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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초심(首丘初心) 김 문 희 은(殷)나라 말기의 사람이었던 강태공은 위수 강가에 사냥 나왔던 창(昌)이라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은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공로로 영구(營丘)라는 곳에 봉(封)해졌다가 그곳에서 죽었지만, 그를 포함하여 5대 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나라 천자의 땅으로 와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를 두고 후세 사람들은 “음악(音樂)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바를 즐기고, 예(禮)란 근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향하는 것은 인(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수구초심(首丘初心)입니다. 여우는 죽을 때 자기가 살던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근본을 잊지 않거나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릅니다.
나는 전라북도 익산시에 소재한 ‘함라’에서 초등학교 2학년부터 6학년 5월 15일까지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교감이셨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초등학교만 3군데를 전전하였습니다. 함라는 함라산을 중심으로 ‘3 부잣집’과 돌담길이 있는 양반 길, 야생 녹차밭 명상 길, 고분 전시관이 있는 역사 길, 수려한 경관이 펼쳐진 병풍 길, 천년 고도 사찰인 숭림사와 함께 하는 건강 길 등, 총 13.8km의 둘레길이 새롭게 단장되어 잊혀졌던 역사의 숨결을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용모정>에서부터 동네를 가로지르는 시냇물은 물이 많고 맑아서 나의 주된 놀이터였습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집안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려 온갖 나물을 캐다가 씻던 곳이 그 시냇가였고 빨랫감만 있어도 안고 달려가는 곳이 그곳이었으며 밤이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이들과 어울려 옷을 홀랑홀랑 벗어부치고 목욕하던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함라는 예부터 양반들의 동네로서 일제시대 호남선 철도를 준설할 당시, 강경, 용안, 이곳 함라를 거쳐 군산으로 향할 계획이었으나 이곳 양반들이 ‘철마(鐵馬)란 본래 검은 것이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쌍것이니 양반 동네를 통과할 수 없다’고 반대를 거듭하여 어쩔 수 없이 함열, 익산으로 철길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현대와는 거리를 두고 오랫동안 교통의 불편을 겪는 지역이었습니다. 근래에 군산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로가 개통되어 이전보다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3 부잣집’은 조해영 가옥(趙海英 家屋.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21호), 김안균 가옥(지방 민속자료 제 23호), 이배원 가옥(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을 일컫습니다. 세 집안은 한결같이 재산을 가난한 사람이나 이곳을 지나는 사람에게 나누는 선행을 베풀어서 ‘인심은 함라’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4월. <함라(咸羅) 초등학교> 제59회 동창회에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웠던 친구들, 생면부지로 다가오는 친구들, 환골탈태해서 알아 볼 수 없게 변해버린 친구들, 시골에서 농사하는 친구들, 객지에서 자신의 뿌리를 새롭게 내린 친구들, 이미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서 하얗게 센 머리에 훤히 벗어진 이마를 드러낸 친구들…. 끝도 없이 묵은 옛날의 기억을 반추하며 깔깔대고 눈물 흘리고 또다시 수다를 이어가기에 배가 고플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준순’이는 당시 귀여우면서도 예쁘고 참 강한 아이였습니다. 특히 공치기며 공기돌 놀이, 고무줄 넘기 등에서 누구에게도 결코 지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한다면 승부욕이 강했다고나 할까요? 마치 선머슴처럼 젖 먹던 힘을 다 하면서 기어이 이기고야 마는 아이로 기억됩니다.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신기할 정도로 지치지 않는 승부사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새롭게 얻은 것도 많지만 소중한 것을 잊은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유독 ‘함라’를 떠올리는 기회라도 있으면 유독 그 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가장 보고 싶었던 친구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 애는 우리 초등학교와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살았더군요. 그러다보니 중학교는 엄마의 강력한 권유로 대다수의 동창들이 진학했던 곳이 아닌, 집 근처의 아주 작은 중학교에 진학했답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연락마저 두절된 까닭이었습니다. 그 학교는 지금은 폐교되고 말았답니다. 그랬던 그 애에게도 세월은 어쩔 수 없었는지 이제는 보기 좋고 마음씨 넉넉한 아주머니로 곁에 와 있었습니다.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모두가 경찰 공무원이더군요. 참 곱게 나이 든 서울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함라의 아련한 추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점순’이는 작지만 무척 당찬 친구 중 하나였습니다. 4학년 때 어느 곳에선가 전학 왔었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공부도 잘하였습니다. 얌전해서 눈에 잘 띄지 않은 친구로 기억합니다. 