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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2019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너무 작은 숫자
성다영
도로에 커다란 돌 하나가 있다 이 풍경은 낯설다 도로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풍경은 이해된다
그린벨트로 묶인 산속을 걷는다
끝으로 도달하며 계속해서 갈라지는 나뭇가지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공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기에 더 중요합니다 너무 작은 숫자에 더 작은 숫자를 더한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비유다
망할 것이다
한여름 껴안고 걸어가는 연인을 본다 정말 사랑하나봐 네가 말했고 나는 그들이 불행해 보인다는 말 대신 정말 덥겠다 이제 그만 더웠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하면 너는 웃지
그런 예측은 쉽다
다영 씨가 웃는다
역사는 뇌사상태에 빠진 몸과 닮았다
나무 컵 받침이 컵에 달라붙고 중력이 컵 받침을 떼어낸다
물이 끈적인다 컵의 겉면을 따라 물방울이 아래로 모이는 동안 사람과 사물은 조금씩 낡아간다
조용한 공간에 금이 생긴다
되돌릴 수 없다
성다영 :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중퇴.
[201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신의 당신
문혜연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호한, 주인모를 관계들
우리는 점점 닮아 가는데
누가 누굴 닮은 건지 모를 때는
어떻게 할까요, 당신은 지금
2%의 당신 자신과, 98%의 당신의 당신
순도 높지 않은 당신, 그리고 나
끝 모를 바닥으로 가라앉아요
새들은 언제나 아득한 높이에서 웁니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물에는
새의 밑면만 지나갑니다
깊이 가라앉은 바닥, 그곳에서 우리는
떠오를 수 없는 낮은 음, 낮은 울음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인사가 됩니다
우리의 울음도 우리의 내일이 될까요
안녕, 당신, 안녕
유언 같은 안부를 주고 받아요
우리는 새들의 세계에서도, 서로의 이름만 부르고
인간은 역시, 새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나봅니다
문혜연 : 1992년 제주 출생.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석사 졸업.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동아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캉캉
최인호
발목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불란서 댄서들은 하이힐에 올라야 비로소
태어나지
발끝을 모으지
분란은 구두 속에도 있고
탁아소에도 있고 어쩌면
내리는 눈의 결정 속에서도 자라고
오후 세 시에는 캉캉이 없다
모르는 시람이랑 대화하려면 쓸데없는 말들이 필요해요
식탁 아래서 발을 흔들고
유쾌해졌지 아무 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몰래 휘파람 부는 것 같아서
뉴스를 튼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가십을 만들죠
상반신만 보이는 아나운서의 말을 믿으며
캉캉은 감춰지는 중
양말 속에 주머니 속에
불란서 댄서들의 스포티한
팬티 속에
빨간 주름치마가 되어
덤블링이 되어
지구가 돌아간다
구세군 냄비에 눈이 쌓이고 내년에는
내년의 근심이 기다리겠지 고향이 어디입니까 묻는다면
제왕절개 했습니다 답하겠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은 캉캉
발끝을 들어올릴 때마다
불거지는 중
[국제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
이규정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 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아래 각을 맞추는 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사열되어
제왕에 예의를 갖추듯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 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구름은 종이 한장의 차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따악, 그 소리
일침으로 조용히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농민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이성배
미선나무 가지마다 밥알 같은 꽃들이 총상꽃차례*로 수북하다
이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십여년 전 겨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폭격이 있을 때
나는 군고구마를 사 들고 눈 오는 거리를 걸었지 싶다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은 사락사락 죽어갔다
하굣길에 장벽 쪽으로 돌을 던진 팔레스타인 소년 사미르 아와드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공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한 2013년 1월,
나는 따뜻한 거실에서 유치원에서 돌아올 네살배기 딸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총상꽃차례 같은 폭탄 다발을 투하하는 인간적인, 그 인간적인 인류애
엉뚱하게 우리 집 마당에 던져진 밥다발을 두고
고슬고슬한 밥알에 어머니 젖가슴 냄새 비릿하게 스며있는
이 질기지 않은 의미를 어찌하면 좋을까
햇볕 좋은 마당에 과분한 꽃
장벽 아래 양지바를 팔레스타인의 언덕에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사이에 수북수북 피어
덤불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 얼굴에 밥알이 하얗게 붙는다면
꽃 하나가 그럴 수 있다면
