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일에 쌓인 정승동(政丞洞)과 그 위치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원구천 마을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정승동의 정승(政丞)에 대한 실체는 현재까지 베일에 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정승동은 재악산(載嶽山)과 정각산(鼎角山)의 경계를 이루는 재악(載嶽)의 삼간(三幹, 第一幹 : 북부능선, 第二幹 : 서부능선, 第三幹 : 남부능선)중, 서부능선에 위치하며, 재악산(載嶽山)과 정각산(鼎角山)의 경계를 이루는 정승골에 위치하며, 정확하게는 재악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 정승동(政丞洞) 정승(政丞)에 대한 지리역사(地理歷史)의 기록 왜곡(歪曲)
이 산록에는 밀양은 물론이고 외지의 산악인들이 정승골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자주 찾는 곳입니다. 오는 사람마다 정승에 대해 물어옵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도 정승동의 정승에 대한 정확한 유래를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정승동에 거주하는 사람들조차 정승의 유래를 듣거나, 찾기 위해서 산악인들이 현지에 와서 물어와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밀양의 향토사료에 기록된 실체가 불분명한 신라의 어느 왕이 나병(癩病)을 고치기 위해서 영정사에 왔을 때, 왕은 표충사(당시 영정사)에서 영정약수를 마시며 치료를 하고 있었다 하며, "왕을 수행한 그 정승은 영정사로부터 삼십리나 떨어진 이 깊고 깊은 먼 정승골에 거처를 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내용을 밀양의 향토사료인 1932년대에 발행된 밀주지(密州誌)의 한 부분에서 옮겨와 적은 기록을 다시 인용하여 대답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3] 정승(政丞)의 성(姓)을 왜곡시키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이 골짜기에 온 정승(政丞)의 성(姓)이 "유"씨이므로 "유정승(政丞)"이라고 항간에 떠돌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1932년대에 발행된 밀주지(密州誌)의 한 내용입니다. 문장의 말미에 "其政丞留"라는 글이 있습니다.
최근에 자신이 정승동 정승의 유래에 대하여 잘 안다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정승의 유래와 성명(姓名)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승의 성(姓)이 "유"씨라고 아래의 한문의 문장에서 대강 들었던 것을 빌려와서 대답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그 정승이 머물렀던 = 其 政丞 留(그 정승 유)] 라는 "한자(漢字)의 문장"을 "한글"로 엉뚱하게 왜곡시켜
다음과 같이 전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승의 성이 유씨이다 ⇒ 其 政丞 留(그 정승 유)" 라고 유식하게 답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최근에 주변에 전해져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식의 어떤 힘있는 사람들의 지리역사의 왜곡을 가장 혐오하며,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의 극치가 아니고, 어떤 힘에 의한 진실의 굴절인 것입니다. 차라리 무식해서 그러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4] 안학수 저 "밀주지" 제2권 내용 일부
<원 문> 政丞洞 水石深僻可隱者盤旋 諺傳新羅王治病於靈井寺其政丞留
<한 글> 정승동 수석심벽가은자반선 언전신라왕치병어영정사기정승유
<해 설> 정승동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면 계곡은 깊고, 절벽 또한 높고(깊고) 어두워 숨어살기가 적당한 곳이다○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영정사(표충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정승은 정승동에 머물렀다.
[5] 정승을 찾아 10년 가까운 세월을 노력한 손흥수 선생
손흥수 선생은 정승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10여년 가까이 재악의 산록을 살피며, 정승의 유래가 있는지 여부를 500여개의 마을을 찾아 묻고,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밀양에 산재한 이러한 자연마을에 대한 지명의 유래를 찾기 위해서, 각종 향토사료와 도서들을 살폈습니다. 산록에 산재한 무수한 비문(碑文)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밀양의 어떠한 자료와 증언에도 정승(政丞)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흥수 선생은 위와 같이 재악산(載嶽山)의 증거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정승동의 유래를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안학수 저 "밀주지(密州誌)"를 제외하고는 정승동에 대한 기록을 그 때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6] 고려 정승, 김용(金鏞)을 찾다
앞에서와 같이 십여 년의 세월동안 조사한 결과, 정승의 흔적이 보이는 마을은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원구천과 재말리를 넘어 재악의 산록 끝자락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정승동(政丞洞)"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수년이 흘러 손흥수 선생은 한 서점에서 구입한 오상출판사 발행 "이야기 고려사(高麗史)"라는 도서에서 고려 공민왕 때 김용이라는 정승이 반역죄로 밀성군(密城郡, 그 당시 밀양의 지명)으로 귀양을 보냈다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이 것은 손흥수 선생이 10여년 가까이 찾아온 각고의 노력 결과라고 봅니다.
