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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밥상머리 마음공부 원문보기 글쓴이: 밥몸맘
여성과 환경 연대 무크지
웰빙 문화 속 깨어나는 여성의 삶
웰빙으로 들끓는 세상
웰빙이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심기가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웰빙이 가져온 고급화된 과소비 문화에 ‘ 제 혼자 잘 먹고 잘 살기’를 원하는 개인과 가족의 욕심 문화를 읽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빙이라는 좀 더 근원적이고 긍정적인 문화적 흐름과 마켓팅 전략으로의 상업적 악용은 함께 공존할 것으로 보여진다.
베이비 웰빙이라고 하는 어린 아이들의 웰빙이 엄마가 해준 유기농의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햄버거 , 피자보다 더 맛있다고 생각하고 먹어야 하는 권유의 웰빙이라면, 10대의 아이들은 일명 ‘요가 패션’ 이라고 불리는 줄무늬가 그어진 산뜻한 트레이닝복을 입으며 웰빙족의 멤버임을 선언한다. 20대의 웰빙은 좀 더 맛있는 집, 최상의 좋은 것을 찾아다니며 전문적인 웰빙족의 모습들을 보이지만 기본적인 삶에 기반하지 않은 이유로 그 내용이 충실하지 않은 반면, 30대의 웰빙족은 가족을 위해 기꺼이 엄마의 노력을 불사하는 집안 지킴이와 건강 수호 천사로서의 모습을 자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혼과 육아, 자기 실현과 사회적 스트레스속에 강화된 정신적 공허함은 요가, 명상, 호흡법을 배우기 위한 시간들을 내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구도의 웰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스파와 아로마를 즐기며 스스로를 웰빙족이라 할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주말이면 산을 타고 매일 아침 동네 한 바뀌를 열심히 조깅하며 자신을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웰빙족이라 생각할 것이다.
먹고 자고 입고 생활하는 의식주 생활 전반에서 웰빙 먹거리, 웰빙 의류, 웰빙 주택, 웰빙 건강법 등 최상의 좋은 것을 추구하는 문화는 짧은 시간동안에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었다.
누구나 더 잘 먹고 잘 살기를 꿈꾸는 시대! 웰빙의 열풍은 기업 마케팅속에 녹아지며 더욱 더 상품 위주의 소비를 조장하면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시점에 ‘참살이’ 이라는 한글로 정식 표기된 웰빙이란 무엇인가? 웰빙의 유래와 근원, 웰빙의 의미, 웰빙 열풍으로까지 드러나고 있는 사회 현상과 문제들, 그리고 웰빙 문화 속 여성의 각성과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보여진다.
웰빙( well being ) 이란?
웰빙의 사전적 의미는 안녕, 복지, 행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웰빙은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도 인스탄트, 가공 식품 보다는 유기농의 자연식과 외식보다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슬로우 푸드를 즐기고, 요가와 명상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며 여행, 독서, 레저와 스포츠 등을 즐기면서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말한다.
웰빙(well being) 은 건강한, 안락한, 만족한 등의 뜻을 가지는 웰(well) 과 존재, 삶,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빙(being) 의 합성어로 되어 있는데 웰(well ) 의 다양한 해석만큼이나 그 의미 또한 상당한 자의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웰빙하면 무엇이 떠오르냐하고 하면 유기농과 요가가 생각이 난다고 하며, 아로마나 스파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명상과 휴식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안에서 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를 해도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웰빙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앞으로 웰빙 열풍은 마켓팅 전략으로 이용하는 기업의 전략과 정보화 사회에 개인이 취합할 수 있는 정보의 총량이 증가하면서 더욱 더 그 여세는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언젠가 답변을 해야 하는 시간은 분명히 찾아 올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시장에 나온 물건만을 살 수 있으며 엄마와 식당 아줌마가 만들고 제공해준 음식에서 살아간다. 자기가 먹을 것을 직접 키우고 만들어 먹지 않는 한 우리는 공급되는 시장과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잘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우리의 여지없는 착각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다. 최상의, 최고의, 신소재의 것들을 즐기다 그것이 언젠가 환경 호르몬으로 판정되는 상황이고, 수십년을 먹어왔던 콧물약이 뇌졸중의 위협으로 사용이 중단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내 아이 좋은 것 골라 먹으며 환경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숯 침대를 사용하고 최고의 교육 환경에서 최고의 아이로 키우고 싶지만 그렇게 키워지는 아이들조차도 중국산 농산물의 처리장이 되고 있는 위탁 급식의 도시락을 먹어야 하며 온통 인스탄트, 가공식품과 패스트 푸드에 둘러싸여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키운 아이가 명문대에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지만 들어간다고 하더래도 취업이 안되거나 사회적 적응을 잘 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과 미국에서 불고 있는 백 투 더 베이직 ( back to the basic ) 운동은 창의력에 열광하며 방치해둔 교육 환경을 비판하며 기본에 충실하고, 가정의 교육의 중요성과 인성 교육을 강조하는 지난 삶의 반성이다. 어찌보면 진정한 웰빙, 잘먹고 잘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삶의 반성 속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 잘 먹을래야 먹을 수 없는 세상, 나 혼자 잘 입고 잘 살래야 살 수 없는 세상.
