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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김문홍 작품론】(계간 <오늘의 문예비평> 게재)
존재의 탐색과 저항적 글쓰기
- 극작가 김문홍 론
김영희
1. 극장에서 탄생하는 희곡
선생은 밥 먹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 내가 반도 채 먹기 전에 식판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연세 드신 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나로서도 민망해 어느 날 식사 도중 겨우 꺼낸 화제가 식사 속도가 대단히 빠르십니다, 였다. 그 때 선생이 한 얘기. 우리는 전쟁을 체험한 세대이다. 하여 언제 피난 갈지 모르니 일단 빨리 먹는다는 거였다. 사실인지 개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년의 기억이 그토록 오랫동안, 뿌리를 도려내지 않은 티눈처럼 박혀있구나, 하는 생각에 오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유년의 경험과 기억은 그런 것이다.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 특별한 냄새, 깊은 촉감, 보았던 풍경, 들었던 이야기 등은 뼈 속 깊이 각인돼 나이가 들수록 더 또렷해지는 법이다. 이러니 작가마다 유년의 원초적 경험이나 특별한 기억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밖에 없다. 김문홍 선생의 희곡을 읽으면 특히 이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공간적 이주자로서 작품에 나타나는 가족과 뿌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생은 식사 속도뿐만 아니라 걸음도 엄청 빨랐다. 피난길 작은 아이의 걸음이 그리 슬프게 빨라야 했던 것일까. 작은 체구에 어디든지 목표가 정해지면, 아니 목표는 늘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주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다. 한 번도 어슬렁거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자주 헤매거나 마음의 사각지대에 빠져서 동력을 상실해 버리는 나와는 달랐다. 선생과 난, 나이 차이만큼 삶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선생의 일에 대한 열정이다. 선생은 소설, 동화, 극작, 배우, 연출, 연극평론 등을 두루 섭렵하는 다양한 활동가다. 이 점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 많은 일을 해 내는 것은 대단한 재능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 중에서 젊은 시절 한때 배우의 경력은 선생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한다. 대사 암기가 힘들어 더 이상 배우 되기를 포기했다지만 인생의 배우로서 무대 위에 오르고 싶어 한 무의식적 욕망이 분명 있었을 법하다. 그 여러 길을 돌아돌아 최근 선생은 희곡과 연극에 집중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선생은 부산에서 하는 연극은 다 본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연극만 작정하고 보는 일도 힘들 텐데 여러 생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정해진 극장을 정해진 시간에 가서 본다는 것은 대단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인기극단, 유명작품만을 챙겨보는 것은 그나마 쉽다. 허나 신생극단, 변두리 극단, 무명 작품을 일일이 챙겨보는 일은 예사로운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건 의식과 의지의 영역이다.
연극을 보는 것도 힘든데 선생은 연극평론형식으로 일회적으로 사라지는 연극에 기록을 남김으로써 연극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을 적극적으로 열어둔다. 희곡연구자와 연극 공연자의 틈을 그 누구보다도 잘 메우고 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명성을 얻는 일도 아닐진대 그는 그 일을 동분서주하며 한다.
무릇 희곡은 책상 앞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극장에서 쓰는 것임을 보여주던 선생은 열정적인 극장 순례와 열정적으로 공연을 지켜 본 결과 1980년 희곡을 쓴 이후 지금까지 네 권의 희곡집을 냈다. 문학에서 희곡의 불안한 위상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한 결과물이다. 그의 희곡은 몇 편을 제외하면 모두 공연됐다. 상연을 전제로 씌어진 언어텍스트가 희곡이란 점을 생각할 때, 수많은 희곡이 상연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는 선생의 희곡이 그만큼 공연적 가능성이 많다는 증거이다. 다섯 권의 희곡집 중 『안개주의보』는 부산 최초 희곡집이다.
선생의 작품세계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1980년「수직환상」이후, 제2기는 1996년「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이후, 제3기는 2009년「대숲에는 말(言)이 산다」부터 현재까지이다. 여기서는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인「수직환상」(1980),「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1996),「세한도에 봄이 드니」(2004),「대숲에는 말(言)이 산다」(2009), 「방외지사 이옥」(2010)을 중심으로 김문홍 희곡의 주제와 무대 형식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글쓰기에 대한 성찰, 그리고 기계 문명비판
-「수직 환상」(1980)
이근삼의「원고지」(1960)에 등장하는 ‘교수’, 장정일의「해바라기」(1996)에 등장하는 ‘김인’, 은 모두 작가이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쓸 수 없는 형편에 놓인 작가이다. 김인은 삼녀의 습작 노트를 동경하지만 실제 자신의 노트에는 순수 창작의 글을 쓰지 못하고 포르노 소설을 번역한다. 교수 또한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대학 교수이고 많은 책을 낸 저술가이지만 자신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그가 출판한 모든 책이 번역물이다. 물론 번역이 자신의 목소리를 거세하는 작업이라고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들에서 ‘김인’과 ‘교수’는 기계적인 번역 작업만 한다. 이 두 등장인물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늘 누군가에게 원고 쓰기로 쫒기고 원고를 강요당한다. 영혼은 말라가고 글쓰기는 자신을 옭죄는 형벌이다.
