다.
장저한테 물었다. 장저가 말했다.
“저 마차에서 고삐를 잡고 있는 자는 누구요?”
자로가 대답했다.
“공구라는 분입니다.”
“바로 노나라 공구신가요?”
“고렇소.”
장저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나루터를 알 거요.”
이번에는 걸익한테 물었다. 걸익이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오?”
“중유라 합니다.”
“노나라 공구의 제자 말이요?”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은 말했다.
“도도히 흘러 막을 길 없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라 천하가 다 그러하거늘, 대체 누가 이 천하를 바로잡는다는 건가? 당신도 사람을 피하는 스승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버리고 사는 우리를 따르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말하면서 뿌린 씨에 흙덮기를 쉬지 않았다. 자로는 돌아와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자는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
“새나 짐승과 더불어 무리 지을 수는 없으니 내가 이 사람들의 무리와 더불어 행하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행하겠느냐? 천하에 질서가 잡혀 있다면 나도 애써 변혁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鳥獸 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 與 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묻는 말엔 답을 않고 비비꼬기만 하는 장저와 걸익. 그들은 필시 노장의 후예일 터이지만 예나 이제나 장저와 걸익 같은 사람은 있는 법이다. 세상을 은둔하고 제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지금으로 치면 사회의 양극화에 냉소를 보이는 사람들이 그 한 예라 할까.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기업인과 근로자,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촌…, 그 간격은 아득히 멀고 중간층은 너무 엷다.
준봉(遵奉)과 참여(參與),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로 금을 긋고 내 사람과 네 사람으로 편을 가르는, 밴댕이 소갈머리가 판을 치는 정치정향(政治定向)에서는 양극화의 심화는 진즉에 예견되어 있었다.
장저와 걸익은, 통 속에서 산다든가 개처럼 살지는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서양으로 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와 같은 견유학파(키니코스학파)의 사람들과 닮은 데가 있는 사람들이다. 무욕을 표방하고 세상을 백안시했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냉소주의는 정치적 무관심이 체질화된 상태라 할까. 적어도 중간층이 되었어야 할 사람들인지도 모를 이러한 사람들이 자꾸 불어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새나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으니 장저며 걸익과 같은 무리들과도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데에도 나타나 있듯이, 공자가 피한 사람은 서민이 아니었다. 무도한 권력자일 뿐이었다. 장저며 걸익과 같은 무리들까지 포용하는 사람이라면, 나루를 못 찾으면 맨몸으로라도 장저며 걸익과 더불어 물을 건너려 할 게다. 멀리 소외를 두겠는가? 가까이 붕비(朋比)를 짓겠는가?
1951년 중학교 때 내 자전거가 삼대독자인, 초등학교 아이의 코뼈를 부러뜨렸다. 치료비는 5원, 하늘이 노랬다. 그때그때 돈을 타 쓰는 내 주머니에 그만한 돈이 있었겠는가. 병원과 약속한 날짜를 훨씬 넘겼다. 병원 앞을 에둘러 다녔다. 아버지가 나의 얼굴빛을 살피시며 “무슨 근심이 있나?”라고 하셨다. 나는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고등학교 때 영한사전이 하도 조잡해서 옆 자리 벗에게 부탁해서 일본의 영어사전을 구했다. 책값에 졸려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약속한 날짜를 두어 번 어겼다. 벗은 짜증을 냈다. 아버지가 나의 얼굴빛을 살피시며 “무슨 근심이 있나?”라고 하셨다. 나는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정치인의 얄미운 구문(口吻)이 하나 있다. 입만 열면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단다. 그들은 유치원부터 새로 다녀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라보겠다.”는 말은 “바라봐 달라.”는 말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어린이도 다 아는 이 두 가지 말을 그들은 구분할 줄 모른다. 바라봐 달라는 말은 아예 할 줄도 모른다.
헌법질서로 본다면 대통령도 정치인도 관료도 모두 국민의 종이다. 말은 그리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다. 종이라면 더욱 국민의 얼굴빛을 잘 살펴야 한다. 코뼈를 부러뜨리고 수심에 잠긴 얼굴, 책값이 없어서 우울한 얼굴, 그런 얼굴을 잘 살펴야 한다. 와락 눈물이 쏟아지게 해야 한다. 잘 살펴야 할 자들이 잘 살펴 달라고만 한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말은 자기만 바라 봐 달라는 소리가 아닌가. 선거 때 자기를 찍어달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사일구 혁명의 도화선이 된 선거가 삼일오 정부통령선거였다. 그때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고 이에 맞서는 여당인 자유당의 선거구호는 “갈아 봐도 별 수 없다.”였다. 못 살겠단 그 소리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들어 봤다. 별수 없단 그 소리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겪어 봤다.
상어가 물을 잃었다. 땅강아지와 개미한테 시달렸다. 원숭이가 나무를 잃었다. 여우와 담비한테 잡히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면 좋을까? 땅강아지와 개미한테 시달리지 않고 담비와 여우에게도 잡히지 않은 대통령을 만나면 좋겠다. 땅강아지와 개미 같은 것에 시달려도 좋다. 땅강아지와 개미를 밟아 죽이는 대통령보다는 좋다. 담비와 여우한테 잡혀도 좋다. 담비와 여우를 잡아 죽이는 대통령보다는 좋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면 좋을까? ‘아마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아마도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숟가락을 들고도 측간에 앉아서도 오직, 그 생각 하나만 하는 대통령이면 좋겠다. 그런 대통령이라면, 상어가 물을 잃을 일도 원숭이가 나무를 잃을 일도, 땅강아지와 개미를 밟아죽일 일도 담비와 여우를 잡아 죽일 일도 없다.
아마도 망하지 않을까? 아마도 망하지 않을까? 자신도, 가정도, 나라도 모두 이 마음 하나가 붙들어 준다. 아마도 천하가 망하지 않을까? 아마도 천하가 망하지 않을까? 공자는 늘 그런 근심을 떨칠 수가 없어 수레를 타고 천하를 유주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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