*꽃이 촘촘히 피는 형태의 하나
[전북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훈민정음 재개발 지구
한경선
강남로 집현전 부동산 내벽에는
매물로 나온 낯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푸른 종이 속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강남로에 집현전을 차려놓고
그 안에 가득 바람을 풀어놓았다
이 곳의 바람은 타워팰리스 하늘과 내통한 지 오래다
집현전 내벽에 새롭게 나붙은 훈민정음을 보며
성층권에서 내려온 별똥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별똥들의 방언도 이곳에서는
종종 훈민정음으로 인정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소문의 지도를 따라
북두칠성이 제 궤도를 돌 때
궤도를 벗어난 뭇별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각진 상자 한 귀퉁이에 지친 제 하루를 누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상자 속의 상자
앰뷸런스 소리가 빈번한 이곳
곽에서 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도 훈민정음이 있다
흐린 불빛을 달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관은
언젠가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길어 올릴 수 없는 검은 우물을 만질 것이다
노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그 우물의 색깔을 알고 있다
종종 허름한 지하방으로 스며들던 그 우물의 예언을 사람들은 한때
언문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순식간에 곽이 관으로 변하는 것은 집현전의 소관이 아니다
ㄱ자로 꺾인 길을 돌아 ㄴ자로 통하는 길은
강남로 후미진 골목 도처에 널려 있다
나랏말싸미 세상인심과 달라
언젠부턴가 사람들은 주위에 이상한 소문의 울타리를 친다
바람이 곽을 슬쩍 밀면 순식간에 관이 되는 이 새로운 골목에서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집현전 벽면에 새로운 훈민정음을 붙이고
네모난 상자곽 안의 잠을 사랑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의 잠 속에 칠성판을 그려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서울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랜섬박스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쉬는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 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한국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는다
노혜진
예순두 살에 뽀얀 속살입니다 시야각으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 벗고 만날 수 있고 온몸을
훑고도 괜찮아요 엄마는 때수건과 우유를 손에 들고 옵니다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두꺼운 발톱과 무좀을 병이라 부릅니다 탕의 수증기는 소리와 이야기를 불러 모읍니다 "그 발톱으로 네일숍에 왔대" 동료들이 웃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엄마 얘기만 합니다 아빠 얘기만 하는 동료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없니?" 질문은 되돌려집니다 알고도 모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동료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아차 하면서 재채기처럼 웃었습니다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만큼 웃음거리들이 쉽게 배어나오는 회사입니다 제가 오늘 재채기를 했던가요
바디 클렌저에서 수영장 냄새가 납니다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떠오릅니다 카페 화장실 앞에서 스콘을 먹어야 했어요 열고 닫히는 문은 섬이었다가 여름이다가 코끼리였습니다 삼십 분 동안 읽었는데요 시 한 편을 오래 보았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책을 동료에게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쓰는 몰입을 알 리 없어요 동료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등단을 못 하겠구나" 엉뚱한 발언을 잘 하는 저의 별명은 소설가입니다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요 동료들은 알고도 모르는 것일까요
"친구들은 어때요"하면 엄마가 떠오릅니다 저의 벗입니다 같은 원 안의 피자를 먹고 다른 날 같은 구두를 신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떼어 두었다가 서로에게 선물합니다 기억이 풍성해지면 쪼그라드는 현재들 진짜 벗들은 기억의 원 안에 있어요
항공사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돕니다 엄마는 키위를 반으로 자릅니다 포도를 씻고 귤을 깝니다 키위의 씨만큼 늘어나는 의혹들 과일 열한 통을 들고 출근합니다 회사일까 집단일까 궁금합니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 과일은 엄마에게 달아두는 외상입니다
조금만 당돌해집시다 구호가 필요합니다 동료는 잘난 척을 하다 동료들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저도 잘난 척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늙어도 우리는 무섭습니다 엄마는 겁보입니다 매일 밤이 오다니 엄마는 차를 몰고 저를 데리러 옵니다 보조석의 방석은 꽃무늬입니다 여성이 되기 위해 꽃을 사들이고 무늬를 사들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아합니다 스무살에 꾸었던 꿈의 일부를 이룬 것 같아요
노혜진 : 1977년 광주 출생. 세종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졸업.
