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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룻 4:9-22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 4:9-22 / 그러자 보아스가 마을 웃어른들과 거기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소유였던 모든 것을 내가 나오미에게서 산 일에 대해 오늘 이 자리에 모여 계신 여러분들께서 증인이 되셨습니다. 10) 또한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나의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제 아이를 낳아 고인의 소유지에 그의 이름이 길이 이어지도록 하겠고 그의 이름이 고인의 동기들과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께서는 증인이십니다.' 11) 성문 위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과 웃어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 집안으로 들어가는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켜 세운 두 여인 라헬과 레아 같게 하시기를 빕니다. 또 여호와께서 그대를 에브랏에서 유력한 인물이 되게 하시고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빕니다. 12) 또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인을 통하여 그대에게 대를 물려받을 아이를 주시어 그대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낳은 베레스의 집안처럼 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13) 이렇게 하여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그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여인의 몸에 새 생명을 허락하셔서 그가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마을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그분께서 오늘 당신 집안의 대가 끊기지 않게 아들을 주셨군요. 이 아이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 이제 이 아이가 당신에게 살맛 나게 해주겠군요. 늘그막에 당신을 잘 모시겠지요. 이 아이는 일곱 아들보다도 더 당신을 극진히 모시던 당신 며느리가 낳은 아들이니까요.' 16) 나오미가 아이를 넘겨 받아 품에 안고 고이 길렀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어' 하며 그 아이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18) [다윗의 족보] 베레스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권한을 포기한 친족을 대신하여 권한을 얻은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고 룻과 결혼을 합니다.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9-10) 기업 무를 자의 행할 일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친족인 가문의 재산을 사와서 그 가문을 다시 세워주는 것과 후손 없이 죽은 자의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혈통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큰 뜻을 세워가는 사람입니다. 보아스의 올바른 선택에 장로들과 백성들이 증인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11-12)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 내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나안 출신이었지만 놀라운 신앙으로 선민 대열에 참여케 된 기생 라합의 후손이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또한 모압 여인이지만 시모를 떠나지 않고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16)하는 룻의 신앙적 결단과 시모에 대한 헌신적 행위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신앙적 선택에 증인된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상속자를 주시기를 원하는 축복을 빌어줍니다.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13-22)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저주 받은 나라이기에 모압 여인인 룻을 아내로 맞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모압 여인인 룻 또한 자신의 나라와 섬기던 신 그모스를 버리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하나님의 뜻에 인도되어 어려운 결단을 하였고 룻 또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통하여 그의 가문이 끊기지 않게 하였으며 그에게 가문의 모든 재산이 돌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시모인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가 되었고 봉양자가 되어 그녀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습니다.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보아스와 룻의 뜻, 헌신은 성군 다윗을 세우는 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온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뜻이 세워진다면 보아스와 룻과 같이 당신의 귀한 것들을 버릴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버림은 헛되지 않고 더 큰 복으로 전환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가 유발됩니다. 목적은 열정을 낳고, 뚜렷한 목적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목적이 없으면 열정은 소실됩니다. 버나드 쇼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삶의 진정한 기쁨이다. 위대한 목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유산을 만드는 데 인생을 보냅니다. 그들은 죽은 후에 기억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입니다.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작은 충절, 큰 은혜
룻 4장 7~17절 / 이수영목사
룻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의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과 위로와 희망은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룻기 전체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겠습니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유다 베들레헴의 엘리멜렉이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 중 하나가 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압에서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두 아들도 다 죽고 여인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다 땅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는 두 며느리에게 각기 그들의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하며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두 며느리는 소리를 높여 울며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새로 남편을 얻고 아들도 낳아 행복하게들 살지 않으면 그들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플 것이라며 단호히 만류했습니다. 그래서 한 며느리는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디든지 시어머니를 따라 가서 모시고 함께 살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한 말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룻의 이 굳은 결심을 확인한 나오미는 할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룻은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추수하는 밭에 나가서 추수하다 떨어지는 이삭을 줍기로 했습니다(룻2:2). 레19:9-10에 보면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고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은 공교롭게도 시아버지였던 엘리멜렉의 친족 중 보아스라 하는 사람의 밭이었습니다(룻2:3). 보아스는 부호이면서도(룻2:1)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처음 보는 여자가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추수감독관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룻2:5). 추수감독관으로부터 룻에 관한 답변(룻2:6-7)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말하기를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며 친절과 호의를 베풀고(룻2:8-9) 축복까지 해주었으며(룻2:12), 식사할 때에는 자기와 함께 먹게 하고 풍족히 먹을 것을 주었으며(룻2:14), 추수하는 자들에게 룻이 이삭을 주울 때에는 책망하지 말 것은 물론이고 그녀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일부러 떨어뜨려서 그녀가 주울 것이 많게 하라고 미리 명령하기도 했습니다(룻2:15-16). 보아스는 룻이 남편을 잃은 후로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효도와 시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낯선 백성에게로 온 일에 관해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룻2:11).
룻은 밭에서 주운 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다 먹지 않고 남겨 온 것을 시어머니에게 드리며 오늘 자기에게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이 보아스라는 말씀도 드리고 그 날 그가 자기에게 해준 바를 소상히 보고했습니다(룻2:17-19, 21). 그 말을 들은 나오미는 룻에게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룻2:20) 했습니다. 레25:2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시기를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라"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옛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친족 소유의 땅은 항상 그 친족의 소유로 남아있어야 했으며, 친족 중 어떤 사람이 생활이 어려워져서 자기의 땅을 팔아야 할 때에는 같은 친족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땅을 다시 삼으로써 그 땅이 계속해서 한 친족의 소유로 남게 할 의무를 갖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그 의무를 갖는 사람을 가리켜서 "기업을 무를 자"라고 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로 하여금 자기의 기업을 무르게 하고는 착하고 가여운 며느리 룻의 남편이 되게 하여 그녀에게 안식과 행복을 안겨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룻3:1). 그래서 어느날 룻에게 이르기를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보아스의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가 먹고 마시기를 다 한 후 누울 때에 그가 눕는 곳에 들어가 그의 발치에 누워 그의 반응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3:2-4). 착하고 순종적인 룻은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했습니다(3:5-6). 보아스는 밤중에 자다가 자기 발치에 누가 누워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 일어나 룻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룻은 대답하기를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했습니다(3:7-9). 그런데 이에 대한 보아스의 반응이 너무나 감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3:10-13)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날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를 자로서 자기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를 불러 앉히고 그 성읍의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증인으로 삼아 그들 앞에서 그에게 말하기를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4:1-4). 그러자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를 그 1순위의 사람이 무르겠다고 대답했고, 이에 보아스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4:4-5). 무슨 말인가 하면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르는 책임 속에는 나오미가 팔려고 하는 땅을 사는 일뿐 아니라 그 일가의 과부인 모압 여자 룻의 남편이 되어 그녀의 전 남편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아들을 낳게 해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자가 자기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도 그 아들은 자기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전 남편의 아들이 되어 그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그 사들인 땅이 전부 기업 무르는 자의 것으로 남지만 아들이 태어날 경우 그 땅은 모두 그 여자의 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업 무를 자는 땅을 사고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업 무를 자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대답하기를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했습니다(4:6).
나오미 일가의 기업을 무를 권리와 의무에 있어서 1순위에 있던 사람이 그 권리와 의무를 포기해줄 것을 내심 바라고 있던 보아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권리와 의무를 인수했습니다. 오늘 본문 7-12절이 보여주는 대로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관행에 따라 장로들과 모든 백성으로 증인이 되게 하고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에게 속했던 모든 것을 사며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는 모든 법적 절차를 마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 룻은 그간의 모든 슬픔과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쁘고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큰 축복과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11-12, 14-15절). 하나님께서는 룻에게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복을 내려주셨고(13절),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는 칭송을 듣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15절).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룻과 나오미와 보아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7절을 보면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됨으로써 훗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님의 가계에 예외적으로 그 이름이 오른 몇 명의 영광스런 여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착하고 순종적인 마음으로 가족과 하나님께 충절을 바친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로우며 유력한 한 남자를 새 남편으로 허락하셔서 가난과 외로움을 벗어버리게 해주실 뿐 아니라, 어두워져만 가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방 모압 출신의 한 작은 여인의 충절이 그녀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훗날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큰 은혜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서 룻기가 사사기 다음에 사무엘서 앞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로 기울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외적의 침입과 지배와 착취와 학대로 고통을 받고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사사의 세우심을 받고 평화를 되찾은 후 얼마 못가서 또 하나님을 잊기를 계속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영적으로 점점 쇠락해갔으며 우상숭배의 습성은 갈수록 심해졌고 사사들에게서조차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지 못하는 모습이 더해갔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의 이스라엘 백성의 일반적인 의식과 삶의 모습은 엽기적이라 할 정도로 부패하고 잔인해져갔습니다. 인간관계의 온갖 질서가 다 무너지는 현상이 빈발했습니다. 사사기의 끝부분인 17장부터 21장 사이의 기록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두워진 영적 상태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매듭짓고 있는 맨 끝 절의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려졌고 각자가 멋대로 사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둠의 그늘이 짙게 덮인 이스라엘의 장래를 보여주며 끝나는 사사기이기에 그 바로 뒤에 수록된 룻기의 이야기는 더 아름답게 빛나고 어두운 이스라엘의 역사에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귀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룻기는 어떻게 어두워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뚫고 위대한 왕 다윗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와해될 대로 와해된 이스라엘의 신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회복과 민족의 영화를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룻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정신적으로 혼란의 극에 달한 암흑기를 맞고 있다고 봅니다. 일부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 발군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가치전복의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나,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폭력시위자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공공질서의 유지를 책임 맡아 직무에 충실하려 했던 사람들은 범죄자 취급받는 현상이나, 이런 정부의 오랜 방조에 힘입어 버릇이 잘못 든 일부 시위꾼들은 외국에까지 원정을 가서 나라와 국민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추태를 보이기에 이른 사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신적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이 이러한 상태로 계속된다면 우리의 장래는 이스라엘의 사사시대 말기처럼 암울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했듯이, 우리나라에도 최고 통수권자가 있기는 있어도 그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있으나 없으나 한 상태가 되고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겠다고 국민들이 여길 정도가 된다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혼란상태가 오고 말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암울해 보이는 때라 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룻기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룻과 같이 충절을 지키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우리나라와 민족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큰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할수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충절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충절을 바로 지킬 때에 우리나라와 민족 전체는 오히려 다윗 왕 때 이스라엘이 누린 것과 같은 영화로운 시대를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여전도회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여전도회 회원들과 이 나라의 모든 여신도들이 룻과 같이 하나님께 충절을 다함으로써 이 나라와 민족의 희망의 씨앗들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배려할 줄 아는 가족 공동체
룻 4장 9~17절 / 성홍모목사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먼저 우리 교회 안에 모든 어버이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연로하신 어른들에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는 중에 오래 오래 사시며, 건강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요즈음에 한 청년이 장가를 들고, 처녀가 시집가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잠18:22에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잠19:14에 "집과 재물을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아내를 원하고 믿음직한 신랑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 받아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결혼하는 것 같은데, 이 결혼에는 하나님의 예정하시는 신비하신 섭리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감히 사람이 나누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의 하나가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요, 이혼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나는 미워한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명심하여 아내를 배신하지 말아라"(말라기2:16)고 하셨습니다.
결혼할 때에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혼을 결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부부 사이에 더 큰 불행을 막아보자고, 이혼이란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의 증가속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가고 있습니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1970년대의 이혼은 한해 2만 건 정도였는데,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에 한해의 이혼이 45,694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2003년도에는 167,096 건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이 해체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혼이란 것이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 이혼하면 위자료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알아주는 이혼 전문 인터넷 사이트가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방송 매체를 통하여 이혼한 여성들이 사회 활동하거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을 미화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이혼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게 합니다.
한 해 동안에 결혼하는 304,932쌍이 결혼하는데, 이혼하는 이들은 167,096쌍이라고 하니, 10쌍이 결혼하고, 5.5쌍이 이혼하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조이혼율을 비교해보아야 하는데, 인구 1천명 당 이혼은 지난1993년에는 1.3%이었는데, 지난 2003년도에는 3.5%로 급증한 것입니다. 한국의 조이혼율, 즉 인구 1천명 당 이혼율에 있어서도 미국을 앞지르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천명 중 35명이 이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중심의 가족 가치관이 해체되면서 이것을 수용하는 과정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심한 마찰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혼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1990년 이후에 이혼율이 급증한 것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확대됨에 따라, 이혼한 후에도 경제활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연세대학교의 인간행동 연구소 송관재 연구원은 "이혼율 급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남성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성의 의식은 토끼가 뛰어가듯 빨리 가는데, 남성들의 의식은 거북이처럼 느려서 격차가 커지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이혼으로 치닫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 학자들은 성 역할의 변화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데,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들이 이혼을 부채질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성들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남성의 배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여성들의 의식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우리들 가정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서적인 가정으로 돌아가야 우리 사회를 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가지게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찾아야합니다.
오늘 가정에 대한 문제는 오후 찬양예배 시간에 들을 수 있기에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서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통하여 "배려할 줄 아는 가족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많은 가정들이 행복한 부부생활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불행하다는 생각, 나는 손해를 보고,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행복은 남편이 가져다주고, 또는 아내가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기에 문제를 안게 됩니다. 가정의 행복, 부부간의 행복은 두 사람이 공동 책임이요,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연합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연합의 정신이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부부 사이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저는 가정이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감상적인 말씀만 드리면서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감동적이고, 감상적인 고마움도 얼마 가지 못하는데, 그래도 매년 어버이 주일이 되면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도 은혜가 되었고,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설교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자녀만이 할 수 있는 설교라고 생각해봅니다.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 자식을 사실 할 말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자기 주견도 아닌 말을 늘어놓게 되는 법입니다. 금년 어버이 주일이 되었는데, 효를 강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효의 문제를 뛰어넘어서 우리네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만나는 나오미와 룻은 참으로 불행한 여성들이요,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나오미라는 여성은 베들레헴에서 살던 사사 시대의 사람입니다. 유다 사람으로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과 그의 부인 나오미는 농사를 짓던 땅을 팔고, 집을 정리하여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부족이 사는 모압 땅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습니다. 모압에 사는 동안 이 집의 가장인 아버지 엘리멜렉이 죽고, 부인 나오미와 두아들 말론 기룐이 남았습니다.
여기서 나오미의 이름은 "나의 기쁨", "나의 행복" 혹은 "여호와의 즐거움"라는 뜻인데, 나오미라는 이름은 부르기도 아름답고, 뜻도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호감을 주고, 매력적인 이름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극찬하는 이름입니다. 엘리멜렉이라는 분은 유다의 족장인 살몬의 형제로 이스라엘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고, 사사를 세우시던 때인데, 가끔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인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여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지방에 기근이 들고, 흉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하면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고 흉년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간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었지만, 거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압에서 아들과 살던 나오미는 그곳에서 큰 아들 말론을 모압의 처녀 룻과 결혼시키고, 작은 아들 기룐은 오르바와 결혼시켰습니다. 흉년을 피하여 모압에 간 것이 벌써 10년이 되었는데, 이렇게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이 남아 장가를 들었지만, 두 아들은 자식도 없이 그곳 모압에서 죽었습니다. 이래서 이 집은 세 여자들만 남았습니다.
모압 지방에 살던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 지방에도 하나님이 돌아보셔서 아주 풍년을 맞이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채비를 채리고 있는데,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가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배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배려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과부된 세 여성이 돌아간다는 것을 보기도 딱하지만 시어머니로서는 젊은 두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아가게 하여 새롭게 출발시켜 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너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나와 너희 남편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였으니 하나님께서도 너희들을 사랑하리라 믿는다. 새로운 남편을 만나 잘 살거라"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장래를 배려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두 번 세 번 돌아가라고 간곡하게 말할 때에 작은 며느리 오르바라는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큰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에게 더 달라붙었습니다. "나더러 어머니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고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단단히 결심한 것으로 보아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두 여성은 고향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리 여성들이 몰려나와 나오미가 왔다고 환영하였지만, 나오미는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제는 저를 마라라고 부르세요"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라는 말을 기쁨 즐거움이란 뜻인데, 마라는 괴로움이란 말이었습니다.
그 때가 마침 보리를 추수할 때인데, 젊은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위하여 이삭을 주우러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젊은 며느리가 나이든 시어머니를 배려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배려를 통하여 사랑하고, 배려를 통하여 더욱 결속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배려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여러모로 자상하게 마음을 써주는 것입니다. 자상하게 마음을 써주고, 염려해주는 것 남을 나와 같이 여기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봅니다. 우리들 많은 사람들이 나만 생각하고, 개인 이기주의 사로잡혀 살게 마련이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왜 우리 사회가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가정이 해체되고 있느냐 하면 서로 배려할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줄 사랑을 꽁꽁 감추어두고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과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받을 사랑만 생각하기 때문에 섭섭하고 나는 가족으로 인하여 피해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형님은 많은 혜택을 누린 사람이요, 나는 언제나 모자라고, 받아야 할만큼 받지 못하였다고 불평합니다.
