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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학 1:1-11
1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학 1:1-11 /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촉구] 제목 : 여호와께서 하달하신 전통. 전령 : 예언자 학개. 수신 : 스알디엘의 아들인 유다 나라의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인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하여 귀환한 사람들이다. 날짜 : ㄱ) 다리오왕 1세의 통치 2년 6월 1일. (ㄱ. BC 520년 8월 29일) 2)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성은 나의 성전을 재건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빠르다고 말한다.' 3)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예언자 학개를 통하여서 다음과 같이 전달되었다. 4) `나의 성전은 아직도 잿더미 속에 부서져 있는데, 너희는 벌써 화려한 집안에서 살고 있느냐?' 5)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하여 보아라! 6) 너희가 농사는 많이 짓지만 거두는 것은 별로 없다. 너희가 먹기는 먹어도 배부르게 먹을 양식은 없다. 너희가 마시기는 마셔도 만족하게 마신 포도주는 없다. 너희가 입기는 입어도 따뜻하게 입을 옷은 없다. 너희가 진실로 쉴 사이도 없이 일을 하여 벌어들여도 밑빠진 독에 물붓는 꼴이 되고 있다.' 7) 그러므로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형편이 왜 그토록 어렵게 되었는지를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8) 너희는 산에 가시 재목을 베어다가 나의 성전을 건축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 성전을 만족하게 여기고 내가 영광을 받으며 거기서 너희에게 나타나겠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9) `너희는 많은 것들을 기대하였으나 얻은 것은 지극히 적었다. 너희가 거둔 것을 집으로 많이 가져왔으나 내가 그것을 불어서 날렸다. 내가 왜 그렇게 하였는가를 너희는 도대체 깨닫지 못하느냐?'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물으셨다. `그것은 잿더미 속에 묻혀 있는 내 성전때문이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누구나 제 집만 잘 짓느라고 정신이 없다. 10) 그러므로 하늘이 비를 그치고, 땅이 소출을 내지 않는다. 11) 바로 내가 이 나라의 산천에 이토록 심한 가뭄을 내리었다. 저 모든 산에도, 저 곡식 밭에도, 저 포도원에도, 저 올리브나무의 숲 위에도, 땅에서 나오는 모든 초목들 위에도, 모든 사람과 짐승들 위에도, 그리고 너희가 애써 일하는 모든 것 위에도, 내가 가물어서 흉년이 들도록 해놓았다.'
주전 538년인 고레스 왕 원년에 유다 백성들이 본토로 귀환하고 예루살렘에 성전 재건의 기초를 놓았습니다(스 3:8-10). 하지만 이후의 작업이 주변 거류민들의 위협과 반대 공작에 막혀 16년 넘게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선지자 학개가 나타나 외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1-5) 그는 먼저 책망을 담은 어조로 말합니다.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이 백성이 자신들은 지붕까지 덮인 집, 공들여 지은 집, 판벽한 집에 살고 있지만 성전은 재건이 중지되어 지붕과 벽도 없는 비참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성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서로 변명만 일삼으며 자신들의 불성실을 정당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것이 옳으냐 묻습니다.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6-7) 자신들의 사명을 팽개치고 변명 속에 자기 생계에 얽매이고 있다면 그의 삶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대 백성들에게 지금 자신의 삶을 살펴보라 하십니다.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수고와 노력과 행복하기 위해서 애썼던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토록 어렵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8-11) 갖은 노력을 했지만 삶이 여전히 어려운 원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하였으되 이를 방치해버리고 제각각 자기 집을 짓기에는 빨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곳에서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거둔 그것조차 흩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소출을 그쳤고 온 땅 위에 가뭄을 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바로 주변 산에 올라가서 보이는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적용: 당신이 일상에서 당신의 생존과 안위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우선순위로 두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마 6:33-34).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에스라서를 보면,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파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고국에 돌아와 주전 536년경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나(스 3:8), 그 땅에 거하던 대적자들의 방해로 주전 521년까지 성전건축은 약 15년간 중단되었습니다(스 4:24). 사람들은 아마 마음이 위축되어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보다는 자기 집을,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 일을 앞세우기 때문에 자신의 수고의 대가를 복으로 누리지 못하였으며 돈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은 것같이 되었다고 지적하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전을 세워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설 교 >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
학개 1장 9-11절 / 이한규목사
< 핑계하는 삶을 살지 말라 >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누구 때문에 하늘의 이슬이 그치고 땅의 산물이 그치고 한재가 생겨난다고 했는가? 그 이유에 대해 “너희로 말미암아”라고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집은 황무한데 자기의 집 꾸미기에만 빠른 너희로 인하여 그렇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어려움이 있을 때 환경이나 남 탓을 하지 말고 하나님 탓도 하지 말라. 나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음을 겸손하게 자각하라.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수많은 난치병으로 고통 받았던 미우라 아야꼬가 고백했다. “병으로 잃은 것은 건강뿐이고 그것 때문에 믿음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불행과 절망은 ‘내가 억울하게 고통당한다.’라고 오해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다고 생각에만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 그 일도 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펼치신 것이라고 생각하라. 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이 심해지고 인생이 후퇴하지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분발하게 되면서 인생이 발전한다.
항상 남을 기대는 것도 잘못이고 남을 걸고넘어지는 것도 잘못이다. 주체의식과 책임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군중심리를 가지고 남을 바라보고 비교하며 실망하고 불안해지는 병은 타락의 증거다. 그런 병으로 인해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하고 가방이나 신발도 사치품 브랜드를 사야 한다. 독립적인 존재로 살지 못하면 행복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믿는 사람이란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 주체의식과 영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기도에서 온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을 바라보고 환경을 탓하며 빈곤한 삶을 사는 이유는 기도의 부족 때문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바쁠수록 기도하라. 기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잘 잡으라. 예수님도 기도하셨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핑계할 수 없다. 기도의 실패는 신앙의 실패이고 신앙의 실패는 인생이 실패다. 반면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가장 큰 성공이고 언젠가 성공의 실질적인 열매가 내게 주어질 것이다.
<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 >
학개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과 우선순위의 삶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은 반대로 자기의 일과 자기의 집에만 빠르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말씀이다. 돈 좀 만져보겠다고 주일을 빠지고 교회에 무관심하고 헌금도 형식적으로 하면 처음에는 돈을 좀 만지는 것 같지만 먼저 믿음부터 날아가고 그 다음에는 가정에 우환이 들고 사고가 생겨 돈이 날아가고 영혼에 세상 것이 들어와 돈이 날아간다.
하나님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나님이 나를 불행에서 지켜주신다.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이 없는데 일이 잘 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내게 관심이 없으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면 부모는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고 할 것이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징계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다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확고히 정립할 때 영혼과 가정에 복 받는 길이 펼쳐진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크게 축복 받았지만 나중에는 타락했다. 그가 언제부터 타락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아마 성전보다 훨씬 큰 왕궁을 지으면서부터 본격적인 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결국 그의 후대에 나라가 둘로 갈린다. 영원히 가치 있는 영혼의 일보다 일시적으로 가치 있는 육신의 일을 앞세우지 말라.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경제적인 피폐가 아니라 영원히 가치 있는 것보다 일시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앞세우고 그것에 자신을 낭비하는 것이다.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고 수입이 생기면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또한 좋은 것을 구별해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면서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잘 건축하면 그것이 나의 가정과 교회가 영원히 축복받고 잘 사는 길이다. 그처럼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을 통해 마음의 성전 건축에 힘쓸 때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내게 더 큰 축복도 내려주실 것이다.
성전건축의 의미
학 1:8, 2:6∼9 / 손상률목사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상징하는 성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이 모세와 함께 출애굽을 감행한 광야 여행기간에는 가는데마다 이동하여 건립할 수 있는 성막이 있었습니다(출40:1-16).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후에는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웅장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찬란한 다윗 왕국의 역사를 성전과 함께 이루어 나갔습니다(왕상7:51).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배도의 길을 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엄청난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때는 어김없이 성전의 수난이 있고 그들에게는 성전을 잃는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 주변 열강들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읍이 함락당하고 백성들은 세계 도처로 유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심정을 노래한 시편기자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고 하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흩어진 나그네로 유랑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그들은 간데마다 회당을 짓고 거기 모여 율법을 강론하며 성전에서 못하는 영적 욕구를 채우려고 애를 쓴 흔적이 있습니다(눅4:16-19).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성전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건물이나 공간적 의미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을 매체로 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크신 은혜에 대한 감격을 체험하고 살아 갑니다.
지금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도 외형적이고 문화적인 측면보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 1:8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되새겨 보면서 성전 건축의 의미를 교훈 받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의 영광
본문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 학개는 바벨론 침공으로(B.C.586)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백성들을 독려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말굽에 짓밟혀 하나님의 성전이 허물어진 것을 볼 때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이 훼손된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학2:3).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학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독려하여 성전재건을 시도하였고 4년만에 그것을 완성하였습니다(B.C.516). 이렇게 지어진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 2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성전 재건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본문 말씀 1:8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확실한 믿음이 그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를 통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시기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학1:9)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집을 잘 꾸미며 개인적인 생활의 안정과 번영을 꾀하면서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원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리며 헌신의 모습을 보이는 여인의 행위를 두고 그것은 곧 주님께 대한 사랑의 발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8:37-47).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성을 드리고 진액을 쏟아 주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농도가 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나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전을 지을 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법도에 따라 순종하는 행위로 이루어졌습니다.
광야에서 지은 성소가 그러했고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도는 무엇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목을 매며 거기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시의존(啓示依存)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성전 건축의 비젼을 제시하였습니다.
학개 2:20-23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일을 하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열방이 멸망하고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는 장차 임하게될 메시아 왕국의 비젼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신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성전 건축과 같은 위대한 역사로 헌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관해서는 솔로몬의 부친 다윗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후 가장 비중있는 사업을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일로 꼽았습니다.
역대상 17:1에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밑에 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은 다윗의 심중을 읽으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고 하였습니다(대상17:7-8).
이에 대하여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대상17:16)하고 그 감격을 억누르지 못한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집착한 것도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Ⅱ. 교회의 소임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받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여야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지상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의 집단입니다.
신명기 7:6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헤아려서 그의 원하시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여야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건축하는 이유중에서 가장 큰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1) 예배적 의무입니다.
로마서 12:1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속받은 성도의 삶의 원리를 제사하는 것으로 하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적 생활을 하여야 된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또 요한복음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하고 예배의 중심과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 대답은 바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21:13)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주님의 교회 곧 성전의 기능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2) 선교적 의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1:8).
이와같은 주님의 분부를 받들어 교회는 부단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야 됩니다.
모든 성도들 개개인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여야 되지만 성도의 집단인 교회는 전도자를 생산하여 내는 곳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나가게하는 선교운동의 센터인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성령 충만의 능력을 힘입어 기독교 세계화 운동의 산실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교회 곧 성전과 건물은 선교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목적의 일환으로 지역과 주민들에게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나가면서 선교의 영역을 넓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는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사54:2)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54:1)고 하여 교회의 엄청난 부흥과 비젼을 이유로 내세웠습니다.
(3) 교육적 의무입니다.
교회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인격자를 배양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 가시기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가운데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양을 쌓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사명중에 교육하는 사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삼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또 그들을 가르치실 때 집에서나 바닷가에서나 산에서나 어디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가르치셨지만 특히 회당에서 성경책을 펴시고 강론하신 장면들은 의미있게 새겨볼만한 일입니다(막6:2).
오늘 우리가 건축하는 성전 건물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세상 사람을 향한 전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양육하는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가장 아름답고 비젼있는 건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Ⅲ. 약속된 축복
하나님의 성전은 그 백성에게 있어서 언제나 축복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은 시편 122편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기록하면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절)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안에 섰도다"(2절)고 했으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6-7절)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존귀케하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자 성전을 지을 때 무한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에게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신 것도 그 백성이 성전의 퇴락한 것을 그대로 방치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학개 1:7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9에는 그들이 성전을 다시 지었을 때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지어드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어지는데 이 일이 바로 백성에게는 더없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였습니다(삼상2:30).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성전을 짓고자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존귀한 복을 주셨습니다.
시편 8:4-5에 그는 노래하기를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재물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 사람들은 자기의 재물을 바칩니다(출36:3-7).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몇 배나 넘도록 더 많고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말씀 8절에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은과 금뿐 아니라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롬8:32).