"학문사" 발행, 류재하 저, "高麗王朝史(전 7권)" 이 두 권의 책에는 "고려사" 및 "고려사 절요" 등에 근거하여 김용에 대한 내용이 년도별, 월별, 일자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 고려(高麗) 정승(政丞) 김용(金鏞)의 인적 사항
가. 성 명 : 김용(金鏞) 나. 본 관 : 경기도 안성(安城) 다. 직 업 : 고려말(高麗末) 무관(武官) 및 여러 관직 (아래의 관직 참조) 다. 출생지 : 경기도 안성(安城) 라. 생몰년 : ? -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
2. 김용의 관직(官職)
가. 학문사(學文社) 발행 "고려왕조사(高麗王朝史)"에 기록된 것 ① 밀직(密直) ②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③ 밀직부사(密直副使) : 공민왕 즉위후 임명받음 ④ 안성군(安城君) : 원(元)나라에서 홍건적(紅巾賊) 장사성 토벌시 피봉(종1품) ⑤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⑥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⑦ 중서시랑문하평장사(中書侍郞門下平章事) ⑧ 총병관(總兵官) ⑨ 정승(政丞) ⑩ 찬성사(贊成事) ⑪ 제조순군(提調巡軍)
나. 오상출판사 발행 "이야기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것 ① 대호군(大護軍) : 공민왕이 원(元)나라에 갔을 때 시종(侍從)한 공(功)으로 임명받음 ② 밀직부사(密直副使) ③ 수충분의공신(輸忠奮義功臣) ④ 안성군(安城君) ⑤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⑥ 첨의평리(僉議評理) ⑦ 중서문하시랑평장사(中書門下侍郞平章事)
3. 고려(高麗) 관직(官職)의 내용(상기 "2" 관련)
가 밀직사(密直司 ) ① 종1품 또는 종2품의 직위로 왕명(王命)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의 관장
나. 응양군(鷹揚軍) ① 용호군(龍虎軍)과 더불어 고려의 이군(二軍, 上將軍 : 정3품, 大將軍 종3품)
다. 첨의부(僉議府) 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을 합친 것
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① 고려시대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던 관청 ② 품계 : 문하시랑(종1품), 중서시랑(정2품)
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① 중서시랑평장사의 품계는 정2품임 ②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문하부(門下府)를 합친 관청 이름 ③ 문하시랑 : 종1품
바. 제조순군(提調巡軍) ① 우두머리가 아니면서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아서 지휘를 하는 직책
사. 대호군(大護軍) ① 무관직에서 둘째로 높은 벼슬
아. 호군(護軍) ① 고려때 장군의 일반적인 호칭, 품계는 종3품
4. 흥왕사(興王寺)에서의 김용(金鏞), 반란(反亂)의 시작과 종말
가. 정승(政丞)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반란(反亂)을 일어키다 [공민왕 12년 서기1363년 윤삼월 신미일(辛未日)]
나. 정승 김용이 밀성군(密城郡) 정승동(政丞洞)에 유배(流配)되다 [공민왕 12년 서기1363년 윤삼월 계사일(癸巳日)]
다. 대역죄인(大逆罪人) 김용이 정승동(政丞洞)에서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북 경주)로 압송(押送)되다 [공민왕 12년 서기1363년 4월 20일]
라. 김용(金鏞)이 계림부(鷄林府, 경주)에서 처형되다 [공민왕 12년 서기1363년 6월 무신일(戊申日)]
5. 고려(高麗) 왕조(王朝, 恭愍王代)의 압박(壓迫) 요인과 김용의 입지(權勢) 강화
가. 압박(壓迫) 요인 ① 원(元)나라 황제(순제, 황실) : 속국(屬國)으로서의 심한 내정간섭 ② 원(元)나라 기황후(奇皇后)와 태자(太子) 및 그 배후세력 ③ 고려 조정내의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 및 그 일당(一黨) ④ 심양왕(瀋陽王) 제도와 심양왕의 내정간섭 ⑤ 2차에 걸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나. 왕권(王權)의 약화 위의 세력들은 고려왕조(高麗王朝) 특히 공민왕대(恭愍王代)에 원(元)나라의 내정간섭 및 왕권(王權)을 약화시키는 거대한 세력으로서, 결국에는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정세의 지속은 김용(金鏞)의 입지(立地)를 더욱더 강화시켜주는 직간접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다. 김용(金鏞)의 입지 및 권세 강화 특히 공민왕(恭愍王)의 총애(寵愛)와 원(元)나라 순제의 기황후(奇皇后) 및 그 태자(太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김용의 권세는 대단한 것이었으나, 흥왕사(興旺寺)의 반란과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에는 이성계의 피의 역성혁명으로 조선(朝鮮)의 건국(建國)으로 치달았으며
김용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당시에 그의 권세(權勢)가 하늘을 찌를 만큼 대단하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否認) 못할 것입니다.