젊은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책임의식을 느끼고, 일하러 나갑니다. 시어머니가 일하러 나갈 것입니까? 집과 밭을 팔고 떠난 입장에서 어머니보고 일하러 나가라는 것은 어머니를 배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 나가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 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시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고, 밖에 나가 추수하러 가는 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었습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라는 친척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는데,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요, 잘 사는 사람이요, 죽은 엘리멜렉과는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모압에서 온 여성에게 이삭을 줍게 하고, 물을 먹게 하며, 시비를 걸지 말도록 일꾼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아스의 훌륭한 인품과 배려할 줄 아는 넉넉한 성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여성,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젊은 여성을 불쌍히 여겨서 이삭을 줍게 합니다.
룻은 보아스의 보살펴주는 은혜에 감사하여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가 예의와 범절이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보아스는 이 여인으로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냥 곡식을 담아주면 자존심이 상하기에 곡식단에서 조금씩 이삭을 뽑아 흘려서 여인으로 줍도록 하였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세심한 배려에 보리 이삭을 주웠으며, 이어 밀 이삭을 주우면서 한 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젊은 며느리 룻을 위하여 보아스에게 시집을 보내고 옛날의 재산을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시어머니는 젊은 며느리에게 단단히 일러둡니다. 보아스가 타작 마당에서 잠에 들 때에 그곳에 찾아가서 그의 이불을 들치고 함께 누우라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여도 들을 것이 있고, 듣지 않을 것이 있지, 보아스라는 남자의 이불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은 좀 심한 말이었습니다. 그래도 시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여 타작 마당에서 혼자 자는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보아스는 추수하여 곡식을 거두어 놓고 마음껏 먹고 마신 후에 노적가리를 지키려고 들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돌아눕다 보니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장차 자기의 부인이 될 수 있지만, 철저히 예의를 지키고, 여성을 배려합니다.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으니 그가 재산을 찾아주면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이 나오미의 재산을 찾아줄 것이며, 룻을 맞겠다고 약속해줍니다. 그리하고는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새벽녘에 보내면서 정숙한 여자인 줄 동리가 다 아는데, 나쁜 평판을 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정숙한 여자라는 것 동리가 다 알고 있소"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겉옷을 보자기로 삼아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 주면서 어머님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일어줍니다. 어머니에게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적은 과자라도 사 가지고 가야 합니다.
오늘의 장면은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보아스에게 넘겨주어서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고 예전 엘리멜렉의 재산을 도로 찾아주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온 마을의 사람들이 보아스와 룻을 배려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축복을 아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을 통하여 그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여러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낳은 아기를 받아 안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고 환호하였습니다. 이쯤되면 나오미가 시샘하고, 이제는 자기의 모든 재산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만도 한데, 모든 공로를 며느리 룻에게도 돌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나오미와 룻과 같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배려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배려합니다. 보아스는 힘들게 살아가는 여성들을 배려하고, 재산을 도로 찾아주고, 룻을 통하여 대를 이어가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정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이 복된 것은 가정에 돌아갈 때만이 사랑이 있고, 관심이 있고, 서로의 배려로 인하여 풍성한 사랑이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룻기는 모두가 신실한 사람들, 모두가 사랑이 있고, 온정이 넘치는 사람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자기를 희생하려는 사람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통하여 오벳을 낳았는데,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게 되었습니다. 룻은 우리 메시아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려움을 함께 대화로서 풀어야 합니다. 과장해서 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하며 가정의 다른 식구를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는 웃음이 있고, 유머가 있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화를 내지 말고, 집에 불이 나지 않는 한 큰 소리를 치지 말고, 옛날 일까지 소급해서 잘못한 일을 옛날 것까지 소급해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을 고래도 춤추게 합니다. 칭찬을 아끼지 말고, 화난 채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의 기쁨을 드러내시는 가정이 되시고, 꿈이 있고, 소망이 있고, 감사가 넘치는 가정, 서로의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배려하고, 자식은 부모님을 배려하는 사랑과 효성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
이성희목사 / 룻기 4:10-12, 사도행전 16:14-15
어느 신학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기관은 교회와 가정이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땅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다른 한 가지 기관은 하늘나라입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대신하는 것이며, 가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최초의 제도입니다. 가정은 최초의 공동체이며 가장 숭고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은 생명이 탄생되는 곳입니다. 인격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생명이 성장하는 곳입니다. 사랑을 배우는 곳입니다. 천국을 배우는 곳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기독교는 가정을 중요시하는 종교입니다. 가정이 작은 교회이며, 가정이 교회의 원형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기독교만큼 가정적 용어를 많이 쓰는 종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우리 서로가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개인의 해탈을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유교에서는 가정보다 가문을 중요시합니다. 전제주의에서는 왕을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공산주의에서는 사회를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물질주의에서는 물질을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을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을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향락주의에서는 쾌락을 가정보다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아낍니다.
한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치과 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이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무자식이 상팔자이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가정이란 있을 것이 다 있어야 좋은 가정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셔야 하고, 손자 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정도 적고 아기를 낳지 않는 부부도 많습니다.
결혼하면 부모로부터 모든 면에서 독립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좋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자녀 교육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 잘 낳지도 않고 낳아도 부모가 양육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점점 캥거루족도 늘어간다고 합니다. 부모에 대한 의존도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26세 이상 20%가 부모에서 의존하여 살고 있는 캥거루족이라고 합니다.
세대 간의 차이도 점점 심각해져 갑니다. 고령화시대를 맞아 가장 큰 문제는 이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전에 인종차별, 성차별이 문제라고 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 ‘나이차별’(Ageism) 시대라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할 일이 있어야 하는데 은퇴는 일찍 하고 할 일은 없고 오래 사는 기형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좋은 가정에서는 이런 모든 문제를 극복해고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 애창곡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작사 작곡한 존 하워드 페인은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정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가정은 누구에게나 가장 그리운 곳이고 좋은 곳입니다. ‘정보사회에서는 집이 더 이상 휴식처가 되지 못한다’고 유명한 저술가 매기 잭슨은 말했습니다. 재택산업의 발달로 이제는 집도 일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과 생활과 휴식 사이에 균형을 잃고 만 것입니다. 집이 가정이 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한 번 가정의 의미를 깨닫고 우리 모든 가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같은 믿음을 가진 가정이 기쁘시게 합니다.
사도행전 16:15에는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라고 합니다. 좋은 믿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의 것입니다. 좋은 것은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맛있는 집은 입소문으로 전파됩니다. 용한 의사는 입소문으로 알려집니다. 좋은 예수님도 우리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내야합니다.
사도행전 8:36에는 빌립이 사마리아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줍니다.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내시를 길에서 만나 이사야 53장을 설명해 줍니다. 내시가 복음을 깨달은 후에 물이 있는 곳에서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루디아도 신앙을 고백한 후 지체하지 않고 바울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자신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집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온 가족이 같은 믿음, 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루디아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들, 노예들 그리고 가정을 돕는 모든 이들, 모두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고 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가정입니까? 오래 전에 빌립보를 여행하면서 전승에 루디아의 집이라고 하는 집터를 가 보았습니다. 그 집터가 굉장히 넓고 집의 기둥들도 굉장히 큰 것으로 봐서 루디아의 집은 크고 식솔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루디아 집의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다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의 간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했으므로 어린이까지 세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온 가족이 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굉장한 복입니다. 부모는 좋은 믿음, 좋은 복음을 자녀들에게 전수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책임입니다. 영적, 육적으로 좋은 신앙, 좋은 습관, 좋은 체질을 전수해 줘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물어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내가 너에게 준 재물을 어떻게 썼느냐? 내가 너에게 맡겨준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를 물어보신다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디모데가 그냥 칭찬받은 사람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을 잘 전수 받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5에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신앙은 모계로 전승된다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어머니의 신앙적 힘은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합니다. 다른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가족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집안에 신앙적으로 다른 사람이 있으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다른 믿음을 가진 가족이 있으면 평안치 못합니다. 집안에 이단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시련이 큽니다. 때로는 영적 갈등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어릴 때부터 믿음을 잘 심어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생활은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입니다.
우리교회 어느 가정의 딸이 여러 해 전에 공부를 잘 해서 서울에 있는 어느 학교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4년 동안 장학금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합격한 후에 서울대학교 합격자 발표를 하는데 합격을 했습니다. 제가 그 애 한테 물어봤습니다. “얘야, 너 그 학교 갈거냐, 서울대학교 갈거냐?” “목사님, 말도 안 돼요. 서울대학교 가야지요” “그 학교는 4년 장학금을 준다는데?” “목사님, 돈이 문제예요?” “너는 문제가 아니지만 네 아빠가 문제잖아?” 그 때 마침 아빠가 있었습니다. 그 아빠도 똑같이 말도 안 된대요. 왜 굳이 돈 들여가며 서울대학교를 갑니까? 좋은 학교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합격하고 학교가 멀다고 안 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갑니다. 왜냐하면 좋은 학교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좋은 학교는 다 보냅니다. 요즘 같은 저 출산 시대에 셋째를 낳게 하는 방법이 있답니다. 셋째 낳으면 서울대학교 보내준다 그러면 낳는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은 학교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왜 연동교회에 나오십니까? 우리교회는 가까운 데보다 먼 데서 오시는 분이 더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좋은 교회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좋은 교회를 나만 다니면 됩니까? 세상의 교육을 위하여 좋은 학교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 교육을 위하여 좋은 교회에 오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온 가족이 한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온 가족이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정이 평안한 방법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 하고, 건강하고, 돈을 잘 벌어 많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최신 공익광고에 보면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모입니까, 학부모입니까? 부모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라고 합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부모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적 부모는 멀리 하나님 나라를 보라, 예수님과 함께 가라하며 내세의 꿈을 꾸라고 가르칩니다.
요즘 아들 자랑은 3류 코미디라고 합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사촌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 8촌이 되고, 장가가면 사돈이 되고, 공부 잘하고 일을 잘하면 나라의 아들이 되고, 돈을 잘 벌면 장모의 아들이 되고, 백수가 되면 평생 끼고 살아야 한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아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평생 내 아들이 됩니다.
둘째, 남을 대접할 줄 아는 가정이 기쁘시게 합니다.
사도행전 16:15 하반절에는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고 합니다. 바울의 선교정책이나 그의 심정은 자신의 복음전파가 남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절대로 자신이나 사역이 남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33에는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목회철학이며 자세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바울과 생업이 같았는데 장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서 ‘천막 만드는 생각’(Tent-making concept)란 자비량 선교 자세를 말합니다. 또한 ‘천막 만드는 자’(Tent-maker)란 자비량 선교사를 뜻합니다. 스스로 돈을 벌어가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데살로니가 2:9에는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루디아 가정에 절대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강권하여 바울을 자신의 집에 며칠 간 묵게 했습니다. 바울을 억지로 자신의 집에 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바울과 억지로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 루디아, 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조화가 두 사람 사이를 아름답게 하였고, 훗날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많은 교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만일에 두 사람이 서로 바뀌어서 바울은 루디아 집에 며칠 머물자고 조르고, 루디아는 집에 방이 없다고 물리쳤다면 서로가 어색하였을 것이고, 아름다운 관계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조화가 아름다운 교회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70인을 따로 세워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위해 보내실 때에 어느 동네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으면 평안을 빌고, 영접하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동정심이 없고,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한 저주를 의미합니다. 동정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중요한 미덕이기도 합니다.
탈무드에서 향유나 기름은 미덕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값비싼 기름은 소비되어 버리지만 선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름은 부자만이 살 수 있으나 선행은 가난한 자도 베풀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행은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아주 작지만 큰 은혜입니다.
사람을 사는데 돈이 없이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는 있습니다. 옛 사람은 이것을 무재칠시(無才七施)라 했습니다. 첫째는 신시(身施)입니다. 몸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둘째는 심시(心施)입니다.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셋째는 안시(顔施)입니다. 편안한 얼굴로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넷째는 안시(眼施)입니다. 눈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언시(言施)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과 격려와 칭찬과 따뜻한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상좌시(狀座施)입니다. 높은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 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방사시(房舍施입니다. 내 집 빈방에 다른 사람을 하룻밤 재워주는 것입니다.
‘마시멜로 이야기’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손자 아룬 간디에게 한 말이 나옵니다. “내가 얻은 결실을 나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하시는 것처럼 타인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가구회사의 점원이었던 클레멘트 스톤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어느 할머니를 발견하고 상점 안으로 모셔와 차를 따뜻하게 대접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강철 왕 카네기로부터 초청장이 왔습니다. 바로 그 할머니는 카네기의 어머니였습니다. 후에 그는 스콧트랜드 별장의 가구 일체를 주문 받아 제작하여 일대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곳에서 클레멘트 스톤 상점에 가구를 주문하여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자는 부자가 되는 법입니다.
놀부 집에 거지가 왔습니다. 힘없이 “아주머니 밥 좀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사흘 지난 밥도 괜찮겠수?” “그럼요, 배가 고픈데 사흘 지나면 어떻습니까?” “그럼 사흘 후에 오슈”. 이런 마음은 동정심도 인심도 아닙니다. 남을 배려하고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은 은혜로운 마음입니다.
지난 번 제가 캐나다에 갔을 때 어느 장로님 부인을 만났습니다. 40년을 시모님을 모시고 살고 계셨습니다. 시어머니는 치매 증세가 있어서 며느리만 찾습니다. 시어머니는 처음 며느리가 시집 왔을 때 이런 건 살면서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고스톱을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요즘도 치매지만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으십니다. 그런데 가끔 “오늘 한 판만 하자”고 하신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한 판만 하자”고 하셨는데 며느리 권사님이 성경공부 과제가 있어서 “어머니, 9시에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9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어서 “잘 됐다”하고 있는데 9시 30분에 어머니가 나오셔서 “아가야, 한 판만 하자”고 하셨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큰 일 날 뻔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도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돈을 잃어줬다고 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고스톱 하는 것이 고역이지만 시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한다고 합니다. 고스톱 한 판이 며느리의 시어머니에 대한 효입니다. 어머니를 위하여 베풀어드리는 것입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청교도는 ‘가정은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가정들이 작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작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는 ‘하루 한 시간이 더 생긴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특집이 있었습니다. 하루 한 시간이 더 생긴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답이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50%였습니다. 브라질, 캐나다, 영국, 남아, 미국, 호주 등이 많은 답을 했고, 한국은 33%가 답을 했습니다. 하루 한 시간이 더 생긴다면 운동을 하겠다는 나라가 터키, 이탈리아입니다. 일을 하겠다는 나라가 인도로 50%입니다. 잠을 자겠다는 나라가 독일로 37%나 됩니다. 여러분은 한 시간이 더 생긴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가정을 위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옛말에 ‘가사삼성’(家事三聲)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책 읽는 소리, 아기 울음소리, 베 짜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을 소리가 필요합니다. 우리 연동의 모든 가정에 이 세 소리에 기도 소리,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정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룻의 해피엔딩
이종철목사 / 룻기 4:10-22
나오미의 회복
룻과 보아스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더라. 고전에서 보는 상투적인 결말입니다. 요즘 우리 드라마도 그렇습니다. 비극적인 것을 싫어합니다. 사랑이 맺어지고, 꿈을 이루고, 원수에 대한 복수가 성취되는 결말을 좋아합니다. 우리 뇌는 행복한 것을 좋아합니다. 인간의 믿음이나 기대라는 것은 결국 성취됩니다. 그렇게 될 것이고, 안되면 그렇게 되도록 상상하고 결국 만들어내기까지 합니다. 죽음이라는 불행을 견딜 수 없어 천국은 탄생했습니다. 성서의 구원사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처음부터 천국이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음부라고 하여 곧 ‘스올’에 내려가는 것으로, 인간의 생명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구약 세계는 그려집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 강요하고 결국 하나님이 허락해주시는 형태로 천국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가장 해피엔딩을 맞은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두 자녀를 잃었습니다.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쳤다고 하며 자기 이름을 나오미, 곧 달콤함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곧 괴로움, 씀이라 부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생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16)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17)
이 아들은 보아스의 아들이던지 아니면 죽은 아들 말론의 아들이라 불러야 하지만 오히려 나오미의 아들처럼 보입니다. 형사취수법에 의해서 태어났으니 보아스가 씨를 주어 낳은 말론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유대교 미드라쉬에서는 보아스가 이때 나이가 80세였다. 보아스는 결혼식 후 첫날 밤을 지낸 후 바로 죽었다라고 하여 나오미가 자기 아들처럼 기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꾸며낸 이야기이고 매우 가부장적 요소가 강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아들은 나오미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주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14절과 15절에 이 아들과 나오미의 관계가 자세히 설명됩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여기 기업 무를 자는 아들 오벳을 말합니다. 나오미의 고엘이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어서 ‘네 생명의 회복자다’ ‘네 노년의 봉양자’라고 말합니다. 죽어가던 너의 생명을 다시 살린 자입니다. 희망의 탄생입니다. 마치 노년에 손주를 얻은 느낌입니다. 늙어가는 때를 이 아들이 먹이고 곁에서 봉양합니다. 노년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정말 나오미에게 고엘은 누구였습니까? 나오미에게 있어서 고엘은 룻이었습니다. 룻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룻에 대한 표현이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 부릅니다. 일곱 아들보다 귀하다. 대단한 칭찬입니다. 이웃 주민들이 알고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관계에서는 사랑한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데 룻과 나오미의 관계에서는 아하브, 곧 사랑한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러니 퀴어신학에서는 룻과 나오미의 관계를 시모와 며느리 이상으로 봅니다. 어찌 되었든 룻이 시모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습니다. 나오미의 고엘은 룻이었습니다. 귀한 만남의 축복입니다.