"은도 내 것 금도 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하시면서(눅15:31)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같이 누릴수 있도록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3)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외적의 침략을 막아주시고 그 나아가는 길을 형통케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40:38에 보면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축복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열왕기상 9:3에 보면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 그 자체가 성도들에게는 무한한 축복의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새해
학 1장 8절 / 김남수목사
새해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한해 축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 1:8)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면서 금년 한해는 성전건축의 해 하나님이 축복하신 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한해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25년동안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성전건축을 위해서 기도해왔습니다. 성전건축위원회가 생겨진지도 20년이 지났고, 퀸즈성전으로 옮겨와서 성전수속을 시작한지 10년만에 성전건축을 눈앞에 보게되었고,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오래참고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아이들이 자동차를 사 달라고 하면 어린아이들에게는 장난감 자동차 밖에는 사줄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가 자라서 18살, 20살, 22살, 나이가 될 때까지 10년, 20년 기다리면 기다리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들은 오래 기다리고 또 인내를 통해서 소중하게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고 사모하게 하셨다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두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하나님의 집이요 우리의 집,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손의 집, 우리 육신의 교회이면서 영혼이 쉴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 그리고 우리 민족과 세계만방에 빛을 전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워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내가 내 영광으로 그 집에 가득 채우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되고 그 성전건축을 눈앞에 보게 하시고, 그 성전을 드리되 하나뿐 아니라 둘씩 한해에 드릴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과 예루살렘 성전, 아이들과 청년들이 드릴 수 있는 예배실과 어른들이 드릴 수 있는 본당과 이 예배실을 금년에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게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응답이 속히 안 된다고 낙심할 때가 있지만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시고, 기도 드린 것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몽땅 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래참고 기다리고 기도한 결실이 우리 눈앞에 보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한 줄 믿습니다. 많은 분들은 하나님 교회의 축복은 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교회와 나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열심히 했을 때 하나님의 일 잘 되시는 것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 일을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주의 일에 힘쓰면 주님의 손길이 나를 도우시고 내가 주의 일을 할 때에 주님이 나의 일을 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내 손으로, 나의 집은 주님의 손으로"가 될 때 집안이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은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축복이 되는 것이 곧 우리의 축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BC 538년에 5만명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고레스 왕이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고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536년에 다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와 여러 가지 어려움과 피곤하다는 이유와 자기 중심의 이기심 때문에 저들은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참 불행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먼저 짓고, 그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 백성들이 범사에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 풍작이 되도록 그렇게 사는 것이 원칙인데 힘들다, 방해가 있다,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2년동안 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고 몇 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자기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기들의 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집을 등한히 하고 황폐케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생활과 삶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 사건이 얼마나 타격을 주었는지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었습니다. 먹을지라도 배가 고팠습니다.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으며, 삯을 받아도 뚤어진 전대에 넣은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메말라졌으며, 신앙은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갈등과 시기와 무의미에 저들은 피곤해질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무익한 삶에 몸부림치며 비생산적인 노동과 공허한 생활과 예상치 못한 수많은 손실 때문에 영적으로도 지치고, 물질적으로도 피곤하고, 가난과 공허와 비생산적인 여러 가지 사건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일이 육신의 일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아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이것을 무시하면 무지한 사람이고, 미련한 사람이고, 결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일과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우선순위를 잘 지켜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깨닫고 문제를 발견할 즈음에 하나님의 선지자 학개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예언자를 보내서 저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저들이 돌이킬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학개는 설명했습니다. "20석을 추수하러 가보면 10석밖에 거두지 못했고, 50그릇의 포도즙틀에서 20그릇만 거두고, 곡식종자,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육신의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성전을 방치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돌아와서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하시니 "너희는 가서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다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에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고 기초석을 놓고 거기에 집을 짖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놓기 시작한때부터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건축과 하나님의 축복을 주실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하나님의 성전건축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정성을 쏟든 정성을 쏟지 않던, 기도하던 기도하지 않던,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제 이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인줄 믿습니다. 그것은 돈을 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니 금도 은도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어야 되겠습니다.
새해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의 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우리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도전을 다시한번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시간 참석서부터 시작해서, 헌금부터 시작해서 기도하는 시간, 성경말씀 모든 면에 하나님께서 갑절의 축복을 주실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께서 영적 부흥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신 분입니다. 함부로 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앞에 아낌없이 드리고, 힘껏 드릴 수 있는 것을 가르친다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았을 때 정말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장부들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도록 준비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때 예배가 새로워져야 될 줄 믿습니다. 찬송이 새로워져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고, 은혜 받으려면 은혜받는 자리에 가야 되고, 은혜받는 준비가 되어야 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축복받는 자리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데서 아무렇게나 주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이제 새해를 새 출발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헌신과 드림과, 예배와 찬송과 말씀 기도를 주님 앞에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것들을 바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하신 축복을 넘치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가정의 신앙의 축복, 우리의 심령의 영적 부흥이 금년에 갑절로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준비를 우리가 할 때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제사, 산 제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될 줄 믿습니다. 목장도 살아나게 될 줄 믿습니다. 평신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통계를 보니 68%가 목장에 소속되었습니다. 32%는 아직도 목장과 상관없이 소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새해에는 한 분도 빠짐없이 목장에 소속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이란 누구도 혼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밀어주고 끌어줄 때 신앙이 불붇게 될줄 믿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도와서 용기와 격려를 주면서 함께 성장할 때 신앙의 불이 붇게 되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여러분이 기도하고 열성과 사랑을 쏟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사랑과 아름다운 교제를 가지십시오. 목장이 부흥되고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면 형제보다 더 아름다운 그리스도 안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여러분의 신앙이 어려울 때 밀어주고 끌어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고, 내 일도 남에게 열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나고 특별한 사람도 있지만 함께 어울려 살면 서로 서로 맛을 내어서 향기가 되는 줄 믿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서로 뭉쳐서 아름다운 부흥과 형제우애를 가지십시오. 세상은 불신만 있습니다. 시기질투와 미움이 가득찬 세상인데 그런 세상을 힘겹게 혼자 살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형제가 우애해서 서로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교제하며 성령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 여기가 천국이 될 줄 믿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이 발전하고 불이 붙을 때 교회도 부흥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시고, 부흥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런 준비를 한 사람 한사람, 목장마다 철저하게 신앙의 부흥과 영적 각성을 위해서 우리가 신앙의 준비를 갖추면 목장이 부흥되듯이 교회는 절로 부흥이 되고, 갑절의 부흥과 축복을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저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교회, 역사적인 교회, 세계적인 교회, 빛을 발하는 교회로 하나님이 세우신 뜻이 계셔서 이 일을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영적으로 가정적으로 물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심으로 이 축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땅끝까지 하나님의 관심인 이 복음 전하라고 주께서 원하셔서 일하시는 줄 믿습니다.
금년에는 평신도 사역이 안정되어서, 이제는 평신도 선교의 원년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선교위원회를 만들고 선교위원회가 선교의 계획과 선교의 진행과 선교의 추진과 선교의 보고를 해왔습니다. 이제 선교위원회는 기획과 여러분을 협력하는 일로 물러나고 이제는 교구가 충분한 교회적 사명을 감당해서 이제는 평신도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된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금년부터 여러분과 여러분의 교구가 한 교회의 역할을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되겠습니다. 교구가 힘을 써서 비젼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하고 이 위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선교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선교에도 불이 붇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스페인 말을 부지런히 배우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하여 남미를 선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안정을 주시고 축복을 주셔서 우리의 산업과 자녀들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으로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몇 년 후에 각 교구가 남미에 자리를 잡고, 충분히 감당할만 할 때에 아프리카 대륙도 한 나라씩 맡으시고, 또 몇 년 후에 자리가 잡히면 동남아시아, 그렇게 해서 5대양 6대주에 우리 교구 교회가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금년에 어떻게 하든지 축복을 받고, 갑절의 부흥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시켜 하나님 앞에 봉헌할 뿐 아니라 대대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통해서 세계 만방에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선교의 사역이 시작될 때 한 가정에서 1년에 한 교회를 지을 수 있다면 1년에 교회가 천 개씩 늘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목장별로 학교를 짖는다고 한다면 한 해에 100개의 학교를 짓게 됩니다. 머지않아서 우리의 손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사역이 한 시대와 역사를 바꾸어놓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금년은 축복 받은 해입니다. 갑절의 축복을 주실 해이므로 마음을 준비하시고, 새해 새 출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주님 앞에 새 결심을 갔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 것이 나의 축복, 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이 한해도 주님 앞에 바칩니다. 사용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과 세계를 선교하는 위대한 사역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내적으로 성결함과, 외적으로 경건함과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을 건축하라
학 1장 7~11절 / 박상훈목사
"전을 건축하라." 8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키소, 코소, 카아소"라고 부릅니다.
첫째 기준은 "키소"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그의 주머니"라는 뜻입니다. 돈 주머니, 곧 전대를 의미합니다.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쓰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온통 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어린 시절 무척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돈이 없어서 옷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살았습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장가도 느지막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안에서 늘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 신조는 이러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는 어려운 교회들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모든 교회가 최상의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운 교회에 전자오르간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그가 기증한 전자오르간의 수는 7천대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의 전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 다오."
우리도 돈을 벌든지 쓰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준은 "코소"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그의 잔"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서 찾는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물됨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잔에 술을 부어서,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육신의 향락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그런 데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 두면서 살아갑니까? 대소요리문답 제1문답을 보면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Men's chief a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기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셋째 기준은 "카아소"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의 노여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 사람의 감정 조절 능력과 인내력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또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습니다. 왜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그 지렁이가 아직은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렁이가 완전히 죽으면 밟아도 꿈틀거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은 육신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일에도 화를 벌컥벌컥 냅니다. 온갖 성깔을 다 부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완전히 장사지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면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한번 평가해 보십시다. 우리의 물질 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을 어디에 두면서 살아갑니까?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우리의 감정을 잘 조절하면서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이 시간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다. 우리의 잘못된 삶의 습성이 있으면 반성하고 바른 길로 돌아서십시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우리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 제일주의의 삶을 살아갑시다. 이 은혜가 우리 모드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8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8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하게 방치할 때의 결과입니다. 9절∼11절 말씀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전을 건축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즐겨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자자손손 누리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살펴봅니다.
8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하나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교나 병원을 지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왕궁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전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만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상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건물들은 아무리 화려하게 잘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은 화려하게 지은 왕궁보다도, 오늘날의 웅장한 종합청사 건물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84:1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의 성전을 이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물질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당시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금 패물을 다 받아서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도록 하셨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그것으로 음식을 사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오르는 생수를 마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허락하셨습니까? 그것들을 가지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으라고 하심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귀한 물질을 넉넉하게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필요할 때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고 우리에게 물질을 맡기신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려한 대리석이나 레바논의 값비싼 백향목을 수입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는 명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가 있는 7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산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와나메이커가 한번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언덕 위에 아주 예쁘게 지은 예배당 건물이 있었습니다. 언덕 밑에는 웬 농부가 쌍발이 소를 몰고서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쪽은 소인데 다른 한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농부에게 그 연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농부는 언덕 위에 있는 예배당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작년에 우리가 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예산이 부족해서 지붕을 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소를 팔아서 하나님께 헌금으로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가 건장한 청년이 되었으니 소를 다시 살 때까지는 얼마든지 쟁기질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의 말대로 소 한 마리를 팔아서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저 교회의 지붕을 얹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와나메이커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그 농부 가족처럼 자기에게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뜨거운 감격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사업을 해서 물질을 벌 때마다 해외에 많은 선교 헌금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도 그가 보내 온 선교 헌금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 건축은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도 충분하게 채워 주십니다.
학2:8의 말씀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세상 은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전 건축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앞장서 가시면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즐겨 순종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8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성전을 건축할 때 영광을 얻으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쪼그라들어서 있는 땅도 팔아야 되고 건물도 줄여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날로 부흥하고 성장해서 온 교우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신축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경멸히 여기고 마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윤택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십니다.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학2:18∼1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지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들은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큰복을 주리라고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 건축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큰복을 받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보스턴 시에 가면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교가 있습니다.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대학입니다. 그 캠퍼스가 얼마나 큰지 도시 전체와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캠퍼스 안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부속 건물 가운데서 가장 중간에 위치한 건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하버드 대학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빙 둘러 서 있는 셈입니다.
하버드 대학교는 하버드라는 이름의 목사님이 세었습니다. 그 학교의 설립 이념은 학교의 중심에 하나님의 성전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학교를 어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버드 대학교가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학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성전을 그만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영락 교회를 건축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의 교인들의 수가 약 150명 가량이었습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서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건축을 하려면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십일 동안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께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성전 기공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150명의 교우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건물이 바로 지금의 영락 교회 예배당 건물입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30년 전에 십일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다 헌금으로 바쳤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다 굶어 죽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 있거나, 또는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8절 끝 부분의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해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또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그 결과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은 한량없는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축복을 자자손손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하게 방치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6절 말씀대로 그들은 밭에 나가서 많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들은 땀흘리면서 열심히 일했기에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형편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하시는데 어떻게 농사가 제대로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거두어들인 것은 적었습니다.
양만 적었던 것이 아닙니다. 질도 나빴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마치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쭉정이처럼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는데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시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잿더미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농사가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창고를 새로 짓고, 그 속에 곡식을 가득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수고했노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시는데 무엇이 남겠습니까?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우리의 건강, 재물, 지식, 명예 등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하나님이 불어 버리시면 우리의 생명도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물으셨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황무한 삶을 살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소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스스로 답변을 하셨습니다.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각 자기 집에는 빨랐습니다. 자기의 집을 짓고, 자기의 집을 치장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둔 채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 받을 짓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에게 무슨 복이 주어지겟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은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비가 자주 내리지 않습니다. 우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고, 그 중간에 큰비가 한 두 번 올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야 제대로 자라서 영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아 이슬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땅의 산물도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것뿐입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한재를 불러."
