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동맥에 상처는 없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이 그어서 벌어진 살이 오므라들 때까진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네.”
“다시는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네.”
병원을 나오면서 화장실에 들러 손목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부러 마치 팔 전체를 다친 것같이 감았지만 역시 거추장스러웠다. 붕대를 쓰레기통에 넣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왼쪽 팔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형광등의 빛을 받아 더욱 하얘 보이는 손목에 붉게 벌어진 상처가 파문처럼 남아있다. 다시는 죽으려고 하지 마세요. 의사의 당부는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긍할 마음이 아니었지만 싫어요―라고 했다간 그를 더 피곤하게 할까봐 그만 두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연계되지 않은 입씨름은 싫어한다. 그래서 특히, 나는 병원을 싫어한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다가 습관적으로 왼손으로 돈을 내밀었더니 본의 아니게 손목의 흉터를 본 여종업원의 눈이 조금 커진다. 당황한 나는 얼른 담배를 주머니에 쑤시고 나왔지만 그 때 언뜻 본 종업원의 표정은 한마디로 재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나에게 항의하는 듯 했다. 빌어먹을 자식. 누군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알아? 죽으려고 했던 게 자랑인 줄 아나, 미친 자식. 그 소리 없는 비난이 마음속에서 울린다. 그것은, 이미 내가 자살을 시도하기 전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쏟아 붓던 일말의 회유였다. 그러자 또 다른 마음에선 변명을 한다. 나도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야. 살고 싶지도 않고 죽고 싶지도 않았다, 고. 손목을 긋는다고 해서 죽으리라 예상 하지 않았다. 문구용 칼로 수 십 번 왼쪽 손목을 긋는 동안 오디오에선 라디오헤드의 카마 폴리스가 지겹게 흘렀다. 절망에 가득 찬 피아노 소리가 영화의 배경음처럼 들렸다. 피가 너무 넘쳐서 어디를 그었는지 잘 보이지 않아 수건으로 열심히 닦으면서 그었다. 조금만 더 그으면 죽을 것도 같다, 라고 생각할 즘 전화가 울렸다. 제인과 통화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칼질을 했다. 지독하게 지루한 얼굴을 하고.
「오늘 데프톤즈 앨범을 거래했어. 내가 전에 말했잖아, 왜, 백 투 더 스쿨이 수록된 한정반을 가진 사람을 인터넷에서 찾았다고. 그래서 칠 만원에 거래했어. 기분 좋다. 너한테 제일 먼저 빌려줄게!」
「레이디 제인이 학교로 돌아간다니 좀 이상하네.」
「아 싫다. 난 롤링스톤즈 싫어. 걔네들 때문에 내 별명이 레이디 제인인 거야.」
「그게 뭐 어때서? 예쁘잖아.」
「설마 믹이 레이디 제인을 부르면서 나같이 하얗게 찐 돼지를 생각했겠니? 거기에 스트레스 받아서 나 요즘 살이 더 쪘어.」
「괜찮아. 건강하기만 한다면.」
「……민신이 넌 남자인데도 어쩜 이런 말하기가 편할까. 근데 그거 아니?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 연인이 되긴 힘들어. 전혀 느낄 수 없거든.」
「오르가슴을?」
「사랑을.」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는 문구용 칼을 책상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직도 철철 흐르는 벌어진 상처를 수건으로 감싸고 대충 지혈한 뒤 병원으로 갔다. 다친 건 왼쪽인데도 오른손이 뻐근했다. 어쩐지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걷다가 실수로 동네 미친년을 건드렸고 미친년은 대낮에 괴성을 지르며 나를 쫓아왔고 그래서 나는 잽싸게 도망갔다. 숨 가쁘게 달리면서, 이건 뭔가 아닌데―를 계속 중얼거렸다. 이건 뭔가 아니야. 난 방금 죽으려고 손목을 그었는데 지금은 오직 안전을 위해 죽을 듯이 뛰고 있잖아. 이건 뭔가 아니야, 아닌데, 아닌데……. 카마 폴리스가 떠올랐다. 업을 다스리는 경찰관님. 지금 제 뒤를 쫓아오고 있는 저 미친년을 얼른 잡아주세요. 이 년의 히스테릭 괴성에 구역질이 날 거 같아요. 그러나 이건 너의 업보야. 이건 너의 업보야. 퍽, 유.
허밍타임 한 개비를 문다. 라이터를 당긴다. 이건 세상의 이치다. 라이터를 먼저 당기고 담배를 무는 사람이 별로 흔하지가 않듯이 시시한 자살기도를 끝으로 잘 살아가는 일은 드물다. 나는 다시 한 번 죽기로 했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젠 사는 데에 심각한 염증을 느낀 탓이다. 레이디 제인의 데프톤즈 한정반을 들어보고 싶지만 왠지 들으면 우울할 것 같다. 죽기 전의 절차처럼 듣는 노래는 진혼곡에 불과하다. 백 투 더 스쿨이 진혼곡이 되기엔 좀 이상하니까. 그냥 담배 하나 피고 나서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편이 낫겠다.
그런데, 옥상 문이 잠겨있다.