김문홍의「수직 환상」의 이수평도 작가이다. 그도 자신의 글쓰기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주인공들과 비슷하다. 하지만「수직 환상」의 주인공이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글쓰기의 올바른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억압하고 길들이려고 하는 일체의 것에 저항하고 싸워 나간다.
이수평 (벌떡 일어서며) 안돼, 안 된단 말이야! 난 결코 개나 말처럼 길들여 질 수가 없 어. (원고 뭉치를 휙 쳐들어 움켜쥐며) 한 줄의 글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난 결코 내 영혼이 길들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난다 하더라 도, 내 존재의 종말을 예고하는 길들여짐은 원하지 않는단 말이야. (이수평이 갑 자기 흐물흐물 웃어제낀다) 이놈의 자식들! 세로쓰기에만 미쳐있는 얼간이들! 커 다란 바윗돌을 굴려 너희 놈들의 골통을 짓뭉개 놓고 말테다. 흐,흐,흐....히,히, 히.....으, 하하하,(갑자기 손에 움켜쥐고 있던 원고지를 마구 흩뿌리며, 웃어제낀 다. 하얀 눈발처럼, 무대 위에 그리고 객석 쪽에까지 마구 떨어지는 원고지, 원고 지, 원고지의 홍수)(264)
이수평은 편집부장 박영호가 요구하는 글과 자신이 쓰고 싶은 글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원고 마감에 쫒기다 잠이 든다. 꿈속에서 그는 김수직이라는 인물에 의해 이유도 모른 채 섬에 납치된다. 이수평의 수평적인 사고체계를 문명시대에 잘 조화시키기 위해 까치섬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 섬은 완벽하게 사회와 단절된 곳, 오직 명령과 복종 그리고 훈련만 있는 곳으로 모든 인물들은 고유이름을 버리고 숫자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 억압과 폭압적인 상황에 놓인 이수평이 훈련 받는 내용은 해를 달이라고 한다든지, 2+3은 4로 이해해야 하는 등이다. 섬의 질서가 정한 대로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어두운 무대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호루라기 소리는 어처구니 없는 훈련 시작의 신호, 길들임의 암시이다.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그를 노예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한 인간을 길들인다는 것, 더구나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이 곧 생명인 작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의 영혼을 지배적인 질서에 순치한다는 것은, 바로 작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길들여짐은 존재의 무화이고 증발이다.「수직 환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수평의 대사는 결코 자신의 영혼을 길들일 수 없는 작가로서의 처절한 목소리다. 자기 존재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단언이다.
한편, 이수평을 길들이고 억압하는 잡지사 편집부장 박영호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글쓰기 방법으로 수직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를 요구하고 원고도 세로쓰기를 요구한다. “21세기의 이 엄청난 전자 미디어 시대에서는 인간의 사고는 물론 사소한 감각조차도 대량으로 수직화 내지는 단순화”되어 있기 때문에 소설가는 수직적 개조를 해야 한다고 한다. 수직의 상상력이야 말로 새로운 문명사회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문명사회는 “ 하늘을 치솟을 듯이 쭉쭉 뻗어 올라간 빌딩의 숲, 그 숲 속을 가로세로 지르며 쭉쭉 뻗어나간 고가도로, 휙, 휙, 건물 꼭대기를 향해 치솟는 엘리베이터들....”(253)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런 수직의 문명사회에 이수평은 적응하지 못한다. 빌딩 유리창을 닦는다고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청소부를 본 그날 이수평은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나오고 그 느티나무 꼭대기에서 밑둥까지 곶감을 꿰어놓은 것처럼 철수, 영식이, 철민이, 경석이, 희석이....친구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들이 맨 밑에 있는 자기에게 친구들이 심부름을 시키는 꿈이다. 그에게 느티나무는 명령과 복종의 은유이다. 그 날 이후 이수평은 직립공포가 생겼다.