이방 여인의 투쟁
룻기는 행복을 찾아가는 투쟁입니다. 모두가 응원합니다. 룻은 전형적인 소수자입니다. 여자입니다. 과부입니다. 게다가 이방인입니다. 이런 룻이 유다 정통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됩니다. 이 룻기를 읽었던 유대인들에게 제일 걸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자? 과부? 아마 모압 여인, 곧 이방 민족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유대 사회도 가난한 자도 많고 이들의 성공 스토리라면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이방여인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자랑하는 다윗 왕조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룻기의 목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 중심주의에 대한 배격입니다. 이방인 포용으로 나갑니다. 요나서도 그렇습니다.
11절의 축복은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 곧 룻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같기를 축복합니다. 정통 이스라엘로의 합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롬 4:16-17)라 하며 믿음이 가져오는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믿음의 능력을 실제 실현시킨 여인이 룻입니다. 변방인이 아니라 주류가 되었습니다. 룻이 이스라엘에 합류하듯,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은 온 이스라엘에 합류합니다.
이는 룻의 투쟁입니다. 성공하기 위한 투쟁은 기도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룻기는 유대 가부장제에 눌렸던 여성과 이방인의 연대라 할 수 있습니다. 약자는 약자 간에 연대해야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2절의 축복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다말은 꾀를 내어 자식을 낳는 형사취수법을 시행하지 않는 시아버지와 동침함으로 베레스를 낳았습니다. 유다의 아들 베레스 가문은 베들레헴에 사는 유명한 가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지켰던 베레스 가문을 다음과 같이 칭찬합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느 11:6) 다말은 투쟁하여 베레스라는 자녀를 얻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룻은 투쟁으로 오벳을 얻었습니다. 11절과 17절에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하고 기원하는 그 유명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유다 왕조입니다. 룻의 투쟁은 곧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요한 한 축입니다. 생활투쟁은 신성합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12장부터 22장 너머까지 이어지는데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삭 하나, 자식 하나 낳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창세기 언약사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를 낳거나 아니면 일상적인 삶에서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충분히 감당했다 할 것입니다.
다윗의 족보
18절 이하에 다윗 조상의 족보가 나열됩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그런데 이게 정상적인 족보입니까? 네 유대인들은 자랑스럽게 이 족보를 받듭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족보가 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에 실려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1:3-6)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룻기의 족보에 언급되지 않은 다말과 라합과 룻이라는 세 이방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그 어디에서도 근거가 없고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합니다. 가나안 땅 정복할 때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은 인간의 족보에서는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족보에는 언급되는 이름입니다.
이름 하나를 족보에 남기기 위해 사는 것, 또 이름을 족보에 새기도록 투쟁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소중합니다. 룻기는 그 해방투쟁 역사의 한 줄기입니다. 결국 이런 오랜 투쟁 끝에 성차별, 민족차별, 계급차별을 없애고 인류사는 해방과 평등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완전한 해방의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시요, 주권자라는 고백은 곧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결론을 낳습니다. 성경에서 다윗에 대한 찬양이 많은데 그것은 다윗이 위대한 영웅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충실히 사환으로서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역사와 큰 차이입니다. 고대 사회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나 권력을 가진 자는 신성시되고 추앙받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용비어천가》를 보십시오. 세종 때 지어진 이 찬양은 그 조상이 매우 위대하도록 미화되었습니다.
“해동 육룡(세종의 6대조 조상)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묄세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 조상을 육룡이라 부르고 태조 이전의 네 명의 조상을 목조, 익조 등 임금으로 부릅니다. 뿌리 깊은 나무라고 합니다. 견고하고 유력한가문이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다윗의 가문은 소박하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거대한 삶의 이념이나 이상이 이끌어간 것도 아닙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룻과 나오미 두 여성에게 당한 80세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조의 조상 이야기로, 그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구성하는 야곱의 열두 아들을 낳는 장면도 라헬과 레아의 아기 낳기 경쟁의 결과일 뿐입니다.
미화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사실적입니다. 하나님만이 왕이기 때문에 인간을 미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보석을 금은방에서 찾지 않습니다. 광산에서 찾습니다. 사실 그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는 정금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삶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매우 숭고하고 신성합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빚어가실지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소한 일은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보람찬 결말
양은익목사 / 룻 4:11~17
겨울 초입에 룻기서를 시작했는데 겨울을 마치면서 마치게 됐습니다. 지금 룻기서는 봄이 오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룻기의 시작은 추웠습니다. 슬펐습니다. 장례식만 세 번 치룹니다. 아버지 한번, 아들 두 번.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습니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이들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먼 것처럼 보였던 구원이 일어납니다. 장례식이 결혼식으로 바뀝니다(13절) 축복이 쏟아집니다. ‘후사가 생겨 라헬과 레아같은 위대한 어머니가 되시라’(11절). 축복 때문인지 불임이었던 룻이 임신을 하더니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보아스도 안고, 룻도 한번 안고, 나오미도 안고. 나오미가 가장 감격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네 할머니들 처럼 나오미도 아기를 품에 품고 정성껏 기르기 시작합니다(16절)
서러움과 원망이 많았는데 이제 뿌듯함과 감사가 넘쳐 납니다. 절간 같던 집안에 간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퍼집니다. 결말이 좋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sad ending이 아니고, happy ending 입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될만한 보람찬 결말로 룻기서는 끝납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 전부 자랑할만한 ‘생의 결말’을 만들어 냅니다.
룻기서의 결말을 보면서 두 가지 묵상하겠습니다. 룻기서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보람찬 결말이 무엇인가? 룻기서의 결말이 보람찬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들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하나하고 또 하나는 이들이 미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자부심을 가질만한 결말을 남깁니다.
1. 무너지지 마라.
(1) 첫 번째 묵상은 ‘무너지지 마라’입니다. 룻기서의 결말이 주는 중요한 도전입니다. 좋은 결말, 부끄럽지 않은 결말, 자부심을 가질만한 결말을 얻으려면 무너지면 안됩니다. 그래야 보람찬 결말, 누릴 수 있습니다. 죽도록 분하고, 죽도록 힘들고, 죽도록 슬프면 장사 없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무너집니까? 성품이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고, 믿음이 무너지고, 의지가 무너집니다. 무너지면 좌절하고, 망가집니다.
죽을 일 앞에 사람은 둘로 나뉩니다. 이기는 사람, 무너지는 사람. 이기는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룻기에서 본 나오미, 룻, 보아스는 공히 다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얼마나 위험했습니까? 나는 나오미, 기쁜자가 아니다. 나는 마라다. 나는 쓴자다. 전능자가 나를 비게 만들었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혔다. 룻은 남편 죽고 홀로 된 순간부터 위험했습니다. 시아버지 없는 시댁은 가난하기 짝이 없고, 나오미 따라 남의 나라 왔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방에 남자 늑대들이 우글 거립니다. 떨어진 이삭 줍고 사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시어머니가 시켜서 야밤에 보아스에게 가지만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보아스도 다를바 없습니다. 지금은 유력한자로, 성공한자로 살지만 그의 내면에는 깊은 상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창녀였습니다. 얼마나 쓰라렸겠습니까?
하지만 나오미, 룻, 보아스 모두 무너지지 않고 이겨냅니다. 성품도, 인격도 안 무너집니다. 대신 서로 의지합니다. 환대합니다. 동행합니다. 선대합니다. 나오미는 동병상련의 룻을 선대합니다. 룻을 위합니다(3:1). 롯은 홀로된 가난한 어머니를 존중하고, 환대합니다. 항상 함께 합니다. 순종하고, 섬깁니다. 보아스는 자기 어머니의 아픈 삶을 마음에 품고 똑같은 아픔을 안고 있는 룻과 나오미를 선대합니다. 룻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합니다.
김남조 시인은 ‘생명’이라는 시에서 ‘친구’를 말합니다.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생명, 부분) 이 시를 보면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는 좋은 친구간입니다. 서로의 일그러진 것, 상한 것을 품어주면서 무너지지 않고 일어섭니다. 이보다 보람된 일이 어디있습니까? 서로에게 대단히 보람찬 일을 한 것입니다.
(2) 세한도(歲寒圖): 추운 시절에 그린 다짐
그림 한 장 보겠습니다. 세한도입니다. 1844년에 그린 추사 김정희의 그림입니다. 세한도는 추운(寒) 시절(歲)에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변함없이 자신을 섬기는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입니다.
풍경은 추운 겨울입니다. 창문 없이 입구만 있는 집 하나하고, 심하게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 차면 부러질 것 같은 잣나무 세 그루가 그림의 전부입니다. 척박하고, 쓸쓸합니다. 추사의 마음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추사는 아내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었지만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마음이 전부가 아닙니다.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볼품없이 구부러져 있지만 겨울에도 시들지 않습니다. 자신도 시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푸르름으로 봄을 맞이 할 것이고,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天敵은 나’라고 하는데, ‘자신’을 잘 이기고, ’마음’ 잘 먹으면 추운 시절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2. 미래를 열라.
(1) 두 번째 묵상입니다. 미래를 열라입니다. 미래는 닫히면 안됩니다. 미래는 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엽니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엽니다. 무너지면 미래도 무너집니다. 룻기서의 결말이 보람찬 이유는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이 미래를 열었다는데 있습니다. 자부심 넘치는 결말입니다. 나오미도 룻도 미래는 커녕 한 치 앞도 내다 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인맥도, 돈도, 남편도 없습니다. 보아스는 좀 나은 편이지만 뛰어 봐야 벼룩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미래를 엽니다.
룻기서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망해가는 시대, 희망 없는 시대, 자기만 아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등장한 사람이 나오미고, 룻이고, 보아스입니다. 룻기서는 효도책도 아니고 연애책도 아닙니다. 어둡고 희망없는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만 아는 시대인데 너무 다른 사람들이 보입니다. 손해 보면 안되는데 손해를 봅니다. 나올게 없는데 함께 합니다. 떠나야 되는데 안 떠납니다. 서로가 선대하고, 동행하고, 환대하고, 헌신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짓이고, 호구짓인데 그렇게 합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절실한, 남들이 하지 못하는 호구짓을 합니다. 희안하고,희귀합니다. 하나님이 이 희귀한 사랑과 희귀한 헌신과 희귀한 환대를 버리지 않고 쓰십니다. 16절에 보면 나오미가 룻이 낳은 아들을 품에 안고 감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사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아이 이름이 오벳인데,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2) 미래는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세상이 사사시대 같을수록 밝은 미래를 열어야 합니다. 누가 미래를 열겠습니까? 룻기서가 보여준 메세지가 있지 않습니까? 미래는 호구짓 하는 사람들이 엽니다.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 유불리만 따지는 사람, 계산에 밝은 사람은 미래를 열지 못합니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나무를 심겠다’. 잘 알려진 말입니다. 이 말을 누가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스피노자 설도 있고, 마틴 루터 설도 있습니다. 누가했건 미래를 원하는 사람은 새겨 들어야 할 말입니다. 내일 종말이 와서 끝나는데 사과나무를 심어서 뭐합니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처신할 것입니다. ‘다 끝났어. 죽을날 기다려. 더 뭘해, 살던 대로 살다가!’ 하지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상황이 아무리 안 좋아도 내가 아닌, 앞으로 살아갈 이들을 위해 희망 버리지 말고, 사랑을 품고 무엇인가를 심으라는 것입니다.
앞서 가는 자의 가장 보람찬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미래를 열어 주는 것입니다. 출세시키는 미래는 약합니다. 먹고 살게 만드는 미래는 너무 뻔합니다. 그런 미래만 추구하다 세상이 망가지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환대하고, 동행하며, 아픈 이들을 껴안아주는 그런 미래의 삶을 열어 줘야 합니다. 정도를 넘어선 버린 적대와 비난으로 내리막 길로 질주하는 한국 사회를 위한 최고의 처방이고, 최고의 미래입니다. 사과 나무를 오래 전에 심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 심지 못했으면 늦었다 포기하지 말고, 지금 심으면 됩니다. 헌신의 나무, 사랑의 나무,믿음의 나무, 매일 매일 성실하게 심어서 자녀든, 남편이든, 아내든, 누구든, 모두에게 최고의 미래를 만들어 주십시오.
흔히 하는 말 있습니다. ‘나 하나 변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나무 한그루 심어서 언제 씁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은 스스로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택도 없다 생각하면 그만 두시고, 할만 하다 생각하시면 심으십시오. 룻기서의 말씀에 의하면 심을만 합니다. 호구짓 처럼 보여도 그 인내와 존중과 환대와 헌신이 한 사람의 새로운 미래를 만듭니다. 그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 삶의 난관 앞에 우리도 ① 무너지지 마십시다. ② 선한 미래를 만들어 가십시다. 이런 보람찬 결말이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다.
천 배의 축복을 꿈꾸라
룻기 4장 13-15절 / 이한규목사
< 먼저 하나님을 추구하라 >
보아스의 은혜로 룻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룻에게 주어진 은혜는 일꾼들을 좇아다니면서 곡식 단을 줍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시기로 계획하셨다. 결국 룻은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다(13절). 그래서 밭에서 많은 곡식 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밭의 소유주가 되었고 아들을 얻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는 칭찬까지 듣게 되었다(15절).
하나님은 지금보다 더 큰 은혜를 주기를 원하신다. 더 행복한 가정을 구하고 더 나은 지위를 구하라. 하나님은 나의 꿈과 비전보다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지 말라. 더 큰 영향력을 꿈꾸라.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나를 놀라게 하기를 원하신다. 그 뜻을 이해하고 더욱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라.
물론 축복만 구하는 기복주의자가 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한 것처럼 하나님을 먼저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품고 범사에 하나님을 높이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와 축복이 나를 추적하고 나를 품에 안을 것이다. 물론 믿음의 길은 쉽지 않다. 그래도 꾸준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꿈과 비전의 성취도 성큼 내 앞에 다가올 것이다.
< 천 배의 축복을 꿈꾸라 >
신명기 1장 1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나를 현재보다 천 배나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천 배의 축복은 어떤 축복인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지만 성경은 그런 축복을 약속한다. 하나님은 내게 천 배의 기쁨과 지혜와 평안을 주기를 원하신다.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축복도 주실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믿음으로 씨를 뿌리면 언젠가 반드시 열매가 맺어질 것이다.
당대에 열매가 없어도 상관없다. 내가 열매를 얻지 못하면 나의 자녀가 열매를 얻을 것이고 천국 보상은 더욱 커질 것이다. 가끔 넘치는 축복을 받는 사람을 보면 그의 부모나 조부모가 하나님께 헌신한 경우가 많다. 그처럼 내가 뿌린 기도와 헌신의 씨는 결코 헛되지 않다. 물론 나의 부모가 나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것이 너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많은 유산을 받고 출발부터 한참 앞서가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수 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라. 지금 나부터 좋은 가정과 좋은 가문을 만들어 가면 된다.
룻은 이방신을 모시는 모압 출신의 여자였지만 하나님께 돌아서서 복된 메시야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계보에 이방 여자로서 찬란하게 그 이름이 올랐다. 그런 위대한 축복이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꾸준히 주일성수를 하며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추구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시련 중에도 인내하면 누구나 복된 가문의 창시자가 될 수 있다.
과거의 실패와 후회스런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그 실패가 나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다. 내가 실패할 때 사람들은 외면하고 떠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에게 오히려 더욱 관심을 갖고 찾아오신다. 그때 하나님을 진심으로 맞이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역사는 지금부터 펼쳐질 수 있다. 그런 새로운 축복이 없어도 실패를 통해 좀 더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졌다면 그 실패는 유익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좀 더 깊게 만나라. 그 만남의 깊이가 참된 축복의 크기를 결정한다. 지금보다 천 배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이웃에게 넘쳐흐르게 하라. 지금보다 천 배의 지혜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지금보다 천 배의 평안으로 수많은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라. 항상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의 축복을 받고 그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복된 인물의 꿈을 이루라.
은혜 이야기
인명진목사 / 룻 4:13-17, 딤전 1:12-17, 마 1:1-11
룻기 이야기는 우리의 가치 체계를 뒤집어엎는 이야기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로 들려지고 읽혀진 시대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고 난 뒤였습니다. 성경의 시대로 말하자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입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민족공동체, 신앙공동체를 재건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기강이 무너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혼인을 금지시키고 심지어 이미 이방인과 혼인한 사람을 강제로 갈라놓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하는 것 그 자체를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룻기는 바로 이 시대 사람들을 독자로 삼고 쓰여진 것입니다.