아래 관련되는 사서(史書)에 의한 기록을 우리나라 고려사학의 원로(元老)이신 류재하 박사가 편수(編修)한 학문사의 "고려왕조사(高麗王朝史)" 및 오상역사연구회에서 발행한 "이야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서 김용(金鏞) 정승의 부분만을 발췌하여 적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역사기록은 국가(國家)기관인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및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 번역사업의 일환으로 국역된 "고전국역총서"인 "고려사절요"에도 같이 기록되어 있슴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공민경효대왕기(恭愍敬孝大王記)> 6 페이지 [공민왕 원년, 임진년 1352년 6월 초하루 이전의 기록] 전 밀직(密直) 홍원철 및 "김용"을 보내어 원나라 완자불화(完者不花)를 전송케 하고, 인하여 평양도(平壤道)를 순시케 하고, "김용"은 머물러 왜적에게 대비케 했다
<공민왕 원년, 임진년 1352년 6월 초하루> 22 페이지 초하루에 임금(恭愍王)이 연저(燕邸, 원나라 연경에 있는 임금의 저택)의 수종공신을 녹훈(錄勳)할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김용(金鏞)" 등을 1등에 삼고, "일등상"부터 "삼등"까지 모두에게 전민(田民)을 하사하다
<공민왕 원년, 임진년 1352년 10월 6일> 30 페이지 "김용"을 밀직부사로 임명하다
<공민왕 원년, 임진년 1352년 12월 4일> 32 페이지 4일(계묘일)에 원나라에서 종정부상판(宗政府常判) 양렬첩목아(梁烈帖木兒)와 이부상서(吏部尙書) 불화첩목아(不花帖木兒)를 보내와 조일신의 변을 국문(鞠問)하였다.
"김용"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조일신(趙日新)의 난에 궁중의 호위군사가 많이 상하였지만, "김용"만은 홀로 면하고 또한 적에게 저항하여 막지 않은 까닭이었다.
<공민왕 3년, 갑오년 1354년 6월 13일> 50 페이지 13일(계묘일)에 원나라가 "김용" 등과 서경(西京) 수군 3백을 소집하고, 또 효용군(驍勇軍)을 모집하여 8월 10일 한으로 연경(燕京)에 집합하여 홍건적 장사성(張士誠)을 토벌케 하였다
<공민왕 3년, 갑오년 1354년 6월 19일> 51 페이지 "김용"을 안성군(安城君으)으로 임명하다
<공민왕 4년, 을미년 1355년 10월 을해일> 62 페이지 밀직부사 임군보가 왕명(王命)을 거짓 전하였다 하여, 제주도에 유배하였는데, 이는 "김용", 정세운 등의 참소 때문이었다. 을해일에 "김용", 홍의, 정세운, 류숙에게 명하여 날마다 궁궐에 들어와 대소를 불문하고 일체를 품의(稟議)케 하였다.
<공민왕 4년, 을미년 1355년 12월 신미일> 63 페이지 신미일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義司事) "김용"이 찬성사(贊成事) 김보와 권세를 다투었는데, 김보가 어머니 상(喪)을 당한 것을 기화로 몰래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 최개에게 권유하여 왕에게 글을 올려,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동안 벼슬을 쉬게 하도록 청하였고 "김용" 등은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그 글을 도평의사(都評議司)에 내려 보내어 꼭 시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임금이 그 사실을 모두 알고 "김용"을 제주도에 유배(流配)시키고, 드디어 "3년 상(喪)"을 폐지하였다.
<공민왕 5년, 병신년 1356년 5월 18일> 67 페이지 임금이 드디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착수하여, 친원파인 "기철" 일당을 처형한 후, 인사를 단행한 결과, "김용"은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임명받았다
<공민왕 5년, 병신년 1356년 7월 9일> 75 페이지 관제를 고쳐서 "김용"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임명하다
<공민왕 7년, 무술년 1358년 2월 27일> 98 페이지 "김용"을 중서시랑(中書侍郞)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임명하다
<공민왕 10년, 신축년 1361년 11월 15일> 137 페이지 15일에 이성계(고려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백여 급을 참하고, 1명을 생포하여 바쳤다.
주 : 상기 이성계는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이성계이며, "김용"의 휘하에 있었고, "김용"의 당시 권력을 가늠케 하는 대목입니다.
17일(癸亥日)에 평장사(平章事) "김용"을 총병관을 삼고, 전 형부상서 류연을 병마사(兵馬使)로 삼았다.
