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빙수의 여름
灘川 이종학
미국 엘에이 코리아타운의 8월 8일 현재 시각 낮 1시의 체감온도는 섭씨 약 45°, 우리 가족은 한밭 설렁탕집에 와 있다. 아무리 여름철 보양식이니 이열치열이라고 하지만 이건 정상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식당을 둘러보니 우리 가족처럼 비정상적인 사람이 많은 식탁을 완전히 점령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객들도 적지 않다. 손을 함부로 댈 수 없을 만큼 보글거리는 설렁탕 뚝배기는 뜨거운 김을 마구 피어 올리며 쉴 사이 없이 식탁을 누비고 돌아다닌다. 어~허 시원하다. 여기저기에서 물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문지르며 내뿜는 비명 같은 탄성이 요란하다. 냉방시설은 완벽한 것 같은데도 사람마다 가차 없이 땀방울을 뽑아내는 설렁탕 국물의 위세는 태양만큼이나 당당하다. 열기 앞에서 시원하다고 아양을 떠는 한인들의 멋은 외국 땅에 와서도 여전히 일사불란하다.
사우나탕에서 막 나온 것처럼 부석부석해진 얼굴을 하고 설렁탕 한 그릇씩을 거의 다 비운 우리 가족은 “그 집으로 갈 거지?” 이미 다음 행선지를 내심 정해 놓은 듯이 의사 표시하기를 잊지 않는다. 이 한밭 설렁탕집을 단골로 드나든 모색이 드러난다. 사실 설렁탕은 어딜 가나 배달민족의 대표적인 음식임이 분명하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고 겨울에는 뜨~끈해서 좋다. 우리 가족의 다음 코스는 예정대로 그곳에서 멀지 않은 팥빙숫집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무더위 극복의 최선 행선지를 선택한 셈이다. 역시 미국의 한인들도 팥빙수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게 사실이다. 유독 코리아타운에 빙숫집이 몰려 있는 상황으로 보아 타민족의 빙수 사랑은 아이스크림만 못한 것 같다. 옛날부터 서빙고(西氷庫) 같은 얼음저장고가 없었거나 아니면 얼음의 참맛을 아직 터득하지 못했음일까? 팥빙수의 사촌 정도 되는 아이스크림은 서양 음식으로 알고 있지만, 그 기원을 따지면 동양 음식에 분류된다는 설이 유력하다.
설렁탕과 궁합이 제일 잘 맞는 디저트의 황태자 빙숫집에 온 우리는 각기 취향에 따라 빙수를 주문했다. 요즘에는 빙수도 여러 가지라 맛 또한 다양하다. 곱게 갈아놓은 빙수에다 무엇을 참가했느냐에 따라 분별된다. 지금은 과일 종류도 많거니와 별의별 향료, 색소, 젤리가 풍부해서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개성 있는 맛과 모양의 빙수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과일빙수, 눈꽃빙수, 케이크빙수, 커피빙수, 녹차빙수, 한약제빙수 그 밖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으며 집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간편한 빙삭기(氷削器)와 빙수 레시피까지 보급된 상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냥 빙수와 팥빙수만을 알고 있으며 지금도 이것들, 옛날식을 제일로 치는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야릇하게 맛과 시각을 자극하는 녹색, 붉고 노란 식용색소를 죽죽 뿌리고 뾰족하게 올라온 얼음봉우리 위에 황색 설탕 반 수저쯤 살짝 흩뿌린 빙수 그릇을 앞에 대하면 시원하다 못해 등줄기가 다 스멀거렸던 까까머리 추억이 새롭다. 거기다가 달착지근한 팥죽과 떡 조각, 미숫가루까지 가세한 별미라니 그 기막힌 맛을 어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팥빙수 팥빙수~/난 좋~아 정말 좋아/팥빙수 팥빙수~/여름엔 왔다야…… 빙수야 팥~빙수야/싸랑해 싸~랑해/빙수야 팥~빙수야/녹지 마 녹~지 마/야 빙수야팥~빙수야…….” 여름이면 한국에서 유행하는 윤종신의 팥빙수 노래가 있다. 과연 팥빙수를 사랑하는 민족답다.
얼음 값은 따로 정해진 게 없었다. (氷)이라고 붉은 글씨로 크게 써놓은 얼음집에 가서 “얼음 좀 주세요.” 하고 돈을 내밀면 그게 바로 값이다. 엿장수 마음대로인 것이다. 주인이 톱으로 썰거나 끌로 쪼갠 얼음덩이를 들고간 그릇에 집어넣으면 군말 없이 얼음이 녹을세라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얼음에 왕바늘을 대고 살살 망치질을 하면 쩍쩍 갈라진다. 이렇게 얼음 쪼가리를 만들어 수정과나 식헤에 띄워 마신다. 삼복더위에 그런 효자가 없다. 아니면 물에다가 꿀이나 설탕, 미숫가루 등을 넣어 마셔도 일품이고 그도 저도 없으면 얼음이 들어간 맹물만 마셔도 납양(納凉) 효과는 만점이다. 집에서 얼음 깎는 방법이 없던 시절 이야기다. 그것도 얼음집 근처에 살았을 때의 호강스러운 넋두리이다. 나도 어려서 고드름을 많이 따먹었다. 오염된 얼음이라 불결하기도 하거니와 입안이 얼얼하도록 차가울 뿐 아무런 맛도 없다. 손이 얼어서 덜덜 떨면서 왜 고드름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의학에서 말하는 얼음 중독 즉 빙섭취증(냉식증)은 아니었을 터인데. 누군가의 말처럼 혹시 얼음밖에 모르는 빙(氷)신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캐나다에서는 식당에 가면 얼음물을 내놓는다. 콜라나 세븐업 같은 음료수에도 절반이 얼음이다. 섭씨 영하 20°를 오르내리는 혹한에도 얼음은 여전히 들어간다. 물론 음료수 반 얼음 반의 장삿속도 있겠지만, 보도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은 미지근한 맛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사람들이 마실 때 상쾌하게 느끼는 찬물 온도는 5~10° 정도이다. 나는 식당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나서 남은 얼음을 모조리 먹어 치운다. 아드득 아드득 깨물어 먹기도 하고 빨아 먹기도 한다. 허연 머리를 하고 오죽잖은 틀니로 애들처럼 왜 그러느냐고 아내와 자식들은 성화를 대지만, 나는 못 들은 척한다. 누구는 울화통이 터지면 냉장고 얼음을 으드득한다는 말을 들었다. 내 경우는 그게 아니다. 입안에서 씹히고 녹는 질감의 상큼한 얼음 맛도 맛이려니와 고드름 같은 얼음만 보면 향수가 묻어나는 걸 난들 어쩌겠는가?
첫댓글 오늘 팥빙수를 먹고 왔습니다..ㅎㅎ
그래서인지 팥빙수의 글이 더 와 닿습니다...^^
햐! 설렁탕과 팥빙수요...
온탕 냉탕을 함게 즐기는 민족...
선생님! 갑자기 핕빙수가 먹고 싶어집니다.^^
감상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늘 건안 하소서!
일독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