이 시대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신명기 율법이 이방인과의 혼인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룻의 원족속인 모압에 대해서는 사람이 뽑을 수 없는 대못을 박아놓았습니다. 신명기 율법에는 “모압 사람은 하나라도 야훼의 회중의 일원으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십대 자손에 이르기까지라도 야훼의 회중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신명기 율법은 모압 사람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신명기는 왜 하필이며 모압 사람을 특정하게 지명해서 심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빠져 나와 광야를 지날 때 모압 사람들은 비정하게 그들에게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모압 사람들은 발람이란 예언자를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 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그런 박대와 멸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막의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면서 배고프고 목말라 기진맥진할 때 누군가 나를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는다면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압 사람과의 결혼을 율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는 이것을 훨씬 더 강화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압 여자인 룻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올라 와 있는 모압 여인 룻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한편에서는 모압 사람은 야훼의 회중에 10대가 지나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금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다윗왕의 선조요, 메시아의 족보에 등장합니다. 이 충돌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한데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도 없고, 둘 다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룻이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법칙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구조는 권선징악의 이야기처럼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류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모압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이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유대인이 만든 울타리를 유대인이 스스로 허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지도 사랑하는 사람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든 울타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허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만이 가지고 위대한 힘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벽이 높아져만 갈 때, 유대인들은 이 모압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녀의 품성과 믿음을 기억해 봅시다. 유대인 시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성,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헌신 이것이야말로 한 유대 남성이 한 여인 안에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룻기는 유대인들의 마음속 깊이 깔려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는 커다란 망치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수는 방법은 설교를 통해서도 아니고, 율법을 통해서도 아니고, 징벌을 통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서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강렬하게 편견의 진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가 주는 힘입니다.
이 룻의 이야기를 들었던 유대인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서 모압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우리가 정해놓은 규칙에 의해 하나님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과연 옳은 것인가? 우리도 모압 여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모압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실까?
룻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기근을 피해 이민을 갔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는 나오미요 두 아들은 말론 기룐입니다. 그들이 모압 지방에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고,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취하여 결혼을 했습니다. 큰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요, 둘째 며느리는 룻이었습니다. 거기 거한 지 십년 즈음에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다 죽었습니다.
기근, 가난, 이민, 한 집안의 세 남자의 죽음, 남겨진 세 명의 과부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었습니다. 룻기가 시작한 지 겨우 다섯 절 만에 이 모든 일이 발생했고, 세 명의 과부는 각자의 남편을 모압 땅에 묻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회적 정황으로 볼 때 여성은 남편이나 아들에게 보호받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남편의 죽음은 사회적 보호 장치를 완전히 빼앗긴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정체성의 상실입니다. 인간 권리에 대한 상실입니다. 사법적 정의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는 의미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자연스런 질문이 던져질 것입니다. 나오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오르바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룻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그들을 향해 보호의 날개를 펼쳐줄 것인가? 어디로부터 그들의 도움이 임할 것인가? 룻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야훼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이야기 끝부분에 이르면 룻은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날개 아래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와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고 있는 마태복음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룻 이야기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관장하시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통제하시는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때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것들을 행하시는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파편들을 모아 훌륭한 도자기를 만드시는 예술가이십니다. 모압 여인 룻을 자신의 구원 계획에 포함시키시고, 심지어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올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귀를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룻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 나 자신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중요치 않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각 사람의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룻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에 열외가 된 모압 여인, 하나님의 디자인에 생략된 모압 여인, 교회 속에서 스스로 변두리라고 여기는 사람들,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어서 위축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나를 위한 이야기다. 저 이야기는 나에게도 사실인 이야기다. 나는 저 이야기 속에 어떤 인물로 자리할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룻의 이야기는 우리 갈릴리의 이야기로 들려왔습니다. 지난날 한국의 주류교회에서 입장에서 볼 때 갈릴리교회는 비주류였고, 변방이었고,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심지어 이상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갈릴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주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5월 12일 원로목사님께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원로목사님께 명예요, 영광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것은 갈릴리교회에 주시는 상급입니다. 단순한 상급만 아니라 갈릴리의 신학과 사회선교, 예배를 신학계에서 인정했다는 뜻이고, 갈릴리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걸어온 길, 역사와 민족과 이웃 앞에 걸어온 길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역사의 변방으로 여겨졌던 모압 사람을 끌어 들여 민족의 울타리를 넘게 하시는 하나님, 비주류를 들여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 갈릴리교회가 만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입니까? 룻의 하나님은 우리 갈릴 리가 만났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룻 이야기는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위해 씌여진 것입니다. 소위 메인 스트림이라 불리는 주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바깥 모압 땅에서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중심부에서 밀려난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잘 나가는 사람, 조건을 갖춘 사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자를 들어서 성전 모퉁이돌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도 시시한 모퉁이돌이 아니라 다윗왕의 증조모로,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등장하는 인물로 말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사람을 고정관념으로 보지 말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괄호 밖의 사람,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이방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괄호 밖의 사람이 없고, 하나님 앞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 앞에 이방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룻기 저자가 당시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방식으로 우리도 그렇게 쳐다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큰 물줄기를 이루던 시절 민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의 전 세계적인 구원 드라마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로 바라보라는 충고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룻기 말씀이 이야기체가 아니라 설교체나 교훈체로 기록되었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현대 최고의 소설을 한편 꼽으라 한다면 박경리 씨의 토지를 첫 손가락에 꼽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민족이 나가가야 할 길도 이야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최서희는 김길상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성을 아버지 김씨가 아니라 어머니 최씨의 성을 따르게 합니다. 이 소설은 가부장제가 영원한 제도라 생각하던 60년대 초반에 쓰여졌는데 너무도 파격적인 사상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로 전해줍니다. 독자들은 이야기이니까 하면서 그냥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입니다.
룻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유대 순혈주의를 고집하고,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고,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몰고 가던 시절 이 이야기를 기록해서 아무렇지 않게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이야기는 놀라운 일들을 행합니다. 이야기는 우리를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인도합니다. 이야기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삶을 의미가 가득 찬 삶이 되도록 영광의 관을 씌워줍니다. 이야기는 사각지대에 버려진 사람을 빛나게 만들어줍니다. 이야기는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이야기는 군중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 사람을 드러내어 모든 사람 바라볼 수 있도록 드러내 줍니다.
룻의 이야기는 말합니다. 룻을 바라보라! 그녀를 자세히 쳐다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녀의 삶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계신지 주의 깊게 쳐다보십시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이 그녀의 삶을 품어 어떻게 새로운 인생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쳐다보십시오.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나님이 모압 여인 룻에게 이렇게 행하셨다면 우리를 이렇게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느냐?”
룻기 2장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모압 여인이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룻은 보아스의 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보아스 밭으로 가라는 환상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우연히 그 밭에 가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우연히 간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룻이 남편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나오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나님이 룻의 세부적인 일까지 인도하셨거늘 어찌 우리의 세부적인 일까지 인도 하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각 사람마다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길도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결 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각도에서 내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셨다고 말입니다. 룻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의 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평생 동안 잊지 못할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더 이상 기쁨이 나오미라 부르지 마십시오. 차라리 나를 슬픔이 마라라 불러 주십시오. 전능자가 나를 심하게 다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의 고통과 눈물과 괴로움을 모아 하나님의 이야기로 뜨개질을 하고 계셨습니다. 나오미의 끊어진 끈과 버려진 실들을 모아 구원의 천을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나오미의 눈에는 끊어진 끈과 버려진 실들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는 보이지 않고 고통과 눈물과 괴로움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 렘브란트의 그림과 같습니다. 그는 확실한 명암 대비를 통해 밝은 것을 극명하게 드러나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명암대비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배경을 만들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확실히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나오미를 최고로 밝은 곳에 세웁니다. 나오미를 박복한 여인이라 수군대던 동네 여인들이 “아들이 나오미에게서 태어났다.”고 외침으로 하나님은 나오미의 모든 눈물을 일순간에 씻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동네 여인들은 “아들이 룻에게서 태어났다.”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외쳤습니다. 동네 여인들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나오미의 한 많은 쓰라림은 다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며느리 룻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 이렇게 해서 나오미는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가 지나도 야훼의 회중의 일원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전통과 인습에 과감히 도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민족주의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시대정신에 과감히 도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믿음의 선배인 나오미의 구체적인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재산권을 행사 핼 수 없는 여인을 보호하기 위해 수혼제라는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지금도 유목생활을 하던 히말라야 아래의 일부 부족은 이런 결혼제도를 유지 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면 그의 형제들이 형수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형의 아들이 되고, 그 아들로부터 과부된 여인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오늘 룻의 경우처럼 형제도 죽고 없으면 그의 친족들이 가까운 순서를 따라서 이 여인과 동침하게 됩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의 친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룻은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야훼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
‘룻이여 당신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룻이여 당신은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당신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된 여인입니다.’ 이런 찬사가 아깝지 않은 여인입니다. 나오미가 고백했듯이 일곱 아들보다 귀한 여인입니다. 룻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다시 인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첫 번째 책, 첫 번째 장에 그것도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그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유별나게 그녀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창녀로 변장하여 자신의 시아버지 유다를 속였던 가나안 여인과 함께,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준 가나안 기생 라합과 함께,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밧세바와 함께 말입니다. 룻, 다말, 라합, 그리고 밧세바 이 네 여인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과 기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끊어진 끈들과 버려진 실들을 주워서 아름다운 천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버려진 돌과 쓸모없는 나무둥치를 모아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변장과 비주류를 불러서 근원을 새롭게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굿 뉴스 복음입니다.
룻, 다말, 라합, 그리고 밧베바 이 네 여인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과 기록은 우리에게 사람이 정해놓은 전통과 인습에 과감히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시대정신에 과감히 도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드라마를 완성시켜 나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들어야 굿 뉴스 복음입니다.
성경은 시대정신과 이 땅의 가치관 앞에 고개 숙인 우리에게 룻 이야기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의 모든 것이 은혜이니 하나님의 은혜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정해놓은 가치관에 갇히지 말고 하나님의 원대한 세계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무엇이라도 된 줄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 자랑하며 사십시오. 시대정신과 가치관을 나의 이상과 가치를 감옥에 가두려 할 때에 성경의 가치관을 따라 이 시대정신을 도전하며 사십시오. 그리하여 룻처럼 몸으로 삶으로 하나님의 드라마를 완성해 나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후반이 더 좋은 가정
문기태목사 / 룻 4:13-17
어떤 공무원이 말하기를 자기가 별로 안 좋아하는 민원인이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유형,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서류 접수하는 사람. 둘째 유형, 일처리 끝내고 "감사합니다" 하며 가는 사람. 셋째 유형, "참 친절하시네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웃어야 할지, 가만 있어야 할 지 표정관리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인사를 잘하는 사람들은 좋은 것 아닙니까? 도대체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데요?" "예, 합의이혼 접수창구에서 일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위기중에 최대 위기가 가정의 붕괴입니다. 부정이 드러나서 이혼하는 것 외에 경제문제, 성격의 부조화, 부부 갈등 등으로 인해 깨어지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의 이혼률이 세계 1위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가정의 붕괴가 심각한 문제인데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오히려 환상적으로 상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분위가 오히려 더 가족의 해체를 더 부추기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입니다.
가족해체, 그리고 가정의 붕괴가 더이상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가정에도 어떤 형태로든 불어닥친 위기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한순간 생각을 잘못하고 그릇된 결정을 하면 여러분의 가정도 깨어지고 그로 인한 고통이 여러분과 자녀들에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지금 고통스럽더라도 후반이 더 좋은 가정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전반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더 좋아질 줄 믿습니까? 지금은 위기에 처했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극복하고 아주 행복한 가정으로 변할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과 기도를 받으시고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룻기에 보면 지독하게 불행한 가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쩌면 이렇게 외롭고 가난하고 쓰라린 상처를 안고 살 수 밖에 없는가? 안스러움을 억누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나라로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눌러 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십년이란 세월이 잠간 지나갔고 아들들도 장성하여 결혼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타국에 잘 적응하며 뿌리를 내리는가 싶었는데 갑작스레 가장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두 아들도 아주 젊은 나이에 다 죽었습니다. 남은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오르바와 룻 이렇게 세 여자뿐이었습니다. 남편들은 다 죽었고, 재산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자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중에 소문에 고향땅에는 하나님께서 풍년이 들게 하셔서 모두가 잘 산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려서 나오미와 룻이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잃었던 땅을 되찾게 해 주십니다. 아주 존귀한 아들을 주셔서 그를 잘 키워 놀라운 섭리를 이루게 하십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는 자기 집안에는 더이상 아무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옛 영화를 회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이 당신이 나오미가 맞느냐?고 물을 때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셔서 거지같은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가정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손자도 하나 남기지 않고 둘 다 일찍 죽어 아무 소망이 없다고 며느리들에게 제발 자기를 버리고 떠나달라고 사정하였던 적이 있었으나 이제 다윗왕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품에 안고 "인석아, 내가 니 할미다."하며 아주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가정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창대하고 잘 된 가정입니다. 그녀들의 가정은 엄청난 시련을 만나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할 수 밖에 없었고 희망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전반보다 후반이 훨씬 더 좋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후반이 더 좋은 가정을 이루기 바랍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고 행복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후반이 더 좋은 가정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1. 연합을 굳게 지키는 가정이 후반에 더 좋은 가정이 됩니다.
세 여인이 보따리를 이고 이제까지 살던 모압 지방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멈추어 쉬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을 향해 입을 엽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갈 이유가 없다.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 그래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 새롭게 시작을 해라. 하나님이 복주시기를 빈다." 그러자 며느리들이 소리 높여 울며 "어머니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만 남겨두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습니까?"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셔서 우리 집이 이렇게 되었는데 너희까지 생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이 더 아프다. 제발 돌아가라." 그래서 셋이 붙잡고 소리를 높여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큰 며느리는 친정을 향해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한 번 맺어진 관계를 절대 깨지 않고 굳게 지키겠다는 결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 이런 고백을 하고 어떤 어려움속에서도 이런 결심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룻이 오르바와는 달리 절대 연합을 지키겠다는 결심에 감동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별한 이들이 절대 재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 관계가 찢어질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게 해 주신 이를 떠나면 벌이 내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애써 지켜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가정이 쉽게 해체되고 있습니다. 남성의 전화에 의하면 외환위기 이후 신용불량,인터넷 채팅으로 비롯된 외도,가정폭력 등이 주된 이혼사유로 등장하다가 지난해 말부터 뚜렷한 사유가 없는 이혼상담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30대 여성들의 가치관이 빠르게 변했습니다 현재 남편에게 뚜렷한 문제가 없어도 앞으로 남편의 장래가 비전없어 보인다든가, 재미가 없다면 굳이 결혼생활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혼 사유가 뭡니까? 하면 "재혼할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이가 없을 때 가정의 구속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다는 것뿐"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연합을 깨는 것을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합을 굳게 지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하지 못할 부득이한 사유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을 이유로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깨뜨린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기를 바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혼을 고려하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쓰는 에너지는 이혼 후에 드는 에너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리서치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혼을 고려하던 부부 중 가정을 지킨 사람은 5년 후 80%가 행복하다고 했고 이혼을 선택한 사람은 같은 5년 후 18%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좋은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기가 찾아와 나뉘어지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도 룻을 생각하며 한번 더 인내하고 어떻게든 부부의 연합을 지켜내려고 애쓰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족의 해체의 유혹을 이기고 연합을 굳게 지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후반이 더 좋은 가정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고 절대 아무 것도 변할 것 같지 않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이 큰 소망을 주시고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큰 복을 받은 가정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2.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가정이 후반에 더 좋은 가정이 됩니다.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하여 곡식을 베는 밭에 나아가 이삭을 줍습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줍습니다. 볶은 곡식을 얻어다가 시어머니에게 드립니다. 그날 그날 있었던 일을 다 말함으로 궁금증을 다 풀어줍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위하여 자상하게 조언을 해줍니다. 그리고 며느리의 행복을 위하여 보아스라는 신사와 맺어주기로 결심하고 온갖 지혜를 짜내어 성사를 시킵니다.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상처만 남은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배려할 여유가 있을리 없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들입니다. 좋은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비젼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잇는 여건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지치고 낙심이 되어 자칫 서로를 원망하고 더 상처를 주기 십상인데 서로를 존경하고 아낍니다. 서로 기쁨을 주려고 온 힘을 다합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가정에 복을 주시기를 주저하실리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후반에 깜짝 놀랄 복을 주시고 어두운 가정을 밝게 하시고 슬픈 가정을 기쁘게 만드셨습니다. 가난한 가정을 부유하게 하시고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가정을 가장 행복한 가정으로 후반에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이웃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 이었고,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었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항상 부부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크나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데도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그래서 어느 날 젊은부부는 과일 한 상자를 사 들고 이웃집을 찾아갔다. 다과를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댁의 가정은 대가족 인데도 웃음이 떠날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싸움만 하는데, 선생님 댁이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웃집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들은 젊은부부는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뜻입니까?" 그러자 주인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니오' 하면서 생각이 모자라 물 그릇을 그곳에 놓아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젊은부부는 이웃집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화목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에도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올수록 자기 기분대로 날카로와져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말고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의 만족만 생각하기보다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서로 마음을 쓰는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는 가정이 후반에 더 좋은 가정이 됩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만났습니다. 그 흉년을 피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더 큰 흉년을 만나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 가난의 흉년,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생명의 흉년,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 도움주는 사람, 위로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인간 관계의 흉년 등 온갖 흉년이 겹쳐집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흉년은 영적 흉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상숭배하는 영적 환경에서 정상적인 좋은 믿음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조금 어려움을 만났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우상숭배의 땅으로 제 생각대로 내려간 때문입니다. 게다가 두 아들을 이방 여인과 결혼시킵니다. 결국 남편도 잃고 자식들도 잃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고난의 연속,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가정은 한 때 신앙이 좋은 가정인 듯합니다. 나오미의 남편은 엘리멜렉(1:2)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뜻입니다. 한 때는 그의 집은 베들레헴에서 유지였던 것 같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 왔을 때 성읍의 화제거리가 되었고(19) 그의 친척 보아스가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꿈을 갖고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더 잘 살려고 이민을 갔는데 모압 땅에 이주한지 10년 만에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남편도 잃고 자식 둘도 잃고 재산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정말 무서운 흉년을 만나 다 잃고는 비로소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은혜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비웃음거리가 될 것을 감수하고 오직 하나님께 돌아가고 영적으로 회복하는 것만이 최선임을 깨닫고 돌아옵니다.