직립공포가 있는 이수평은 모든 수직 이미지와 상상력에 적응하지 못한다. 수직이미지와 수평이미지란 무엇인가. 수직 이미지는 질서, 서열, 추락, 속도, 아찔함, 문명을 상징하는 데 비해 수평 이미지는 소통, 평등, 안정, 편안함, 자연을 드러낸다. 이수평에게 수평적 이미지는 이름처럼 자연스러움인 동시에 존재방식 그 자체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모여들고 살기를 선망하는 도시에서 구름에 걸친 거짓말 같은 고층건물들은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니다. 땅에서 멀어진 허공에 떠있는 수직의 이미지, 새집의 이미지가 오늘날 도시인의 생활공간이다. 그 높은 건물을 첨단 고속 엘리베이터로 수십 초 만에 우리는 비현실적으로 도착한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우리를 편리와 속도의 노예로 만들었다. 동맥처럼 뻗어 있는 도로는 산길, 물길, 생명의 길을 잘라버리고 그 길 위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로 개발되어 등장하는 자동차뿐이다. 성장과 속도 지상주의에 갇힌 오늘날의 우리는 기술, 기계 문명을 떠나서는 삶 자체를 생각할 수 없다
허나 이수평은 모든 수직 이미지와 문명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바보처럼 갇히거나 원고지 세로쓰기에 상상력이 차단된다. 끝내 수직의 문명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이수평. 결국「수직 환상」은 작가에게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데 그치지 않고 수직의 문명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작가를 통해서 획일적이고 성장 중심적인 문명사회 비판으로까지 우리 의식을 확장시킨다. 작품이 씌여진 80년대로부터 훨씬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그 주제가 의미가 특별해지니 이 작품이 가진 선구적인 의미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3. 뿌리 찾기와 죽음에 대한 응시
-「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1996), 「세한도에 봄이 드니」(2004)
두 작품은 2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제목에 두 작품 다 ‘봄’이 있다. “어느 봄날의 사흘간” 일어난 이야기(「산천에」)이거나 “요즈음의 봄 저녁부터 자정까지” 일어난 이야기(「세한도에」)이다. ‘산천에’ 봄이 오고, ‘세한도’에 봄이 든다는 어절 구성도 비슷하다. 등장인물의 연령대나 갈등 구조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가족의 부재에 따른 뿌리 찾기와 죽음을 존재 탐색의 한 축으로 생각함이 비슷하다. 바로 선생의 유년의 기억과 체험이 잘 반영된 작품들이다.
흔히 죽음에 가까워진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그리 말한다. 따뜻한 봄날 자는 듯이 가고 싶다고. 이 짧은 말에 버릴 단어는 하나도 없다. 가장 평화로운 죽음에 대한 열망이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봄은 가장 따뜻한 계절이다. 언 땅을 뚫고 만물이 소생의 기운으로 가득 찬 계절.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공기는 활동하기에 적절하다. 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을 봄으로 스스로 원하는 것은 봄이 살기에도 좋지만 죽기에도 좋아서 망자는 망자대로 충만한 마음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일 게다. 무엇보다 이는 남은 자에 대한 배려가 녹아있는 말. 장례절차를 치루는 데 있어서 어느 계절보다 봄은 적절하다.
자는 듯이 간다는 말은 더 기막히다. 죽음 앞에 고통을 호소하며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 처절함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는 죽음을 일생동안 일상에서 반복해 온 잠을 자듯이 그리 죽을 수 있다는 것. 곧 계속된 잠이 죽음이라면 이 또한 편할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 왔듯이 저세상으로 간다는 말은 또 얼마나 철학적인가. 마치 소풍가듯이, 혹은 마실 가 듯이, 그저 이곳에서 저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일이 죽음이라면? 따뜻한 봄날 마치 잠을 자듯이, 봄 소풍 가듯이 그리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죽음은 그대로 축복이다.