<공민왕 10년, 신축년 1361년 11월 19일> 138 페이지 19일에 적의 선봉이 흥의역에 이르렀다.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에 둔을 친 다음, "김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최영을 임금에게 보내어 서울의 군사를 청하다.
주 : 상기 최영은 위화도회군 때의 최영 장군이며, "김용"의 휘하에 있었고, "김용"의 당시 권력을 가늠케 하는 대목입니다.
<공민왕 10년, 신축년 1361년 12월 15일> 141 페이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15일에 복주(福州, 경북 안동지방)에 이르렀다. 왕이 정승 "김용"에게 말하기를 "지금 두(정세운, "김용") 정승이 적(敵)을 구경만 하고 (적을) 치려하지 않으니 누가 본 받지 않으리오. 만일 적(홍건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비록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어도 어떻게 살아 있으며 어떻게 나라가 되겠는가" 하였다.
주 : 복주(福州)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安東)지방을 가르키며, 당시 공민왕은 홍건적의 무리들이 남쪽으로 쳐들어와 경성(京城, 開城)의 왕궁은 불바다로 변하였고, 왕은 정승들과 함께 남쪽으로 계속 피난을 왔으며, 결국 안동에서 행궁(行宮)까지 설치했음
<공민왕 11년, 임인년 1362년 정월 22일> 144 페이지 22일(기사일) 일찍이 "김용"은 정세운(정승)이 임금의 총애(寵愛)를 받는 것을 시기했고, 또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이 큰 공을 이루어 임금의 신임이 두터워 질 것을 두려워하여 교지(敎旨)를 꾸며,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임금에게 참소하여,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 했다.
<공민왕 11년, 임인년 1362년 정월 22일> 145 페이지 "김용"의 사주에 의하여 안우 등이 장사(壯士)들과 합세하여 정세운을 때려 죽였다.
정세운은 "김용"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받아온 1등 공신이며, 공민왕 10년에 홍건적 침입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을 겸하여 왕을 호종하여 피난하였으며, 천성이 충직, 청백하였다.
<공민왕 11년, 임인년 1362년 2월 을사일> 148 페이지 원(元)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나하추가 심양(瀋陽) 땅을 점령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일컬었다
정유일에 왜적이 진주 악양현(지금의 경남 하동)을 불태웠다
신축일에 임금이 행궁(行宮)을 복주에서 상주(尙州, 지금의 경북 상주)로 옮겼다
"김용"은 자신의 음모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행궁의 문지기로 하여금 안우(홍건적의 난 때, 적을 물리치고, 서울 개성을 수복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 안우경이 개선할 때 몽둥이로 쳐죽였고, 자신의 조카 김임(金임)까지 죽였고, 그 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정세운 피살 사건) 거짓으로 왕에게 보고를 했다.
<공민왕 11년, 임인년 1362년 > 150 페이지 이방실이 총병관(摠兵官) 정세운, 안우, 김득배, 안우경, 최영 등과 함께 20만 대군으로 서울(개성=경성)을 포위하여 적(홍건적)을 대파하고 많은 적을 죽이고, 남은 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 냈다
그러나 "김용"의 간계(奸計)로 말미암아 정세운 이하 대공(大功)을 세운 김득배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뒤에 조선조 문종때 경기도 연천(蓮川)에 고려 태조묘인 숭의전(崇義殿)을 세워 안우, 김득배, 이방실을 함께 배향하였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高麗崇義殿史)
<공민왕 11년, 임인년 1362년 3월 초하루> 150 페이지 초하루에 "김용", 정지상 등이 김득배(名將)를 상주(尙州) 산양현(山陽縣)에서 잡아 죽여, 상주(尙州)에 효수(梟首)하니, 보는 자가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민왕 12년, 계묘년 1363년 정월 2일> 162 페이지 1일 임금이 청주(淸州, 충북 청주)에 머물고 있었다. 2일(계묘일) 찬성사(贊成事) "김용"에게 명하여, 첨동(僉同) 기전용(奇田龍)의 어머니를 위로케 하고 토지를 주었다.
<공민왕 12년, 계묘년 1363년 2월 2일> 163 페이지 계사일에 찬성사(贊成事) "김용"을 제조순군(提調巡軍)으로 삼았다
공민왕대(恭愍王代)의 고려 정세] 공민왕은 즉위한 후, 원(元)나라로부터 자주권을 회복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고려는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큰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남으로는 왜구(倭寇)가 끊임없이 침입하여 국토를 짓밟고, 북으로는 또 홍건적이 쳐들어와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1359년 겨울에 1차로 모거경이 무려 4만여 명이나 되는 홍건적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서경(西京,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이방실 등이 거느린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망갔다.