그러자 우리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가정을 말년에 회복시켜 주십니다. 나오미 말년에 보아스가 며느리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자신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를 낳은 것입니다. 웃음을 주었습니다. 가계를 잇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기대를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유명한 자가 될 것을 희망하게 하였습니다. 소망을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후반이 훨씬 더 좋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다 끝났다. 내 인생은 종쳤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구 경기에 9회 말에도 역전 홈런을 칠 수 있습니다. 인생도 얼마든지 후반에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때 전혀 불가능한 일들이 해결되고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호와께서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어도 괜찮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몰려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질병이, 가난이, 실패가, 갈등이 여러분의 가정을 삼키려하고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문제를 정확하게 살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혹 문제의 원인이 아닌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욕심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영적으로 황폐해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곧 돌아 오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 오십시오.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면 하나님께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후반이 더 좋은 가정으로 역전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주 좋게 만드십니다. 보아스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기업무를 자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구속자'라는 말입니다. '값을 지불하고 사서 자유케 한다'는 말입니다. 보아스가 값을 지불하고 룻을 구속함으로 룻의 가정은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신분이 변화됩니다. 기업을 잇게 됩니다. 미천한 존재를 축복의 근원으로 만듭니다. 무명의 존재를 유명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룻이라는 가정을 통해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도도히 약속되어온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바로 룻이 그 가정의 족보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는 것보다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게 했습니다. 오벳이라는 아들을 주었습니다. 룻 때문에 나오미가 복을 받습니다. 룻 때문에 베들레헴 사람들이 기뻐하게 합니다. 룻이 낳은 자손 가운데서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베들레헴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십니다. 민족이 복받게 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은혜 안에 들어온 한 가족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불가능할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아들이 생깁니다. 한나가 자신의 인생을 절망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통곡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주십니다. 모세가 젊음을 다 잃어 버리고 광야에서 초라한 목동으로 살아갈 때 그의 후반전 인생을 기적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다가가시니까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모자에게 그치지 않는 기름과 가루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후반 인생을 더 아름답게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반전 인생을 더 빛나게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후반 인생을 더 영향력있게 사용하였습니다. 경기는 전반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반전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후반을 더 좋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여러분의 가정을 후반전에 역전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눈으로 아무리 둘러보아도 뾰족한 수가 생기기는 틀렸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가정의 후반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연합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리고 이해와 배려의 폭을 더 넓히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래서 후반에 역전시키는 하나님을 여러분 가정을 통해 경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널리 증거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역전승의 은혜
룻 4장 13~17절 / 박지온목사
벌써 한 20년 세월이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 날이 추석명절인데요. 시민운동장에서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슨 마음인지, '한번, 구경을 가야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가지고 혼자서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경기가 잘 풀리지 않더라 구요. 삼성 라이온즈와 다른 팀과의 경기인데, 어째든 이 플레이 오프라는 중요한 경기가 펼쳐졌는데, 그날 따라 삼성이 운이 따르지 않는지, 좋지 않은 성적으로 질질 끌려 다녔습니다. 9회 초까지 스코어가 어땠느냐 하면, 8:5로 지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패색이 짖었습니다.
이제 9회 초가 되니까 사람들이 슬슬 일어나기 시작하더라구요. 왜냐하면,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 이래가지고, '뭐가 경기가 되겠느냐? 하는 모양새들을 보니까, 전혀 힘도 없고...' 그래서 사람들이 슬슬 일어서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때 또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제 마음속에도 '일어설까! 8:5로 지고 있고 더 이상 가망성도 없는데, 일어서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니다, 끝까지 한번 지켜보자! 질 때 지더라도 끝까지 지켜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가지고 경기를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9회 말인데요, 2아웃까지 갔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루상에는 주자가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좀더 일찍 일어날걸, 괜히 버티다가 참 좋지 않는 모습보고 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9회 말 투 아웃이 되어졌는데, 그때 한사람이 루상에 주자로 나갔습니다. 1루에 채워지고, 그 다음 사람이 포볼을 얻어 가지고 또 2루에 나가고, 또 그 다음에 안타를 쳐 가지고 3루에 가고, 그래서 9회 말 2아웃인데 말루 상황이 되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타자가 누구냐 하면, '함학수'씨라고 여러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 타자로 나섰습니다. 투수가 있는 힘을 다해서 공을 던졌는데, 이 공을 '함학수'라는 선수가 받아 쳤습니다. 그런데 베??딱 맞는 순간에 이게 힘차게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날아갔느냐 하면, 담장 너머까지 날아갔습니다. 뭐죠? 홈런입니다. 9회 말, 2아웃, 역전 말 루 홈런에 사람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고함을 지르고 '함학수'를 외치고, 그때 제 마음속에, '끝까지 잘 견뎌냈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역전승이라는 것이 뭡니까? 다 지고 있던 게임, 포기할 수밖에 없던 그 게임이 완전히 뒤집어 지는 사건! 그래서 승리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그 승리가 뭐냐하면, 그게 역전승이죠.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이런 역전승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빨리 낙심을 합니다. 빨리 좌절을 합니다. 빨리 포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전승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끝까지 지켜보고 끝까지 남아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축복 속에 내 자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절대로 놓치지 마십시오.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 '목사님 너무 당연한 말이 아닙니까?' 물론 당연합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빨리 포기를 합니다. 낙심을 합니다. 좌절을 합니다. 주저 않습니다. 결국에는 그 뒤에 나타나는 엄청난 역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상황들을 역전시켜 나가십니다. 이 역전에 하나님을 여러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성경에 쭉 성공한 인물들,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던 인물들을 가만히 보시면 거의 다가 역전승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흐름을 가만히 보십시오. 제가 오늘 예를 몇 가지 들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벨론 신하들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넣으려고 온갖 계략을 다 꾸몄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계략을 따라서 실제적으로 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날 밤에 그들에게 자축연이 벌어졌습니다.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던 저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다니엘은 사자 밥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승리에 취한 나머지 잔치를 베풀고, 파티를 열고, 그래가지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사자굴속에 던져져서 죽을 줄로만 알았던 다니엘은 살아납니다. 반대로 사자굴속에 집어넣었던 그 바벨론 신하들은 도리어 사자굴속에 던져져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 우리가 성경을 가만히 보시면 참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벨론 신하들이 다니엘 대신에 사자굴 속에 던져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몸뚱이가 땅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의 몸을 움츠렸더라! 그러니까 완전한 역전승의 승리가 그 현장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만과 모르드개 사건을 여러분들이 잘 아시죠. 이 하만이라는 사람이 모르드개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멸절 시키려고 치밀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꾸몄던 그 계략들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지고 역전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하만이 모르드개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참에 완전히 다 멸절 시키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특별히 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서 높은 장대를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르드개 목을 가르고 그 모든 시체를 장대 위에 달려고...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웠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를 허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만이 장대 위에 높이 메어 달리고 모르드개는 살아나는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만이 뭘 몰랐습니까? 그때당시 왕궁에 이 에스더가 유대인, 이스라엘 여자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역전승의 역사가 성경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성경을 보시면 창세기에 4명의 족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렇게 4명의족장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4명의 족장들도 마찬가지로 역전승에 주인공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어떻습니까? 이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우상을 만들어서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지역이죠. 그러니까 갈대아 우르가 고향인 이 아브라함은 어릴 때부터 우상을 섬겼다는 것! 그러니까 우상 숭배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우상 숭배자였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완전히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역전승이라고 합니다.
이삭을 어떻습니까? 그때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얼마나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우물을 팠다하면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를 가만히 보시면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했던 이 블레셋 사람들이, 군대 장관, 왕들이 몰려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용서해다오!' 그러면서 용서를 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안겨줬던 이 블레셋 사람들이 도리어 화친을 요청하고,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역전승이라고 합니다.
또 야곱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원래 이 야곱에 이름의 뜻이 뭐냐하면, '속인다, 간사하다!' 쉽게 말하면 나쁜 놈이죠. 그런데 이런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꾸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했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해라! 너는 원래 속이는 자가 아니냐! 간사한 사람이 아니냐! 그래서 네 인생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네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겠다!' 하나님의 황태자! 그러니까 야곱의 인생이 완전히 역전되어 졌다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요셉을 어떻습니까? 이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고 저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요셉의 인생이 완전히 망해가는구나! 더 이상 가망성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요셉이 나중에 애굽에 총리대신! 전 세계를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어졌다는 것! 이 또한 역전승의 축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역전승에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답답해도 모든 일들이 자꾸만 꼬이고, 안 되는 것 같아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인생들을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겁니다. 절대로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의 사업들이 바닥을 헤메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내어쫓길 그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가 왔습니까? 또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상황들을 너무 잘 아십니다. 아니 잘 아시는 정도가 아니고, 이제는 여러분들을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 해 놨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야 됩니다.
왜, 우리가 역전승의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까?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진정한 승리자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에 대한 영적인 눈이 열리지 못하니까, 늘 낙심하고, 주저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류 최고의 역전승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물론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업에서 실패하다가 성공하는 것도 역전승입니다. 이번에 우리 총선을 잘 보셨죠. 이 총선 선거에서 뒤지고 있다가 역전하는 것도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보다도 더 위대한 역전승의 역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게 역전승에 최고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저주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건! 그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보십시오. 이 사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이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축배를 들었겠죠. '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제 우리가 승리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짓눌렀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사단에 역사를 한번에 날려버린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이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저주와 재앙에서, 모든 죽음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 사건!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전승에 최고의 승리자가 되셨다는 것!
여러분 예수님께서 역전승에 승리자가 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역전승에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참 낙심될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은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참 축복의 자리로, 진정한 승리의 자리로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룻기서입니다. 그런데 이 룻기서에 전체 주제가 뭐냐하면, 역전승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13,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룻기 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 어떠한 역사의 흐름으로 지금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지를 한번 확인을 해봅시다. "(룻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룻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오늘 이 본문 속에 보시면 룻이라는 여자가 나타나고 나오미라는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다 참 초라한 인생들입니다. 보십시오. 나오미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여기다가 두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룻은 어떻습니까? 룻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자로서 개처럼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자들, 이런 초라한 여자들, 그들의 인생들이 완전히 역전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뭐라고 했습니까? "(룻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인생을 완전히 역전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아들도 잃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나오미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 나오미 자신도 '나는 고통이다!' 할 정도로...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오미의 인생, 이런 룻의 인생을 완전히 역전을 시켰는데, 그 역전에 결과가 뭐냐하면 16, 17절입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어떻게 역전이 되어졌느냐? "(룻 4: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룻 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여러분 멋지지 않습니까! 처참한 인생들입니다. 초라한 인생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그런 비련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인생들이 이제는 완전히 역전되어졌는데, 어느 정도까지? 예수님의 조상이 되어지는 이런 축복의 자리까지! 우리가 이걸 보고 '역전승의 승리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족보 장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예수님의 족보 장에는 5명의 여자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족보 장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경에 마태복음 1장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족보가 쭉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여자들은 절대로 족보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족보도 아니고 메시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5명의 여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다말, 둘째는 라합, 셋째는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룻, 그리고 네 번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생모이신 마리아! 이렇게 해서 5명의 여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명의 여자들을 가만히 보시면, 인간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진짜로 인간 구실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첫째는 다말을 보십시오. 이 다말은 자기 시아버지와 불륜을 해 가지고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돌에 맞을 인생입니다. 그리고 라합을 보시면 성경에는 기생이라 되어있는데, 은밀한 말로 하면 이건 창녀입니다. 자기의 몸을 팔아먹고 살아가는 그런 창녀죠. 이 남자, 저 남자, 여러 남자들이 이 여자를 거쳐갔습니다. 또 룻은 어떻습니까? 결혼했는데 남편을 먼저 잃었습니다. 여기다가 개처럼 취급을 당하는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멀쩡한 남편 놔두고 다른 외간남자와 통정한 여자! 그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여러분 이 밧세바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남편 우리아가 저 전쟁에 나가 가지고 지금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아주 위험한 판국에, 이 여자는 자기 집에서 외간남자를 유혹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냐 하면, 다윗입니다. 이 다윗을 불러들여 가지고 통정을 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여튼 못된 여자죠. 이런 여자!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사람이 마리아인데, 이 마리아도 은밀하게 따져서 가만히 보시면 혼전에 잉태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면에서만 본다면 인간 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 장에, 영원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그 그리스도의 족보 장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놨습니다. 쉽게 말해서 역전승에 주인공이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들이 이러한 역전승에 주인공들이 될 수 있었느냐? 다시 말씀드리면, 역전승의 역사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첫째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역전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서 1장 16절에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읽지는 않았습니다 만은 앞에 보시면, 여기에 보시면, '과연 룻이 어떻게 해서 역전승에 주인공이 되어졌느냐?' 그 내용들이 나타나는데,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아멘. 참 중요한 고백이죠. 그 뒤에 후반 절에 보시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한마디로 말하면 이 룻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의 역사를 가지고 역전승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믿느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제대로 믿느냐? 이걸 보고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는 믿음의 전당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가만히 이렇게 살펴보시면, 전부다 믿음의 역사에 대해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고,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고,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라합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믿음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인생들을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못난 것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든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저는 분명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따지고 보면 똑같습니다. 누구하나 더 잘난 게 없습니다. 우리가 뭐 폼을 잡고 으스대고 돌아다니면, '참 저 사람 뭔가 멋있고, 능력 있고, 잘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전부다 못난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배웠으면 얼마나 많이 배웠고,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을 비교해서 보면 무엇하나 제대로 내어놓을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느냐?' 바로 이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믿음만은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물질 잃고, 건강을 잃고, 사람을 잃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나갑니다!' 그 믿음이 역전승에 주인공으로 만들어갔다는 것이죠. 그래서 역전승의 주인공은 어떻게 될 수 있느냐? 첫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입니다. 어떻게 인생에 역전승이 이루어집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룻이라는 여자가 베들레헴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룻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상한 말들이 나왔습니다. '저 여자는 역마살이 낀 여자다! 남편이 먼저 죽었다! 저 여자는 이방여자다! 이상한 여자다!' 그러면서 이 룻을 향해서 얼마나 입방아를 찌었던 지요. 쉽게 말하면 인간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여자, 인간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이런 인생을 전혀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 인생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축복된 자리로 이 룻의 인생을 인도해 갔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룻'이라는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룻이 잘나서요, 똑똑해서요, 능력이 있어서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룻이 예수님의 족보 장에 오를 수 있었던 그 모든 배경 속에는 하나님에 은혜가 작용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창세기 6장 8절에 보시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도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술 먹고 자식들을 얼마나 저주했습니까? 그런 노아가 믿음의 조상으로 어떻게 올라갔습니까?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이 축복된 역사 속에 노아가 함께 섰을 때에, 역전승에 주인공이 될 수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역전승에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짜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우리가 제대로 알고, 그 축복의 흐름 속에 우리가 함께 서야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나오미라는 여자가 나타나고, 룻이라는 여자가 나타납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오늘 이 룻기서에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룻입니까? 나오미입니까? 둘 중에 누구죠? 그런데 사실은 이 룻기서에 주인공은 룻도 아니고 나오미도 아닙니다. 누구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꼭 명심하십시오. 룻이라는 인생이 쭉 진행되어지고 결과가 너무 좋으니까, '룻이 주인공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꾸만 믿음이 올라가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고 아브라함이 주인공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진짜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룻의 인생을 변화시키시고, 나오미의 인생을 역전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진짜로 인생에 주인공이라는 것!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눈들이 확실하게 열려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나오미의 인생과 룻의 인생을 역전시킨 하나님이 참 주인공이다! 룻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룻의 인생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인생에 주인공이 누구냐?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나갈 때에 모든 문제와 모든 사건들이 완전히 역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부끄러운 간증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가정에 얼마 전에 큰 문제가 한번 일어났었습니다. 제 위에 형님이 한 분 계시는데, 본인은 열심히 한다고 사업을 했지만 이런 저런 모양으로 사업이 안되어졌습니다. 금융계 또 사체업, 이래가지고 돈을 여러 가지 이유로 당겨쓰다가 부도가 나고 나니까, 이제 전부다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체업자들, 금융계에 있는 사람들이 대거 저희 아버님 집에 몰려 가 가지고... 왜냐하면 보증을 섰기 때문에, 그래서 가정에 몰려가서 막 고함을 지르고, 큰소리 치고, 심지어는 빨간딱지가 붙고, 참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TV에서나 영화에서 봤습니다. 막 사체업자들, 소위 말해서 조폭들이죠. 이런 사람들이 막 몰려와서 고함을 지르고, 기물을 부수고, 빨간딱지가 붙고, 저는 지금까지 쭉 살아오면서, 뭐 영화 속에서 그런 일이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이런 문제가 저희 가정에 일어나고 나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던지요.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내가 목사 아닙니까! 왜, 목사의 가정에 이런 문제가 일어납니까?' 물론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가정과 가문에 일어났던 이 일들, '하나님, 왜 이런 문제가 닥쳐옵니까?' 그래서 얼마나 원망스럽고 얼마나 고통스럽던지요.