「산천에」의 노 할머니의 3일장에 일어난 일이다. 90대 초반의 노 할머니는 평소 바람대로 “따뜻한 춘삼월, 날 좋은 어느 날” 죽는다. 노 할머니의 부고를 받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모여든다.「세한도에」도 92세 할머니가 등장한다. 마치 작가에게 92세는 삶의 끝을 맞는 나이이거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의 나이일지도 모른다. 임종을 앞둔 할머니는 북으로 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린다. 구순의 나이 정신이 혼미할 수 있는 나이. 하지만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오래 생생한 것이 청각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 할머니는 귀가 밝아서 비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더니, 빗소리가 기다리던 남편 소식일까, 살풋 그 기대를 내비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고 삶의 연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생명과 탄생으로 이어지는 죽음은 종말이 아니다. 인간 존재는 죽음에 이르러 끝나는 듯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다른 모습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산천에」도 그러하지만「세한도에」는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원환으로 인식한다. 이 작품은 할아버지의 제삿날 하루 동안 일어난다. 이 날은 제삿날이기도 하지만 결국 노 할머니가 임종을 하는 날이기도 하고 임종의 순간 며느리가 아들을 순산하는 날이기도 하다. 결국 노 할머니의 죽음과 며느리의 출산을 한 장면에 바로 연결시켜 죽음이 곧 삶으로,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 어린아이와 노인은 유사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둘은 작고 가볍다. 물론 노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허리가 굽어져 몸이 둥글어지는 것은 마치 아이들이 몸을 오그리고 있는 모습과 닮았다. 어린아이나 노년 모두 이성보다는 본능의 세계에 충실하다는 것도 그렇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입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과 포만감이다. 밤새 안녕을 물을 필요도 없이 꿀잠을 자는 일이 중요한 것도 무엇보다 이들이다. 잘 먹고 잘 자는 일.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능에 바로 닿아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노인과 어린이는 닮았다, 둥근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 둥근 봉분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삶. 그래서「세한도에」나「산천에」의 노 할머니가 그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때마다 끼니를 놓치지 않고 찾는 일, 죽음 가까이에서 생명 연장을 강렬히 느끼는 그것은 참 자연스럽다.
죽음을 삶과 분리하지 않으려하는 것은 이런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두 작품 모두 죽은 자는 삶과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곳, 어떤 초월적인 경계에 머무는 것이 안이라 우리의 삶과 일상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함께 머물고 있는 것에서. 두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대숲으로 설정돼 있지만 죽은 자는 필요한 경우 삶의 공간으로 나와 이것저것 산 사람의 세간이며 공간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삶의 공간에 죽은 자의 출현이라니.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참 자연스러워 어떤 괴기스러운 생각도 할 수 없다. 살아있는 동안 교만해 져 잊어버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뎌진 의식은 우리 앞에 언젠가 나타날 죽음 앞에서 비로소 예리해 짐을 생각할 때 이 두 작품의 주제가 예사롭지 않다.
한편 이 두 작품에서 가족의 부재와 이에 따른 뿌리 찾기를 엿볼 수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산천에」의 경우 ‘은규’라든지,「세한도에」의 경우 북으로 간 노 할머니의 남편 등 흩어진 가족을 기다린다. 기다림이란 우리의 일상 속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예사로운 일상이지만, 제삿날 혹은 초상이 생긴 날의 기다림, 특히 부재했던 가족의 기다림은 특별한 사건이 된다. 죽은 자의 부재를 통해 산 자의 부재를 확인하고 그 부재를 지우고 싶은 날이 죽은 자의 생일인 제삿날이고 초상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삿날은 혹은 초상집은 비로소 흩어진 가족이 다 모일 수 있는 시간이고 공간이다. 특히 초상집에 문상객으로 가보면 그 집안의 숨겨진 내력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죽은 자를 초상하기 위한 자리가 산 자의 갈등을 분출시키고 때로는 해소하기도 한다. 그래서 늘 초상집은 시끄럽다. 오히려 정갈하고 정돈된 초상집의 분위기는 우리의 관습과 정서상 낯설다. 두 작품 모두 이런 산자의 갈등과 해원을 통해 결국은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게 하고 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오늘 같은 날 우리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아픈 가슴을 쓸어주고, 차디찬 등허리 다독거려줘야 안 쓰것소. 그거이 가족 아니겄어라우”(「세한도에」, 20)의 어머니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족이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그런 것. 