내가 빠져 있는 그 행복의 단꿈은 누군가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으며 누군가의 고통을 위에선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나의 성공과 출세, 내 아이 일등하는 행복에는 이등하고 꼴등하는 아이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이 있다. 정부는 경쟁력 없는 농업을 포기하고 핸드폰, 자동차, 컴퓨터를 더 팔아 그 돈 주고 식량도, 에너지도 사서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국제 시장에서의 식량과 석유의 값이 늘 지금 같으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석유값은 이미 폭등하기 시작했고 에너지 전쟁으로 이라크의 많은 아이들과 여성들을 비롯하여 무고한 생명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내가 내 돈 주고 먹을 거 사먹고 내 돈 내고 전기와 에너지를 마냥 쓸 수 있다고 하지만 국제 시장의 곡물 시장 가격이 오르고 에너지의 가격이 오르면 제 3 세계 누군가는 먹을 것을 사지 못해 배고파 죽을 수도 있고 석유가 없어 추워서 얼어 죽을 수도 있는 문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모든 사람과 생명과의 연관을 떠나 살 수 없는 세상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개인적인 가치관에서 출발하고 있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웰빙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모색을 해내야 한다.
언제부터 웰빙인가?
우리나라에 웰빙 열풍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정도로 파악된다. 모 방송사의 연이은 식품 안전의 위협과 새집 증후군의 공포는 본격적인 웰빙 열풍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서구 사회에서 웰빙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이 지나면서부터라고 한다. 고도화된 산업 사회는 사람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것이 자아실현이고 자기 성취라고 위장되기도 한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들에게 정신적 만족과 안정감, 맑은 정신과 삶의 균형같은 것은 소홀히 여겨졌다.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는 산업 사회의 병폐에 회의를 느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60년대 히피들의 자연주의 사상과 뉴에이지 운동을 계승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웰빙족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물질적 부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래도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기 시작하면서 웰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한다.
요즘 서구 사회에서는 승진과 출세를 앞둔, 하버드대, 예일대 등 명문대를 졸업하고 진취적인 사회 활동을 통해 소위 잘나가는 여성들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 만족, 균형과 맑은 정신’ 이라고 이야기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또는 내 자식을, 내 손으로 잘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 현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이전에도 서구 사회에 웰빙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0대 히피들은 유기농의 음식을 찾고 자연식, 채식을 하며 요가와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 반전, 민권 운동 등을 하면서 산업 사회 전체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 흐름은 80년대 유럽에서 이태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슬로우 푸드 운동과 80년대 도시 근교에서 살면서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피족, 90년대 느리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보수는 적지만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슬로비족, 부르조아의 물직적 부와 보헤미안들의 정신적 풍요를 함께 추구하는 보보스족등의 출현으로 그 모습을 계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도 총체적인 삶의 양식의 변화와 흐름속에 사회적으로 웰빙족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더더욱 비싼 유기농을 선호하고 건강을 위해, 공기 정화기, 전기 인덕션, 정수기, 숯 침대 등을 구입해야 하며 허브차와 아로마를 즐기고 스파와 요가를 하는 등 상품 위주의 소비 문화와 지나친 건강과 미용에 대한 집착 등의 소비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건강한 삶과 건전한 소비라는 웰빙의 두 축은 명품과 아바타와 블로그에 열광하는 현대인들에게 뚜렷히 감성을 자극하며 더욱 더 고급화, 프리미엄화, 차별화 전략속에 상업화의 길을 가고 있다.