소재지에서 꽤 먼 거리에 떨어진 그의 집인 ‘숭림사’까지 산 하나를 넘어서 걸어갔다가 자고 먹으며 보냈던 시간들이 내겐 늘 그리운 과거 여행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1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를 어린 나이에 산도 넘고 굽은 길도 걸으며 길가에 펼쳐진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온통 마음과 눈길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더욱 지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애의 눈에는 나를 미래의 식물학자거나 예술가를 점쳤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눈에 비친 그 애는 주어진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미래를 펼치는 당돌하고 똑똑한 아이였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애의 집을 방문하고 하루 저녁 신세를 졌던 친구가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놀라웠습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말은 없지만 사회성과 함께 리더십이 강했던가 봅니다. 그 애를 떠올리면 언제나 삭아버린 새끼줄에 얽힌 이야기들이 기억 저편에 닿을 듯 말 듯한 깊은 추억으로 나를 이끌곤 하였습니다. 중앙 부처에 근무하는 고위직 공무원으로 다가온 그를 보며 가슴이 후련하였습니다. ‘역시….’라는 단어는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인가 봅니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 애는 내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속삭였습니다. “함라의 옛 기억에 대해 거품을 물고 예찬하는 네가 부럽고 고맙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태어난 곳도 아니고 오랫동안 살아온 곳도 아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마지막 버스표까지 사서 건네주며 기쁜 마음으로 재회를 약속하는 손길에서 어린 시절을 어른이 되어 확인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5월. 서울 지역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여학생 동창들만의 모임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나는 졸업을 하지 못하고 전학을 했기 때문에 정식 회원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배려로 입회비도 내고 내 생애 처음으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금옥’이는 얼굴이 잘 생겼으면서도 키가 크고 씩씩한 아이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 웃고 항상 밝은 얼굴은 그 애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선생님들께도 귀여움을 많이 받아서 부러움을 받는 아이였습니다. 키가 유난히 컸던 그 애는 주로 뒷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키가 작았던 나와는 가까이 할 기회가 드물었던 것이 섭섭했습니다. 거의 50여년 만에 만나서 그와의 그리웠던 실타래를 풀어가는 동안 어린 시절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남매들 사이에서 유독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년 시절은 딸의 희생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또래 여류 소설가인 신경숙이나 공지영, 양귀자 등도 자신들의 체험을 담은 자전적 작품에서 많이 실토하기도 합니다. 꼭 그와 같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시대의 아프고도 장한 친구였습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친정 엄마 덕에 강한 살림꾼으로 성장할 수 있었어. 직장 생활하는 나를 대신해서 자식 셋을 올곧게 키워 준 엄마가 오히려 고맙더라”라고 되뇌이며 가만히 목소리를 떨었습니다. 그 애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아줌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서울의 한 초등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며 이 시대의 애국자로서 체구도 당당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가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8월. 석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정기 모임을 위해 강남 ‘신사역’으로 갔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절반이 서울․경기 지역에 둥지를 틀고 그 중에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동네입니다. 촌사람이 고속버스 타고 지하철로 옮겨서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복희’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마음이 여려서 어떤 부탁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애를 좋아하지 않은 남학생이 없을 정도로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특히나 좋아했던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그 남학생이 복희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마음이 여렸던 복희는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발만 동동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동네에서 꽤 유복한 집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5학년 때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여러 친구들이 함께 가서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작은 가슴에 차마 담지 못한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아픔을 이기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는 점순, 선주와 함께 당당하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그의 보이지 않는 용기에 가만히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후 세무공원이 되고 같은 직장의 낭군을 만나서 남매를 두었더군요. 강남의 한 가운데에서 강남의 사모님으로 뿌리를 곧게 내리고 살아가는 친구가 보기 좋았습니다. 여전히 어릴 때 모습을 잃지 않고 수줍게 웃음을 머금은 그가 문득 “나는 참말로 함라에 가서는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걷기가 취미라는 복희…. 오늘 모임에도 빌딩 숲을 헤치며 매연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왔다던 친구. 비록 거부할지라도 그의 보이지 않는 내면에는 함라의 강인함이 깊이 박혀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 살지는 않을지라도 그와 함께 ‘함라산 둘레길’을 걸으며 빨간 황토밭에서 고구마 줄기를 뽑아내듯이 아직도 미처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안주 삼아 수다를 떨고 싶습니다.