그것이 혈통이나 직계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의 상처를 포개며 일상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것. 이는 “망할 대로 다 망했는디 시방 뿔뿔히 흩어진 가족 찾는다고 뭔 소용이 있겄소”(25)라는 자포자기적인 태도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선생의 개인사가 포개진다. 앞서 밝혔듯이 공간적 이주자로서의 그 낯섦은 완도와 부산의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선생에게 가혹했을 것이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늘 어머니라 부르던 사람이 아닌 새롭고도 낯선 이에게 어머니라 불러야 했다는 그 사실. 그것은 눈뜨면 바라보던 산과 들이 사라지고 도시의 높은 빌딩 숲이 나타났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자신의 존재 전체가 흔들려 버리는 슬픈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이 겪었을 그 유년 시절의 어둔 기억이 작품 속에서는 긍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 그 점은 참 다행스럽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사회에서 할머니는 봄날에 잠자듯이 세상을 떠나고 사람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한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사연으로 제삿날조차 혹은 초상 날조차 집에 쉬이 오지 못하는 자식들을 끌어 모으는 구심점으로서 자리를 강고히 한다. 큰어머니와 어머니의 시간을 뛰어 넘은 화해도 그러하다. 이렇듯 평범하고도 고단한 대가족의 삶의 면면을 동심원을 그리듯 포개고 연결시키면서 선생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4. 진실 찾기의 어려움, 다시 글쓰기에 대하여
- 「대숲에는 말이 산다」(2009), 「방외지사 이옥」(2010)
회갑을 넘기고 나서부터 희곡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것 같고 작품 발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연극의 기능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책무는 대사회적 발언으로서의 치열한 현실인식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인지 나는 재미를 화두로 삼고 있는 요즘의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사랑 타령의 연극텍스트는 쓸 줄도 모르고 아예 쓰기도 싫어한다....<대숲> 머리말 중에서
<대숲>은 김문홍 희곡의 전환점에 놓인 작품이다. 형식과 주제의 변화가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측면으로는 무엇보다 무대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무대는 희곡의 사건이 펼쳐지는 곳이며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며 극장을 들어선 관객이 제일 먼저 목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대가 어떤 식으로 형상화되고, 무엇으로 채워지는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대숲>의 무대 설명을 보자.
무대
이 작품의 주요 공간적 배경은 도림사 아래 대숲이다. 여기서의 대숲은 진실의 진원지와 소통의 이중적 의미를 지닌 상징적 공간이다. 천을 이용한 대나무와 광케이블이 얼기설기 엉켜져 있다. 모든 인물들은 시종일관 무대의 좌우에 활시위처럼 휘어진 구도로 앉아 있거나 서 있다. 이들은 장면에 적합한 상징적 마임을 하다가, 자신들의 차례가 되면 무대 중앙으로 나와 연기한다. 대숲에 얼기설기 뒤엉킨 광케이블은 복두장이와 그의 아들을 고문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기존의 무대와는 상당히 다르다. 가장 다른 것은 사실적인 무대설명에서 상징적이고 양식적인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천과 광케이블을 활용해서 대숲을 비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거나 사람의 몸과 마임을 활용한 무대 장면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모든 인물들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시종일관 “무대의 좌우에 활시위처럼 휘어진 구도로 앉아 있거나 서” 있도록 한다. 관객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같이 연극을 본다는 점. 이는 서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관객을 실제 관객과 허구적 관객, 두 개의 층위로 만드는 것, 극중극을 통해 연극으로부터 관객을 소외시키는 것, 배우가 자신의 역할에 완벽하게 몰입하지 않고 장면에 필요한 연기를 순간 시범적으로 표현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①코러스의 역할놀이가 펼쳐진다. 한 사람이 복두장이의 왕관을 빼앗아 왕관 테두리에 장식물을 꽂는다. 모든 사람들이 왕관을 빼앗아 테두리에 장식물을 꽂는 사이에 드디어 왕관이 완성된다. (사이) 이번에는 서로서로 왕관을 빼앗아 머리에 써보지만 헐렁헐렁 하여 맞지 않는다. 한 사내가 머리에 왕관을 쓰자 안성맞춤이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몇몇 사람들이 왕관을 쓴 사내들을 목마를 태워 왕으로 추대한다. 그들은 왕 역할의 사내를 무대 후면 중앙의 왕좌에 앉히고 제각기 자신들의 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②갑자기 경문왕 역을 맡았던 배우가 머리 위의 왕관을 벗으며 소리친다.
사내 에이, 난 이제 임금 역할 안 할래
코러스 아니, 왜?
사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무대 후면 중앙을 가리켜 보이며) 저 자리엔 아무나 앉는 게 아니야.
코러스 (애원하듯이) 에이, 다시 한 번 더 하자, 응?
사내 난 안 한다니까!
사내가 왕관을 대숲 저쪽으로 휙 던져버린다. 모두들 그 왕관 쪽으로 내달리다가 스톱모션되는 가운데 컷 아웃. (사이) 어둠 속에서 코러스들이 조금 전의 노래를 합창하는 가운데 서서히 막.
