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국천왕은 후사 없이 죽었다.
그는 명상 을파소를 등용해 진대법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백성들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왕은 위세를 떨치던 제나부 출신 우씨를 왕비로 맞이해, 왕비족과 연대를 강화했다. 그의 왕권이 전례없이 강해진 이유가 거기 있다.
그런 고국천왕이 죽자 왕위 계승의 문제가 일어났다.
<삼국사기>는 그 일차적 책임을 왕비 우씨에게 전가했다. 우씨는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긴 채 야밤에 시동생 발기와 연우의 처소를 차례로 방문했다.
<삼국사기>는 우씨의 이런 처사를 맹비난했다. 발기의 입을 빌려, 우씨는 남녀 간의 예절도 모르고, 왕위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이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발기는 우씨의 야합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왕좌를 놓치고 말았다.
과연 우씨의 처사를 유교적 도덕의 기준으로 간단히 재단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우씨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다. 그녀의 深夜 방문은 왕비족 전체의 명운이 달린 그야말로 막중한 정치적 협상이었다.
선왕의 둘째 아우 연우(산상왕)는 옥좌에 오르면서 우씨를 왕비로 선택해 형사취수(兄死娶嫂)했는데, 이것이 당시의 전통이기도 했다.
권력 싸움에 진 발기는 형수의 패륜을 탓하며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적국 한나라로 망명해 재기를 노렸지만 그 역시 실패해, 自殺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씨앗이 우씨 한 사람의 비행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관련자 개개인과 집단 및 한·중 양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리며 일어났다.
역사의 진실은 중층적이다.
첫댓글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