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일제시대의 대중스타 기생 이야기 4ㅡ2
2]화려한 연예인 스타의 선조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의 선조다. 재주와 끼도 많고 스캔들도 만들고, 대중 인기의 수명을 가졌다. 항상 안정된 삶을 위해 은퇴를 생각하고 멀티플레이어의 전형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한다. 레코드 가수로 성공하면 영화에 진출하고, 경성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면서도 사생활을 밝히기 싫어하며, 예뻐지기 위해 뭐든 하였다. 그 당시 잡지와 신문의 연예란은 그들을 봉건적인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의 대중스타로 대우해주었다.
이처럼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라디오의 음악방송에 주로 출연하고, 축음기의 음반을 취입하여 대중적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라선 이들도 있었다.
초창기 영화도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으며, 각종 전람회와 박람회에 흥을 돋우기 위한 예능의 기예도 각 권번의 기생들의 몫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특산품으로 기생을 출품하려고 한 당시의 상황만 하더라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자 철도회사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평양명기 앵금' '인천기생 초선'하는 식으로 주요 역 정거장 마당에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였다.
더 나아가 기차 칸칸마다 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오가면서 승객 유인에 한몫을 했다. 당시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제품광고 및 잡지, 행사 포스터의 표지 사진, 웨이브 파마 등도 기생들이 주축이었다.
평양명기 김옥란의 은단 광고 포스터 광고 모델의 이미지는 광고를 의뢰한 회사가 즉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인지도 면에서 비교적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제시대에 기생들은 그러한 면에서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회적 계층이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기생이 등장하는 신문광고는 거의 대부분이 미용과 관련된 제품이다.
일반적으로 샴푸, 비누, 화장품의 광고는 대부분 기생이 등장한다. 기생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전까지 아마도 이들은 지금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외양이 아름답고 가무에 소질이 있으며, 이들의 삶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는 곧바로 대중의 화젯거리가 되고 일반적 여성들에 비해 미용과 패션, 화장 등 미적인 면에서 월등히 시대를 앞서나가며 유행을 선도해 나간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은 지금의 여자연예인과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분명 조선의 일반 여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면을 부러워하고, 또 따라하고 싶었을 것이고 광고를 하는 회사들은 바로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초창기의 인쇄광고는 사진을 쓰지 않았으며, 1920~1930년대는 광고에 모델을 등장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들이 광고하는 제품을 통해 당시 일반 대중이 받아들였던 기생의 이미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생을 모델로 한 광고의 형태나 그 소구방식은 놀랄 정도로 현재와 흡사하다. 많은 여자연예인 중에서도 정확히 그 제품의 이미지와 맞는 인물을 찾아내 돈을 더 주고서라도 광고 모델로 지목하는 지금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얼짱 기생' 장연홍은 최고의 광고 모델로 손색이 없었다. 아름답고 복스런 웃음을 가진 인기 최고의 화초기생이었던 그녀의 이미지는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의 비누와 신제품 화장수에 잘 들어맞았다.
장연홍의 사진과 함께 써있는 "한 번 두 번에 살 거친 것, 벌어진 것, 주름살은 꿈같이 없어지고 백분이 누구의 살에도 잘 맞도록 화장이 눈이 부시게 해 줍니다. 이렇게 여천으로 만들어낸 화장미는 당신을 훨씬 젊게 만듭니다"라는 다소 허무맹랑하고 직설적인 광고 문구는 마치 깨끗하고 선하며 순수한 이미지를 가진 그녀가 직접 귀에다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함으로서 그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미활비누'는 장연홍뿐만 아니라 김영월, 김화중선 같은 다른 인기있는 기생들을 포함한 여러 모델들을 두었다. 또한, 그 모델들의 사진 옆에는 "나의 애용하는 (중략) 미활비누"라는, 광고 모델 기생이 직접 이용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문구를 주로 적어놓았다. 이것은 분명 기생들의 순백의 피부가 당대 여성들에게 부러움을 샀었고, 그 아름다움이 모두에게 인정될 만큼 매우 빼어났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장연홍의 '미활비누' 광고 김영월의 미활비누 광고 기생들의 빼어난 얼굴뿐 아니라 비단결 같은 머릿결도 광고의 소재로 빠짐없이 이용되었다. 노은홍을 모델로 등장시킨 '화왕샴푸' 광고는 그녀의 미발 비결을 화왕샴푸라고 소개하고 "일주일 화왕샴푸로 세발하면 기분을 명랑케 하고 발륜을 빛나게 합니다"라는 경쾌한 문구를 적어놓았다.
이렇게 개화의 물결이 넘친 1920년대 또는 1930년대에 여인들이 사용한 향장품은 동백기름, 백분, 연지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 가운데서도 머릿기름으로 가장 많이 썼던 동백기름은 여인들의 필수품으로 윤택하고 건조가 잘 안되어 머리를 길게 땋거나 쪽지는 데 긴요했고 후에 상표를 달고 샴푸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몇 안 되는 미용 관련 상품의 신문광고에는 당대 인기 있던 기생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고 주로 얼굴을 강조하는 상반신 사진이나 클로즈업 사진을 사용하였다. 복장은 한복으로, 머리의 모양은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강조하는 샴푸의 광고에서도 쪽지게 가르마를 탄 한 갈래 묶음머리를 벗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본 화왕삼푸 광고를 한 평양기생 노은홍(「동아일보」 1935.8.14. 광고)
당시의 권번 기생들은 현재의 연예인처럼 방송, 음악, 영화, 광고, 행사 도우미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번은 지금의 연예기획사나 매니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권번 기생은 당국의 '기생영업인가증'을 받아야 했는데, 오늘날 '개인사업자등록증'처럼 생각할 수 있다.
웃음과 기예를 팔던 기생을 대신하여 권번이 화대를 받아주고 이를 7 : 3의 배분으로 나누어 가진 상황이 요즈음 연예인들과 얼마나 흡사한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미술대학에서 동양화, 서양화의 모델도 권번의 기생에서 찾기가 쉬웠다.
이당 김은호 선생이 1939년 남원 광한루에 있는 춘향사당에 모실 춘향의 초상을 그릴 때도 조선 권번에 나가던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요릿집에 불려가는 기생의 전용물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인력거. 택시가 갈 수 없는 골목길도 다닐 수 있고, 도심의 웬만한 거리는 택시보다 요금이 저렴했기 때문에 인력거는 계속 이용되었다.
하지만 전차보다 속도도 느리고 한 사람밖에 탈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구시대 유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인력거를 타면 휘장을 내리고 타지만, 기생들은 자신을 선전하고 과시하는 목적으로 휘장을 치지 않고 다녔다.
인력거꾼들은 기생들을 요릿집으로 나르면서 그들의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의 딸들을 키워 동기(童妓)로 입적을 시키는 일도 많았다. |
첫댓글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의 선조다."
첫 문장에 올려주신 글이 답인것 같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