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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에 출간된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는 북유럽 슬라브 신화에 있는 인어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여진 이야기다. 평생 짝사랑을 하며 독신으로 살던 안데르센은 자신의 경험을 녹여 동화를 지었다. ‘인어공주’도 고백하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자신의 사랑 경험을 기반으로 창조되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과 성장 동화는 1989년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각색이 많이 되었다.
필자가 한 일고여덟 살 즈음에 읽었던 "인어공주"는 난생처음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인어공주는 가장 소중한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녀에게 내주고 왕자 곁으로 갔지만, 왕자는 그녀의 희생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왕자의 심장을 찌르면 원래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지막 남은 기회마저 스스로 버리면서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었다는, 이 슬픈 사랑 이야기를 어린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거품이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랑하는 왕자 곁에 머물 것이라는, 내 맘대로 결론을 내리면서 꿈에서도 울었다.
'인어공주', 롭 마샬, 2023. (이미지 출처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인어공주'의 신화, 실사 영화에서 달라진 점
198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인어공주’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보상하듯,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나를 기쁘게 했다. 디즈니 사후 20년 이상 이어지던 침체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디즈니 왕국의 출발을 알린 이 애니메이션은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은 빨간머리 미녀 에리얼을 인어공주로 기억한다. 그렇게 34년이 흐르고, 월트 디즈니 컴퍼니 100주년이 되는 올해 리메이크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개봉했다.
이 리메이크작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2019년에 제작과 캐스팅을 발표하자 팬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큰 화제가 되었다. 감독은 ‘시카고’, ‘숲속으로’ 같은 뮤지컬, 그리고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어드벤처 판타지로 유명한 롭 마셜이고, 그는 주인공 에리얼 역에 십대 가수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 한다고 발표했다. 할리 베일리는 어려도 그래미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실력을 갖춘 가수여서 뮤지컬을 하기에 문제가 없는데, 많은 이의 화제에 오른 이유는 그녀가 흑인이며, 한눈에 미인이라 보기 어려운 외모 때문이었다.
'인어공주'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왕자의 구조를 기다리며 결혼을 꿈꾸는 동화 속 공주가 지금 시대에 동떨어지는 점이 많으므로 리메이크는 대폭 각색이 필요하며, 기존 생각을 뒤집을 파격으로 새로움을 가져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PC)’을 적극적으로 가져와서 논쟁과 화제를 불러오고, 세계를 의식하며 관객층을 넓히면서 신세대와 진보주의자들에게 응원을 받았다. 디즈니의 PC주의는 일견 상업성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이 분명하지만, 세계 최대 글로벌 엔터테이먼트 기업의 이러한 선택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흑인에 이쁘지도 않은 에리얼이 팬들의 동심파괴라는 면에서 거부감을 일으킨다고 지적하자, 디즈니 관계자들은 가르치듯 이를 ‘인종혐오’, ‘여성의 대상화’로 몰아갔다. 이에 팬들은 더 거세게 분개했고, 급기야 나오지도 않은 작품을 미리 깍아내리고 말았다. ‘인어공주’를 둘러싼 최근 해프닝은 대중문화를 하나의 사회학적 현상으로 분석할 만한 중요한 소재거리다.
그 모든 걸 떠나서, 나는 행복한 인어공주의 결말이 기쁘면서도 원작 동화가 주는 깊은 슬픔 뒤의 성장과 위안의 감정이 아쉬웠다. 그레서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서 펼쳐진 그 소울 넘치는 아름다운 할리 베일리의 목소리가 에리얼에 어떤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었을지가 무척 궁금했다.
'인어공주'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내 맘속에 숨어 있는 꿈꾸는 어린아이
바다 위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며 미지의 낯선 세계를 동경하는 에리얼의 눈동자는 모험과 도전의 설렘 앞에 영리하게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개성 넘치는 외모는 감정을 풍부하게 담아내는 노래 실력으로 한층 호감이 갔다. 에리얼뿐만 아니라 영화는 구석구석에 편견과 틀을 깨고 다양성과 개방성을 담아내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인간 왕국의 에릭 왕자가 왕 부부에게 입양된 아들이지만 후계자로 길러진다는 점은 혈연 중심 가족이 깨지고 있는 현대를 반영한다. 바다 마녀 울슐라는 트라이튼 왕의 여동생으로 오빠가 몰빵으로 가져간 권력에 한을 품으며 욕망을 숨기지 않고, 에리얼의 여섯 명 언니들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개성 넘치는 아름다움을 뽐낸다.
에리얼은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이어서 안락하고 평화로운 바다 공주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위험천만하지만 도전적인 낯선 세계로 향한다. 사랑을 쫒았다기보다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장의 서사로 읽히며,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안에 여전히 잠재해 있는 소녀가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안의 소녀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말이다.
바다 마녀 울슐라는 바다의 왕이 되고 싶었지만 축출당한 인물로, 꾸지 말아야 할 꿈을 꾸고 욕망을 숨기지 않았기에 손가락질 당한 불행한 선구자 여성으로 보여서 빌런이지만 밉지 않았다. 딸을 구하기 위해 최고 권력을 내어놓고 한없이 움추러드는 인간적인 아버지 트라이튼 왕, 그리고 대결보다는 평화를 원하며 적국의 생명체에게 손을 내미는 에릭 왕자도 인상적이지만 여성 캐릭터들에 비해서는 덜 부각된다. 영화는 인어공주와 바다 마녀의 욕망의 향연과 대결의 드라마다. 이를 보면서 많은 관객은 무한한 가능성과 꿈을 품었던 어린 시절 감수성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인어공주'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바닷 속 세계는 어두컴컴하고 무섭게 그려진다. 이는 땅의 세계가 주는 햇살과 따뜻함과의 대비를 위한 장치다. 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침략과 식민의 역사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백인 제국주의적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못마땅한 의심을 하게 된다. 이를 역사와 사회로 읽을 때면 불편하지만, 인격의 성장과 인간적인 도전으로 본다면 큰 문제는 없다.
아이들에게 추천하기에는 공포스럽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로는 좋다. 에리얼에 대한 팬심 때문에 21세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무장한 공주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키스를 기다리는 수줍은 소녀가 아니라, 마차를 거침없이 몰고 거대 선박을 조정하는 데 거리낌 없으며, 외형으로 위축되지 않는 멋진 여성이 거기에 있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Peace be with You!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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