가장 곤혹스럽고도 서글픈 사실에 나는 우습게도 죽기 위한 설계도를 세울 필요가 있다. 주변 고층 건물의 옥상이란 옥상은 전부 올라가봤지만 망할 놈의 수위가 하도 꼼꼼해서 옥상 문은 죄다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었다. 결국 아파트를 선택했다. 아파트 옥상도 당연히 잠겨 있겠지만 베란다는 다르다. 고층에서 사는 집 어딘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면 되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전부 2층, 3층 아니면 단독주택, 아니면 지하, 아니면 서울역에서 사는 놈들이다. 그냥 깨끗하게 지하철에 찢겨버릴까. 그것도 싫다. 만약 지하철에 찢기면 그 시체를 처리할 때 경찰이 내 성기를 보고 남자라고 추정할 테고 손목을 보고 며칠 전에 또 자살을 기도했었군, 중얼거릴 것이다. 비록 내 몸을 사랑하는 편은 아니어도 그건 싫다. 미리 주민등록증을 주머니에 넣고 뛰어내려야겠다.
여의도 한강이 보이는 소위 고급아파트는 21층까지 있었다. 21층이 좋을까, 20층이 나을까를 실없이 망설이다가 21층으로 정했다. 가장 높아서가 아니라 이십보단 이십일이 왠지 어감이 좋다. 2102호 문 앞에서 벨을 꾹 누르자 인터폰을 받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어린 여자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최대한 신뢰 있는 아저씨로 보이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가스 검사 나왔습니다.”
“엄마 안 계세에요.”
뭐? 개새?
“잠깐 검사만 하고 갈게. 문 좀 열어주겠니?”
“으응, 안 돼에요. 엄마가아, 모르는 사람한테느은 문 열어주지 말랬는데.”
“아저씨를 왜 몰라. 너 텔레비전에서 소방관 아저씨 못 봤어? 아저씨가 그 아저씨야.”
꽤나 유치하게 둘러댔음에도 멍청한 아이는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말했다.
“얘, 꼬마야. 아저씨는 너희 집의 안전을 지키는 착한 아저씨란다. 네가 사랑하는 엄마, 아빠를 나쁜 일로부터 구해주는 사람. 만약 아저씨가 네 집에 들러서 가스 검사를 안 하면 불이 뻥! 하고 터져서, 네 엄마 아빠가 죽을지도 몰라. 그런 게 좋아? 아니지? 자, 얼른 문을 열렴. 아저씨는 슈퍼맨보다 착한 사람이야.”
“세일러문처럼요?”
내가 세일러문처럼 한다면 레이디 제인이 미친개처럼 웃을 게 틀림없다. 그래도 나는 그렇다고 했다.
세일러문은 단박에 효과를 보였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문을 열어주더니 꺅꺅 마치 우리 동네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며 저만치 동동동 뛰어갔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곱슬하게 파마를 했지만 코가 들창코였다. 그런 애가 배시시 웃으니 너무 못생겨서 그저 서글프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순수한 아이 앞에서 뛰어내릴 만큼 나는 모질지 못하다. 자꾸 그 단추 구멍만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아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우선 베란다에 들어가 거기에 늘어선 화분을 관찰하는 척 했다. 가스 검사 나왔으면서 난데없이 화분은 왜 보냐는 의문을 어린 아이가 깨달을 리 없었다.
당장 떠오른 단어가 없어서 얼떨결에 한 말이다. 사실 열쇠는 아무 필요도 없지만 아이가 찾기엔 힘들 거라고 판단했다. 아이는 왜 열쇠가 필요한지 궁금해 했다. 그래서 불이 안 나려면 그게 필요하다고 타일렀더니 무슨 중요한 임무라도 받은 마냥 비장한 얼굴로 동동동 안방으로 달려갔다. 겨우 따돌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베란다 문을 열고 가까이 섰다. 솔직히 지금은 전혀 죽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실행했으니 무연히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절망을 짜내기 위해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벌어진 상처. 아무 느낌이 없다. 그래도 아이가 금방 돌아올 것이 신경 쓰여 얼른 뛰어내렸다.
뛰어내렸다. 바람이 갑자기 거세져서 눈을 뜰 수가 없다. 구름을 뚫고 나온 신의 손이 내 어깨를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누르고 있다. 젠장. 속으로 욕을 했다. 소설책에서나 봤던 투신자살 하는 사람들은 다들 새가 되는 착각을 하던데, 왜 난 전혀 그런 착각이 들지 않는 걸까. 이건 나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거다. 이렇게 떨어지다가 운이 좋아서 나무에 걸리거나 1층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푹신한 이불에 떨어져서 살진 않을까, 내심 그런 굉장한 우연을 바라며 나는 거센 바람으로 피곤해진 몸에 힘을 뺐다.
빌어먹을 나무나 이불 따윈 없었다. 내 몸은 동상에 정통으로 부딪친 것처럼 퍽하는 소리와 함께 추락을 끝냈다. 아픔도 잠시, 머릿속에서 삑(마치 터미네이터가 죽을 때처럼), 기계음이 들렸고 힘겹게 눈꺼풀을 올릴 찰나 깜빡 죽어버렸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서도 벗어났다.
끝난 줄 알았는데 육신을 떠난 내 의식은 땅 속보다 깊숙한 내면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첫댓글 궁금하네요. ㅎ, 건필하시길.
미묘한 분위기이군요. 죽음이라는 소재를 앞에 놓고 분위기를 격하게 몰아가지는 않는 군요. 어떻게 끝맺을 지 궁금해집니다.
우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