[부산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
권영하
하늘 끝 마천루 정수리에
밧줄을 꽁꽁 묶었다
동아줄 토해내며 낙하하는 몸으로
건물의 창을 닦으며 절벽으로 내려간다
빌딩들 눈부시게 플래시를 터뜨려도
허공길 유리블록 사뿐히 밟으면서
수족관 물고기처럼
살랑살랑 물호수를 흔들며 헤엄친다
뙤약볕 빨아먹은 유리성이 열을 뿜고
빌딩허리를 돌아온 왜바람이
목숨줄을 무섭게 흔들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아이스링크에 정빙기같이
생채기를 지운다
유리벽에 갇힌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도 열어주고
유리창에 비치는 현수막의 사연도
살포시 보듬어 닦는다
의지할 곳 없는 허공에서
작업복 물에 젖어 파스내음 진동하고
피로가 줄끝에서 경적처럼 돋아나지만
또다시 하늘에 밧줄을 묶는다
땀 흘린 줄길이만큼 도시는 맑아지고
유리벽에 그려진 풍경화도
깨끗해지니까
[한라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
김윤진
고양이소에서 정말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당신은 물웅덩이를 지켰다. 짙은 녹색의 고양이소처럼 당신의 집은 고양이의 눈처럼 깊고 고요하다.
가만히 있다가도 다이빙하거나 발을 헛디뎌서 누가 그 깊이를 만지면, 털을 바짝 세우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릉, 하고 울어댔다. 몸을 으스스 떨며 건져 올린 신발의 개수를 일지에 적어넣는 것이 여름 당번의 일. 개학 후 신발의 개수만큼 책상이 비고, 당신이 지키지 못한 동생들은 집을 떠나고
당신은 항상 깊이를 알 수 없어. 두근대는 소에서 산다. 꿈 속에 당신의 아비는 칼을 들고 쫓아오고, 또 하나 당신의 아비는 발목이 부러진 당신을 부축하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은 당신 어깨를 감싸고, 파도가 되었다가 호수가 되었다가 그저 무지개 장화를 신은 아이들의 퐁당거리는 빗물이 되었다가, 당신마저 발을 담그면 세숫대야 물은 심층을 알 수 없었다.
[대구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사과를 따는 일
권기선
나는 아버지 땅이 내 것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 마음을 먹은 뒤부터 아버지 땅에 개가 한 마리 산다 깨진 타일조각 같은 송곳니는 바람을 들쑤신다 비옥한 땅은 질기고 촘촘한 가죽의 눈치를 살피다 장악되고 과잉되다 갈라진다 아버지는 땅을 방치하고, 나는 그것을 납치한다 깊은 목젖을 끌어올려 목줄을 뜯은 개가 간신히 사과 하나를 놓고 엎드렸다 세상 혼자 짊어지려던 남자는 무게를 견디다 어깨가 굽었다 힘은, 무기의 정차역 같았다 엎드린 개가 일어서지 못하고, 사과는 지하의 고요한 관을 기억해낸다 아버지 땅에 몰래 사과나무 한 그루 심은 날 그해 사과는 한 개도 달리지 않았다 아버지 땅이 내 땅이 되던 날 나는 사과나무 아래 아버지를 묻었다 병 걸린,
아버지를 먹고 자란 사과나무
붉은,
사과 따는 일을
[세계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대 가장 작은 별이 발견되다
박신우
별이 깃든 방, 연구진들이 놀라운 발견을 했어요 그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별 가운데 가장 크기가 작은 별을 발견했습니다 그 크기는 목성보다 작고 토성보다 약간 큰 정도로, 지구 열 개밖에 안 들어가는 크기라더군요 세상에 정말 작군요, 옥탑방에서 생각했어요 이런 작고 조밀한 별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말이죠 핵융합 반응 속도가 매우 낮아서 표면은 극히 어둡다고 합니다 이제야 그늘이 조금 이해되는군요
이 별의 천장은 매우 낮습니다 산소가 희박하죠 멀리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울지 몰라요 어차피 낮에는 하늘도 추락하겠지만 그래도 먼지가 이만큼 모이니 질량에 대해 얘기할 수 있군요 그건 괜찮은 발견이에요
먼 곳에서 별에 대해 말하면 안 돼요 다 안다는 것처럼 중력을 연구하지는 말아야죠 피아노 두드리듯 논문을 쏟아내지 말아요 차라리 눈물에 대해 써보는 게 어때요 별의 부피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레를 더듬는 일이죠 옥상난간을 서성거리는 멀미처럼 말이에요
여기 옥탑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의 상당부분이 기체로 존재해요 그래요 모든 별들은 항상 지상으로 언제 떨어질지 숨을 뻗고 있는 거죠
[무등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
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쾡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을 건너온 사인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릴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무늬가 찍혀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만지면
그 속에 갇힌 울음이 시커멓게 묻어나온다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지 같은 기름이 왈칵 쏟아진다