웰빙 열풍이 거세게 일어나기까지
우리 사회는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발과 성장, 생산과 효율성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사회적 가치였고 곧 규범이었다. 의식의 완충 지역없이 진행된 고도의 물질적 성장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치 체계의 혼란을 넘어 세대별 갈등과 환경적 위협, 생명력의 저하 등을 비롯한 개인과 사회적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이밥과 고깃국을 먹으면 잘 사는 줄 알았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훼밀리 레스토랑에서 퓨전 요리를 즐기며 자신의 삶이 업그레이드 되는 줄 알았다. 최신식의 설계와 디자인을 자랑하는 새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그 꿈은 완성이라도 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라도 하듯 지식의 독점이 풀리고 감추어진 진실들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양반과 귀족들이 독점했었기 때문에 내가 잘 살게 되면 충분히 먹으리라 다짐하며 그토록 갈망했었던 이밥과 고깃국은 더 이상 그 옛날의 그것이 아니었고, 우리가 그토록 달콤하게 느끼며 맛있게 먹었던 빵과 과자, 라면과 자장들도 안전한 음식이 아니었다. 모든 영양과 생명력이 모여 있는 씨눈과 껍질을 모두 깍아 버리고 도정율이 10분도가 넘어버린 그 하얀 쌀밥을 우리는 맛있다고 느끼며 내가 먹고 있는 밥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옛날 어쩌다 먹는 고기는 질겼고 국을 끓이면 누런 기름이 떴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고기는 소들이 들녘에서 풀을 먹고 만들어낸 고기도 아니며 곡물 사료를 먹고 숨막히는 공간에서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맞아가며 만들어낸 절망과 좌절로 몸서리치는 분노의 고기였던 것이다. 하루는 라면, 하루는 자장, 하루는 스파게티, 하루는 칼국수, 하루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에게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음식들은 밀가루라고하는 단 한가지의 음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밀가루 또한 농약과 살충제, 방부제와 표백제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에 기함을 할 노릇이었다.
뿐만 아니라 허리띠 졸라매며 열심히 살아온 댓가로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서는 바닥과 천장과 벽지에서 온갖 화학 물질들을 뿜어내고 있었고, 새로 구입한 가구들과 편하자고 사용했던 침대와 쇼파, 커텐, 카펫은 온갖 화학물질들을 뿜어내거나 진드기를 키우며 알레르기의 원인 물질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파트 실내 공기는 지하철 환승역의 공기보다 더 오염도가 심하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하늘이 아찔했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고 진실들이 밝혀지며 사람들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개발과 성장이 최고의 미덕이며 더 많은 경제적 부와 물질적 풍요속에 인간의 행복이 있을거라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을 사람들은 의심의 눈길로 다시 바라보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성취 지향적 삶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의 광폭한 육식 문화에 쐐기라고 박듯이 전 세계를 채식의 세계로 안내할 것 같았던 광우병 파동, 21 세기 바이오들의 총공격을 예견하며 닥쳐온 사스와 조류 독감, 당뇨병 천만명 시대를 예견하는 온갖 만성 질환의 창궐,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쓰레기 만두 사건을 비롯한 식품의 안전을 위협하는 식품 사건과 사고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마는 세상에 더 이상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기본적인 생명의 영위조차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경제문제, 정치적 이슈에서 벗어나 건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집에 들어가야 하는 젊은 직장인들 때문에 회식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회자되게 되었다. 젊은 직장인들은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며 경제적인 부를 쫒아 살지도 않으며 자기 성취와 명예를 위해 또 다른 삶의 욕구나 가족과 친구와의 유대를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대체로 이는 개인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비롯되지만 그들은 오히려 이전 세대보다 개인과 사회생활의 적절한 조화를 꿈꾼다.