히브리말에 "한재"라는 단어와 "황무"라는 단어의 어근이 같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한재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한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봅시다.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산에." 곡물이 자라는 낮은 밭에도, 그리고 나무들이 자라는 높은 산에도 한재가 임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전역에 한재가 임했습니다.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 땅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산물입니다. 한재는 밀과 보리와 같은 곡물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도, 감람나무에도 임했습니다. 이들 세 가지 대표적인 농산물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소산에"도 한재가 임했습니다. 그 정도로 한재가 극심했습니다.
식물에만 한재가 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육축에게"도 역시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먹을 양식이나 마실 물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한재가 너무나도 극심하였기에 아무리 그들의 손으로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체적인 환난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황무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같은 공동운명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처해 있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할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총체적인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7∼8절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윤택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전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도 큰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전을 건축하라." 이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즐겨 이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성전 건축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의 주인이시요 금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앞서가시면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슥4:6의 말씀처럼 성전 건축은 우리의 능으로도, 힘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됩니다. 성전 건축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다윗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엄청난 축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에 믿음으로 즐겨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학 1장 7~11절 / 임현수목사
요즘 공부하는 학개서 강해와 큐티하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묵상이 성전 건축이 시작되기 전 이었다면 아마도 적지 않게 부담을 갖고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이 많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 건축 마무리 하는 시기 이기에 그런 오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만 생각하고 부담을 느끼시면 안 됩니다. 명령을 준행한 후에 주신다는 축복과 영광을 알고 보면 부담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 입니다..
건축 이라고 할 때 성전 건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 건축도 있고 공장 건축도 있고 공항 건축도 있고 많은 건축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건축은 명하신 적이 없는데… 성막 건축이나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정을 보면 하나님 께서 직접 설계와 건축에 구체적으로 관여 하시고 명령하시고 일 할 사람들을 구별 하시고, 이방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성전 건축을 돕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시면 …주님은 내교회를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학교를 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서관을 지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원을 건축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은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면 다른 것은 성도들이 다 하게 될 것 입니다. 그것이 근대 선교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8절 상반부는 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8절 하반부는 성전을 건축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9절∼11절은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하게 방치할 때의 결과입니다.
전을 건축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즐겨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자자손손 누리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전을 건축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8절 상반부의 말씀 입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하나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교나 병원을 지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왕궁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습 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전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전만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상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건물들은 아무리 화려하게 잘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은 화려하게 지은 왕궁보다도, 오늘날의 웅장한 종합청사 건물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 84:1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의 성전을 이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당시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금 패물을 다 받아서 나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가지고 출애굽을 하도록 하셨습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그것으로 음식을 사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광야에서 공장을 짓고 사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오르는 생수를 마셨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허락하셨습니까? 그것들을 가지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으라고 하심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면서 전적으로 하나님 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귀한 물질을 넉넉하게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필요할 때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고 우리에게 물질을 맡기신 것입니다.
8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려한 대리석이나 레바논의 값비싼 백향목을 수입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는 명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가 있는 7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산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와나메이커가 한번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언덕 위에 아주 예쁘게 지은 예배당 건물이 있었습니다. 언덕 밑 에는 웬 농부가 쌍발이 소를 몰고서 쟁기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쪽은 소인데 다른 한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 을 하고 농부에게 그 연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농부는 언덕 위에 있는 예배당 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작년에 우리가 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예산이 부족해서 지붕을 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이 소를 팔아서 하나님께 헌금으로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가 건장한 청년이 되었으니 소를 다시 살 때까지는 얼마든지 쟁기질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의 말대로 소 한 마리를 팔아서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저 교회의 지붕을 얹을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와나메이커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그 농부 가족처럼 자기에게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뜨거운 감격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사업을 해서 물질을 벌 때마다 해외에 많은 선교 헌금을 보냈습니다. 한국에는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을 그가 보내 온 선교 헌금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 건축은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도 충분하게 채워 주십니다.
학 2:8의 말씀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세상 은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전 건축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앞장서 가시면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마지막까지 순종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할 때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8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 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 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성전을 건축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쪼그라들어서 지금 이 건물도 팔아야 하고 다시 서양 교회에 렌트비 주고 들어가야 한다면 하나님 께서 과연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 습니까? 오히려 교회가 날로 부흥하고 성장해서 온 교우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신축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경멸히 여기고 마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윤택하게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십니다.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복을 내려 주십니다. 학 2:18∼1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지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들은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큰복을 주리라고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 건축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큰복을 받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건축을 본격적으로 시작 하면서 부터 오히려…헌금이 줄지 않고 십일조도 줄지 않고 … 불경기라 하는데 … 헌금이 더 늘어 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대학은 하바드 대학입니다. 보스톤에 가보신 분들은 알지만 하바드 캠퍼스가 얼마나 큰지 도시 전체와 어우러져 있는 것을 아실 것 입니다. 그런데 그 넓은 캠퍼스 안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부속 건물 가운데서 가장 중간에 위치한 건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하버드 대학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빙 둘러 서 있는 셈입니다.
하버드 대학교를 세운 하버드목사의 학교의 설립 이념은 학교의 중심에 하나 님의 성전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학교를 어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버드 대학교가 명실공히 세계 제일의 학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성전을 그만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영락 교회를 건축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의 교인들의 수가 약 150명 가량이었습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서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건축을 하려면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십일 동안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께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성전 기공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150명의 교우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건물이 바로 지금의 영락 교회 예배당 건물입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30년 전에 십일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다 헌금으로 바쳤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다 굶어 죽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 있거나, 또는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8절 끝 부분의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해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또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그 결과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은 한량없는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축복을 자자손손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을 때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6절 말씀대로 그들은 밭에 나가서 많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들은 땀흘리면서 열심히 일했기에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형편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하시는데 어떻게 농사가 제대로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거두어들인 것은 적었습니다.
양만 적었던 것이 아닙니다. 질도 나빴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 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마치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쭉정이처럼 다 날 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는데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 까?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시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잿더미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농사가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창고를 새로 짓고, 그 속에 곡식을 가득 쌓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수고했노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제 땅 부자 되었고, 건물 부자 되었고, 주식 부자 되었고, 은행 통장도 수십개가 되고…. 이제 팔자 좀 펴고 살자)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시는데 무엇이 남겠습니까? 하나님이 불어 버리시면, 우리의 건강, 재물, 지식, 명예 등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하나님이 불어 버리시면 우리의 생명도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물으셨습니 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황무한 삶을 살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소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스스로 답변을 하셨습니다.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각 자기 집에는 빨랐습니다.
자기의 집을 짓고, 자기의 집을 치장하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둔 채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 받을 짓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에게 무슨 복이 주어지겟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언약을 맺은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비가 자주 내리지 않습니다. 우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고, 그 중간에 큰비가 한 두 번 올 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은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야 제대로 자라서 영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아 이슬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땅의 산물도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것뿐입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한재를 불러." 히브리말에 "한재"라는 단어와 "황무"라는 단어의 어근이 같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방치해 두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한재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한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봅시다.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산에." 곡물이 자라는 낮은 밭에도, 그리고 나무들이 자라는 높은 산에도 한재가 임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전역에 한재가 임했습니다.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 땅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농산물입니다. 한재는 밀과 보리와 같은 곡물뿐만 아니라, 포도나무 에도, 감람나무에도 임했습니다. 이들 세 가지 대표적인 농산물뿐만 아니라, "땅의 모든 소산에"도 한재가 임했습니다. 그 정도로 한재가 극심했습니다.
식물에만 한재가 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육축에게"도 역시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먹을 양식이나 마실 물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한재가 너무나도 극심하였기에 아무리 그들의 손으로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복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게 되었고, 그것마저 집으로 가져갔으나 불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학 1:9) 이것은 쉽게 말해서 ‘저주’입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의 주인 되지 못하여 소유할 없다는 것이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저주를 받아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창 3:18) 가인도 아벨을 죽여서 저주를 받은 결과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창 4:12) 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에도 보면 저주는 결혼하였으나 아내와 동침하지 못하고, 집을 지었으나 소유하지 못하고, 샘을 팠으나 먹지 못하고, 과실나무 를 심었으나 따먹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신 28:30-31) 이런 저주는 아버지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광을 누리도록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성전건축을 통해서 그 영광 을 먼저 아버지께서 얻으시게 한다면, 그 후에 영광을 주셔서 우리로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체적인 환난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황무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같은 공동운명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처해 있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할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총체적인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7∼8절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전을 건축하라." 이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즐겨 이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성전 건축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은의 주인이시요 금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옛날 가난한 시절에는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을 먼저 불렀던 때도 있었습 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면서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려 나고 레크레이션과 스포츠와 여가 활용과 건강관리가 우선순위를 차지하게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주일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 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산이나 들로 나가는데 급급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학개시대의 사람들과 원리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학개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 짓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외쳤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일에 더 열심을 내야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화와 향락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리 자신만 중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윤택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전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도 큰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는 주의 명령에 대해서 얼마든지 항변 할 수 있었고 따질 수도 있었지만 순종하여 드립니다. 그 결과를 아십니까?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한나가 아들을 서원대로 드렸을 때 받은 축복을 기억하십니까? 오병이어를 드린 아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건축 후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 무리의 목전에 심히 존대케 하시고 다윗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게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상29:28)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일에 즐거이 드려진 자들에게 영광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요 13:32-33) 그 영광은 바로 다윗처럼 성전을 사모하고 사모하여 그 건축에 참여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여러분 성전 건축 이후를 지켜 보시기 바랍니다. 건축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참여한 성도들의 가정을 어떻게 축복하시는가를 지켜 보시기 바랍니다.
사업도 은총을 입을 것이고, 자녀들의 앞길도 축복해 주실 것 입니다.
이번 성전 건축을 계기로 일평생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시기 바라며….
앞으로도 더욱 주의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살아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흥을 위한 처방
학 1장 7~15절 / 피영민목사
서론
교회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종교개혁사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다 보면 책마다 저술하고 있는 역사가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기존의 종교가 잘못되어 이것을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쓰면 그 역사가는 개신교 역사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역사가들은 반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로마 가톨릭이 잘하고 있는데 반동분자들이 나와 교회를 갈라놨다고 해서 책 제목을 ‘개신교 반동’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책 제목만 봐도 개신교 역사가인지 가톨릭 역사가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역사가들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산업혁명, 농업혁명처럼 종교계에 큰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서 ‘개신교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학개서에 일어난 변화는 혁명도 아니고 개혁도 아니며 반동도 아닙니다. B.C. 520년 성전의 기초를 놓고 16년 동안 중단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자 다시 힘을 얻어 반대를 물리치고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신앙적인 용기를 얻어 반대와 어려움을 뚫고 사명을 성취한 이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가 증거한 여호와의 말씀은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2)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성전 건축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는 백성들이 학개의 메시지를 듣고 변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역사를 하였으니” (학 1:14). 16년 동안이나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있던 백성들이 학개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흥분되어 하나님의 전역사를 시작하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성전 건축을 완공한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에게 용기와 능력과 성령을 부으셔서 사명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학개의 메시지를 통해 어떤 요소들이 이런 부흥을 일으켰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학개의 메시지는 ‘도전’(Challenge)으로 시작된다
학개 1장 5절과 7절에 두 번이나 반복되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학 1:5).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학 1:7). 학개가 주는 도전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좌절이나 낙심부터 할 것이 아니라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실만한 어떤 요인이 있어서 내게 이런 난관이 왔는가?’를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에게는 세 가지 생각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왕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어긋나게 될 경우 누구의 명령에 순종해야 되냐는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가 성전 건축을 중단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고레스 왕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어긋날 때 우리는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결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사도들도 성령을 받고 복음을 증거할 때 사람들과 권력기관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유다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이 반대를 했고 로마제국도 핍박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 4:18). 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당신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할 때는 순종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산헤드린이 아무리 방해해도 계속해서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자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깨우고 묶인 것을 다 풀어주었으며 옥문도 열어주었다는 내용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첫째 문제점은 왕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어긋날 때 왕의 명령을 따르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는 확고한 결단이 부족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어려워도 즉시 할 것인지 아니면 기다렸다가 환경이 좋아지면 할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환경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반대가 있어도 뚫고 나갈 힘을 주십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지금은 반대가 있으니 환경이 좋아지면 그때 하겠다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2). 유다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바벨론 강가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면 성전을 가장 먼저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고레스 왕을 통해 칙령을 베푸시고 바벨론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어려움이 오자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나중에 환경이 좋아지면 하겠다고 미뤘던 것입니다. 이들은 적극성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지금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평생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분명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워도 먼저 성전을 지으면 내가 기뻐하고 축복할 것이다. 내가 명령하였으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어디를 가도 성질이 급해서 빨리하려고 합니다. 또 여행 가서 돈 조금 있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 보면 다 한국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두각을 나타냅니다. 한국에서 꼴찌 하던 아이들도 미국에 가면 1등 합니다. 아무리 미국에서 1등 하는 아이들도 한국에 오면 성적이 안 좋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일단 어딜 가든지 교회를 먼저 짓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지 교회 개척하는 것에는 1등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있어도 신앙적 적극성이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온 성도가 나와서 기도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한국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적극성이 부족했습니다.
