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강가에서
-김인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섬진강 편지』를 읽고
고은아
내가 김인호 시인을 처음 만났던 그 노고단의 가을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내게는 그날, 그
하루는 그의 말대로<내 마음의 잎새 지는 소리까지 훤히 듣던 날>이었으므로.
그 사람 김인호 시인 마흔 넘은 그 사내. 전 날의 과음이 숨김없이 드러남에도 그 섬진강
강물에 <맑아지고 깊어져 미움까지도 껴안을 수 있는 넉넉함으로>으로 마주친, 오롯이 섬
진강, 강물 빛을 닮은 눈빛을 가진 그 사람은 새벽 강에 나가 막 씻고 돌아 온 낯빛으로 내
게 손 내밀어 악수를 청했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날 처음 만난 그 날의 그 눈빛. 아직
도 강물 빛으로 서늘하게 남은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나는 강을 좋아한다.
그 강, 섬진강. 그 깊은 가을날의 한반도 남단 들녁을 흐르는 물안개가 골짝 아래뜸과 위뜸
마을을 건너다니고 강 이쪽과 저쪽의 낮은 불빛, 때마다 철마다 얼굴 바꾸며 자라고 피고
지는 꽃들이 산과 함께 있는 강.
그러나 혹 누군가, 우리 나라 강 마을, 어딘들 그렇지 않은가 따지고 묻는다면 나는 낮게 대
답할 것이다. 거기 내 스물 둘 첫사랑의 기억이 있는 곳이라고. 그 곳 섬진강은.
망망대해 바다처럼 그 크기에 질리지 않아도 되고 거칠거나 사납게 돌변하는 변덕스러움을
자주 겪지 않아도 되는 강을, 그 섬진강을 나는 바다보다 좋아한다.
그 섬진강에서 만난 김인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섬진강 편지』는 어렵지 않고 담담하게
읽히는 시집이다.
나는 좋은 시, 좋은 시인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좋은 시, 좋은 시인은 누가
봐도, 언제봐도 좋다"라고 믿는다. 그의 시집은 누가 보아도 언제 보아도 좋아할 듯한 그런
선명한 예감이 든다. 오래 기다린 탓도 있지만, 막 받아 들고서도 금세 내 체온만큼 따뜻해
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정겹고 반가운 시집 한 권을 나는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과장도, 혹은 지나치게 큰 소리도 없이, 삶에서 배우는 지혜들로 편편
마다 반짝거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다.
이 시집 전체를 보듬고있는 이미지는 아름다움이다. 아니 지혜를 발견해낼 줄 아는 아름다
운 눈빛의 반짝거림이다.
어쩌면 그가 지향하는 시적 세계 또한 <시린 날을 버텨내고> <맑아지고 더없이 맑아져서>
<아기 첫 울음으로 터져 나는 저 환한> 세계가 아닐까 마음대로 생각해보기도 한다.
김시인이 섬진강 은어빛 지혜를 발견해가고 깨달아 가는 과정은 시집 구석구석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은 선승의 화두처럼 감 잡을 수 없는 막막함과 난해함의 끝이
아니라, 요란하지 않은 담백함으로 지리산을 오르고 섬진강을 지나는 그의 낮은 눈빛과 발
걸음 끝에 있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 끄덕>이기도 하고 <아니다 아니다....이 마음 어제의 그 마음 아
니>다 라고 다독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잘못된 만남의 흔적>을 깨닫기도 하고 <새 살 채
워 올려야 할 상처를 덧낸 마음의 흉터를 깨닫고> 그렇게 <너무 늦거나 이르지 않게 딱 맞
추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사는 일도 그렇게 된서리를 맞아야 제 맛을 품게 됨>을 깨달
아가며 <딱, 죽비 소리에 얻는 환한 생각하나>를 그 섬진강 은어빛 지혜들로 깨달아 가는
중 마침내 그는 <질긴 두려움 싹둑>잘라내고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는, 끝끝내>그가 가
야 할 길을 발견해 내고 만다.
파업 투쟁 가운데의 그를 잠시 떠올려 본다. 여덟 식구에게 부끄럽지 않은 가장으로서의 책
임감과 분명 싸워 이겨야 할 그의 생 앞의 길 가운데서 쉽게 흥분하거나, 싶게 포기하지 않
았던 그의 차분함은 어쩌면 그 섬진강 유순히 흐르는 강줄기에게서 배웠을 듯도 하다.
강물빛 서늘한 눈빛 그 사람 섬진강 시인, 특별시민이 되어 서울살이 시작한 그가 <저 맑은
강물에 마음 뉘여> 놓은 채 지하철을 세 번 갈아 타고 삼성동 그의 직장을 향해 가는 그
걸음이 부디 <새 희망으로 출렁이는 강으로>가는 날이 되기를, 그리하여 섬진강을 노래하
는 눈 맑은 시인으로 거듭 살아< 피워내야 할 생의 수많은 꽃>들을 <은빛 금빛 강물빛>으
로 활짝 활짝 피워내시기를 두 손 모아 빌어드린다. 그에게는 <아직 피워내야 할 생의 수많
은 꽃이 남아>있으니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할 뿐.
아침밥 짓는 연기 오르는 강변의, 그 가을날. 나는 오래 기다린 섬진강 한 물줄기를 만났다.
그가 내 무릎에 끌어다 놓은 아 .섬진....오래 그리웠었던 강 하나를 그의 시집『섬진강 편
지』를 통해 다시 만난 큰비 내린 날, 술김에 나는 그에게 고맙다, 고맙다 했다....한다. 늘
그렇다. 늘 그렇게, 고맙고 그리운 사람이다. 그 사람 김인호 시인.
결국 내 앞에 <바람 막아 주는 숲 하나>를 놓아주고 만 그 사람 김인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