식품 오염과 환경 파괴, 질병의 증가, 정신적 만족과 행복감의 결여, 파편화된 사회속에서 안정감과 유대감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새로운 문화적 흐름과 요구는 절박할 정도로 간절한 것이 되었다. 비록 그것이 상품 위주의 과소비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고 근본적인 접근에서 비롯된 의식의 전환과 상생과 공존의 삶을 향한 모색을 이루어내고 있지는 않지만, 웰빙 문화의 확산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고 더욱 더 다양한 사회적 논의속에 구체화되어 갈 것으로 보여진다.
밥상머리 깨어나는 삶
약국을 정리하고 식생활 계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지난 1998년만 해도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고 식탁의 안전과 환경적 위협은 큰 문제로 다가서지 않았다. 오렌지는 농약범벅에, 오렌지 쥬스에는 비타민 C 가 한 방울도 없다는 사실, 내가 먹고 있는 고기와 우유는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제가 넘쳐날지도 모른다는 것과 오늘 아침에도 먹은 빵은 온갖 화학 물질과 설탕과 변질된 기름이 넘쳐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친 왜곡에 불과하다는 사실들에 생명의 근원적 치유를 꿈꾸었던 나로서는 눈 감고만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사회적 충격들은 이제 여러 방송과 언론 매체들을 통한 사회적 호들갑속에 완충되어 둔해질대로 둔해진 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새로운 정보들에 눈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조상들은 이미 밥상 머리에서 교육이 끝난다고 했다. 밥을 먹으며 우리는 엄마의 정성과 사랑을 느끼고 아빠의 수고에 대해 생각한다. 밥을 먹으며 우리는 농부들의 피땀어린 노고와 뭇 사람들의 손길을 생각하고 해와 바람과 비와 땅의 고마움에 머리 숙인다. 사람과 자연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곳, 그곳이 밥상머리였던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사람된 도리가 아니라고 가르키며 그 교육의 시작은 분명 밥상머리에 있음을 조상들은 말해오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밥을 먹으며 영양가를 따지고 좋고 나쁘고 맛있고 맛없고를 따지면서 온갖 분별심으로 삶의 만족과 감사의 시간을 뺏고 있다.
오늘 내가 먹은 밥은 내 몸안에서 소화되고 흡수되어 내몸을 만들고 하루를 살아가게 해준다. 밥이 곧 내가 되어 버린다. 그 밥에는 부모의 정성과 사랑이 들어 있고 농부들의 노고와 자연의 은혜가 들어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은 분명 파동이라는 형태로 고스란히 담겨져 지금 나의 생명력을 이루고 나의 생명과 공명한다. 음식은 손끝 맛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엄마의 입김으로 큰다는 것도 우리 조상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조차도 소중히 여겼던 심성에서 할 수 있었던 말이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음식을 먹으며 다른 생명과 공명하며 생명의 소중함에 눈에 뜨고 생명적 각성으로 다른 생명과의 연관적 삶에 자각한다.
밥이 나고 내가 밥이다. 엄마가 나고 내가 엄마다. 농부가 나고 내가 농부이며 자연이 나고 내가 자연이다. 네가 나고 내가 너이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네가 없다. 네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하고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우리의 삶은 시, 공간적으로 조상과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이어지는 삶의 투영들을 가지고 있으며 한 세대를 살아가며 뭇 사람들과 물건들, 사회적 조건과 자연 환경들의 투영속에 나라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들의 네트워크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서로가 서로를 담아내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이며 연관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흔들지 않는, 의심할 여지없는 생명적 각성은 밥상머리에서 시작된다. 자기가 먹을 밥을 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밥을 해먹는 것은 생명의 기본을 따르는 일이며 생명을 온전히 돌보는 시간이고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안정감을 해결하는 근원이다.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생명의 이치에 충실하려고 했을 때 다른 문제들은 좀 더 쉽게 이해되거나 설명되고 풀어져 간다. 그것은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신체의 반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람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싸움과 도주의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종족 번식도 아닌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모든 과정이 집중된다. 생존 반응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곳의 혈관은 수축하고 생존을 위해 집약적인 혈액의 집중과 함께 신체 시스템이 재편된다. 결국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고 솔직한 것이며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좀 더 생명적 이치에 가깝게 이해하고 생명적 질서를 따라 살고자 한다면 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 싸고 싶을 때 싸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생명적 솔직함이 필요하지 않는가 한다. 몸은 배가 고픈데도 온갖 생각에 빠져 밥맛을 잃거나 반찬이 없다고 밥이 먹기 싫은 것도 생명의 이치는 아니다. 몸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대로 먹지 않고 새로운 음식들을 입이 원한다고 먹거나 맛이 있다고 더 먹는 것 또한 생명의 이치는 아니다.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 자신의 출세와 성공, 더 많은 요구 실현과 자아 충족을 위해 그 시간을 빼앗아 쓰는 것도 생명의 이치는 아니다. 먹은 것이 있으면 싸야 되는데 화장실이 더럽다고, 시댁에 가서 마음이 불편하다고 화장실에 가지 않는 것도 생명의 이치는 아니다.