셋째, 그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부자로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겔 36:28~30). 에스겔 선지자가 고레스 칙령이 반포되기 50년 전에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되면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전혀 물질적인 풍요가 오지 않았습니다.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물질적 풍요를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는데 왜 이렇게 가난하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이 가난했는지 한번 보십시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 1:6). 농사를 지으려고 씨를 많이 뿌려도 거두는 것은 조금이고 월급을 받으면 이상하게 전대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학 1:9~11).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물질적인 풍요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음에도 지금 가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학 1:9). 성전부터 지으라고 했더니 성전은 안 짓고 자기 집부터 지었기 때문에 약속하신 물질의 복을 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사람의 명령을 따라 행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소극적으로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의도적으로 거두셨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여러 부분이 다르지만 물질 문제에 관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옛날부터 금욕주의가 강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팔고 거지처럼 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가진 것을 내놓으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이 다릅니다. 다 내어놓아도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셔서 더 낼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들어간 나라는 아무리 가난해도 나중에 보면 부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모두 드려도 하나님께서 내게 더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성전 건축을 게을리하여 물질의 복을 주려다가 그것을 불어버렸으니 다시 순종하여 성전을 지으면 하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Ⅱ. 학개의 메시지는 분명한 명령(Command)을 주고 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 1:8).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 일어나 성전 건축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때가 안 되었다고 핑계 대지 말고 방해가 있다는 변명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산에 올라가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유다 백성들의 우선 순위를 교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건축 기술이 없어서 성전을 못 짓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없어서 성전을 못 짓는 것도 아닙니다.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학 1:9). 자기 집을 짓는 것은 잘하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지금 어려우니 나중에 하자고 하여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가족들이 살 집을 짓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보다 우선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질문에 미워한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데 아내에게 끌려서 할 수 없이 앉아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돈보다는 아니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명예보다는 아니라면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제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전을 짓는 것이 너희에게는 먼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순위에 혼란이 온 것은 사소한 문제 같아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도둑이 명품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가격표를 바꿔놓았다고 합시다. 500만원과 100만원 물건의 가격표를 바꿔놓고 아침에 문 열자마자 싼 것만 다 사서 다시 비싸게 파는 것입니다.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을 뒤로 미뤄놓고 가치가 작은 일부터 먼저 한다면 가격표가 뒤바뀐 백화점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께서도 우선순위의 문제를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우선순위로 두고 구하면 나머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은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같이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에 한 명이 젊을 때 돈을 벌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젊을 때 공부하고 헌신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굉장히 형편이 어렵습니다. 오히려 제가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지만 넉넉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다 책임져 주십니다.
Ⅲ. 학개의 메시지는 ‘격려’(Consolation)를 주고 있다
학개 선지자는 자신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다 백성들을 네 가지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학 1:13).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학 2:5). 우선순위를 교정하면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 일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유다 백성들 중에는 50년 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보고 과거에 사로잡혀 옛날이 좋았다면서 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왜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있느냐고 하시며 너희가 순종하면 미래에 더욱 큰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셋째, 순종하면 물질의 복을 내려 주리라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 2:18~19). 성전 지대만 놓고 성전을 완공하지 않았을 때는 복이 없었지만 다시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다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보십시오.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제일 헌신하는 것, 내가 돈 제일 많이 쓰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지금처럼 잘 사는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고, 여러 가지가 부족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신 것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23). 그 날은 종말을 의미합니다. 종말이 올 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취하여 인을 삼으리라는 것은 항상 지니고 다니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과 항상 동행하시고 영원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 론
학개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설교를 다 잊으셔도 이 말은 기억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내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게 하기까지 사랑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만 나를 제일 사랑하지는 않는구나. 나를 제일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너희가 누릴 복을 다 누리지 못하고 있단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명한 일을 계속 하여라. 어려움과 반대가 있어도 좌절하지 마라. 소극적으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여라. 나중에 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행하여라. 다른 일 먼저 하고 하겠다고 하지 말고 그 일을 먼저 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의 행하는 일이 성공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성전이 완성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복을 줄 것이다. 내세의 복도 주겠거니와 이 땅에서 현세의 복도 줄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학개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현실을 생각해보고 순종하며, 우선순위를 바꾸어 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부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이루시고 이전 영광보다 나중 영광이 더 크리라는 약속을 이루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학 1:7-9 / 이영훈목사
<등단 후 멘트>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우리 예배드릴 때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새 힘을 주시고 내 죄와 허물을 다 사해 주시고 주님의 기쁨으로 평안함으로 넘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 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면 일생동안 복이 임합니다. 찬양할 때도 최선을 다하시고 기도할 때도 최선을 다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도 최선을 다하시고 예배에 승부를 걸면 일생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옆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성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내 자신이 어떤 문제로 어떤 이유든 간에 주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오늘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귀한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 민족을 주님이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나라 되게 하시고 통일의 시대가 속히 오게 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늘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고 상처받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다투고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았던 우리들의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해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늘 눈물로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정말로 귀하게 아름답게 쓰임 받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에게 펼치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희들 모두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말씀>
오늘 저는 학개서 1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함께 따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계획을 많이 세우고 또 노력하고 내가 어떤 일을 잘 만들어 보려고 해도 잘 안 될 때가 있어요.
우리가 이번 소치 올림픽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중에 제일 안타까웠던 것이 준준결승에도 1등으로 준결승에도 1등으로 나온 통과한 박승희 선수가 1등으로 가다가 뒤에서 넘어지면서 넘어뜨리니까 제일 실력이 떨어지는 맨 뒤에 따라오던 중국 선수가 금메달로 들어왔어요.
이 선수는 세계 랭킹에 그 이름도 없고 원래 출전하기로 했던 선수가 갑자기 출전을 못 하게 돼서 20일 전에 갑자기 너 대신 나가라고 해서 나온 선수인데, 워낙 실력이 달리니깐 맨 뒤에 따라가다가 앞에 사람이 넘어지니깐 들어와서 금메달 딴 거예요. 그러니깐 세상만사가 우리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서 그 하나님의 뜻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우리를 돌보시는 그 은혜가 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날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상처와 절망과 고통과 괴로움만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큰 은혜를 값없이 받고도 쉬이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늘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다투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의 삶에 첫째도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도 하나님의 은혜요, 마지막도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로 살기를 원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살 때 큰 복이 임했지마는 은혜를 떠났을 때 심판이 임했던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의 통로로 이 땅에 교회를 세워 주시고 이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넘쳐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충성, 헌신하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나타나도록 아낌없이 헌신하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고난 중에 주신 은혜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한 고난 중에 주신 은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통일왕국 시대를 이루고 난 후에 1대, 2대, 3대,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를 지나고 나서 4대 왕인 때에 이르러서 나라가 반이 나뉩니다. 주전 922년에, 약 2,900년 전에 이스라엘 나라가 반으로 나뉘어서 북왕국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 수도가 사마리아고 남왕국은 유다라고 불렀고 수도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뉘고 난 다음 북왕국 이스라엘이 얼마나 우상숭배를 했는지 하나님께서 앗수르라고 하는 큰 제국을 일으켜서 200년 후에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남왕국 유다 백성들이 “우리는 절대로 우상숭배 하면 안 되겠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으면 되는데, 그렇게 멸망한 것을 보고도 저들이 똑같이 우상숭배를 해서 하나님께서 주전 586년에 새로 일어난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남왕국 유다가 멸망을 당하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 왕국의 모든 귀족들, 지도층들을 일차, 이차, 삼차 포로로 끌어가서 거기서 비참한 삶을 살게 하셨는데, 그들이 유다 왕국의 지도자만 붙잡아 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성전 기물을 다 가져갔어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고 우상을 섬길 때 우리에게 심판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기 원합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주님의 일꾼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세요. 그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유다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예루살렘에 돌아와 예배드리게 될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저들에게 예언해 주십니다. 예레미야 28장 4절에 보면,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70년 동안 거기에서 연단을 받습니다. 70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 그들이 회개합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심판이 임했구나.” 그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고 회개했습니다. 실제로 포로생활 이후에는 다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엇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가 주님을 기쁘게 섬기지 못하는 이와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의 성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물질이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내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늘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시편 137편 1절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즉,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그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슬피 울며 “주여 우리가 회개하오니 우리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70년이 지난 후에 저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그곳에 성전이 있고 마음껏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찬양할 때 그 큰 은혜와 축복이 임했는데 예배드리는 특권을 빼앗기고 성전도 다 무너지고 나서 이방 나라에 와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슬픈지 “주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성전이 있을 때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예배드렸어야 했는데 형식적으로 예배드리고 우상숭배 했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고난이 우리에게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회개를 통하여 깨어짐을 통하여 낮아짐을 통하여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국을 일으켜서 바벨론 왕국을 무너뜨리시고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통치하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칙령을 내리게 합니다. 주전 538년에 고레스 칙령이 발표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바사 왕국으로 표현했는데요, 에스라 1장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을 보면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야훼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야훼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그리고 옛날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가져간 모든 기물을 돌려주라고 명했습니다. 7절 8절에, 고레스 왕이 또 야훼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할렐루야. 이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의 왕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돌려보내고 이스라엘의 신이 참 신이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신자도 감동을 시켜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고 그들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풀어서 다시 자유함을 주고 본국에 돌아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고 사람의 마음을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망 중에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고난 중에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며 우리의 삶 가운데 문제 가운데 문제 해결의 길을 보여주시는 축복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
둘째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저들이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가운데 저들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 받아 돌아왔는데, 성벽을 세우고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일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이 참소하고 그 하는 일을 중단을 시켰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전을 지었어야 되는데, 그들이 그 핍박에 지쳐서 중간에 포기합니다. “아이고, 우리가 성전을 계속해서 짓다가는 저들의 공격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겠다. 잠시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중단한 것이 16년입니다.
여러분 어떤 희생이 따라도 어떤 어려움이 따라도 주님의 뜻을 행할 때에는 그 길을 멈추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과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포기하고 자기들이 살 집들을 먼저 짓기 시작했습니다. 학개서 1장 4절에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성전이 무너졌는데 너희들은 좋은 집을 짓고 거기서 편하게 지내는 것이 잘된 일이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주님이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을 짓지 않고 자기 집 짓는데 앞섰던 저들에게 환란이 다가왔습니다. 학개서 1장 6절을 보니까,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돈을 버는 것 같은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밤낮 받아놔도 남는 게 없는 것입니다. 또, 자연재해가 극심하게 저들에게 임했습니다. 9절, 10절에,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학개서 2장 16절로 17절에,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 고르뿐이었었느니라 만군의 야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느니라
삶의 우선순위가 바뀔 때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하고 노력을 하고 또 노력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가 되는 일이 없습니까. 잘되는 일이 없고 계속 어려운 일만 생깁니까. 가정에 끊임없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여러분의 사업장에서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계십니까.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주님보다는 물질을 더 사랑하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내 가족을 더 사랑하고, 내가 가진 명예와 권세를 더 사랑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회개하고 뉘우칠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멘소래담 연고를 만들어 세계적인 부자가 된 미국의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 씨가 있습니다. 그는 문방구를 했던 사람입니다. 사업이 잘되어서 돈을 빌려 주식에 투자했다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빚투성이였습니다.
그때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때, 탁 지나쳐 가는 생각이 본인이 사업이 잘될 때 YMCA에 헌금을 하기로 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깜빡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그가 회개를 하고 가진 재산을 정리해서 YMCA에 선교 헌금을 갖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는데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멀리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떠나가면서 베델에서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약속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고 나서 큰 복을 받았어요. ‘아! 내가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못 했구나.’ 그래서 자기 집을 팔아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사람들이 다 저 사람은 자기 살 근거도 없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다고.