①은 연극의 첫 장면 일부이고 ②는 마지막 장면이다.「대숲」은 코러스가 역할 놀이를 하는 것으로 극 시작을 설정함으로써 전체 극의 구조는 극중극 형식을 띤다. 왕이 되는 경위도 뚜렷한 명분이 없다. 왕관이 우연히 머리에 맞는 사람이 왕이 되는데, 이는 놀이에서는 가능하다. 누구나 왕이 될 수도, 거지도 될 수 있는 것이 놀이의 세계이다.
허나 놀이를 하다 우연히 맡게 된 왕의 역할이지만 극중극을 하는 동안 왕 역할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복잡하고도 책임을 요구하는 자리이며 갈등을 중재하거나 그 자신이 갈등의 중심에 놓이기도 한다. 우연히 쉽게 시작했지만 쉽게 시작할 일이 아니다. 결국 뭇 코러스들의 애원도 거절한 채 등장인물은 왕 역할을 거부한다. 그것이 아무리 놀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무대를 그저 놀이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음은 무대를 비사실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일상적인 현실을 무대 위에 그대로 재현하지 않아도 놀이의 세계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무대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징후로서 시적인 무대를 들 수 있다.
③석여령을 비롯한 복두장이 가족들은 처마 밑에 등불을 건다. 복두장이의 오두막 앞에서 왕궁 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겨운 몸놀림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대숲」 26)
④두 사람이 성균관 기숙사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사이) 향그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기숙사의 방문이 일제히 열리며 유생들이 걸어 나와 추녀 끝에 꽃등을 내건다.(「이옥」 9)
사실적인 묘사를 걷어낸 무대는 훨씬 시적인 느낌이다. 처마 밑에 건 등불과 추녀 끝에 내건 꽃등은 아름답다. 등불이나 꽃등의 시각적 효과와 노래 소리의 청각적 효과가 극의 분위기를 이끈다. 감성에 호소하는 이 시적인 무대에 마음을 빼앗긴 관객이라면 어느 새 이 연극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 셈이다. 이는 희곡이 모든 감각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다시 다음에 주목하자.
⑤김려가 보퉁이를 이리저리 뒤척이며 살피다가 그 속에서 글 한 편을 찾아내어 읽기 시작한다. (사이) 그가 이옥의 글이 적힌 종이를 펼치자 성균관 기숙사의 여러 방문이 열리며 울긋불긋한 치마저고리를 차려 입은 여인들과 형형색색의 옷가지를 걸친 남자들이 나타나 성균관 뜰 앞으로 나선다. (사이) 김려가 이옥의 산문 ‘화설(花說) 의 의 한 부분을 낭독하는 사이에 형형색색의 옷가지를 걸친 사람들이 글의 내용에 어울리게 군무를 펼치기 시작한다....여인과 남정네들의 화려하지만 투작한 군무가 펼쳐진다, 형형색색의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나름대로의 모양을 만들며 음악에 맞추어 글의 내용을 춤과 동작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다.(「이옥」4-5)
⑥이옥의 소설 <심생전(沈生傳)>에 나오는 호조계사의 외동딸이 이옥 곁으로 사뿐사뿐 걸어와 정중하게 예를 표한다.
이옥 오, 어느 집 규수이기에 날 아는 체 하는고?
외동딸 심생전에 나오는 호조계사의 외동딸이옵니다. 양반 자제와 중인 처녀의 사랑을 다뤄...제게 사랑이 이렇게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일깨워 주셨지요. 눈 물나고 고맙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중략-
이옥 내 문장이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 속의 너희들이 이렇게 잘 지낸다는데...외롭긴 뭐가 외롭다고 그러느냐.
이번에는 이옥의 산문 <신아전(申啞傳)>에 나오는 칼의 명인인 벙어리 신씨가 등장하여 수화로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옥 오오, 이게 누군가? 칼의 명인 벙어리 신씨 맞지?
벙어리 (활짝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한다.)
이옥 통역으로 자네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아전이 죽었을 때, 자넨 그의 널을 매질하 며 마치 개 우는 소리처럼 슬퍼허였다며? (사이) 그래, 그 고마운 아전은 저승 에서 만나겠지?
벙어리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다.) -중략-
이옥 뭐라고? 유배생활을 하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아니다! 내 글이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 글 속의 너희들이 이렇게 행복해 하는데 이 이상 무얼 더 바라겠느냐?