그 뒤에도 산발적으로 노략질을 하다가 1361년 10월에 10만의 홍건적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이들이 수도(개성)까지 쳐들어 왔을 때는 이미 공민왕과 왕실이 개성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한 후였다.
개성을 점령한 홍건적은 마음되로 약탈하고, 불사르고, 살육하면서 개성(京城)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어려운 형편에서도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하고,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을 원수로 하는 고려군은 필사적인 전투를 벌여 홍건적을 몰아내고 개성을 수복함으로서 평화를 되찾았다.
<신축년, 공민왕 10년(1361년 11월 신미일), 원 지정 21년> ○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왕의 피난행렬이) 이천현(利川縣, 경기도 이천)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녹였다.
[홍건적의 만행] > 이날(신미일) 적(홍건적)이 경성(개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屯兵)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서 성(城)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거나, 임부(姙婦)의 젖을 구워서 먹는 등 잔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출처 : 고려사절요 공민왕편)
이와 같이 남북으로 외세의 침략이 그칠 새가 없어, 고려가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을 때 내부에서는 간신(奸臣)들의 발호(跋扈)가 그치지 않아 국운(國運)이 점차 쇠퇴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공민왕(恭愍王)의 가까운 신하 가운데 김용(金鏞)이란 사람이 있었다. 김용은 경기도 안성(安城) 출신으로서 일찍이 공민왕이 원(元)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김용은 시종(侍從)으로 있으면서 공(功)을 세워, 여러 번 벼슬에 올라 대호군[大護軍, 무관(武官)으로서는 최고의 벼슬]까지 되었다.
공민왕은 즉위한후, 그에게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 벼슬을 주었고, 수충분의공신(輸忠奮義功臣)이란 호까지 내렸다. 또한 김용은 1354년에 안성군(安城君, 종일품)에 피봉되었으며, 그 후에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事司), 첨의평리(僉議評理), 중서문하시랑평장사(中書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보니 김용이 큰 죄(罪)를 범하였을 때에도 공민왕은 그의 죄(罪)를 경감(輕減)시켜 주거나 아주 묵과(默過)해 버리곤 하였다.
이와 같이 김용은 공민왕의 대단한 총애(寵愛)를 받았으나 나중에는 흥왕사(興王寺)에서 반란을 일으켜, 공민왕을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쳐 실패하고 밀성군(密城郡) 정승동(政丞洞)로 유배되어 한 달 여를 있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로 압송되어, 그의 부하 대호군(大護軍) 임견미, 호군(護軍) 김두, 계림부 안렴사(按廉使) 이보림(李寶林) 등의 국문(鞠問)에 의거 효수(梟首)되어, 그 목은 개성으로 보내져 거리에 내걸려지고 그의 생애는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공민왕 12년, 계묘년 1363년 윤3월 신미일> 166 페이지 [고려 정승,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반란(反亂)을 일어키다] 삼월 윤(閏)달 신미일 밤 오경에 김용이 몰래 휘하 장수인 김수, 조련 등 그의 도당 50여명을 몰래 보내어, (왕이 잠자고 있는) 행궁(行宮)인 흥왕사(興王寺)로 달려가 문을 지키던 자들을 죽이고, 바로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황제(元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왔다" 했다. 김용 도당들이 왕의 침전에 들어갔는데, 환자 안도치(安都赤, 환관)은 용모(容貌)가 임금과 비슷하므로 자기 (안도치) 몸으로 대신하고자 임금의 잠자리에 누웠는데, 적은 임금인줄 알고, (安都赤을) 죽이고서 (공민왕이 죽은줄 알고) 좋아 날뛰면서 만세를 불렀다.
[행궁(行宮)에 대하여] 홍건적(紅巾賊)은 2차로 1361년 10월(공민왕 10년) 10만명이 남침하여 경성(京城, 개성)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공민왕은 남으로 남으로 행궁을 이동해 가면서 지금의 경북의 안동, 상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피난 과정에서 지역별로 이동 왕궁인 행궁을 설치,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 11년에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장군(將軍) 등의 병력에 의하여 적들이 물러가고, 경성(京城, 지금의 개성)으로 공민왕의 일행이 돌아왔지만 궁궐은 모두다 불태워졌고, 고려 왕조는 경성 인근에 있는 사찰인 흥왕사에 임시로 행궁을 설치했습니다. 고려 정승 김용(金鏞)은 흥왕사(興王寺)의 반란에 실패하고 밀성군(密城郡) 정승동(政丞洞)으로 귀양을 보내졌습니다.