그래서 한동안 낙심에 빠져 가지고 힘이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그런 말을 하데요, 너무 어렵고 힘들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다는 그 말이 진짜 실감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고, 옆에서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웃음이 나지 않고,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막 하나님께 원망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시간이 쭉 지나면서 하나님께 기도가 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 가정에 이런 문제를 일으키신 것도, 또 이런 모든 사건들이 일어난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진행되는데...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길갈 때도 기도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기도하고, 잠을 잘 때도 기도하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통해서 저는 기도가 회복되어졌습니다. '하나님, 기도밖에는, 하나님의 이름 외에는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진심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사태들이 많이 회복이 되어졌고, 물론 아직까지 100%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만은,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지요. 왜, 제가 이런 치부를 말씀드리느냐 하면, 여러분 진짜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상황들, 힘들고 어려운 가정들이 있지 않습니까? 원망하지 마시고, 불평하지 마시고, 진정으로 여러분들이 중심을 다해서 여러분 속에 기도가 터져 나왔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태들을 역전시켜 나간다는 것!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역전승의 주인공들이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이번 한 주간 꼭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 건축에 모든 현장들, 하나님께서 날마다 역전승의 은혜를 체험케 하실 것입니다. 또 우리 목사님이 지금 병중에 계시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목사님을 통해서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가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개인, 여러분의 모든 사업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역전승의 주인공으로 반드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역전승의 주인공이 되시고, 이에 따른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들을 날마다 누리시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복하는 공동체
룻기 4:13-17 / 정동수목사
룻기서를 잘 알고 계시죠? 구약 신약을 통틀어 보더라도 여인의 이름으로 된 성경은 룻기와 에스더뿐입니다. 더군다나 에스더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룻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여인으로서 책이름이 명명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입니다. 아마도 놀라운 신앙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룻의 이름이 책이름이 된 것 같습니다.
이 룻이라는 여인의 이면에는 나오미라는 훌륭한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두 여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과부였습니다. 이 두 여인의 이야기가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있었는데 바로 이 과부만 남아있는 한 집안을 통해서 그리고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었는지 오늘 이 아침에 한번 생각해보면 큰 은혜가 될줄로 믿습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이 잉태케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은 동네 여인들이 대를 잇게 됨을 나오미를 통해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기쁘게 끝을 맺는 룻기서는 처음에는 그렇게 기쁨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늘 축복하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이 땅위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노블리스오블레제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블란서 말인데 노블레스는 사회의 지배층인 엘리트 그룹이 사회전반에 도덕과 윤리적 측면이서 끼치는 영향을 뜻하며 오블레제란 정말로 선택받은 엘리트들이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자기의 욕심과 자기의 명예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미쳐야하는 윤리적인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어 자녀로 선택해주시고 이민족 이나라를 온지구촌을 지킬수 있는 노블렛으로 불러주신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정체가 이럴진데 이 룻기서를 통해서 이 사상을 발견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룻기서를 1장부터 살펴보기도록 하겠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이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룻1:1-2)
룻기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이란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면 분명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나오미는 행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가정은 신앙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또한 튼튼한 가문이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정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모합이 어디입니까? 창세기 19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 롯이 소돔땅에서 살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소돔땅을 멸하시기로 하시고 롯의 가족을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때 롯의 부인은 끝내 뒤돌아 보아서 소금기둥이 되었고 롯은 남은 두 딸과 동굴에 살게 되었습니다. 두 딸은 자손이 끊김을 걱정하여 롯에게 포도주를 잔뜩 마시우게 하고 동침하여 자손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이 모압과 압몬자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압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압에서 살고 있는데 갑자기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홀로 남은 나오미는 두 모압여인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그러나 10년후 두 아들도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흉년이 들었다고 세상으로 가지 말길 바랍니다. 담임목사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자리를 비우지 말고 더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이방땅으로 가서 결국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남편을 앞세우고 두 아들을 앞세워 보낸 그 여인의 가슴속에 얼마나 기쁨이 없었겠습니까? 이렇게 상실 그리고 죽음과 이변으로 룻기서는 출발합니다.
나오미는 고향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축복하는 마음으로 그 젊은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개가하여 새삶을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며느리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고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 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큰 며느리 오르바는 어머니를 결국 떠납니다. 오르바의 뜻은 불성실이란 뜻입니다. 룻이라는 이름에는 동반자·파트너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값을 하는 것인지 룻은 1:16∼1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방여인 룻의 가슴속에 이런 하나님의 신앙이 어디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추측으로 가족을 잃은 나오미가 쓰라린 가슴을 안고 회개하며 과부 며느리들을 교육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역경의 터널, 고난의 터널을 지날때가 있는데 하나님께 더 기도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두 과부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가 흉년든 베들레헴을 떠난 지 최소한 10년은 넘었을 것입니다. 요즘 강산은 10년도 안되어 변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난 지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들은 나오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흉년 들어 고향을 버리고 떠나더니 남편 잡아먹고 아들 앞서 보내고 거지로 돌아왔네 재수 옴붙은 집안이니 소금뿌리고 가까이 하지 말라" 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들은 나오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가졌던지 어떤 위치던지 어떤 상태에 있던지 나오미는 나오미로서 받아주었습니다. 어느 지체가 교회가 싫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면 따뜻하게 받아주십시오. 이와 같이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오미는 회개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남보다 본인이 먼저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닙니다. 마침 보아스가 일꾼들과 얘기하는데 낯선 처녀가 보여 묻습니다. 세상 인심같으면 일꾼들은 "어디서 굴러온 여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는 것을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입니다" 라고 칭찬했니다.
보아스는 부러울 것 없고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쓰러져가는 집안의 과부 이방여인에게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이러한 좋은 얘기를 부자 보아스가 들었다는 것을 보면 베들레헴 사람들은 서로 축복하고 덕담을 나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축복할 수 있는 크리스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또한 목사님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목사님의 설교가 가끔 질릴 수도 있습니다. 기교가 없어도 된장찌개와 같은 목사님의 설교가 최고입니다. 안수집사, 사역자,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축복하기 바랍니다.
룻이 집으로 돌아오자 나오미는 반갑게 맞으며 이것저것 묻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땅에서 보리 이삭을 계속 줍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보아스가 없는데도 나오미는 보아스를 축복했습니다.
또한 며느리도 축복하였습니다. 3:1을 보면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4절에는 프로포즈를 권고합니다.
이스라엘에는 형이 죽고 형수가 있으면 형수를 취한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형의 대를 잇게했습니다. 따라서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는 룻을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보다 우선권을 가진 기업무를 자가 있어 보아스는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묻습니다. 그 기업 무를 자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함으로 보아스는 룻을 취하게 됩니다.
4장 11·12절을 보면 온 장로들이 이 가정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화와께서 이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해서 룻이 아기를 낳았으니 나오미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룻이 혼인하여 아들를 낳자 온동네가 이들을 위하여 축복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교훈 몇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축복하는 공동체
예수 믿는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복덩어리로 축복하심을 받아 이미 많은 것을 받은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셨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받았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받은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하늘의 재산을 받을 상속자로 이세상에서 필요하다면 명예와 지위·재산은 덤으로 받을 것은 다 받았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우리는 지금도 거지처럼 하나님 주십시오 하는 자가 아니고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은 존재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다가졌다고 하지만은 진짜 가져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줄로 믿습니다. 그 방법은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 교회는 온 이웃을 축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아주 극한 상황 축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었어도 며느리들을 축복하며 보내려고 했습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돌아와도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시험을 잘 못치르고 왔어도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만큼 길러주신 부모님께 노년에 건강하시라고 축복하시기 축원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킵니다. 지금 배우는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기를 바라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가문이 아니더라도 우리교회 우리나라에서 나라를 이끄는 인재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할 때 축복하는 것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3. 축복하는 자 앞에서는 환경도 바뀌는줄로 믿습니다.
2장 3절을 보면 보아스가 우연히 갔다고 했고 4절에는 마침 보아스가 나왔는데 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연이란 마침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여러분 이웃에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이 녹아지고 환경이 변할 줄로 믿습니다.
4. 축복하는 자는 그 복을 바로 자기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를 축복했을 때, 보아스를 축복했을 때, 결국 나오미가 축복 받았습니다. 장로들이 베들레헴을 축복했을 때 이 땅이 축복 받았습니다. 나오미의 자손에서 베들레헴에서 가장 황금기에 다윗왕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현재 온세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유명합니다. 나오미는 자기의 손자가 다윗인지 모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구주, 온세계의 구주가 이 가문으로부터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나온 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설교할때마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복합니다.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정치가요 예술가요 과학자요 목회자가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따라서 온 지구촌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게 축복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대가 아니더라도 2대 3대에서 꼭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문에서 여러분의 신앙 공동체인 이 교회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회복하게 하시는 은혜
룻 4장 13~17절 / 성홍모목사
오늘은 “회복하게 하시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구약에서 룻기라는 성경은 누가 그 책을 기록하였는지 저자를 알 수 없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다윗 왕 이후에 다윗을 예찬하는 어떤 사람이 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탈무드 “바바 바드라”에서는 사무엘 선지자가 기록한 것으로 말하는데,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나눌 때에 모세오경의 율법, 예언서와 마지막으로 성문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룻기가 우리 성경에서는 역사서로 분류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거룩한 문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문서 중에는 시편과 잠언과 욥기의 지혜문서와 함께 다음으로 “다섯 두루마리”라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아가서, 룻기, 전도서, 애가, 에스더 이상 다섯 권의 책을 다섯 두루마리라고 합니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읽었으며, 룻기는 무교절에 읽었고, 애가는 아브월 9일인 성전파괴기념일에 읽었고, 전도서는 장막절에, 에스더는 부림절에 읽었습니다. 현대에 와서 룻기는 가장 목가적인 책이라고 칭찬하며, 시적인 예술성과 아름다움이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룻기를 기록하는 목적은 룻이라는 여성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다윗왕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 인물이냐, 그가 메시아의 족보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실패한 한 사람을 어떻게 받아주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어떻게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으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따뜻한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좁은 동리에서 스캔들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사건인데도 당당하게 한 사람을 세워주고, 회복시키고,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으로 룻기는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소원하십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도 재기하게 하고, 망하게 된 사람도 위대한 인물로 일어서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징검다리를 놓는 인물로 사용하십니다. 어찌 보면 정상적인 여인들의 이름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 반하여 비정상적인 여인들은 위대한 인물로, 그들의 족보에 당당하게 기록해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극히 연약한 사람을 들어 강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여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사람이요, 사회적인 약자요, 부적절한 관계로 들어온 사람들인데, 정말 귀한 존재로,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룻기 1장에서부터 읽어보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동리에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부인 나오미와 함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흉년을 피하여 모압이란 이방 땅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한다고 이민 갔는데, 10년 동안 살면서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으며, 부인 나오미는 모압의 여인 룻과 오르바를 맞이하여 두 아들 말론과 기룐으로 장가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라는 여성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도 땅이 무너질 것인데, 두 아들을 이방 땅에 묻어야 하는 쓰라린 아픔을 겪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처량하기도 하고, 남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 부인들 책임입니까? 우리나라 같으면 남편을 어찌한 여자들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정신을 차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람이 성공해서 고향을 찾는 것은 좋으나 다 망하고 돌아온다는 것이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동안 팔았던 땅을 되찾고, 일어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고향인 베들레헴은 이제는 풍년이 들었고, 먹을 양식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두 며느리가 함께 따라나서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간곡하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자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각기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남편을 맞아 잘 살라고 하였습니다.
두 며느리가 소리 높여 울며,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단호하게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의 입 맞추고 돌아갔지만, 룻은 절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16-17의 룻의 간절한 소원을 그대로 읽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룻은 모압의 여성이었지만, 유대인에게 시집을 왔으면 이제 자기는 유대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에 떠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의 젊은 여자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나와 반겨 맞아주는 것도 불편할 정도로 절망감에 쌓여 있었습니다. 온 성읍의 사람들이 나오미를 알아보고 떠들며 인사합니다. “이 사람이 나오미가 아니냐, 나오미가 왔다.”고 반겨 맞이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희락이라는 말인데, 나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희락이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 나오미의 심정이 얼마나 처절하였을까, 그의 심정을 상상해보았습니다. 한 여성으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에 장가든 두 아들이 따라 죽었으니, 마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름이었습니다.
두 여인이 베들레헴에 들어왔을 때에는 한참 보리 추수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룻이 일어나서 시어머니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밭으로 가서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이 때에 나오미는 며느리의 헌신에 감동을 받고 허락해주었습니다. 룻이 추수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을 따라가서 한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그 밭은 우연히도 죽은 엘리멜렉의 친척이요, 동리에서도 대단히 유력하고 덕망 있는 보아스라는 사람의 소유였습니다. 때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자기 밭으로 나와서 보리를 베는 자들에게 밭에서 이삭을 줍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곡식을 베는 일꾼들을 부리는 사환이 일러주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모압 처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매우 착하게 보고는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으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하며, 정말 친절하게 배려해주었습니다. 일꾼들에게 단단히 이르기를 “이 젊은 여성을 건드리지 말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룻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라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밭에서 추수하며 일하는 일꾼들이 식사할 때에도 룻을 오라고 하여 떡을 먹게 하였고, 곡식을 거두면서 야박하게 모조리 거두지 않고, 이삭을 떨어뜨려 넉넉하게 주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낯선 땅에 찾아온 여인에게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룻이 하루 종일 밭에서 주은 이삭을 떨어보니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한 에바는 22ℓ 정도였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보이고 일꾼들이 준 떡을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보아스가 적극 관심을 가지고 룻을 돌아보는 것을 보고는 보아스로 하여금 자기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재산을 다시 찾아주고 기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 후에 계속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고,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이삭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몇 주간 계속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을 불렀습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룻이 시어머니의 시키는 대로 “다 행하겠습니다”고 말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좀 어찌 생각해보면 세상에 이런 스캔들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일을 시키는 어머니나 그렇게 하라고 그대로 순종하는 젊은 여자도 다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하루 종일 타작하였고,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누었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룻이 시어미가 시키는 대로 보아스가 덮고 있는 이불을 살며시 들치고 들어가서 옆에 누었습니다. 보아스가 자다보니 한 여인이 자기 곁에 한 이불 속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밤 중에 보아스는 놀랐습니다. 몸을 돌이켜 보았더니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었습니다. “당신 누구요”하고 물었더니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집안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업을 무를 자는 재산을 되찾아주는 것과 결혼하여 자식을 이어주어야 하는 두 가지의 과업이 있었습니다. 이 밤에 기업을 무를 자가 된다는 말은 자기를 아내로 받아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룻이 기업을 무를 자라는 말의 뜻을 잘 알고 한 말인지, 어머니가 하는 말대로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아스가 자상하게 말해줍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참으로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기업을 무를 수 있지만, 자기보다 더 가가까운 친척이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먼저 기업을 물러주면 좋지만, 그가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자기는 틀림없이 기업을 물러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그 밤에 발치에서 아침까지 자고 가라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새벽에 여인을 깨우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때에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 룻이 타작마당으로 들어와 함께 자고 간 것을 알지 못하도록 단단히 이르고, 룻의 겉옷을 펴서 보리를 여섯 번이 되어 주면서 성읍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네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 시어머니에게 빈손으로 가지 말라”는 말 정말 귀한 말입니다.
