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댓잎 그림자 어른대는 석물(石物)인데 이름이 호젓한 식물 같을 때가 있다. 단단함과 여림이 하나의 어휘 속에 서로 휘감아 도는 경우가 있다. 작은 바위와 식물의 뉘앙스는 그리하여 세상이 부르는 바와 실물 사이에 두동지듯 어울린다.
늦겨울 따순 볕에 땅과 댓돌에 구멍을 내며 떨어지는 석임물을 하릴없이 셀 때면 무엇 하나 담담히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적막한 한낮의 풍경들 곁에 시조는 차경(借景)의 눈시울이 습습해지곤 한다.
주술 같으나 그것은 마음의 솥에 덖으면 그 뜨거움 가신 뒤에 고요가 한 마당 열리는 시조는 왜 없겠나. 옥생각에 빠지지 않는 징검돌들 같은 것이나, 어느 난처(難處)와 모진 헤매임과 세월의 가위눌림에 처했을 때 선선히 손 이끄는 눈매 그윽한 빛살이 간절할 때, 가납사니와 나쁜 기운의 살(煞)들을 녹이는 상용의 부적 같은 것이 종요로울 때, 틀어 올린 포도 넝쿨의 포도잎 그늘을 이마에 받듯 시조를 떠올린다.
시절가조라는 말에는 응당 시절과 시대에 대한 늠연(凜然)하고 결 고운 영육, 즉 뫔의 시적 대응이 서린 일종의 방편이 돋아나는 것이면 좋겠다. 새삼 시조가 무슨 세속적 효험이고 효능이 있을까라고 누구는 의구심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태의연한 정형시의 관념 속에 새로운 간원의 촉(燭)이 솟아도 뭐랄 것이 없다. 오히려 소슬하고 기껍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비루하고 열등한 자기환멸에 빠졌을 때 그걸 가만히 보듬고 깨치듯 똥기는 일의 종요로움이다. 시조에는 그런 잠재된 문학적 영성의 고스란한 기운이 서렸다고 여긴다. 상투적인 시형식이 아닌 마음의 호주머니에서 언제든 꺼내 들 수 있는 일용할 그 무엇이면 좋겠다. 부스럭거리며 손에 쥐어진 것을 버리려 했는데 그걸 가만히 펴보니 새벽 어령칙한 꿈자리의 동티가 없는 중얼거림이 적바림된 것이 아닌가. 그 메모를 가만히 주워섬기니 옅은 서러움 같기도 하고 가만한 기쁨 같기도 하다. 박수 심방의 주문과 진언 같기도 하고 혼잣말의 노래 같기도 하다. 때로는 용채가 없어 공터에서 혼자 마시는 호젓한 선술 같기도 하고 가납사니 같은 누군가의 삿된 말을 되새겨 다시 전환하는 경계의 입말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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