<공민왕 12년 계묘년, 1363년 윤삼월 이십삼일(계사일)> ⇒ 174페이지
[김용(金鏞)을 밀성군(密城郡) 정승동(政丞洞)에 귀양 보내다]
흥왕적(興王賊)을 무려 90여명을 체포하였는데 김용이 제조군사(提調軍師)가 되어, 한 사람도 심문(審問)을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였다. 왕이 김용을 불러 이르기를 "마땅히 너를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정상(情狀)을 심문할 것이나 다만 전일의 공(功)을 생각하여 아직 죄를 감하노라 하고 , 곧 명하여 ★★★ 밀성군(密城郡)으로 귀양보내고★★★, 그의 도당 대호군(大護軍) 고환(高환)과 전리정랑(典理正郞) 화지원(華之元) 등 몇 사람도 외지로 귀양을 보냈다.
[1] 흥왕사(興王寺)에 대해서
경기도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있던 절. 1056년(고려 문종 10년)에 짓기 시작하여 12년만에 낙성된 큰 절로서, 2천 8백간[당시 서민의 한 집을 소위 말하는 "초가삼간(3간)"으로 계산하면, 900호가 넘는 규모]이나 되었다고 한다. 1067년(문종 21년) 1월 이 절의 낙성연등회가 있었으며, 그 후 선종, 숙종 때에는 의천(義天)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이 곳에 설치, 국내 혹은 송, 요, 일본 등에서 모아온 논저(論箸)들로 속장경을 간행하였다. 이 절에 1대 주지가 대각국사(의천), 2대 주지가 징엄(澄嚴, 선종의 왕자)이 되는 등 국가적인 대사찰이었다. 그 후 이 절은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어 고려말 이성계는 여기서 창왕(昌王) 폐위를 모의하였다(출처 : 고려사, 대각국사 문집)
[2] 귀화부곡(歸化部曲), 향(鄕)·소(所)·부곡(部曲)에 대해서
① 신라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하급 행정구획이며, 이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라서 그 신분이 노비, 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의 지위에 있었다.
② 부곡(部曲)이란 말은 원래 중국에서는 노예 노비적 인간을 가르켰던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행정구획으로 쓰이게 되었다.
③ 소(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금·은·동·철·실·종이·도기·먹 등을 만들기 위하여 두었던 특수기관으로 여기서 일하는 공장(工匠)은 죄인 또는 또는 천민의 집단이었다.
④ 일반적 행정구획과 향·소·부곡을 구별하는 기준이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예컨대 부곡(部曲)은 때로는 현(縣)보다 큰 호구(戶口)를 갖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현(縣에)서 부곡(部曲)으로 강등(降等)되기도 하였다. 향(鄕)은 부곡(部曲)과 비슷한 행정구획의 하나인 듯 하다.
⑤ 이 향·소·부곡의 발생은 자세하지 않으나, 대개 옛날의 전쟁포로 혹은 역모죄인의 유족 또는 반란이 거듭 발생한 향읍(鄕邑), 기타 어떤 특수 생산노비의 집단 거주 등으로 하여 발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⑥ 부곡은 신라시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고려조에 들어서면서 점차 해방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고려 일대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존재하였다. 국가 운명에 대한 중대한 범죄가 일어나면, 그 벌로서 일어났던 현(縣)이나 군(郡) 전체가 부곡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부곡의 수는 증가되었던 같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의 지방행정구획으로서 공적인 지위에 있어서 고려왕조는 이것을 중요한 하부조직으로 여겼다.
⑦ 조선에 들어서면서 시대의 발전에 따라서 지방행정구획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공사노비는 광범위하게 존속하였으나, 지방제도속에서 향·소·부곡이라는 천민의 집단의 모습이 사라졌음은 조선의 사회 제도가 전대(前代)보다 한 걸음 전진하고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출처 : 1974년도 백만사 발행 국사대사전(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용덕 저, 향·소·부곡 攷 등)
[3] 밀성군(密城郡)의 최대 영역
신라초기에 밀양의 명칭은 추화군(推火郡)으로 불리워지다가, 경덕왕 때에 밀성군으로 하여, 관할 행정구역이 확대되고 명칭이 밀성군으로 변경되었으며
밀성군은 현재의 경남 밀양시, 창녕군 일부 및 경북의 청도군의 일부 등을 포함하는 거대한 영역의 군(郡)으로서 위세를 떨쳤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地理) 신라(新羅)" 편에 의하면 밀성군(密城郡)은 지금의 밀양시(密陽市)를 본부로 하여