그런데 그 후에 약국을 하는 친구로부터 연고를 같이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만들어낸 것이 멘소래담인데 이게 잘되기 시작해요. 점점 회사가 커졌습니다. 사업 시작하고 나서 매달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립니다. 회사 사원이 와서 묻습니다. “사장님! 우리가 지금 여기저기 회사를 확장하느라고 진 빚이 많은데 왜 빚을 갚지 않고 십일조부터 드립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빚 갚는 것보다 먼저 도둑질한 것을 갚아야겠다.” “아이 무엇을 도둑질하셨습니까.” 그가 말라기 3장 펴들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십일조를 도둑질한 도둑놈입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서 3년 만에 멘소래담 회사가 세계적인 회사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미국과 전 세계로 팔려나가기 시작하는데 그가 회사가 잘되니까 십의 일조, 십의 이조, 십의 삼조, 십의 사조, 십의 오조, 십의 육조, 십의 칠조, 십의 팔조를 드렸는데,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갔던 아들이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 저 십일조만 떼어서 나한테 선교비로 보내주세요.’ 그래서 십의 구조를 떼어서 보낸 다음, 이 회사가 세계적인 회사가 되어 전 세계 150개국 이상에서 지금도 이 멘소래담 연고를 쓰는 그러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강철왕은, 그의 자서전을 살펴볼 때, 그가 아주 가난해서 누더기 옷을 입고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믿고 나서 큰 부자가 됐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어려운 교회들을 많이 지원했는데요, 특별히 ‘교회가 최상의 찬양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된다’ 그래서, 교회마다 이 전자 오르간을 기증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교회 이 알렌 전자 오르간이 파이프 오르간하고 연결되어 있는데, 미국 전역에 전자 오르간을 기증한 것이 7천 개나 됩니다. 7천 대. 그러니까 7천 교회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데 이 전자 오르간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게 된 거에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전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 주십시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하루에 시간의 십 분의 일은 기도하고 성경 보는 일에 투자하십시오.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에 투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 있든지 간에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다 같이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보기 원합니다. 학개서 1장 7절, 8절에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야훼가 말하였느니라
성전은 짓지 아니하고 포로 생황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짓기에 급급했던 저희들에게 학개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먼저 성전을 건축하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무너진 성전을 다시 회복하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시간이 지나가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형식적이 되고 습관적이 되고. 뜨거웠던 열정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모습이 식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바뀐 우리들이, 편안한 환경 속에서 잊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불광동 시절에 얼마나 어려운 시대를 지냈습니까? 서대문 시절에 얼마나 어려운 때를 우리가 지냈습니까? 초기 여의도 시기에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때를 지냈습니까? 전 지금도 기억합니다. 1969년에 우리가 이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해서 1973년에 준공이 되었는데 서대문에 살던 성도들 대부분이 “아이고, 여의도에 이사 가면 일주일에 몇 번씩 버스 타고 가야 하는데 버스비가 없어서 어떻게 하나!” 버스비 걱정을 했어요.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차가 너무 많이 와서 주차할 데가 없어서 걱정이에요. 주일 날 제발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도님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목사님, 저는 가족이 많아서 가족 다섯 명이 꼭 차를 타고 한 차로, 승용차로 와야 하는데 교회 근처에 와서 20분 이상을 늘 돕니다. 제발 주차 공간을 마련해주세요.” 그만큼 우리가 복을 받았어요. 그만큼 우리가 복을 받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생활이 윤택해지고 복을 받으니까 반대로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사라진 것입니다. 마음의 교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내온 것입니다.
“주여, 우리 마음속에 무너진 교회를 다시금 세우게 하여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다시금 변화돼서 세계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교회로 주님,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크기를 자랑하지 말게 하여주시고 우리 교회가 낮아지고 섬기는 섬김의 모습을 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로만 기억되게 하여주옵소서.”
여러분, 우리들이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되고 우리들의 무너진 교회론을, 우리 마음속에 무너진 교회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가 몸 된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원망했던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교회 일에 앞장서지 못하고 늘 팔짱을 끼고 뒤에서 구경하고만 있었던 저희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지 못하고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지 못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신앙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초신자 때는 모르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참 희한하게 사람들이 보여요. 사람들이 보입니다. 사람 때문에 교회에 못 나오겠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어요. 여기 서 있는 저도 부족한 것투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 서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 부족한 것이 많고 모자란 것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이 우리가 교회에서는 서로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당신 이것이 문제야. 이것이 문제야.” 잘못을 지적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싸움터가 되어버리고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우리 주위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장애 있는 이웃을 섬기는 교회 되게 하여주옵소서. 우리가 가진 모든 축복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 많은 축복을 받았사오니 또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나누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쓰임 받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는 사랑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우리의 삶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려지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면 여러분을 통하여 이 사회가 아름답게 변화되고 예수님의 선한 영향력이 온 사회를 뒤덮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변화되어서 자신을 드렸을 때 어떻게 큰 변화가 다가왔는가! 오늘 마지막으로 한 분을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1607년 영국에서 태어나셔서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되신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님이 계십니다. 미국에 신대륙의 큰 꿈을 품고 1637년에 건너옵니다. 서른 살 때죠. 와서 꿈을 펼치려고 했는데 폐결핵으로 그만 1년 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지역에 새로 대학교가 세워졌는데 그 학교에 본인이 갖고 있던 모든 책을 다 기증하고 그리고 자기 재산 절반을 학교에다 기증합니다. 그리고 책을 기증하면서 이 책을 학생들이 읽고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주시고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크게 쓰임 받는 일군들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편지와 책과 재산을 기증받은 이 학교 당국자들이 크게 감동을 받고 그 분을 기념해서 학교 이름을 하버드 대학으로 바꾼 겁니다. 이 학교 정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하버드 목사님은 평생 예수님 제일주의, 교회 우선주의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뉴잉글랜드에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안락한 성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지식을 우리 세대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까지 몰려주기 위해 대학을 세우고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생의 궁극적인 목적들을 진지한 태도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함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했다. 또한 모든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그리스도를 깨닫게 했다. 나아가 주님만이 지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깨닫게 했다.”
이 하버드 대학이 세워진 배경을 설명한 이한 해리슨(Ian Harrison), 그 분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가 얼마나 큰지 도시 전체와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그 넓은 캠퍼스 안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부속 건물 가운데서 가장 중간에 위치한 건물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버드 대학교는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부속 건물들이 빙 둘러 서 있다. 그 학교의 설립 이념은 학교의 중심에 하나님의 성전을 둔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버드 대학교가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학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의 성전을 그만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교회 우선 중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주님 앞에 드려지기만 한다면 우리 일생동안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절대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할 때 가장 큰 복이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시작한 유다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학개서 2장 7절로 9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야훼의 말이니라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이 교회에 은혜위에 은혜를 더해주시고 주님의 평강이 차고 넘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희망을 얻고 기쁨을 얻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위로와 치료를 받고 문제를 당한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그 삶이 변화되어서 이 사회 속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는 주님의 귀한 일군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이 교회를 통해서 계속 계속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뿐인 인생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축복 가운데, 큰 은혜 가운데 일생동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전 건축의 깊은 의미
학개 1장 7-8절 / 이한규목사
<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전 건축 >
본문 7절에는 5절과 거의 유사한 말씀이 나온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불행의 원인에 대해 자신의 믿음 부족 때문이거나 성전 사랑의 부족 때문은 아닌지 자기의 신앙 행위를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직설적으로 사명을 도전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8절).”
흔히 교회 건축에 나선 교회들이 가장 많이 표어로 사용하는 말씀이 이 구절에 나오는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이다. 그 말씀의 핵심 메시지는 ‘신앙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이다. 즉 교회 중심적으로 살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는 말이다.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그저 교회만 다니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다. 교회에 다니지만 불신자보다 더 이기적이고 무정하고 실망도 잘하고 변덕도 심하다면 문제다. 신앙의 성전을 새롭게 하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또한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외적인 성전 건축의 의미도 있지만 내적인 성전 건축의 의미도 있다. 내적인 성전 건축에도 힘쓰라. 특히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인간적 풍요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왜곡시키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고 내면의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라. 그리고 육적인 욕구에 바쁘기보다 영적인 욕구로 바쁜 인생이 되도록 늘 내가 가는 길을 신중하게 살피라.
인생의 비극 중 하나는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가치 있는 것에 나를 낭비한다는 데 있다. 그런 낭비가 내 삶에 없도록 내면의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라. 마음의 성전, 기도의 성전, 봉사의 성전, 헌신의 성전, 전도의 성전도 새롭게 건축하라. 그것이 나와 내 교회가 살 길이고 나아갈 길이다. 그렇게 내면의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도 큰 축복을 내려주시고 나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지금 이후의 삶을 내 인생의 최대 성장기와 부흥기로 삼으려고 힘써 보라.
< 성전 건축의 깊은 의미 >
성도에게 보다 중요한 성전건축은 건물의 건축보다 바람직한 교회상의 건축이고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을 건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점과 기복주의가 확산되고 있고 교회에도 침투하고 있다. 2000년 10월 10일에 이사대란이 있었다. 그 날은 동그라미가 다섯 개 있는 날로 천 년 만에 한 번 밖에 안 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날 이사 가야 복을 받는다고 해서 일 년 전에 이사 예약이 다 끝났고 이사 갈 필요가 없는 수많은 가정이 일부러 이사 갔고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이 있었다.
복 받는 날이 어디 있는가? 있다면 미신이 없는 선진국은 다 거지가 되어야 하는데 선진국이 더 잘 살고 있다. 우리는 묘지를 잘 써야 복이 있는 줄 아는데 선진국은 묘지가 거의 공동묘지다. 그래도 잘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산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 명칭을 붙이면서 명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명당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을 잘 믿다가 잠들면 어디든지 명당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도 이름을 잘 지어야 복받는다고 작명소에 가서 몇 백 만원 들여서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이름과 복은 아무 관계없다. 몇 백 만원 들여서 이름 짓기보다 그 돈을 좋은 일에 써야 진짜 복을 받는다. 결혼 날짜와 복도 아무 관계없고 이사 날짜와 복도과 아무 관계가 없다.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복 주시면 복 받을 것이다. 기복주의를 버리라.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은 하나님 사랑과 교회사랑, 그리고 이해와 용서다. 마음의 신앙의 전을 잘 건축할 때 삶이 더욱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성전 건축은 더 깊은 신앙의 전의 건축을 위한 계기가 되는 통로가 되어야 하고 영적 무관심과 나태에서 벗어나는 좋은 계기로 삼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은혜를 예비하는 길로 삼아야 한다. 성전 건축을 전부로 삼아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등한시 하지 말라. 성전 건축을 한다면서 전도사 사례도 주지 않고 선교 후원도 끊는 경우도 있다. 세상적인 관심과 이기주의 때문에 성전 건축을 외면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성전 건축 때문에 영적으로 꼭 필요한 다른 꼭 해야 할 거룩한 일을 외면하는 것도 잘못이다.
삶의 우선 순위!
학 1장 5~11절 / 지태일목사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다 회개치 않을 때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70년이 차자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감동시켜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셨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서 그들은 감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지만, 사람의 생존을 염려하는 경제적인 문제, 정치적인 난관까지 겹쳐 성전 재건하는 일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니 다시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라 하여 손을 못댄 결과 성전은 황무케 되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의 황무함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본문 5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지나간 길을 곰곰이 돌이켜 보면서 잘못된 것을 반성하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이제는 바른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살아온 과정이 어떠했습니까? 16년 동안 하나님 성전의 건축을 방치해 놓고 살아온 그들의 삶의 결과가 어떤지 한번 뒤돌아 보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4절에서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양심이 있거든 한번 대답 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하나님의 성전이 이렇게 허술하고 황무한데,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하는데 이 때에 너희들만 그렇게 좋은 집에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많은데 그것은 외면하고 너희들 일, 자기들의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하냐. 돌아보고 이 물음에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일은 다음에 하자 하고 자꾸 미루면서도 자기 일만 자꾸 힘쓰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소위를 한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복 얼마나 받았느냐? 얼마나 돈 많이 벌었느냐? 얼마나 잘 되었느냐? 한번 살펴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돌보기보다 자기 집이나 자식이나 일만을 위해서 그렇게도 열심했는데 그 결과 어떤지, 한번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하게 만든 결과는 무엇입니까?(5-6절)
그 결과가 6-7절에 보여주고 있잖습니까? 하나님은 학개 선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케 한 결과, 왜 유다백성들의 생활이 그렇게도 핍절했는지, 도리어 가난하게 되고 어렵게 되었는지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6-7절입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절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지를 또 한번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벌어진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뒤바꾸어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16년간이나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아니하고 황무한 채로 내버려둔 것이 바로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원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케 놔둔 결과 그들의 삶도 역시 황무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불이익을 당합니다. 문제에 문제가 꼬리를 물고 해결이 안됩니다.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불순종하고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식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의 황무해진 삶을 6절에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첫째,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농사를 지을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양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뿌려 주셔야 농사가 잘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고 계신데 어떻게 농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부지런히 노력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2) 둘째,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 식량이 풍부했겠습니까? 굶주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배고풀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셋째,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마실 물도 부족합니다. 포도 농사가 안되니 마실 포도주도 없습니다.
