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⑭
고려 관리가 되어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지키려 했던 위구르인 설장수
몽골고원의 주인공이 된 위구르제국
출처 : 프리미엄조선 2014. 05. 26.
1. 돌궐을 멸망시키고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위구르제국
기마유목민족의 진원지 몽골고원은 흉노(BC3C~AD2C), 선비(1~3C), 유연(4~6C), 돌궐(6~8C) 등이 차례로 지배하다 위구르가 이어 받았다. 흉노의 후예 위구르는 돌궐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키워 745년 돌궐제국을 멸망시키고 위구르제국을 건설했다. 튀르크인들은 유라시아 스텝지역에서 2천년간 수많은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는데, 위구르제국 역시 몽골고원·중앙아시아 지역의 튀르크계 위구르족이 세운 국가다. 당나라는「안사의 난」(755~763)을 진압하기위해 위구르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 난을 진압한 후 위구르제국은 동방세계 최강세력으로 급부상하여 100년 가까이 존속했다.
위구르시대에는 유목민문화에 농경문화가 도입되면서 도시화와 정착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유목민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위구르인들은 유목과 농경, 동서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위구르문화를 전개해 나간다. 초기에는 돌궐문자를 썼으나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자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고 둔황·투르판 등지에서 문서·벽화 등 다수의 문화유적을 남기고 있다.
투르판 벽화/베를린국립박물관
위구르 제국은 840년 또 다른 튀르크계 키르키즈에 멸망당했으나, 위구르인들은 제국의 멸망 후에도 간쑤, 둔황, 투르판 등지에 튀르크계 국가들을 건설하여 중앙아시아지역에서 기마유목민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9세기 들어 위구르인들은 서진하면서 이슬람을 대거 받아들여 11세기에는 본격적인 튀르크 이슬람시대가 전개된다. 위구르인은 현재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약166만㎢)에 대부분(약880만명) 거주하고 있고, 중앙아시아에도 일부 산재해 살고 있다.
터키교과서의 위구르 지도
2.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전개되는 기마유목민의 역사
중앙아시아 지역은 투르키스탄(Trukistan)으로 불렸고, 이는 튀르크인(Turk)의 땅(Stan)이란 뜻이다. 투르키스탄은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동·서로 나누어지는데,「동 투르키스탄」은 지금의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이다. 신장지역은 중국으로 편입된 후에도 분리 독립운동이 일어나 1930~40년대 2차례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일부지역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1949년 중국이 재점령했다. 「서 투르키스탄」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있는 땅이다.
중앙아시아 지역도 오래전부터 기마유목민이 활동해오던 지역이다. 몽골고원을 평정한 흉노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 일대까지 정복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흉노 이후에도 중앙아시아 지역은 유연, 돌궐, 위구르 등이 지배했고, 특히 9세기부터 위구르인들이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지대에 본격적으로 이주·정착하여 이 지역이 투르키스탄이라 불리는 계기가 된다.
중앙아시아 민족은 튀르크계 유목민 후손이 대부분이나 소수민족도 혼재해 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대가 압바스·위구르 연합군에 패퇴했고,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급속히 이슬람화했다. 당나라시대에 위구르는 회흘(回紇), 회골(回鶻)로 불리웠으며, 이것이 이슬람교가 중국에서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回回敎)로 불리게 된 유래다.
이후 13세기에는 몽골제국의 차카타이한국, 15세기에는 티무르제국 등이 차례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 기마유목민족 국가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청나라·영국·러시아 등이 이 지역을 놓고 각축을 벌였다. 그 결과 동투르키스탄 지역은 1760년대 건륭제때 청나라가 차지하게 되고, 서투르키스탄 지역은 188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가 대부분 장악하게 됐다.
터기 국기(왼쪽)와 과거 동투르키스탄 국기.
3. 위구르-중앙아시아와 한민족의 교류
중앙아시아 지역은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하는 기마군단이 활약해 온 땅이자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18세기까지 동서간 문명 교류의 중심이었다. 이 실크로드는 스텝지역 중심을 통해 동서를 연결하는 통로로, 한반도는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의 수많은 고분과 유물은 스텝지역 기마유목민과 한반도의 교류를 말해주며, 고대 북방유목민의 생활·관습·문화 등이 우리와 뿌리를 함께 하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당나라와 고구려가 대항할 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돌궐이 고구려와 동맹관계였던 것은 군사적 이해관련 뿐 아니라 알타이 민족으로서의 친연성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오래전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은 우리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신라·발해·고려시대에 줄곧 실크로드에서 활약한 상인인 소그드인 등을 통해서 중앙아시아 및 서방과 교류해 왔고 이러한 흔적은 우리문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 섬서성 역사박물관의 소그드인 기마용.
신라(BC57~935)는 실크로드를 통해 당시의 페르시아 등 서역문화권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북방계는 물론 다양한 서역 문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신라에서 발굴되는 유리제품은 로마문화권 등 서역에서 유래했고 경주의 괘릉에서는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상이 발견된다. 처용가의 처용도 신라 헌강왕때 귀화한 이슬람계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고구려 벽화에서도 중앙아시아인을 볼 수 있으며, 사마르칸드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는 고대 한민족 특유의 복식을 하고 있는 2명의 사신 모습이 그려져 있다(본고③편 참조).
고려에서도 위구르인들이 활약한다. 몽골제국은 몽골인과 위구르인의 연합정권 성격으로 위구르인들은 준 지배계층을 형성했다. 이 위구르인들은 몽골군의 한반도 침입때 참전하거나 이후 고려가 몽골 영향력 하에 있을 때 관리·역관 등으로 한반도에 와서 정착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온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로 「고려사」등에 회회인(回回人)으로 쓰여 있는데, 개경에 회회인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등장하는 회회아비도 이들을 일컫는다.
설장수라는 위구르인은 고려 관리가 되어 정몽주와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이후 조선조 때도 등용되어 외교에 공을 세웠다. 몽골·고려의 혼인정책으로 고려왕비가 된 몽골공주는 대규모 시종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때 다수의 위구르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충렬왕비가 된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와 귀화한 장순룡은 장군에까지 이르러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세종때 학자 설순은 고려말 귀화한 위구르인의 후손이다.
근세에 들어서도 우리와의 관계는 지속된다. 중앙아시아는 한인(고려인)이 1937년 강제 이주된 후 70여년간 거주한 지역으로 지금도 30만명 이상이 살고 있다. 중국·미국·일본 다음으로 많은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이슬람교는 조선시대 유교에 배척되어 사라졌으나 6·25참전 터키군에 의해 한국에 다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동쪽 끝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북방기마유목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해왔고, 그 역사도 유라시아 스텝제국들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보다 긴 시간의 흐름과 넓은 공간적인 이해 속에서 한민족의 형성과 삶의 흐름을 읽어나가는 것이 현대의 기적을 이룬 국가 대한민국을 해석하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는데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