생명적 가치는 밥을 섬기고 그 밥을 먹으며 내 몸의 생명의 질서를 깨달아갈 때 비로소 체득된다. 내 몸 귀중한 줄 모르는 사람이 뭇 생명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는 것은 강요된 정의에 대한 열광 이상이 아닐 수 있다.
웰빙과 생명 가치의 실현
경제적 부와 물질적 풍요속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정신적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웰빙의 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사회가 문명사회의 병폐에 대한 회의, 건강과 실속,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소비라는 의식의 전환과 생활 방식의 전면적 검토라는 반성속에 이루어진 것이 웰빙의 시작이었다면, 우리 사회의 웰빙 열풍은 하나의 상품으로도 설명할 수 있듯이 상업적으로 포장되어 거세지는 과장된 소비 문화 트렌드로 대변되고 있는 실정이다.
웰빙이란 잘 존재하는 것, 잘 먹고 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잘 살아간다는 것의 기준이 개인마다 다르고 너무나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웰빙 열풍은 있어도 뚜Ffut한 실체는 없고 무성한 논란만 있을 뿐이다. 참살이라고 한글 표기화된 웰빙의 적절한 정의는 쉽게 내려질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생명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과 상생과 공존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역사적 과제가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 웰빙의 이해를 좀 더 구체화해볼 필요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존재의 특성은 생명의 특성을 이해해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생명의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잘 존재할 수 있고, 결국 하루하루를 잘 존재하는 것이 잘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
생명은 타고난 생명력, 기운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와 관련된 가능성은 그 안에 모두 내재되어 있다. 생명은 유전적 지도를 따라 그 안에서 그려지는 그림과도 같다. 무엇이, 어떤 것이 발현될지는 잘 모른다. 세포의 유전자에는 수천년의 조상들의 역사와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 그들의 생각과 경험과 의식은 모두 지금 이어지고 있다. 콩이 팥이 되지도 않고 팥이 콩이 되지도 않는다. 콩은 심어서 또다시 수확을 통해 콩으로 거듭나도 콩이다. 우리는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말이 스스로 그러한 것임을 말하듯, 생명적 인정과 포용없이 생명은 커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 안에 내재된 힘이 있고 그것은 스스로를 치유하며 돌보고 잘 커갈 수 있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서 성장하고 쇄약해져 사멸하며 그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과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내부적 힘에 의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믿을 필요가 있다. 생명력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며 그 생명력은 인생 전체를 이어가며 치유하고 변화시켜간다.
세 번째로 생명은 모두가 상호 의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관적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씨앗의 생명력이 있어도 땅에 심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해가 비추어 줘야만 씨앗은 뿌리는 내리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뻣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씨앗은 해와 바람과 비와 땅과 관계를 맺으며 생명으로서 성장하고 온전해지는 것이다. 너 없이는 내가 없는 상호 의존적, 연관적 관계로 생명은 자신의 의미를 갖춘다.
네 번째로 생명이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다만 바램없이, 기대없이, 욕심없이 준다는 것이다. 해가 씨앗을 싹을 틔울 때 해가 씨앗한테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밥이 내가 되고 니가 내가 되고 자연이 내가 되어 모든 만물이 한 몸인데, 손이 아픈 허리를 두들겨 준다고 한 들 손이 허리한테 너는 나에게 뭐해 줄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무런 욕심없이, 바램없이,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알 수 없을 정도로 한다는 것이고, 안아플때까지 두들겨 주고 가렵지 않을 때까지 긁어주듯이 끝까지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늘상 하는 ‘난 하느라고 했다’는 말은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이는 기대와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생명적 이치의 말은 아니다.