4) 넷째,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돈이 없으니까 제대로 의복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날씨도 춥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5) 다섯째,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들어오는 것, 수입도 적은데, 나갈 것, 지출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옛날 시골에서 우물 물을 긷는 두레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통은 값싼 양철로 두레박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잘 길을 수 있지만 오래 쓰다보면 양철로 만든 두레박은 우물 벽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찌그러집니다. 그리고 두레박 밑은 녹이 슬어 구멍도 생깁니다. 이런 구멍 뚫린 두레박을 가지고 물을 길으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물이 가득 담겼지만, 올라오면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부딛힌 나머지 다 새 버리고 올려보면 물이 밑바닥에 조금만 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황무한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멍 뚫린 전대와 같습니다. 구멍 뚫어진 두레박과 같습니다. 밑빠진 독과도 같았습니다.
만복의 근원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아니하시면 이렇게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시 127편에 말씀하심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데다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너희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며 밤늦게까지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데다”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렇게 노력하며 잘 살아보겠다고 노력하였지만 전혀 노력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으면 뭔가 이루고 달라지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도 성공하고 살기가 좋아져야 하지 않습니까? 결과는 오히려 그렇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살림이 더 피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씨앗을 심고 거둔 것을 먹고 마시며 입고 일을 열심히 하여 삯을 받아도 구멍난 주머니에 돈을 넣는,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학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9절을 보면 "나 만군의 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자기들의 생업을, 먹고 사는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일에만 바빴으니 신앙이 제대로 서 있지도 않고, 하나님도 함께 하시지 않는데, 생업 활동이, 경제적 활동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인간의 생사화복을 섭리 역사 주장하십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라갑니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의 중심인데, 그 하나님의 임재의 중심은 바로 바로 성전이었습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중요성이었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공동체 생활의 중심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재건은 곧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 재건하지 못한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의 신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아니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모든 문제 해결의 핵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고 자기들을 기쁘게 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재건은 시기상조라 하여 뒷전으로 미루고 집안 일부터 해야 하고. 돈부터 벌어야 하고. 직장이나 사업장부터, 자식들 먼저 공부 직장 잘 구해주고 밀어주고 난 뒤 성전을 재건하든지 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에 붙들려 있었으니 하나님의 성전은 판자로 엉성하게 만들어 논 상태로 방치해 두기를 16년 동안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축복하시고 회복하게 하시려고 학개 선지를 통해서 그들을 깨우칩니다. 유다 백성들은 아직 건축할 시기에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만 하나님은 당장 산에 올라가 나무들을 찍어다가 내 전을 건축하라 말씀하십니다.(학1:8)
여기에서 우리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기와 사람의 시기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산 위에 올라가서 나무들을 찍어다가 내 전을 건축하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우리의 밭을 일구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너무 살기도 힘든데 무슨 성전 건축입니까? 다음에나 합시다. 근본적으로 성전 건축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니라고 시기상조를 외치며 자기들의 일에만 급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생활 하다보면 가끔씩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서 갈등을 일으킬 때가 있는데 그때에 영성이 강하면 하나님 편으로, 육성이 강하면 세상 편으로 기울어지는데 여러분은 영혼이 잘된 사람이 되어서 항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 편으로 기울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삶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앞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그는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축복의 샘물이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지 않았습니다. 인간 제일주의로 살았습니.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기름진 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풍성한 물과 번성하는 가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떠했습니까? 돈은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었지만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하나님없는 물질과 번영은 타락과 범죄의 도구가 되어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도 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재산을 한꺼번에 불어 버리셨습니다.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죄를 범하여 후손을 봅니다. 그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내고 남편이고 자식이고 물질이고 사업이고 소용이 없음을 잘 보여 줍니다. ♬ 찬 500장. 주 떠나 가시면 내 새명 헛데네 즐겁고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여러분 에서와 야곱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권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되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담겨진 것입니다. 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물질과 배부름을 먼저 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일등의 위치에서 꼴찌의 자리로 추락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장자권 그것을 추구하고 소유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꼴찌로 태어났지만 일등이 되었고 자식의 복, 물질의 복, 사명의 복을 받았고 민족의 대표자가 되었고 후에 하나님이 주신 그의 이름 이스라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내 삶의 질서 가운데 첫 번째, 1순위가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내 인생의 첫 번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알게 한 교회에 우선적인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르게 사는 길이고 복되게 사는 길입니다. ♬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가룩한 일을 제처 놓고 교회를 외면하고 자기 일에만 집중한다면 자기 집, 자기 사업에만 골몰한다면 성공한 것 같으나 실패하고, 소유한 것 같으나 잃어버리고, 집에 가져 가지만 결국 다 날아가 버리고, 그렇게 담아 올리지만 다 흘러 버리는 낡은 두레박의 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소위를 돌아보며 다시금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높이는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진짜 원하는데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싸우고 상처받고 슬픔속에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마귀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행복에는 절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이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행복을 누리게 되는데 대상이 둘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이신데 그 분을 사랑하는 방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습니다. 이것이 첫째와 둘째 되는 계명이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의 확증이 로마서 5: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행복은 부모사랑을 받는데 있고 학생의 기쁨은 선생님의 사랑 받는데 있고 성도의 기쁨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 받는데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잠 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23절에는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재물도 얻게 하여 곡간에다 잔뜩 채워주겠다”고 말씀함으로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지 않습니다.
엡 6:24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항상,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늘 주님만을 사랑하시기 바람니다. 시간적으로 처음과 나중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시기 바람니다. 사역적으로는 큰 일이나 작은 일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시기 바람니다. 환경적으로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교회에 은혜가 늘 충만합니다. 은혜의 강가에 심기운 자는 마르지 않습니다. 해를 두려워 아니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 하고 심하면, 뜻대로 잘 안되면 자살합니까?
요즘 젊은 연예인들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달이 멀다하고 현재는 다른 물증이 없어 자살로 추정합니다만, 그것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러하다는 것은 매우 충격입니다. 인기와 명성, 그리고 돈이 제대로 안되면 누구보다도 우울해 하고 낙심하고 그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한가지 걱정하는 것은 베르테르 효과라 해서 모방 자살입니다. 이것은 독일의 작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로데라는 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는데 그녀는 약혼남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실의와 고독감을 더 못이겨 그만 권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한 때 독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충격이 되어 판매금지까지 내린 책입니다. 요즘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로 유명인의 행위를 따르려는 모방 행위가 연약한 청소년들이 따라 하거나 하는 것 큰 문제입니다. 또 다른 자살 충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여러분!
어려서부터, 젊어서부터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다니지만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사람이 바꾸어 집니다. 변합니다. 실망과 낙심, 고통과 좌절과 허무속에 빠진다 해도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만나야 합니다.
막연하게 교회 다니는 사람을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의식에 변화가 와야 합니다. 죄를 많이 범한 사람이라도 주님 만나면 달라집니다. 바뀌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이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그렇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불행해 집니까? 왜 걷잡을 수 없는 좌절과 고통이 밀려오고 옵니까? 그것은 사랑해선 안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딤후 3:1절 이하에 보면 “사람이 고통을 왜 당하는가? 말세가 될수록 사람이 더 고통스러운 때가 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 대상을 바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보다는 쾌락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이 육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 잘 믿는 것처럼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이게, 너는 이와 같은 일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돌아서라. 즉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교회 다니면 고난만 심하고 갈등만 심합니다. 하루를 믿어도 똑바로 믿고 바르게 믿고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두드리고 사모하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탄식하면서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하나님의 성전 짓기를 사모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 7:2) 물론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그의 손에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를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등불이 영원토록 꺼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문제는 하나님만을 위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가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있는 리버 사이드 교회를 웅장하게 짓고서 하나님께 헌당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록펠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진정한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돈을 들여서 이토록 엄청난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때 록펠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입고 있는 옷이 아버지가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귀한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을 잘 지어 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록펠러의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평생 5,000여 개의 교회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건강과 장수의 축복까지 아울러 주셨습니다. 그는 54세에 의사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계속해서 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을 주시고 98세까지 건강한 몸으로 장수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4, 7절 말씀처럼 이 시간 "우리의 소위를, 우리의 행동을, 삶을, 생각을, 계획들을, 직장이나 사업이나 학업을, 지식을, 신앙을, 교회를 한번 더 헤아려, 되돌아 볼 수 있는 귀한 축복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 우리가 잘 안되는지, 왜 헛수고 하거나 어렵고 힘들고 궁핍한지, 가난한지, 그렇게 하고자 했지만 왜 잘 안되는지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귀한 일을 이번 기회에 감당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교회와 모든 주의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자신의 믿음을 살리라
학개 1장 5절 / 이한규목사
< 자신의 믿음을 살피라 >
학개가 성전 건축을 선포할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경제는 매우 피폐했고 불의의 재난이 많이 일어났으며 연속적인 가뭄으로 농산물이 급감하는 어려움이 처해 있었다. 학개는 그 원인이 영적인 원인으로서 성전 건축은 외면하고 자기 살길만 찾는 백성들의 모습 때문이며 특히 물질이 있는 자들이 하나님이 물질을 주신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성전 건축을 외면한 것 때문임을 알았다. 그때 그들의 영적 나태와 무관심과 이기주의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본문 5절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어려움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남 탓을 하지 말고 너희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너희 행위를 살펴보라는 말씀은 너희 믿음을 살펴보라는 말씀도 된다. 모든 문제가 나의 문제 특히 나의 믿음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라. 실제로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며 반성하면 영혼이 풍성해지고 믿음이 자라며 축복의 지경도 넓어진다. 문제는 환경이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기도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믿음을 살피며 자기 성찰의 질문을 해보라. “나는 진정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놓고 하나님의 일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을 내 가정이나 자녀보다 사랑하는가? 나는 전도와 선교와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대로 행동하는가?”
‘일일삼성(一日三省)’이란 옛말이 있다. 매일 세 가지를 성찰하며 살라는 뜻이다. 즉 남을 생각하고 행동했는가를 성찰하고, 친구와의 교제에서 신의를 저버리지는 않았는가를 성찰하고, 배우지 않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면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는가를 성찰하라는 뜻이다. 수시로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강력한 자원과 무기를 가진 것이다. 일이 잘 안 풀리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남 탓을 하기보다 나의 부족과 부덕을 탓하라. 남을 탓하는 만큼 발전이 지체되고 나를 반성하는 만큼 발전이 이뤄질 것이다.
< 삶의 목적을 뚜렷이 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유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살기 위해서였다. 그 초심과 은혜와 감격을 잊고 그들은 어그러진 길로 가고 있었다. 그처럼 물질을 따라가고 자기 살길만 생각하니까 하나님께서 학개를 통해 호소하셨다. “너희 가는 길이 복 받는 길이고 선민의 마땅한 도리인지 너희 행위를 살펴보라.”
당시의 서글픈 모습은 현대 교인의 모습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의 처음 믿을 때의 감격과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다. 이런 서글픈 현실 가운데에 한국 교회가 서 있다. 그런 현실과 비교해 나의 힘이 미약할지라도 어둠의 세대에 빛을 비춰주는 작은 불꽃이 되는 비전을 포기하지 말라.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고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축복의 키는 훌쩍 커져있을 것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마지막 때에 교회 갱신과 부흥과 선교를 위해 선봉적인 교회가 되도록 일조하겠다는 사명을 가지라.
요한 웨슬레 한 사람이 영국 교회 부흥의 역사에 크게 일조했다. 조나단 에드워드 한 사람이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촉발시켰다. 캠브리지 대학의 7명의 청년들로 인해 영국에 선교의 바람이 불고 중국 대륙 선교의 문도 열렸다. 작은 불이 뭉치면 큰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 교회가 잠들고 있는 동안 지옥은 불타고 있다. 신학적인 어려운 문제를 놓고 논쟁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 한탄만 하지 말고 나 자신이 헌신의 자리에서 일어서라. 하나님은 나부터 그런 변화된 모습이 있기를 원하신다.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 첫째 물음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대답한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향해 잘 달려가고 있는지 신중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없는 삶은 공허한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삶은 헛된 삶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꼭 붙잡고 사명을 따라 나아가는 삶은 최종적인 승리를 낳을 것이다.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학개 1장 5-6절 / 이한규목사
<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
학개는 신앙 갱신과 성건 건축을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살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할 때 주어지는 저주스런 결과에 대해 말씀한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절).” 아무리 모아도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말이다. 모으는 것이 삶이 큰 재미와 보람인데 열심히 모아도 모이지 않아서 희망과 비전도 없다는 말이다.
가장 큰 불행 중 아나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하나님을 잊으면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된다. 때로는 무엇인가 모으는 것 같지만 그 모은 것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내 가정과 자녀와 일터와 건강을 지켜주시는 것도 복이다. 매년 교통사고로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장애인이 된다. 하나님이 운전대를 지켜주는 것도 보이지 않는 큰 은혜다.