(사이)
그밖에 그의 모든 시문과 산문에 나왔던 인물들이 모두 이옥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정중하게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이옥」39)
무대를 상징적이거나 시적으로 표현함을 넘어서 이옥의 작품을 낭송할 때 작품 속 인물들이 작품 밖으로 빠져 나와 마임으로 연기를 해 보인다. 순간 무대는 환상적으로 변한다. 배우가 읽어주는 것을 관객이 듣는 것이 아니라 책 속 인물들이 마임으로 연기하니 관객은 책의 내용을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훨씬 극적효과가 크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책 속에 있던 등장인물이 책 밖으로 나와 마침내 이옥과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러니깐 작가와 작가가 창조한 등장인물이 서로 대화를 한다. 「심생전」의 규수는 이옥에게 아름다운 사랑으로 자기를 형상화해줘서 고맙다, 한다. 「신아전」의 벙어리도 책 밖으로 빠져 나와 작가에게 인사한다. 규수가, 벙어리가, 자신들을 창조한 이옥에게 외롭지 않느냐, 억울하지 않느냐 묻고 이옥은 그들로부터 오히려 위안을 얻는다. 사실성을 버린 무대는 순간 역동적인 극적 상상력으로 꿈틀댄다.
덧붙여 사실적인 무대 장치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것 외에도 설명적 대사를 압축하고 그 대신 여러 가지 볼거리를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선생의 희곡이 후기로 갈수록 연극성, 놀이성을 부각하는 양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제의 변화를 보자. 이 시기의 작품들은 우선 가족 내부에서 시선을 돌려 역사를 통한 현실인식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그 외연을 확장한다.「대숲」은 삼국유사 卷 3에 전하는 신라 경문왕조 복두장이가,「이옥」은 정조 때 실존인물인 이옥이,「훼벽사」에서는 허균이 무대에 등장한다.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역사물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인 태도와 해석은 결국 작가가 어떻게 당대 현실을 인식하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선생은 연극의 기능을 대사회적 발언이라 말한다. 무릇, 글쓰기는 발언이다, 라는 이주홍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이는 당연하다. 선생은 오래 전 설화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복두장이와 이옥 그리고 허균을 불러와 그들의 입을 통해 오늘날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말한다.
우선「대숲」을 보자. 복두장이가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크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다 결국 죽기 전 대숲에 들어가 그 진실을 말했다는. 그 뒤로 대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로, 이는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진실은 결국 밝혀진다는 이야기인데, 선생은 이를 새롭게 창조하고 해석한다. 곧 복두로 가려진 임금님 귀는 크지 않기 때문에 복두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게 복두장이의 진실. 임금이 귀가 커지길 바라는 마음이 큰 귀 환상을 만들게 됐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므로 크기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임금 스스로가 귀를 기울여 백성의 아픈 말을 잘 들어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
이로써「대숲」은 진실을 찾기 위한 소통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부패한 권력은 쉽게 다른 사람, 특히 민중의 말을 무시하고 억압한다. “말은 공기처럼 오고가며 서로 통해야 하는 법”(51쪽)인데, 부패 권력은 자유롭게 흐르는 민중의 말을, 정당한 여론을 불안해 하고 은폐한다. 말은 대숲처럼 막힌 듯 뚫려 있어 벽이 없고 막힘이 없이 흐르고 통해야 한다. 의견은 통제당하고 감정은 억눌리고 진실은 왜곡된 현실에서 아무리 권력이 힘으로 누르고 달콤한 말로 그들을 꼬득여도 민중의 거칠지만 생생한 말의 진실을 가리지 못한다. 요즘 대나무 숲 트위터가 유행처럼 번져 나간다고 한다. 학교 대나무 숲, 사무실 대나무 숲, 아파트 대나무 숲 등등. 우리 사회가 그만큼 억압과 불만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해소하고픈 소통 욕구가 강하다는 증거이다.
이제「방외지사 이옥」을 보자. 이옥은 정조와 노론의 글쓰기 방식에 저항하여 모든 사물에 개성과 구체성을 살려주는 문체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고 결국 불행하게 살다간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만의 문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 진정 백성들의 들끓는 감정을 절절하게 노래하거나 힘없는 백성에서 사소한 벌레, 잡초에 이르기까지 공평하게 누려야 하는 약자에 대한 존재의 권리를 말하는 그런 글”(7)을 쓰고자 한 인물이다. 글쓰기를 출세를 위한 수단이나 자신을 뽐내기 위한 사치도구로 생각함이 아니다. 삶과 일치하지 못하는 글은 결국 허무맹랑하여 결국 잊혀지기 마련이다.