이후에 보아스는 성문에서 모든 사람을 모으고 기업을 물러주는데, 먼저 자기보다 가까운 친척에게 책임을 감당할 것인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나,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아 그에게 대를 이어주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의무를 포기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표시로 그의 신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확정하고, 땅을 되찾아주고,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동리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의 기업을 나오미에게서 사들인 것을 증인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고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에 증인을 삼았습니다.
성읍에 사는 모든 백성들과 장로들이 증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축복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4:10-11)라고 했습니다. 아마 보아스가 나이 많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였던지, 결혼하여 아내가 있었다고 해도 아들이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상속자를 낳아달라는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그의 아버지가 살몬이었는데,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을 아내로 맞아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맞아 결혼하였고,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룻으로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동리의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모여들어 축하하였습니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축복하는 말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서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한 여인의 며느리가 되신 분들은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벳이라는 뜻은 “섬기는 자”, “봉양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벳은 다윗왕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로 다윗에게는 할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이 룻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 시어머니를 따라 온 모압의 여인 룻을 통하여 장차 메시아가 오실 계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에게 한 쪽의 창문을 닫으셨지만 그러나 다른 창문을 예비하시고 열어주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줍게 되었는데, 그것이 사람 편에서 보면 우연이라는 말을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보아스보다는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에게 물질적인 손해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기업 무를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게 하시고, 보아스가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크냐 하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그를 존중히 여겨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귀한 여인, 세상에 소중한 사람, 그렇게 마음이 고운 여인은 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룻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좋은 마음과 넉넉한 기다림과 후한 인심으로 실패한 한 가정과 실패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은 유력한 사람이요, 인심이 후한 사람이요, 사람을 볼 줄 알았고, 실패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회복시켜주는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우리 남자들은 보아스와 같은 넉넉하고 책임을 감당하고, 후하고 인심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천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가 빼앗고 차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하였다고 생각하고 낙심하지만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들어서 강한 사람,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며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시고,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은 회복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복되게 하여 주십니다. 회복하게 하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나타난 구원 역사
룻 4장 13~17절 / 이필재목사
이 주간에 북한이 핵실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뉴스 때문에 온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이 되어서 성명서를 이미 서둘러 발표했고 강대국들은 아주 초긴장으로 시간마다 이 문제를 뉴스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온 세계가 이렇게 긴장을 하는데 가장 긴장하고 또 이 일로 인해서 가장 피해국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 대한민국은 가장 태평한 것 같습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우리는 송편 해먹고 오고 갈 거 다 가고 놀러갈 거 다 가고 누구의 얼굴에도 불안한 감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보 불감증이라고 보도를 하는데 다만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니까 우리 열심히 기도하는 대한민국 어린 양들의 새벽 기도를 들으셔서 이 민족의 가장 유능하고 훌륭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믿음만은 우리가 확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선택을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다른 성경에 비해서 룻기는 특별한 내용의 성경입니다. 다른 성경은 그 범위가 광범위한데 비해서 룻기는 한 가정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우 불행하게 되는 한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되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나타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입니다. 더구나 그 전체 이야기가 이민을 오고간 두 여인의 생애를 그린 고난스럽고도 조금은 로맨틱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전체 내용에 나오는 두 여인의 이름이 하나는 나오미요 하나는 룻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시어머니요 룻은 며느리가 된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국적이 다른 사람인데도 운명적으로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식구가 됩니다. 국적을 먼저 말하면 나오미는 유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엘리멜렉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기룐과 말론이라는 아들 둘을 낳아서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의 어려움은 그 나라에 말할 수 없는 흉년이 들어서 식량 부족으로부터 이 가정이 시작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 땅은 흉년이 많이 드는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에 갔다가 기근을 만나 먹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까지 내려가는 역사를 여러 번 우리가 발견할 수 있고, 야곱의 72명 가족도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가서 결국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게 되는 역사도 성경에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 때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온 국민이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기후 조건에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내렸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렇게 비가 안 오는 세상이 있습니다. 1년에 비 한 방울 안 떨어지는 곳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먹을 식량을 구하기 힘든 데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나오미의 네 식구는 흉년이 들어서 결국 모압땅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합니다. 모압은 어떤 나라인가? 유대 땅 남동쪽 사해바다 동쪽에 있는 조그만 부족 국가입니다. 이 나라는 유다 나라와 사이가 대단히 좋지 못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 나라 사람들이 모압국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왜 멸시를 했는가? 이것도 역사가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갈 때 형님 아들 조카 롯을 아들 삼아 양자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조카 롯이 장성해서 따로 살림을 나서 살고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나타났습니다. 롯은 그 때 심판의 자리에서 겨우 피해 목숨을 건지는데 그의 아내는 세상에 미련이 있었는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 되었다는 기록을 우리가 성경에서 봅니다. 아내를 잃은 롯이 두 딸을 데리고 외롭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딸들이 이상한 생각을 합니다. “우리 종족은 이제 끝났다. 어머니는 안계시고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많아지는데 우리는 딸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대에서 족속이 끝이 난다.” 그러니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종족을 번식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 종족은 아버지 밖에 없으니 어떻게 하냐?” 그래서 두 딸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술을 많이 먹이고 아버지와 더불어 동침을 하여 종족을 번식시켰습니다. 그래서 큰 딸과 함께 번식된 종족이 모압이요, 작은 딸과 번식된 종족이 암몬이라는 족속이 되어 오늘까지 내려옵니다. 그래서 유대 나라 백성들은 이 역사를 알기 때문에 “이 모압 족속, 암몬 족속은 사람도 아니다.” 멸시해 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 가족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멸시하는 모압으로 이민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모압 이민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한마디로 큰 실패를 가져옵니다. 모압으로 이민 간 가정은 아마도 이민 살기가 힘이 들었던지 이민 10년 만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견디지 못하고 그 땅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또 두 아들은 그곳에 가서 사니까 할 수 없이 현지 여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첫째 며느리는 오르바요 둘째 며느리가 룻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두 아들도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모압 이민은 10년 만에 완전히 망해버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슬픈 나오미는 종족이 다른 두 며느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내 고향으로 역이민을 해서 돌아가겠다. 너희들은 이 땅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서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 그러면서 길을 떠나려고 하니까 며느리 중에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이민을 가겠다고 나섭니다. 사실 그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유는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사는 것은 멸시나 천대 받을 일이 없습니다. 유대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도 그 인격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룻이 유대 땅으로 가서 사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압 여자요 이방 여자인 룻을 베들레헴에서 우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곳에 가서 억지로 산다고 해도 그 멸시와 천대를 이 여인이 도저히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네가 가서 절대 살지 못한다. 너는 여기서 살아라.” 하면서 끝까지 만류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룻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불쌍하게 된 나오미 시어머니를 그냥 보낼 수가 없습니다.” 절대 따라 나섭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오미는 남편 없는 자기 며느리 룻을 데리고 슬픔을 안고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을 향하여 슬픔의 노래를 부릅니다. 본래 ‘나오미’란 이름의 뜻이 ‘희락’이나 ‘즐거움’이라는 뜻인데 “내 이름을 마라라 불러주오.” ‘마라’는 ‘고통’이나 ‘쓰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노래가 성경에 나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내 이름이 어찌 나오미가 되리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노라. 내 이름은 오늘부터 마라라 불러주오.” 이제 두 사람의 유대 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이삭줍기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나오미나 룻과 같이 된 사람이 가장 살기가 힘든 사람들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시대에는 여인들의 사회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고, 누가 동정해서 도와줘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 사회가 정한 복지법이 나옵니다. 한번 추수가 지난 자리를 다시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거기 무엇이 좀 남아있는 것은 그런 불쌍한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만약 흐트러지고 좀 떨어진 이삭을 싹싹 긁어모으는 주인은 아주 인색하고 나쁜 사람으로, 하나님께 벌 받을 사람으로 그렇게 사회복지법을 만들었습니다. “흘려진 것은 불쌍한 사람들이 주워다 먹을 수 있게 하라! 그리고 가능하면 밭의 마지막 한 줄은 추수하지 말아라!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그 한 줄에 희망을 걸고 살 수 있도록 한 줄을 남겨라.” 여러분, 맥도날드 같은 데서 ‘프렌치프라이’ 만드는 감자가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미국에서는 모두 ‘아이다호 감자’를 씁니다. 왜? 그래야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다호 감자’ 밭주인은 추수하면서 맨 마지막 밭고랑의 감자는 성경말씀대로 추수를 안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 밭고랑에 와서 호미로 그 감자를 캐다가 식량을 삼게 됩니다. 하나님이 큰 복을 주어 ‘아이다호 감자’가 아니면 ‘프렌치프라이’가 안 되는, 그래서 미국 전역에 그 많은 맥도날드에서 모두 그 감자만 쓰니까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또, “떨어진 이삭을 주인의 것이 아니다. 줍지 말아라. 그것은 어려운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이삭줍기가 서구 사회에서는 문화화 되었습니다. 우리가 눈에 익은 프랑스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1857년에 나온 “이삭줍기”라고 하는 그림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 그림을 보시면 추수의 농장에서 주인은 말을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꾼들이 추수한 곡식의 단을 마차에 가득하게 실었는데, 바로 그 뒤를 세 여인이 앞치마를 두르고 이삭을 줍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법은 구약 신명기 24장에 극빈자를 위한 사회복지 규례입니다. 신명기 24장 19절에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좀 흘려서, 좀 남겨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을 쌓아놓을 수 있도록 하라. 싹싹 긁어서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게 그렇게 하지 말라.” 결국 룻이 고달픈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바로 할 것이 이삭줍기 밖에 없어서 그것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잘 나타납니다. 밭주인을 아주 잘 만난 것입니다. 농장주인 보아스가 룻의 효성에 너무나도 감복되어서 어디까지 되었느냐 하면 “네가 이 여인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되겠다.”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실 당시로서는 이방 여인과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그 문화를 깨뜨리고 합니다. 룻이 말합니다. 2장 10절에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그렇게 말합니다. 보아스의 대답은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너에 대한 좋은 소식을 내가 다 들었느니라.”
이 성경의 이름이 “나오미”가 되지 아니하고 “룻기서”가 된 것은 룻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확실하게 나타내려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 룻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된 이유는 쓸모가 없게 된 불쌍한 인생의 나오미를 버리지 아니하고 지극한 사랑을 베풀고 베들레헴 이민이 주는 멸시와 천대를 감수하면서 나오미를 돌보았다는데 하나님의 감동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를 영원히 나쁜 놈이라고 규정합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나쁜 사람입니까? 처음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바라보았을 때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이 사람만 나와 함께 있으면 내 목적이 다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는데 나중에 예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잡혀가는 쓸모가 없어진 예수를 버리면서 돈 몇 푼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에서 은 삼십을 건지고 넘겨줌으로써 끝냈기 때문에 영원히 나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실 보면 신자들도 복 받을 사람과 반대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 없는 늙은 외국 시어머니를 어디다 쓰겠습니까?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무거운 짐 하나를 내가 만들 뿐입니다. 더군다나 돈이 하나도 없어서 이삭을 주어다 그를 봉양해야 되는 이런 일이 얼마나 고달픈 삶입니까? 그런데 그의 올바른 삶의 방향과 철학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 룻기서가 주는 영적 구원의 보편성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성이 있다.” 즉, 유대 사람들의 고정 관념으로 모압 사람들은 저주 받은 백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조상 적부터 도덕적 패륜의 자식들이요 아브라함을 배반한 배은망덕의 죄의 종자들이요 소금기둥이 된 세속의 대표적 조상을 둔 그런 패거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종자들이요 동물성 피 흐름의 족속이다.” 이렇게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룻을 통해서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교만한 신앙을 수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이 나타나는 성경입니다. 오늘 말씀과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이야기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 진리를 우리들에게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이야기는 아브라함 때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고 하고 42대의 역사에 나타난 이름들을 전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족보의 이름의 서열 가운데 여자 이름이 넷이 나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마리아입니다. 누구도 차지하지 못하는 메시야 혈통의 족보에 여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룻은 보아스와 결혼을 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으며 맨 마지막에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로써 멸시받던 모압 족속은 유대 사람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아브라함 족보에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이방 민족이요 과거가 부끄러운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구원의 보편성 진리를 확실히 했다는 것이 룻기서의 신학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이 말은 “종족이 다른 신분이지만 나는 어머니 백성으로 귀화해서 어머니 백성으로 살겠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것은 “종교가 다른 신분이지만 내가 개종을 해서 어머니의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룻기서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서와 요나서는 히브리인의 고정 관념 신학을 완전하게 수정하는, 이방 세계의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 진리를 제시하는 가치관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지식 자랑만 하고 복음을 철학적으로 비판하고 나설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의 주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갈대아 우르에서 이민 온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당대 최고의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로 삼아 애굽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인신매매자에게 팔려온 나그네의 신분입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지도 능력이 뛰어났던 통치자가 누구냐? 세계 역사가들은 누구나 다 모세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80세의 나이에 가장 나쁜 조건에서 가장 긴 시간 40년을 민족 지도자로 인도한 지도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입니까? 노예 신분 때문에 살 수가 없어 역청 바른 갈대 상자에 띄워 운명적으로 나일 강에 떠내려가던 어린 아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역사하신 겁니다.
이 룻기서의 또 하나의 교훈은 인간의 고난 역사는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룻을 보십시오. 남편이 죽은 젊은 미망인으로 돈 한 푼 없이 인종이 다른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멸시받으며 남의 집 추수가 끝난 빈 밭을 구차하게 구부리고 이삭을 주워서 끼니를 연명하였습니다. 그 생활을 상상해 봅시다. 그런데 그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니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반열에 드는 사람이 되었고 인류 역사에 국경을 초월하는 인종화합의 다리 역할, 모압 족속과 그리고 유대 족속이 결혼할 수 있을 길을 그가 열어놨습니다. 그래서 이방 세계의 구원의 빛을 그가 보여주었습니다. 서구 사회는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믿음의 가정에서 딸을 낳으면 ‘Ruth’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성 안에서 우리 삶을 조명하는 이 룻기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룻이 먹고 살 수 없게 된 가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던 일이요, 그래서 멸시하는 모압 족속이 사는 땅으로 이민을 간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다시 역이민을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이삭을 주워서 겨우 겨우 먹고 사는 구차한 생활도 하나님의 우주 통치권 안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일이요, 죽음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고 인종 차별 받는 것도 나쁜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주적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있던 일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이방족이라고 규정하고 절대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고 믿는 것이 히브리인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의 보편성 진리를 이루기 위해서 모압 여인 룻을 끌어들여서 메시야 탄생의 조상을 삼으신 것입니다. 유대 땅에 기근이 들어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민을 간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룻이 그토록 슬픔의 주인공이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요 남편 잃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구차하게 바구니 들고 보리 이삭 주우러 다닌 그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들어있던 것입니다. 그러한 신학의 기초와 신앙의 관점으로 내 생애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내가 살고 있는 모든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론에 있는 매우 담대하고 자부심을 갖는 크리스천의 삶이 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규정하는 그런 기준에다 나를 맞추어서 나의 삶에 실망을 가져온다면 예수를 믿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독일에서 나치 활동이 한참 심하게 일어났을 때 유대 사람을 거의 다 죽였습니다. 600만 이상이 죽지 않았습니까? 15살이 된 유대인 소년 하나가 살기 위해서 도망을 갔습니다.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이렇게 생각했다고 회고록에 나와 있습니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싸울까?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서 서로 도우면서 사이좋게 살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고 싸워야 될까? 내가 어른이 될 때는 싸움 없는 세상 만들기 위하여 내 몸을 바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자세로 와신상담(臥薪嘗膽) 그 일을 위해서 노력을 해서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라고 하는 “핵무기와 외교정책”이라는 논문을 써서 전술 핵무기의 한정적 사용에 의한 유연 대응전략을 주장함으로 전략연구가로 미국에서 인정을 받아 그것 때문에 대통령 보좌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전통화되어오던 국무성의 외교정책을 다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연구한 독자적 정책을 폈습니다. 그는 교제하지 않았던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중미협상의 길을 열었습니다. 월맹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중동평화에 놀라운 공헌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계 평화의 공을 인정받아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바로 헨리 키신저 박사입니다. 그 시절에 그가 없었으면 세계 운명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왜 저렇게 싸울까? 내가 어른이 될 때 싸움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공헌을 해야지!’ 이 한 소년의 꿈이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그가 유대인 출신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살 수가 없어 쫓겨 도망가는 이민자 소년 하나를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일하겠다.” 룻이 멸시받는 모압 여인으로 유대 땅의 서글픈 이민자였으나 아브라함 족보의 여인이 되고 지금까지 그 이름이 온 세상 서구 사회를 빛내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이제 앞으로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을 들어서 21세기에 하나님의 인간 구원 사역에 크게 쓰실 것을 우리가 희망하면서 날마다 기도를 드리고,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서도, 우리 갈보리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도 세계에 빛을 비추는 비밀의 경륜을 우리의 고달픈 삶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반기문 장관이 21세기의 세계 평화에 가장 큰 공로자가 될지 누가 압니까? 나의 배후에는, 또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지금도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음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룻기서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영적으로 저희들이 깨닫게 하시고 나의 배후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이 나를 인도하시며 피곤하고 고달픈 좌절된 인생의 모든 순례자의 여정에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것을 저희들이 영적으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21세기는 대한민국 때문에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시고 세계에 죽어가는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대한민국 교회의 선교 사역 때문에 모두다 구원을 받는, 가장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쓰임 받는 국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구원의 계보는 계속된다
룻 4장 13~21절 / 류영모목사
. 장례식에서 결혼식으로(4:13)
목회를 하다보면 새벽에 장례식 오후엔 결혼식을 주례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룻기는 문이 열려지면 1장 장례식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와 장성한 두 아들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4장 룻기 마지막 부분에서는 결혼식이 거행됩니다. 신혼의 달콤한 입맞춤으로 룻기는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룻기는 끝이 유쾌하고 기쁨 해피엔딩 - 나아가 아름다운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룻기 1장의 그림은 "남겨진 여인들의 고통"입니다. 남편 잃고 버려진 여인들의 눈물입니다. 2장의 그림은 "은혜의 눈빛"입니다. 룻은 하나님의 은혜의 눈빛 한 번, 이삭 한 줌,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3장을 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린다면 "안식을 기다리는 여인"을 그릴 것입니다. 4장의 그림은 "행복한 결혼식"입니다. 이 결혼식으로 남겨진 여인의 고통은 사라집니다. 안식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에게 안식이 주어집니다. 4장의 결혼식은 천국 혼인잔치 신랑 예수를 예고해 줍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다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차겠네 우리의 주님과 함께 있을때는 영원한 기쁨있겠네
1장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만 4장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1장에서는 가난에 주린 배가 보입니다만 4장에서는 함포고복 부른 배가 보입니다.