어떤 사람이 돈을 꽤 벌었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사업이 부도가 났다. 한 순간에 10년 모은 돈이 날아갔다. 어떤 사람이 안 쓰고 열심히 저축해서 10년 만에 1억을 모았는데 갑자기 자녀가 큰 병에 걸려 몇 개월 만에 그 모았던 돈이 다 없어졌다. 또한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1-2년 만에 퇴직금을 다 날리는 사람도 많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지금 살 길이 있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수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없어도 세상적인 복은 받을 수 있지만 행복할 수는 없다. 얻는 것은 내 노력으로 가능해도 얻은 것을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아무리 많이 얻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순식간에 날아간다. 돈이든 명예든 얻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리지만 잃을 때는 순식간에 잃는다. 적은 것을 얻어도 그것을 하나님이 지켜주시면 행복의 탑이 쌓이지만 많은 것을 얻어도 하나님이 날려버리시면 행복의 탑은 무너진다.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 남 탓을 하지 말라 >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남 탓을 하지 말라. 그것은 성도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만약 불행하다면 그 불행의 이유를 다른 데서 찾지 말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자것이 나의 이기적인 행위 때문은 아닌지 살펴보라.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다 불행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언제 불행을 느끼는가? 대개 나의 어려움이 남 때문이고 남 탓이라고 생각할 때다. 어려움을 통해 나의 행위를 살펴보는 사람은 불행을 느끼지 않고 나를 성찰하고 회개하고 내일의 의욕을 다시 새롭게 가진다.
문제가 생길 때 나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을 먼저 탓하라. 부모들은 뒷방에 쫓아내고 굶기면서 자기 배만 불리면 행복할 수가 없다. 그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일은 무관심하고 자기 집만 화려하게 꾸민다면 행복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행한 삶이 찾아오는 이유는 이기주의에 빠져 사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의 삶과 가정과 자녀에 대한 비전을 세우면서 교회와 선교를 위한 비전도 세우라. 평수가 큰 아파트에 사는 꿈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그 꿈을 가질 때 교회와 선교 문제도 생각하라. 좋은 것이 생기면 교회와 및 선교사와 함께 나누고 자녀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하나님의 일과 교회와 선교에 관심을 가지라. 하나님은 사명을 지킬 때 영혼과 행복과 물질도 지켜주신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한번 움직이시면 없던 길도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래도록 기억했어야 했다. 그 은혜를 잊었기에 성전 건축의 사명도 잃고 결국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만 남게 되었다. 은혜를 받는 가장 분명한 길은 이제까지 받은 은혜를 크든 작든 오래 간직하는 것이다. 받은 은혜를 오래 간직하면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보여 참여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이 나의 영혼과 행복과 물질을 지켜주신다.
관심이 축복의 씨앗이다
학개 1장 3-4절 / 이한규목사
< 교회에 깊은 관심을 두라 >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하며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방인의 방해공작, 경제적인 어려움, 육신적인 피로 등으로 인한 외부적인 요인과 핑계와 영적 나태와 무관심과 불신과 같은 내부적인 요인으로 얼마 후 성전 건축을 중단했다. 그때 하나님이 학개를 통해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말씀을 하시며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나태와 무관심을 지적하면서 조금 더 직설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4절).” 판벽한 집이란 백향목 판자로 벽장식을 한 집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인테리어가 잘된 화려한 집을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원이 부족해서 성전 건축을 못하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들은 자기 집은 호화롭게 꾸미면서 성전은 흉한 상태로 놔두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성전이 황폐했느데 너는 화려한 집에서 살면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없나? 교회가 더럽지는 않은가?” 하고 관심을 가지라.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 필요한 것이 반드시 보인다. 목회자가 성도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다. “목사님! 교회에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없나요? 제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까요?”라는 말이다. 교회 사랑의 문이 열리면 축복의 문도 열린다.
교회는 영혼이 만족을 얻는 터전이고 축복의 근원이다. 우리나라가 개화되고 지금처럼 비교적 잘 살게 된 것도 교회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러시아에 공산주의가 들어서면서 바로 교회의 문을 닫게 했다. 결국 러시아는 하나님과 교회가 없는 땅이 되면서 은혜도 없는 땅이 되었다. 그 후 서서히 가정도, 교육도, 문화도, 경제도 죽어가면서 나라가 크게 쇠퇴했다. 최근에 러시아 여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몸을 파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영국과 독일 민족은 원래 야만 민족인데 교회로 인해 문화민족이 되었다.
< 관심이 축복의 씨앗이다 >
하나님의 자녀는 검소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테리어가 잘 된 집에 사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고급 인테리어를 하고 살면서 교회는 돌보지 않고 선교에 동참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관심이 내 것, 내 자녀, 내 가정에만 한정되어 사랑의 손길이 미치는 영역이 작으면 축복의 영역도 따라서 작아지지만 사랑의 손길이 미치는 영역이 크면 축복의 영역도 따라서 커진다.
성경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 중 하나가 다윗이다. 마태는 구약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을 아브라함과 다윗이라고 본 것 같다. 그래서 신약을 여는 마태복음 1장 1절을 쓰면서 그는 기록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처럼 다윗은 축복을 받았는데 다윗에게는 축복받을만한 수많은 요인들과 장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하나님 우선순위의 삶이었다.
어느 날 다윗은 백향목으로 된 궁전에서 나단 선지자에게 고백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 7:2).” 그날 밤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 가문에 대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 고백 후 다윗은 비록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길을 예비했다. 다윗처럼 고백의 질문을 하라. “나는 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가 교회와 선교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교회에 더욱 관심을 보이라. 교회 간판 위에 거미줄이 처진 것이 보이는 것이 축복이고 교회의 전구가 나간 것이 보이는 것이 축복이다. 그런 관심이 축복의 씨앗이다. 무관심과 이기주의는 한 통속이다. 좋은 일에 관심을 두기 싫어하고 해야 할 일을 귀찮아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면 “내가 이기주의적 성향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대략 맞다. 무엇인가 귀찮다고 짜증을 잘 내는 나의 모습을 이기주의를 경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라.
영적 성전을 재건하라
학 1장 2~11절 / 김근중목사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때에 선지자 학개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이 BC 586년에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갔다가 약 70년이 지나서 고레스 칙령에 의해 유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불타버린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스3:1-13). 그러나 여러 이유로 인해 성전건축을 중단하였고 14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이 성전건축을 중단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다시 건축을 시작하도록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고 율법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대한 언약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성전 건축 문제는 하나님과 유다 백성 사이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내적 성전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성도 개인이 성전이고 성도들의 연합된 공동체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성도의 인격이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지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 영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고전3:16, 고후6:16). 그리고 그 성도들이 연합하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 교회 공동체들이 연합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 그 공동체와 연합체들이 하나님 나라로서의 역할을 바로 해 나가는 것이 영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유1:20, 엡2:22, 4:15).
1. 솔로몬 성전에 비해 열등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3:12-13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불탄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성전지대를 놓았을 때 바벨론에 잡혀가기 전에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노인들은 통곡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영광에 비해 스룹바벨 성전의 지대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이 초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룹바벨 성전 재건을 스스로 작은 일로 여기고 성전 건축하기를 중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은 다릅니다. 전자는 다윗 왕 때부터 준비되었고 이방 왕까지 협조하여 각양 고급 재료가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포로에서 갓 돌아온 자들이 황폐한 땅 위에 준비되지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고 처음 개척교회를 할 때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경험하게 되지만 시일이 지나면 처음 은혜를 누리기 힘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강권하는 은혜가 있지만 후에는 자기의 노력이 많아야 합니다. 비록 처음 은혜가 안 느껴지더라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적 성장도가 다른 것입니다. 나중 영광이 처음 영광보다 클 줄 알아야 합니다 (학2:5-9). "작은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서 가장 큰 일로 생각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슥4:10).
2. 사마리아인의 방해 공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4:23-24에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 년까지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강 서편 사마리아인들이 조롱을 하고 방백들에게 뇌물을 주어 행정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또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할 때 고소를 했고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거짓 고소를 해 왕으로 하여금 성전건축을 중단하라는 조서가 내려지도록 했습니다. 영적 성전건축에 있어서도 방해 공작이 있으면 중단하기 쉽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내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슥4:7).
3.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하고 사마리아인들이 적극적으로 방해를 하고 지배국이었던 바사(페르시아)의 왕들이 성전건축 중단을 명령하니까 스스로 성전재건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에 대해 소극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원수들의 공격보다 그 공격 때문에 아직 때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영적 성전건축에서도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그 상황에 대해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영적 힘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때요 긍휼의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후6:2).
4. 자기 육체의 평안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4절에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고 했고, 9절에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무했으나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했습니다. 자기 집 짓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폐하여 짐승이 거하고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성전은 생각지 않고 자기들의 육체를 위해 고급 목재로 집을 짓고 사치와 연락에 빠졌습니다. 영적 성전은 황무했는 데도 자기의 평안과 안일을 추구하면 성전 재건을 할 수 없습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12:1).
성전건축을 중단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5~6절에 보면 자기 소위를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었고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고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고 입을지라도 따뜻하지 못하고 일꾼이 삯을 받아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9~11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늘의 이슬을 그치게 하고 한파를 불러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 땅의 모든 소산에 임하게 했기 때문이고, 사람과 육축과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바랬으나 도리어 소득이 적었고 그것을 집에 가져갔으나 불어 버려서 그것들이 소리지르며 날아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영적 성전건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은택이 끊어지고 심령이 마르고 영적 고갈과 곤고함을 당하고 생명의 열매가 맺히지 않고 맺히려 하다가도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것으로 행복을 누리려고 소욕대로 취해도 그것들로 만족함이나 흡족함을 얻지 못하고 기쁨이 없었던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8절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영적인 성전건축을 해야 합니다. 상황을 보지 말고 말씀과 성령으로 영적 성전을 건축을 하기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학2:8). 고린도전서3:12에 만물이 다 우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삶의 우선 순위!
학 1장 1~8절 / 지태일목사
오늘 학개서의 말씀은 성전건축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언젠가는 꼭 나누어야 할 말씀으로 알고 이 말씀을 나누어야 할 시간이 언제 오나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라면 성전 건축의 기쁨을 나누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헤쳐 나가야 할 생각을 하면 기쁨에 못지않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성전건축이라는 말씀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떠나는 사람들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일산의 어느 한 교회는 신시가지에서 교회 부흥이 너무 많이 되어 목사님이 이제 성전을 건축하려 합니다. 말하자 그 다음 주일에 약 300명이상의 교인들이 나오지 않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 좋은 일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축복을 왜 교인들이 시험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이제 나누면서 성전 건축이라는 사명과 말씀앞에 시험들거나 떠나지 말고 주님 주신 은혜 가운데 승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학개서의 배경은 에스라서입니다. 학개서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에스라를 읽고 나서 학개서를 보아야 시간적으로 내용적으로 이해가 쉽습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바사의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무너뜨린 이후 칙령을 내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70년을 살고 있던 유다의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그들로 하여금 고국인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갔던 온갖 기명들을 돌려줌으로 이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떠나왔던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의 삶을 회복하며, 회개를 통해 신앙의 개혁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에스라 4장을 보면 성전건축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시험들이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도비야와 산발랏과 같이 간교한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유다 백성들도 처음 성전 재건의 열정도 식어지고 어떤 사람들은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저마다 자기 살길을 찾아 제 일 하기에만 급급해집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바로 학개서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다리오 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때는 바사 왕 다리오 2년이었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고국으로 돌아온 지 18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에 돌아온지 근 20년이 되도록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면 당시 학개 선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선포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1절을 보면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였습니다. 초하루는 새 달이 시작하는 날로서 월삭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성전에 모여서 평상시에 드리던 상번제가 아닌 특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무해진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모여 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의 이름이 지목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입니다. 스룹바벨은 유다의 총독 곧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이고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로 하여금 유독 이 두 사람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자가 먼저 바르게 서야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를 통해 두 지도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성전이 황무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가 나옵니다.(2절)
2절 말씀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 백성"이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실 때는 주로 "내 백성"이라고 칭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책망하실 때는 "이 백성"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됩니다. 말하자면 지금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섭섭한 감정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성전 재건의 당위성은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어 버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사랑하는 성전을 떠나야 하는 슬픔을 너무 잘 압니다. 성전의 중요성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동안 뼈에 사무치게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난관이 있더라도 성전을 재건했어야 했습니다. 더구나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진정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러 저러한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물론 실제적으로 성전을 재건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젯점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막 돌아와 살기가 너무 어렵다',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다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도 어렵고 더구나 흉작으로 소출도 적고, 또한 '적들이, 방해꾼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반대가 심한데 그런데 어떻게 성전을 지을 수 있느냐?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볼 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핑계를 대었던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그들이 내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무슨 이유를 대든지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타당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럴싸한 구실이요, 변명이요, 핑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이런 저런 여건 때문에 지금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핑계하면서 성전건축을 미루고 방치한 것이 무려 16년이나 되었습니다. 핑계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성격이 되고 결국에는 성격이 그 사람의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 격언에도 "두 번 이상 핑계하는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댈만한 이유들은 많았지만 분명한 것은 재건되어야 할 성전이었습니다. 오냐하면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 회복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성전 재건은 누구의 뜻이요 섭리였습니까? 그것을 말씀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2절에서의 밝히는 말씀처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심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통치하시는 하나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정대적인 능력으로 보호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저 "아멘" 으로 절대 순복할 뿐입니다. 거기에 무슨 이유나 핑계가 필요하겠습니까?