다섯 번째로 자연의 은혜속에 자란 생명들은 모두 다 제각기 제 모습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지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들은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고 잘 난 놈도 있고 맛이 있는 놈도 있고 맛이 덜한 놈도 있다.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잘난 것은 잘난 대로 먹고 못난 놈은 못난 대로 먹고 맛이 있으면 맛이 있는 대로 먹고 맛이 없으면 맛이 없는 대로 먹으며 타박없이, 불만없이 그냥 먹었다는 것이다.
생명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다양성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다만 통제와 관리를 위해 불편한 가치일 뿐이지,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거나 문제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이 사라진 세상은 더 이상 생명이라 할 수 없다.
여섯 번째로 생명은 연하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큰 목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랜다. 거친 행동에 그릇이 깨지고 잽싼 행동에 발밑에 깔리는 생명이 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생명은 부드러운 엄마의 목소리와 섬세하고 연한 손길로 키워진다. 생명을 키우는 시간은 번거롭고 힘든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만이 생명 살림의 길임을 알려주는 시간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부드럽고 연한 것이다. 노자는 부드럽고 연한 것은 삶의 무리이고 강하고 센 것은 죽음의 무리라고 했다. 생명은 서로 삼가고 조심할 때 살림의 무리 속에 있게 된다.
잘 존재하기 위해 생명적 특성을 거스르지 않고 생명적 질서 속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웰빙적 삶의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생명력을 믿으며 상호 연관된 삶의 이치를 깨닫고 다양성을 불편해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으며 오늘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온전하게 만족하며 온전하게 감사하고 온전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것. 그것은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풍요의 문제를 상반된 문제로 여기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신없이 경제적 부와 물질적 가치를 쫒다가 이제는 육체적 건강과 정서적 여유와 만족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자세는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끝없는 인간의 욕구 실현의 한 과정으로서 밖에는 이해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은 이미 둘이 아니다. 정신적 가치에 대한 갈망이나 끝없는 지적 욕구나 건강한 육체를 갖기 위한 좋은 음식, 좋은 먹을거리, 좋은 환경 등을 고려하는 것은 모두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에 대한 집착 그 이상이 아닐 수 있다. 오늘날 웰빙의 열풍은 육체와 정신에 대한 한없는 집착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으며, 건강일 수도 있으며 명예와 권위의 회복일 수도 있고, 지적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감을 갖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에는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부분이 있지만,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는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방법과 욕구의 양을 조절하며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다. 사람들의 욕망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제 뜻대로 모든 일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와 욕심은 더 큰 욕망을 낳으며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인생의 일들은 뜻하는 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며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며 행복에 이룰 수없다는 것은 조금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조절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욕구 제어의 실패는 환경의 파괴와 생명 경외의 실종, 인간성 상실과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지며 더 큰 욕망의 수레를 굴리고 있다. 욕구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대한 만족과 감사의 마음이 필요하다. 과거에 잘못 먹고 싸우고 미워하고 잘못 살아온 무지의 세월을 떠올리면 지금의 상황은 더 나빠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오늘도 살아 있고 분명 살아있는 오늘의 삶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참회와 반성은 생명으로서 온전하게 거듭나는 길이며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잘 먹고 잘 살며 잘 존재하면서 추구하고자하는 행복은 상업적이며 개인적이며 이원론적인 웰빙 열풍속에는 찾을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웰빙은 값비싼 유기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꼰 다리 또 꼬는 것과 같은 요가 자세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체험을 해줄 것 같은 명상의 시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공기 정화기를 틀어 놓고 숯 침대위에 자며 스파와 아로마를 즐기고 허브차를 마시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고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사람과 자연이 둘이 아니며 내가 너와 둘이 아니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의존적인 연관속에 어우러져 살아가며 그속에 생명 가치를 획득한다. 자연의 생명을 섬길 수 있는 삶이라면 자연이 제공하는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생명 또한 가장 이상적으로 지켜 줄 것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없는 세상! 개인적, 이원론적, 상업적 웰빙 열풍은 한 순간에 사라질 소비 문화 트렌드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유기농을 먹고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땅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기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해 미리 환경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며, 생명적 각성을 통해 뭇 생명과 제 나라 제 땅의 먹을 것과 전통적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민족적, 국가적 이익의 중심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자립을 돕는 근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생협 운동과 환경 운동, 대안 교육 운동, 공동체 운동, 여성 운동은 모두 생명 운동의 확산이라는 지평속에 새롭게 구현되는 모습이어야 한다.