나는 제대로 된 고향이 없습니다. 어찌하다보니 아버지의 근무지를 전전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던 부평초였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함라’는 어린 시절의 친구와 더불어 추억의 고리를 엮으며 재미와 고뇌를 나누고 자연을 벗삼아 미래를 꿈꾸던 둥지였습니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 없는 미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순탄하고 곧게 뻗은 길보다는 종종 가시덤불도 있고 구부러진 곳도 있어야 걸을 마음이 생겨납니다. 50 중반에 서서 지나온 삶을 돌아봅니다. 곧고 반듯한 아스팔트 ‘숭림사 길’보다는 한없이 멀고 흙먼지 풀풀 풍기던 그 길이 그립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산딸기 따고 아카시아 잎사귀 훑으며 ‘가위 바위 보 게임’도 하면서 추억을 먹고 사는 ‘지천명’이고 싶습니다. 이 가을에는 곱게 단풍 드리워진 함라산 둘레길을 소꿉동무들과 거닐고 싶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기쁜 추억은 더욱 들추고 아팠던 기억은 오늘을 잊게 해 주었음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3부자가 아닌 ‘동창 부자’로 이웃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먼 훗날 이 세상 마치고 하늘로 돌아갈 때는 함라산 언덕을 향해 머리를 돌리지 않을까요? 친구들과 함께….
가을입니다.
뒹구는 낙엽을 드려다봅니다. 함라국민학교 교정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리운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하나, 두울, 세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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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서부터한평생을 파란만장하게 사느라 소중한 친구들을 만이 잊고살았는대 친구글을보고 새삼옛추억이
되살아나는군 나라는존제를 기억조차 못하는이들이 많지만 그래도 동창모임에나가면 반갑고 즐거웠지반가웠다네
한편의 단편소설을 읽어 내려가듯이 구구절절이 아름답운 마음씨로 정서적으로 쓰여진 글에 심취하게 되는구만! 고향 이라는 단어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돌아갈 수 있다는 곳이 있기에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그런데 나와같이 자라고 숨쉬며 살아온 친구가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무엇인가 내가 있는 것을 주고싶고 나누고싶고 같이하고픈 아니 인생의 남은 길을 동행하고싶은 옛동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 우정의 길이겠는가! 부디 오래오래 간직하며 반추 하시길 바라면서...
좋아 하던 예쁜 여학생의 빛바랜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마음이었어.
짝사랑하던 연인의 속마음을 알고난 기분이랄까? 하여튼 김문희친구! 어린시절 문학소녀답게 친구들의 마음을 소설처럼 표현하였네... 우리죽마고우 친구들 이야기를 책에서 보는거같아 좋은데... 우리들모습도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문희친구의 아버지의 수필과 어머니의 수필을 읽고 눈물을 많이 흘렸었네--- 문희친구가 외동딸 이어서 다른사람이 부모생각하는 마음과 조금은 더 애닮을꺼라 생각해--- 나도 문희친구가 겪고 생각한것과 너무도 많이도 닮았어---나도 7남1녀외동딸이잖아---풍요속의 빈곤이랄까 부모님들 돌아가시고 가슴한켠이랄까 어디랄까 애리고 시리고 너무너무외롭고 남편,자식이 채워주시못하는 외로움이 자주 찾아오곤 하지----술잔기울이며, 맞있는 음식대접하며 부모님과 못다한말 효도하고 싶은것 하며 살고 싶지만 효도할 부모님은 안계십니다 ----
수구초심을 읽고 기분이 좋았네 나의어릴적기억을 해준것에 대해 고맙지요---또릿또릿한 목소리하며 야무지고 예쁘게 생긴자그마한 친구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친구가 책을 많이 읽은 지식인이라 표현하고 싶구려 내용에 지식이 많이 들어있고 글 하나하나가 또릿또릿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수 있는지 대견스럽네 친구 ---전화받고 1시간 퇴근미루고 글쓰고 퇴근합니다. 다음모임에 꼭 참석할께---
우린 언제 고향을 지키러 내려가지?
친구의 고향에 대한 추억의 메세지를 보니 나도 모르게 고향이 그리워지고 찾아가서 다시 느끼고 싶다
나이 50의 중반에서도 즐거움과 행복함이 넘치고 정감있는 고향을 그대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구만. 아름다운 추억을 품고 살아온 문희는 유년시절부터 참 행복한 삶을 살았구나 부럽기까지 해. 그 추억속에 나도 있다는게 반갑고 고마워. 친구는 교정에서 웅변과 노래로 당당하게 휩쓸던 모습이 선하고 어쩌면 그때부터 문학적인 소질이 다분했던것 같은데. 문희야 사물놀이와 장구의 흥에 취해 신명나게 사는것도 좋지만 이제라도 인생의 2막을 위하여 문인으로 등단을 도전해보는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딩 후 서울에서 고딩 그리고.....36년을 지내다 이곳 고향에 내려온지가 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