누가복음 14장에는 천국의 잔치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이 잔치를 베풀고 종들을 보내어 손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밭을 샀으니 밭을 보러가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종들로부터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대단히 노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전에 청하였던 그 세 사람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핑계하는 사람은 상종 못할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핑계하는 사람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다고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대면서 핑계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응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핑계하지 말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달란트가 있고 사명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불량만큼 그것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126:6) 바울은 디모데에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이 황무하였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님니다. 우리 교회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여기까지 이렇게 역사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때를 따라 새빛중앙교회 성전 건축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아니면 우리가 잘 감당하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전 건축의 놀라운 축복을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이 황무하게 방치되고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3-4절)
3∼4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황무하게 된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4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여기서 판벽한 집이란, 문자적으로는 널빤지로 벽을 쫙 둘렀다는 뜻입니다. 잘 꾸며진 집, 아름답게 단정된 집을 말합니다. 벽과 지붕에 각종 화려한 장식을 한 집, 안락한 그런 저택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은 황무하였다고 했습니다. 성전에는 지붕도 없습니다. 벽도 없습니다. 그저 성전 건축을 위한 지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무너지고 훼파되었으니 보기에도 얼마나 흉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의 지붕도 둘렀습니다. 벽도 둘렀습니다. 그리고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그 안은 좋고 아름답게 치장을 해 놓았습니다. 자신들은 호화 저택, 판벽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황무한 하나님의 성전 재건은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중단하고 있는 실정이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습니까?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깊은 배신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범죄한 유다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살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습니다. 거기서도 죽지 않고 70년을 준비하게 하시다가 교만한 대국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그 뒤를 이어 바사 나라가 들어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유다 백성들을 조국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게 하는 칙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까? 바사 나라에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까? 시집가고 장가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자기들의 집을 지을 만한 충분한 땅이 부족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에스라, 느혜미야, 학개서 등에서 거듭 반복되고 있는 말씀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금 재건하도록 하시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고국 땅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백성들로서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어야 할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들의 집을 짓느라 바빠서 하나님의 성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탄식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이 백성이 나의 전은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서 자기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고 있구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던 영국의 청교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항해하는 67일 동안에도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배 안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 성수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복을 내리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미국의 대 축복은 바로 조상들,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였던 최치량장로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그는 선교사님들을 도와서 평양의 장대현 교회를 세우신 분이십니다. 어느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천장에서 비가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다음날 월요일 아침 일찍 자기 집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 위에 있는 기와를 벗겨 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멀쩡한 기와를 왜 벗겨 내십니까?" 그때 최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비가 새고 있어. 내 집이야 비가 좀 새도 괜찮지만 어찌 하나님의 집에 비가 새도록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자기 집의 기와를 벗겨 내서 하나님의 성전의 비 새는 곳을 막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황무한데 나는 어찌 홀로 판벽한 집에 거하겠느냐?" 하나님의 집은 폐해진대로 내버려 놓고 자기 집은 아름답게 편리하게 꾸며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다음에 나, 먼저 하나님의 집 다음에 나의 집이 되어야 하는데 이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마음, 위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그 옛날 하나님의 성전 짓기를 그토록이나 사모했던 다윗의 마음이요, 평양 장대현 교회의 최장로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새빛중앙교회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이제는 이런 귀한 마음,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고 세우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과 메시지
학 1장 1~6절 / 피영민목사(강남중앙교회)
서론
구약성서에 예언서들이 많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나누면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먼저 B.C.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왕에 의해서 멸망당할 때 예언했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호세아, 아모스, 요나, 이사야, 미가, 오바댜 이렇게 6명은 B.C. 721년 예언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B.C.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할 때까지 예언한 사람들이 스바냐,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입니다. B.C. 587년부터 B.C. 539년 바벨론 포로기에는 에스겔, 다니엘이 예언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기 전반부에 활동했고 다니엘 선지자는 포로기 전체에 걸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B.C. 538년 고레스 칙령이 발표되고 예루살렘으로 유다 백성이 돌아온 이후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고 요엘 선지자도 후기 저작설이 맞는다면 이 시대에 활동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같은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이 에스라 1장부터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학개와 스가랴의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것을 잘 읽고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그들이 증거하는 메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개서의 시대적 배경은 네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Ⅰ. 고레스 칙령(B.C. 538)
남왕국 유다는 북왕국이 멸망한 B.C. 721년으로부터 136년 더 지속되었습니다. 그동안 히스기야나 요시야와 같은 훌륭한 왕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하면서 엄청난 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남왕국 유다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케 한 우상숭배의 길을 따라갔고 B.C. 587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열왕기하 25장과 예레미야 52장에 이것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솔로몬이 7년에 걸쳐 지은 궁전도 완전히 파괴되고 모든 집들이 불태워졌습니다.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히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모든 금그릇, 은그릇은 옮겨져 바벨론 신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망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나면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B.C. 605년 여호야김 왕 때 느부갓네살에 의해 1차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로 끌려간 때부터 시작해서 70년이 지나 B.C. 537년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B.C. 539년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기 20년 전인 B.C. 559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되어 B.C. 550년에 그 옆에 있는 나라 메대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B.C. 539년에 바벨론을 멸망시켰는데 오늘날로 치면 이란이 이라크를 멸망시키고 지배한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통치하기 시작한 B.C. 538년에 고레스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고레스 칙령의 내용은 에스라 1장 1~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서 70년 동안 고생한 유다 백성들은 이제 자유롭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너희는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 예루살렘으로 안돌아가고 바벨론에 남는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은이나 금이나 물건이나 짐승으로 예물을 드려라.” 이것이 고레스 칙령인 것입니다. 고레스는 페르시아 사람으로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이 어떻게 이런 칙령을 발표할 수가 있느냐?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칙령을 발표하게 된 것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사 44:28). 고레스가 정권을 잡기 100년 전에 이미 이사야가 고레스라는 이름도 알고 고레스가 자기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된 것에서 해방시키리라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언을 한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 선지자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9장을 보면 다니엘 선지자는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 갈 것을 알고 금식하며 약속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에 섭리하셨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 21:1). 저수지에 있는 물을 농부 마음대로 인도하듯이 왕의 마음도 하나님 마음대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스 1:1).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시고 예언케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고레스 칙령이 발표되었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수가 몇 명이냐? 에스라 2장 64~67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42,360명이 돌아오고 노비가 7,337명,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 돌아왔다고 아주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두 합해보면 5만 명에서 103명이 모자랍니다. 하나님께서 대충 5만 명으로 써놓지 않으시고 정확하게 기록해놓으신 이유는 무엇이냐? 천국은 대충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각하거나 실수로 들어가서 숫자가 틀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만 명에서 103명 모자란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정착해서 남아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탈취했던 금, 은그릇 5,400개도 다 돌려받았습니다. 고레스 왕이 성전에서 쓰던 그릇을 다 돌려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이 잔치를 열어 술을 마시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그릇으로 술을 마셨는데 갑자가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알 수 없는 글씨를 써 놓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오늘 벨사살이 죽고 바벨론도 멸망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결국 그날 고레스가 쳐들어와서 벨사살은 죽고 바벨론은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을 듣고 고레스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모든 기물을 다 돌려주라고 한 것입니다.
Ⅱ. 성전 지대를 놓음(B.C. 536)
고레스 칙령이 B.C. 538년이고 유다 백성이 돌아온 해가 그 이듬해인 B.C. 537년 4월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돌아와서 성전에 지대를 놓았습니다. 이들이 돌아오자마자 먼저 성전 터에 가서 보았는데 그들을 인도한 사람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옛날 솔로몬 성전이 있던 터에 가서 보니까 완전히 황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지고 온 모든 보물들을 성전 건축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이들이 가장 처음 와서 한 일은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스 2:69). 이들은 인색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학개 선지자가 증거하는 백성들은 인색해서 헌금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헌금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학개서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심을 다해 헌금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착한지 3개월이 지난 B.C. 537년 7월에 이르러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짓기 전에 먼저 예배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B.C. 536년에 드디어 성전 건축을 위한 지대를 놓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3장 8~11절에 보면 레위인들 가운데 20세 이상 되는 남자들은 공사 감독을 하고 나머지 지파들은 공사를 하여 성전 건축을 위한 토목 작업인 지대를 놓게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레위인들 가운데 찬송을 맡은 사람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불고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주는 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레위인들이 찬양하니까 백성들도 즐거운 소리로 부르며 화답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을 눈으로 보았던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솔로몬 성전은 매우 큰 성전이었는데 그 성전이 어디로 갔냐고 하면서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전 지대를 놓을 때 대성통곡하는 소리와 여호와를 찬양하는 소리가 어우러져서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학개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있는 유다 백성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며 전심을 다해 헌물을 드린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Ⅲ. 사마리아인들의 반대가 일어남
성전에 지대가 놓이고 성전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사마리아인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을 찾아왔습니다. B.C.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앗수르 왕 에살핫돈의 명령으로 사마리아의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사람, 에돔 사람, 아람 사람 등 이방사람들을 사마리아에 심어놓았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지만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 사마리아에 와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죽자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제사장을 데려다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만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온 신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33). 한국에는 종교혼합주의가 많습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 가고 4월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갔다가 명절이 되면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유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닌 종교혼합주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혼합주의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에스라 4장 2절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와서 헌금할테니 성전 건축에 동참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스 4:2). 그러자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스 4:3). 왜냐하면 스룹바벨은 우상숭배로 70년을 고생해본 사람입니다. 바벨론에 가서 70년을 고생해봤기 때문에 종교혼합주의를 다시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거절당하자 그때부터 조직적, 의도적으로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 때부터 다리오 왕에게 이르기까지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방해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고레스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캄비세스인데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라고 부릅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캄비세스 왕에게도 유다 백성을 고소합니다. 그리고 캄비세스 다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인데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왕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으로 페르시아의 관리가 된 르훔과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 백성을 모함하는 편지를 올린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읍을 건축해서 반역을 도모한다고 모함을 하자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 (스 4:23).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려서 성전 건축을 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기초만 놓고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불신자들도 아니고 배교자들이나 이단자들도 아닙니다. 정통신앙을 가지고 종교혼합주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참된 성도들이었고 헌신된 성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모함과 권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중지하게 된 것입니다.
학개서의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반대와 공격이 오자 실망과 좌절을 하여 중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옛날에만 있었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깨달아 성령 충만을 받고 교회와 구역에서 봉사하다보면 방해가 옵니다. “너 장로 되고 싶어서 그러냐? 왜 그렇게 난리를 치냐?”면서 별 소리를 다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그만두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증거한 유다 백성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가대를 봉사하다가 떡을 돌렸는데 성가대장하려고 떡 돌리냐면서 몰아붙입니다. 그러면 떡 돌리고 그 다음 주에 교회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또 두 사람이 떡 해왔는데 한 사람 것은 맛있고 다른 한 사람 것은 맛이 없다고 해서 안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Ⅳ. 다리오 왕의 조서(B.C. 520)
B.C. 536년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발표되자 유다 백성들은 16년간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습니다. 먼 길을 돌아와서 헌금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방해로 인해 16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것입니다. 이때 에스라 5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학개, 스가랴 선지자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학개가 두 달 먼저 예언을 시작했는데 B.C. 520년 학개와 스가랴가 다시 일어나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는 그대로 유효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강 서편에 주둔하는 페르시아 총독 닷드네와 그의 보좌관 스달보스네가 스룹바벨에게 찾아와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성전을 건축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스 5:5). 누구의 허락을 받고 짓느냐고 묻기만 하지 성전 건축을 방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입니다.
페르시아 총독 닷드네와 스달보스네는 아닥사스다 뒤를 이어 왕이 된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레스 칙령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다리오 왕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이유를 알아보게 되었고 실제로 조사해보다가 고레스 칙령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은 고레스 칙령과 동일한 조서를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역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로 하나님의 이 전을 본처에 건축하게 하라” (스 6:7). 결국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린 B.C. 520년 성전 건축이 재건되었고 4년 만인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16년 동안 중지되던 것이 4년 만에 완공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결 론
학개서의 배경을 이렇게 자세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학개서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듣기 위해서 입니다. 학개서에 나타난 유다 백성들의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거나 헌금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헌신되지 않았거나 너무 인색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행하는 도중에 닥쳐온 반대, 어려움, 모함, 방해 때문에 넘어지고 좌절한 것입니다. 축구 선수가 공을 몰고 가다가 태클이 들어와서 넘어졌다고 계속 넘어져 있으면 되겠습니까? 다시 일어나서 뛰어야지 넘어져서 누워있으면 되겠습니까? 학개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다가 반대가 올 수도 있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모함하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런 반대를 뚫고 주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와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믿음과 용기가 부족한 것이 유다 백성들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학개서의 교훈은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면서 사업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왔거나 가정에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와서 넘어졌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성도님들은 다 뚫고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