① 상약현(尙藥縣) □ 서화현 > 상약현 > 영산현 으로 변천 □ 지금의 경남 창녕군 영산면 일원
② 밀진현(密津縣) □ 추포현(경남 함안군 칠북면 멸포) > 밀진현(密津縣) > 죽산 > 현내(縣內) > 하내(河內) > 증산(曾山) 으로 변천(추정) □ 지금의 경남 창녕군 길곡면 일원
③ 오구산현(烏丘山縣) □ 오야산현, 구도, 오례산 □ 지금의 경북 청도군
④ 형산현(荊山縣) □ 원래 경산현(驚山縣)인데 뒤에 청도군으로 합속
⑤ 소산현(蘇山縣) □ 본래 이름은 솔기산현 임 □ 지금의 경북 청도군
등 5개의 현(縣)을 거느린 큰 군(郡)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크다란 행정구역상의 영역(세력) 등으로 인하여, 신라를 지나 후대인 고려초에는 밀주(密州)라는 더 큰 행정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4] 김용이 정승동에 유배될 때 밀성(密城)의 행정적 지위
① 밀양은 고려초에 행정명칭이 "밀성군(密城郡)"으로 되었다가,
② 고려 성종대에 지금의 광역시 및 도(道)의 수준인 "밀주(密州)"로 개칭되어 수장(首長)인 "자사(刺史)"가 다스렸으며,
③ 고려 현종대에 "밀성군사(密城郡事)"로 개칭되고,
④ 고려 충렬왕 원년에 조천(趙仟) 등이 몽고군에 항쟁하는 삼별초군에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계림부(경주)의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되어, 그 명칭이 엄청나게 강등(降等)되었으며
⑤ 민족사적으로 볼 때는 당시 밀주인(密州人, 밀양인) 조천의 집단은 고려사(高麗史)에서 외세(外勢 : 元나라)에 항거한 밀양 최초의 민족자존(民族自尊)의 독립운동(獨立運動)으로서, 나아가서는 밀양(密陽)이 외세에 항거(抗拒)한 자랑스러운 고장으로서 그 의의(意義)가 엄청났으나
⑥ 고려왕조가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 애석하게도 역적의 집단으로 몰려버린 사건이 되었으며
⑦ 밀양으로 보아서는 그 이후로 정치 및 행정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그 실례가 행정의 명칭이 "주(州)"에서, 계림부(鷄林府)에 속한 하나의 부곡(部曲)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⑧ 그리고 조천의 군사가 삼별초군을 지원하기 위한 그 당시의 집단 군사훈련장인 병구지(兵丘地)가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관음사 사찰아래에 있었으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밀양의 향토사료(鄕土史料)에 그 기록이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⑨ 그후 밀성현(密城縣)으로,
⑩ 고려 충렬왕 11년에 밀성군(密城郡)으로 되었다가
⑪ 다시 밀성현(密城縣)으로 강등(降等)되었으며 ※ 출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⑫ 이러한 지방행정 조직의 강등, 핍박 등으로 공민왕대(恭愍王代)에 밀성군(密城郡)은 실질적으로 계림부(鷄林府, 경북 경주)의 속현(屬縣)으로 계림부(鷄林府)의 수장(首長)인 안렴사(按廉使, 도지사급)의 지시에 따르는 상황이었으며,
⑬ 위와 같은 연유로 김용이 당시 밀성군(密城郡)에서 처형되지 않고, 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고 밀성(密城)을 다스렸던 세력권의 수장[首長 = 안렴사(按廉使) = 관찰사(觀察使)]이 있었던 계림부(鷄林府)로 압송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서기 1363년 4월 20일(己未日) 계림부 압송]
고려 정승 김용이 재악산 산하에서 사라진 이유
김용(金鏞)은 공민왕 초기에는 왕(王)의 일등 공신(功臣)이었으나 흥왕사(興王寺)의 반란이후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유배 및 참수(斬首)당하여 고려 조정에서 기피(忌避)의 인물로 낙인찍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당시의 지방수령(首領) 및 토호(土豪)들, 그리고 백성들로부터도 기피의 인물로 되어짐에 따라, 왕조사(王朝史)의 기록과 밀성군(密城郡)의 기록에서, 그리고 민간의 구전(口傳)에서조차도 금단(禁斷)의 인물로 되어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고 짧은 유배기간, 민간(民間)과의 원거리(遠距離), 민간(民間)과의 소문의 격리(隔離) 등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위와 같은 사유로 인하여 김용은 왕조(王朝)의 역사에서, 그리고 밀성(밀양)의 향토사(鄕土史)에서, 밀성(밀양)의 민중(民衆)으로부터 사라져 갔습니다.
<공민왕 12년, 계묘년 1363년 4월 20일> 174 - 177 페이지
□ 김용(金鏞)을 계림부(鷄林府, 경주)로 압송(押送)하다
20일(기미일)에 왜선(倭船) 2백 3십척이 교동(京城 = 개성 앞바다)에 정박하니 경성(京城)은 계엄을 선포하고 안우경(安遇慶)을 방어사로 삼았다.