임종의 안쪽에는 어느새 검은 멍이 튼튼히 자리잡았다
길이 간절할 때마다 울음이 작동되지 못하고 툴툴거린 흔적이다
죽어도 사흘 동안 귀는 열려 있다는 말을 꼭 움켜쥔
얼굴의 피멍이 희미한 눈빛부터 쓸어내렸다
이제 습골의 시간이다
정든 과수원 나무들이 마지막 악수를 청했는지 뼈마디마다 주저흔이 보인다고 기름 묻은 손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경상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광고
김길전
파라킨사스 너는 뼛속까지 시린 밤에도 쇄골을 드러낸 가난한 여인의 입술에 걸린 광고
가진 것이 그저 빨강 밖에 없네요
추운 것들은 늘 번지려는 색 뿐이에요
낡은 예식장이 생각과 모자를 바꿔 장례식장이 되자 눈이 많이 내리고 대기하던 사람들이 죽었어요
간밤
그 신장개업의 담벼락에 어지럽게 나붙은 광고
생고무 신발 재고 정리 새 신발 신고 가세요
추운 것들은 늘 눈이 커져요
광고는 붉은 과장
광고는 춥고 따스함의 의도적 대비
광고는 움츠리는 불빛의 촉수
추운 것들은 언제나 끝에 있어요
오늘 파라킨사스는 눈 속에서도 드러낸 가슴이 너무 붉고
몇 낱알 쌀을 물고 누운 자는 신발이 없어요
단지 겨울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돌아섰네요
타인의 추위를 수긍하지 않는 이들의 등 뒤로 드러냄이 참 스산한데요
[전북도민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명옥헌 별자리
최재영
원림에 드니 그늘까지 붉다
명옥헌*을 따라 운행하는 배롱나무는
별자리보다도 뜨거워
눈이 타들어가는 붉은 계절을 완성한다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연못 속 꽃그늘
그 그늘 안에서는 무엇이든 옥구슬 소리로 흘러가고
어디선가 시작된 바람은 낮은 파문으로 돌아와
우주의 눈물로 화들짝 여울져 가는데,
기어이 후두둑 흐드러지는 자미성**
연못 속으로 어느 인연이 자맥질 해 들어왔나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젖히고
한여름 염천에 백리까지 향기를 몰아간다
그 지극함으로 꽃은 피고지는 것
제 그림자를 그윽히 들여다보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첫 개화의 우주에서
명옥헌 별자리들의 황홀한 궤도가 한창이다
한 생을 달려와 뜨겁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드디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안과 밖을 당기니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견고한 합일의 연못
눈물겹게, 붉다
*명옥헌 : 전남 담양군 소재. 조선중기 오이정이 세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소리 같다하여 명옥헌이라 함.
**자미성 : 자미는 백일홍나무, 배롱나무라고도 하며 하늘의 은하수를 본따 명옥헌 연못 주위에 28그루의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함.
[영주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기도
원기자
일면식도 없는 햇살이
평화의 소녀상 앞에 십자가로 세워집니다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할머니가
외줄 위의 어름사니처럼 아슬아슬하게 넘어갑니다
헐렁한 약속을 꿰어보자고
옷고름 풀고 앉아 빈 하늘에 보내는 침묵을
귀 세워 듣는 이 없네요
열세 살 어린 꽃송이
군용트럭에 실려 어둠의 터널로 들어섰지요
속살 드러낸 허공이 이제 막 달거리 시작한 꽃잎으로
휘파람을 불며 달려들던 밤에는
비린내가 사라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랫소리 배경삼아 스스로 껍질이 된
한 여자의 붉은 생, 반듯한 체면을 따라가면
목숨처럼 그러안은 기도가 쏟아집니다
인생이란 단막극을
주연으로 살아본 적 없는 몸, 숨이 멈추면
"미안합니다"
듣고 싶은 그 말 한 마디 염원으로 남기고
십자가 높은 푸른 하늘에 한 줌 햇살이 되리
[2019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
조온윤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의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면 어두컴컴한 하수구 어디쯤에서
삼켰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여전히 관망하지
세계를
그곳의 공감각을
머지않아 모든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온다고 해도
목을 축이러 찾아간 아무르 강가에서
저 멀리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밖엔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눈을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지
죽은 뒤에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흔들의자는 혼자서도 오랫동안 흔들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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