이옥은 주변에 내몰려 조명을 받지 못하는 당대 민중들의 삶, 여인들의 생활과 정서에 관심을 가진 점에서 방외지사였지만, 대상에 애정을 가지고 철저히 관찰하고 묘사하려 한 점에서 그는 진정한 작가였다. “서로 화를 내어 맞싸우는 자, 손을 잡아당기며 노는 남녀, 갔다가 다시 오는 자, 왔다가 다시 갔다가 다시 오기를 바삐 하는 자,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 옷을 입은 자, 상건을 쓰고 흉복을 입은 자, 중 옷에 중의 삿갓을 쓴 중, 패랭이를 쓴 자 등”(23). 그의 문장은 마치 시장의 곳곳에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정조는 그의 문체를 문란하다 하여 문체를 바꾸도록 강제하였지만 끝내 이옥은 이를 거부한다. “문체는 내 세계이며 내 목숨이기도 합니다. 문체를 잃음은 곧 내 마음을 잃음이니 결코 고칠 수 없”(12)다고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권력이 한 개인의 글까지 간섭하며 그를 통제하고 길들이려한 것에 그는 분연히 저항한다. 시대에 너무 앞서 태어난 이옥은 권력과 힘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글쓰기의 방식을 끝까지 주장했으니 바로 그의 글의 본질은 저항이다. 그는 거창하게 사회를 변화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러운 권력과 구속에서 멀어지고자 한 것이니, 그에게 글쓰기는 자기 존재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것이다.
평화운동가 에이브러햄 머스트(1885-1967)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해서 백악관 앞에서 촛불 시위를 할 때 기자에게 남긴 말. ‘난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겠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참 놀라운 의식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자신을 바꾸지 못하도록 촛불시위를 한다는 말. 허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머스트의 밝히는 하나의 촛불은 그저 하나의 촛불이 아니다. 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한 사람의 실천과 습관이 종합되면 모래가 태산이 되듯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머스트가 든 촛불은 사회를 밝히고 변화시키는 빛이다. 따라서 이옥을 통해 선생은 말하고 싶은 것, 바로 글쓰기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등단작품인「수직환상」에서 보여지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그의 후반부 작품이라 할 수 있는「이옥」에서도 반복되는 것은 우연일까. 그것은 오랜 창작기간 동안 선생에게 늘 떠나지 않는 문제, 바로 글쓰기가 무엇이고 글쓰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반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결국「수직환상」의 이수평이나「방외지사 이옥」의 이옥이나 그리고 선생에게도 글을 쓴다는 것은 일체의 권력에 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올곧게 세우는 것. 그럼으로써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것이다.
5. 세상에서 아름다운 말, 열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열정이라고 한다. 열정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생명이니, 참 옳은 말이다. 하여 생명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열정이다. 그토록 평화롭고 다소곳해 보이는 식물의 세계도 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온 에너지를 모아 내부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뿌리를 박고 온힘을 다해 뿌리로부터 양분을 끌어올린다. 그들에게는 노력을 이리저리 낭비하는 일없이 오직 하나의 의지, 아래로 끌어내리는 숙명에서 벗어나 위로 솟아오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누구든 정원에 핀 작은 꽃 한 송이가 발휘하는 에너지의 절반만이라도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는데 투여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꽃과 풀과 나무에게 배울 게 많다. 빛깔과 향기로 그리고 홀씨로 세상에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나가는 저 생명의 분주함. 그러고 보면 난 너무 많이 쓸모없이 삶의 여러 조건을 탓했는지도 모른다. 너무 잦게 삶을 수상쩍게 생각하고 서글퍼 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선생을 생각해 본다. 선생을 보면 식물의 그 열정적이고도 묵묵한 자세와 닮았다. 겉으로는 평범하고 조용해 보이는 듯해도 실은 대단한 열정으로 물줄기를 끌어올리는 성실한 태도가 그렇다. ‘부산’이라는 지역성에, ‘희곡’이라는 주변성에 갇혀서 자신을 불필요하게 괴롭히지도 않는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늘 자신의 삶에 꽃처럼 나무처럼 정직하고 열정적인 어른. 그러고 보면 난 선생에게 배울 게 많다.
김영희 연극평론가.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공저로『여성의 눈으로 읽는 문화』,『박조열 희곡 연구』등이 있음.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출강.
yhee01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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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평론이라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동업자(?)로서 연극 평론가의 평을 하긴 쉽지 않는데
김영희님의 글은 작품분석력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김문홍 선생님의 걸어온 길이 한 눈에 보이네요.
<방외지사 이옥>
이 분의 삶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식사를 빨리 하는 이유가 재밌군요.^^
존경하는 김문홍 선생님!
"열정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생명"
정말 그렇게 살고 계세요.~ㅎ
늘 선생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