1장에서는 으이으이 장송곡소리가 들려옵니다만 4장에서는 딴딴딴딴 웨딩마치가 들립니다.
1장에서는 무너지는 가정의 이야기가 4장에서는 회복되는 이야기로 바뀝니다.
1장에서는 모압에 남겨지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4장에서는 베들레헴 스타가 됩니다.
1장의 장례식은 4장 결혼식으로 바뀌어 집니다. 인생 역전의 드라마 그것이 룻기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모아 모아서 오늘 본문 시작하는 4:13절 "이에"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4: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룻의 프로포즈는 위기를 만나지만 보아스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재판은 끝이 났습니다. 재판이라고 하면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서로 존중해 주고 축복해 주며 재판을 합니다. 패배자에게 침을 뱉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참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재판은 끝이 났다. 이에 행복한 결혼식이 펼쳐졌다 하는 이야기로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장을 상상하면서 사람들은 몇 가지 의문점을 갖습니다.
보아스는 상당히 나이가 많았을 텐데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보아스는 부인을 잃고 지내던 홀아비인가 아니면 부인을 두고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 부인으로 룻을 맞이한 것인가? 그러나 정작 룻기 저자는 이런 문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 했다고만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성경이 말하지 않는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 연구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당신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어뚱한 관심은 성경의 관심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관심일 뿐입니다.
13절 한 절 안에서 룻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습니다. 한절 안에서 그렇게 후딱 10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참 행복하고 달콤했던 10개월이었으리라 쉽게 짐작이 됩니다. 여기서 룻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룻으로 임신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임신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이 한마디 고백을 통해 보아스와 룻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결혼을 하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모든 비극과 눈물, 모든 괴로움과 염려를 털어버리는 한 마디 말입니다.
II. 축복의 여인(4:14-17)
룻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베들레헴 마을에 전해지자 여인들이 나오미를 찾아가 축하인사를 합니다. 이때 축하 인사를 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옥동자를 얻었으니 축하합니다" "애기가 복스럽게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베들레헴 여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은 생겨먹길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게 되어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그러나 베들레헴 여인들은 나오미가 잘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진심으로 나오미를 축복합니다.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4절 계속된 말씀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 번역엔 "이 아이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엔 "그의 이름이"입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① 우리말 번역처럼 "지금 태어난 이 아이의 이름"일 수 있습니다. ② 두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불려지길 축복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같은 14절 "찬송할지로다" 이 말이 "복 받으소서. 여호와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여호와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불려지소서"라고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③ 셋째는 같은 14절에 "기업 무를 자"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보아스의 이름이 유명해 지기를 축복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④ 넷째는 언어 사용에 탁월했던 룻기 저자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대명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풍성하게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답은? 역시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15절 마을 여인들의 축복의 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생명의 회복" - 이 말은 시편 23편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동안 나오미는 인생의 모진 풍파에 시달리다 삶의 의욕과 기쁨을 다 잃어버리고 그의 영혼이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룻이 자식을 낳아주므로 나오미의 영혼이 소생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마라(괴로움)가 다시 나오미(기쁨, 환희)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룻기 저자는 "생명의 회복"이란 말로 정리했습니다.
베들레헴 여인들은 의례적인 축하 인사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축복의 내용은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계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축복이 정교하고도 세련되었습니다. 그 축복 가운데 룻을 축복의 며느리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고 합니다. 이 기록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잘 키운 며느리 하나 일곱 아들 안 부럽도다" 이 말입니다.
룻은 과연 복덩어리, 복의 근원 - 축복의 딸이었습니다.
① 우선 룻은 나오미에게 복덩어리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소생되었습니다. 룻은 나오미 노년의 보양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아들 보다 귀한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일곱 아들"이란 이 땅에서 어버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말합니다.
② 둘째 룻은 남편 보아스에게 복덩어리였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함께 구속의 족보, 메시아 가계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문으로 거듭났습니다. 룻이 라헬 같은 국모라면 보아스는 자연히 이스라엘 국부가 되었습니다.
③ 셋째 룻은 베들레헴 마을을 복되게 만든 복덩어리였습니다. 무명의 마을이 룻이 낳은 아들과 함께 다윗 왕의 고향, 메시아가 태어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이상 더 유명해 질 수가 있을까요?
④ 나아가 룻은 이스라엘 민족의 복덩어리, 온 인류의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방 족속의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과연 룻은 "생명의 회복자" - 능력있는 애인, 현숙한 여인 - 에쉐트 하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나오미는 룻이 낳은 아이를 품에 품고 감격에 겨워합니다.
16절에 나오는 "아기"는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옐레드"인데 이미 1:5에 나왔던 두 아들과 같은 말입니다. 1장에서 어미보다 먼저 죽어 어미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던 그 아들 - 옐레드가 4장 마지막에 와서 기쁨과 회복의 아기, 아들로 태어납니다. 옐레드의 죽음으로 시작된 룻기는 옐레드의 탄생으로 끝이 납니다. 먼 훗날 한 옐레드 - 아기가 태어나 인류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 축복의 아이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을 볼때마다 방실방실 웃으며 사람의 애간장을 녹입니다. 성경에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데, 일반적으로 이름을 짓는다고 하면 그 아이의 아비가 이름을 짓겠지요. 아니면 집안의 어른들 가운데 누가 이름을 짓겠지요. 아니면 학식이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름을 지어달라고 얘기했겠지요. 그런데 이 아이의 이름은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이 몰려와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성경에 보면 한번 말한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그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벳이라" - 섬기는 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아이가 너의 늙음을 섬겨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아이가 될 것이다. 오고오는 세대에 인류를 섬기는 아이가 될 것이다. 오벳이라 이름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베들레헴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얘기가 어떻게 이어집니까? "이 아이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베들레헴 마을의 관심은 온 이스라엘의 관심으로 번졌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결국 이 사랑과 관심은 모든 인류 하늘의 천사 - 역사의 관심이 됩니다. 역사는 한 아기로 말미암아 BC와 AD로 나뉘어 집니다.
III. 베레스(4:18)
룻기의 결론 - 마지막 다섯 절은 계보입니다. 계보는 일반적으로 앞부분에 나오는데 유독 룻기만은 계보가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보라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계보는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계보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필 왜 베레스로부터 시작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됩니다. 12절에서도 마을 사람들이 보아스를 축복할 때 베레스의 집 같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베레스가 누구입니까?
창세기를 살펴보면 37장부터 끝까지 요셉의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중간 38장에 야곱의 12아들 중 넷째 아들 유다의 별로 좋지 않은 에피소드가 불쑥 끼여듭니다. 유다는 잠시 신앙적으로 침체되어 아버지 야곱의 집을 버리고 이방 땅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거기서 이방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낳습니다. 그 첫째 아들이 엘이란 아들인데 이 장남 엘과 결혼한 여인이 다말입니다. 엘이 자식 하나 낳아주지 못하고 일찍 죽고 둘째 아들도 다말과 관계 속에서 죽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다말은 유다의 집에 메시아의 약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자식 낳는 일을 방해합니다. 어느날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의 친정집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을 창녀로 위장을 하여 유다를 유혹합니다. 그날밤의 징표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얻습니다. 석달 후 유다는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느리를 죽이려 합니다. 유다가 다말이 내민 증표를 보고 그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임을 알게 되지요.
다말이 드디어 해산을 하고 쌍둥이를 낳는데 첫째 아이가 바로 베레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말이 낳은 베레스와 지금 룻이 낳은 오벳과는 어떤 관계가 있길래 룻기는 야베스를 시조처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 다말과 룻기의 룻은 유다 집안 메시아 족보가 끊어질 위기에서 메시아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구원의 때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구원의 대를 이어가려는 열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대를 이어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는 그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가졌던 사람이 이방 여인 다말이요 룻이었습니다. 이 열심히 얻은 아들이 창세기 베레스요 룻기의 오벳입니다. 다말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여 베레스를 얻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의 아들을 얻기 위해 고향 땅 동족과 자기 신들을 버리고 어머니를 붙쫓아와 얻은 아들이 오벳입니다.
이제 왜 룻기 저자가 베레스와 오벳을 연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다윗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막을 자는 없습니다. 당신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IV. 하나님의 구원의 폭(4:19-21)
마지막 다섯절 족보 안에는 각 절마다 두 사람씩 모두 10명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단순한 문장을 아홉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1장에서 죽음의 이야기를 들려주더니 4장 마지막에서는 출생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헤스론 - 람 - 암마나답 - 초반에 등장하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어린이 청년 시절을 거쳐 시집 장가가고 자식 낳고 살았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겐 숨겨진 인물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족보속에 이름 한번 등장하는 인물들이지만 구원의 맥을 이어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21절에 오면 룻기의 주인공들 이름이 드디어 나옵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지금까지 룻기는 보아스가 룻의 친족 구원자 - 고엘이 되어 많은 헌신과 희생을 해 주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보아스의 대를 이어간 아들로 언급됩니다. 룻은 나오미의 가문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보아스의 가계를 회복했습니다. 룻은 보아스 가계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 손해 보고 희생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결국 자신을 통해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회복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희생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21절은 룻기의 한 주인공 보아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과정을 이끌었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인 살몬이라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5에 의하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여리고성의 기생으로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이란 사람입니다. 살몬이 라합과 결혼한 것을 보면 살몬은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여인 라합이 이방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자랑하듯 알려줍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히11:31)
룻기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원의 폭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인 다말이 시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얻은 아들 베레스를 구원 역사 중심에 세웁니다. 여리고의 기생과 살몬은 결혼하여 룻기의 주인공 보아스를 낳습니다.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여 다윗 왕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이 부끄러운 가계를 조금도 괘념하지 아니하고 당당히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V. 다윗을 낳으니라(4:22)
이제 우리는 룻기의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절입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는 사사기의 연속편입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었던 시대였는데 룻기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태어났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룻기의 마지막 단어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을 다음 책 사무엘서로 넘겨줍니다.
룻기는 다윗으로 끝이 나지만 신약 마태복음은 다시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결국 룻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끝이 납니다. 룻기는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친족 구원자 - 고엘되신 예수 그리스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깁니다. 룻기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합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았다는 구원의 계보는 지금도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당신을 낳아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영적 아비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와 누구를 낳았습니까? 행여 당신에게서 구원의 계보가 중단되지는 않았습니까? 끊어질 위험에 처한 구원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 목숨을 담보했던 다말의 열심히 내게 있습니까? 백성과 자기 신들을 버렸던 룻의 열정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또 다른 도전이 있습니다. 또 다른 영웅이 있습니다. 행여나 구원의 물줄기가 그대에게 도달하고 난 다음에 다시는 흘러가지 않는 썩은 물로 썩은 복음으로 내 삶속에 고여 있지는 않느냐? 구원의 물줄기 구원의 계보를 그대는 만들어 가고 있느냐?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물줄기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느냐. 그대가 만났던 친구와 이웃과 동료들에게 구원의 계보가 만들어져 가고 있느냐. 또 너는 누구를 낳았더냐. 그대가 낳은 믿음의 자녀는 누구이며 그대가 만들었던 그대의 제자는 누구이냐. 그대가 구원해서 또 만들었던 계보를 내게 보여다오. 룻기의 저자는 우리에게 마지막 도전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베레스의 계보
룻 4장 13~22절 / 손상률목사
성경 룻기는 열 명의 이름이 나오는 베레스의 계보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22절에는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계보의 특징은 다윗의 조상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베레스의 족보를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한 예수님의 족보와 연관시켜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다윗은 아브라함과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중간 인물로서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생각하면서 베레스의 계보가 주는 신령한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약속에 근거한 계보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창 17:7).
1) 선택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을 거룩한 백성(聖民)으로 택하시고 이들을 세상 모든 민족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창 18:9).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코자 하는 목적에 이들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똑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이스마엘은 제외되고 이삭이 선택되었습니다. 이삭에게서 쌍둥이 아들이 낳지만 에서는 제외되고 야곱은 선택되었습니다(롬 9:13).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넷째 아들인 유다지파 후손들이 족보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입니다. 로마서 9:16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언약 중심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되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두고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라고 하였습니다(신 7:8). 하나님 나라의 주류가 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3:22). 또 다윗에게는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삼하 7:13).
3) 역사의 증거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선진들이 살고 간 자취는 후세 사람들에게 거울이 됩니다(고전 10:6). 히브리서 12:1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말한 ‘증인들’이란 아벨에서부터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구약시대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들도 모두 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통하여 믿음의 자취를 남겨놓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처럼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축복의 유산을 남겨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므로 역사에 오점을 남긴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 왕국의 멸망과 함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포로시대의 역사가 그런 것입니다(마 1:11).
2. 복음의 특징을 알게 하는 계보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게 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기 베레스의 계보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거기에 담겨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1) 메시야의 왕통을 나타냅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유대인의 관념에 따라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근거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 전통에 따라 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 난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히브리 왕조의 뿌리가 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족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족보의 특징 중 하나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를 14대씩 3등분하여 42대로 맞춘 것입니다. 이는 유대적인 기교에 따른 것으로서 3은 하나님의 숫자이고, 14는 거룩한 숫자인 7의 2배로 유대인이 좋아하는 숫자입니다. 여기에 매이다 보니 왕들의 이름 중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시아, 여호야김 등 네 명의 숫자가 빠졌습니다.
2) 상식을 뛰어넘는 계보입니다.
혈통과 신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적인 통념으로 볼 때, 이 족보에 나열된 이름들 중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유대인 최고의 명문을 소개하는 것인데 거기 이방인과 여성들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도 라합과 룻은 이방인이고, 다말과 우리아의 아내는 비정상적인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서 비천한 신분이었고(수 2:1). 다말은 야곱의 넷째아들 유다의 자부인데 시아버지와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것도 매우 부끄러운 기록입니다. 유대인이 자랑하는 메시야의 족보이지만 이처럼 추하고 어두운 면도 숨김없이 사실대로 밝혀 놓았습니다.
3) 죄인이 의롭게 되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그 어디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행 4:12). 예수는 천하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요,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1:16). 또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사유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강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눅 23:43). 수가성의 음란한 여인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유함을 받았습니다(요 4:25).
3. 축복의 통로가 되는 계보입니다.
룻기의 시작은 시련과 고난이었지만 결국 회복과 영광으로 마치게 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나오미, 룻, 보아스, 오벳 같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됩니다. 곧 예수님의 모형이며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다윗 왕조의 뿌리가 됩니다.
다윗의 왕조는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의미합니다. 다윗 이전에도 왕이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명의 왕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다 족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유다 지파 다윗의 자손을 뿌리로 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어가고자 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울왕의 경우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그들이 제비뽑아 세웠지만, 결국 그의 왕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삼상 10:17-21). 한편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되면서 북조 이스라엘에도 19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계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앗수루에 멸망할 때까지 왕조가 아홉 번이나 바뀌는 등 악순환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래도 다윗의 후손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그 이름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2)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근거가 됩니다.
성경에 “유다 지파” 또는 “다윗의 뿌리”로 표현되는 예언과 약속들은 모두 예수님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야곱의 예언 가운데 “규(홀-笏)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11:10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유다지파 이새의 아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자기 민족에게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 주었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온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와 축복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3) 영광스러운 기업의 보장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기 백성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사 43:1-7).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던 나오미도 룻도 다 보아스를 통하여 회복되고 최고로 존귀한 반열에 올랐습니다. 본문 16-17절에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꿈같은 축복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는 잉태해 보지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하면서 남편 없는 자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사 54:1).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