진정한 웰빙과 여성의 삶
웰빙 가전, 웰빙 의류, 웰빙 건강 식품 등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의 질적 개선을 부르짖는 상품은 즐비하고 있다. 웰빙이라 이름하는 상품으로 여성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소비욕구는 삶의 불만족이 심화될수록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근본적인 핵심을 찌를만한 원인의 분석과 삶의 모색이 힘든 것은 생명적 가치를 따르지 않으며 살아왔던 지난 삶의 전부를 부정해야하는 고통의 시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의 삶의 질적 개선은 유기농을 먹으며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고 내 아이 아토피를 치료를 하고 내 가족의 건강을 위해 생협에 가입하거나 모임에 참석한다고 해결될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개선을 위해 정치적 이슈에 함께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 가치의 실현속에 사람들과 관계의 문제를 정립하는 것이고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고통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가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의 단절은 개인적 질병이며 사회적 고통이다. 관계의 회복은 결국 생명적 가치의 회복을 말한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몸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의 양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의 분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근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득력 또한 갖추지 못한다.
사람들은 관계에 문제에 생겼을 때 개인의 안정감을 잃어 버리며 생명력을 상실한다. 질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단절, 사람과 자연의 관계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의 단절은 곧 생명의 가작 취약한 고리다. 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성장기에는 부모와의 관계를 잘 풀며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배워가고, 성장 후에는 이성과의 관계, 부부와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유대와 안정감을 얻는다.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하고의 관계를 잘 풀 때 비로소 사람들은 큰 행복감을 갖는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느냐 하는 문제는 삶 전체를 좌우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이 제공하는 먹을거리와 마실 물과 공기가 오염되면 인간의 생명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는다.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먹을거리, 물, 공기 등 자연의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 모두가 사람들의 섬김의 대상이어야 한다. 상호 의존적, 연관적 존재로서 관계의 문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 남의 생명을 살린다.
둘째로 이원론적인 분별과 시시비비를 늘 가리고자하는 마음을 놓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맞는 것이 나중에 맞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내가 항상 틀린 것도 아니다. 항상 모든 이치는 상대적이며 시대와 상황과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고 고정된 실체는 없다. 나와 나 아닌 세계를 나누어 들기 시작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항상 자신을 옳아야 하며 너는 틀려야 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지고 나와 자식, 나와 가족, 나와 사회, 나와 자연은 항상 화합할 수 없는 개별적 존재로 자각된다.
나를 위한 것이 너를 위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다. 사회 문제와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것 또한 나를 위한 것이고, 내 아이 잘 키우고 가족의 건강을 챙기며 자신의 영적 진화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 또한 사회와 세상을 위한 일이다.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일은 둘이 아니고 어느 것이 먼저가 아니다. 내 아이 잘 키우는 것이 남의 아이도 잘 키우는 것이고 남의 아이 잘 크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의 아이도 잘 크는 일이다. 나의 인생의 행복이 우리 모두의 행복이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이다.
물질적 풍요 다음에 정신적 풍요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적 욕구 못지않게 육체적 건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질이 있고 없고 지식이 있고 없고 건강이 있고 없고 여유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개별적, 분열적 존재로서의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너 없이는 내가 없고 너로 인해 내가 있으며 나로 인해 네가 있다는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 있다면 그것은 경제적 부가 있거나 없거나 육체적으로 힘들거나 힘들지 않거나 삶의 여유가 있거나 없거나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그 삶은 그 순간 생명력과 행복으로 넘쳐나는 것이다. 결국 웰빙 열풍은 생명의 심성을 따라 배우며 우리가 어디에 있거나 무엇을 하거나 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길로 안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