대호군(大護軍) 임견미(林堅味)와 호군(護軍) 김두(金 )를 보내어 김용을 계림부로 옮겨 가두게 하고, 안렴(按廉) 이보림(李寶林)과 함께 국문(鞠問) 하니 (당시 안렴사 이보림은 고려 조정이 가장 신임하는 지방 장관으로 추정됩니다)
김용이 말하기를 "내 8년 동안에 세 번 재상을 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임금을 범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다만 홍시중(洪侍中, 홍언박)을 없애고 싶어서 한 일이다" 하였다.
임견미(林堅味) 등이 힐난하기를 "무엇 때문에 안도치(安都赤, 환관)을 죽였는가" 하니, 김용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드디어 김용을 죽여 그 머리를 경성(京城, 개성)에 전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도당 10여명을 베었다. 그밖에 매를 때려서 귀양보낸 자도 수십 명이었다
< 주> - 홍언박(洪彦博) : 충숙왕 17년(급제), 충목왕 4년(밀직제학), 공민왕 원년(첨의찬성사, 남양군), 공민왕 3년(좌정승, 우정승, 남양후, 1등공신), 공민왕 10년(문하시중), 홍건적 침입시 임금의 파천을 시종, 흥왕사의 반란 때 김용의 도당에 의하여 피살됨. - 대호군(大護軍) : 고려시대의 무관 계통으로서는 최고의 관직 명칭 - 호 군(護 軍) : 고려시대의 대호군 다음으로 높은 무관의 관직 명칭 - 안렴사(按廉使) : 고려시대 지방장관(요즘의 도지사 정도), 계림부(현재의 慶州)의 수장(首長)
<공민왕 12년, 계묘년 1363년 6월 무신일> 180 - 181 페이지 □ 김용(金鏞)이 계림부(鷄林府)에서 처형(處刑)되다
무신일(戊申日)에 사자를 보내어 김용의 도당을 유배지에서 모두 목을 베었다 김용은 밀성(密城)에 귀양 보내졌다가 계림부(鷄林府)로 옮겨져 사형을 당했다
□ 김용(金鏞) 등의 또 다른 음모(陰謀)
<공민왕 13년, 계묘년 1364년 11월 신유일> 200 페이지 <주 : 다음은 홍건적 난 때의 일로, 김용이 처형되기 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동지추밀원사 최유가 공민왕과 원한을 품고 있는 원나라 순제의 기황후를 꾀어,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거짓으로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기를 "홍건적의 난에 고려가 국새(國璽)를 잃어버려 새 국새를 제멋대로 만들어 씁니다" 라고 하니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았으며, 김용(金鏞)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무릇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있는 자는 모두 임명하여 위관(爲官)을 삼고 , 원병(元나라 兵) 1만을 인솔하고 덕흥군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고려를 침공하니) ----- 하략
<공민왕 15년, 병오년 1366년 8월 정묘일> 228 페이지 < 주 : 다음은 홍건적 난 때의 일로서 김용이 처형되기 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원(元)나라 왕후와 태자가 "임금이 전에 기철(奇轍, 元나라 황제인 순제의 둘째 황후의 오빠, 고려 문관)을 베어 죽인데" 대해, 원망을 품고, 김용(金鏞)을 내응케 하여 심왕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니 ------ 하략
□ 밀성군(密城郡)은 당시 지리적, 정치적으로 가장 적합한 유배지(流配地)였다
삼별초의 난 때 밀성인(密城人) 조천 등의 반란으로 인하여, 밀주(密州)가 계림부(지금의 경주)의 귀화부곡(歸化部曲)이었을 당시(행정구역을 강등시킨 당시), 밀성군은 계림부의 직할로 모든 행정의 지시를 계림부로부터 받고 있었읍니다.
위와 같은 연유로 인해서 반역의 정승(政丞), 김용은 밀성군 정승동에서 계림부로 압송되었습니다.
고려 조정의 김용에 대한 유배지의 선택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개성(당시 京城)의 북쪽은 원(元)나라 및 홍건적(紅巾賊)과 인접해 있어, 조정(朝廷)에서는 유배지로서는 부적합했습니다.
남쪽인 바다와 연접한 부산·동래·울산 등은 왜구와의 내통이 우려되어 역시 유배지로서는 부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밀성군은 고려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어, 개성의 숨은 잔당들과의 내통이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지리적, 정치적(고려 조정이 가장 안전하게 믿을 수 있는 지방 정치세력이 있는 계림부)으로 가장 안전한 유배지(流配地)는, 위에서 언급한 지역을 벗어나는 남쪽 지방으로서
천혜의 요새인 험준한 영남알프스의 동쪽 면을 방벽으로 하고 있는 재악산(載嶽山)의 자락 중에서 가장 깊숙한 정승동(政丞洞)을 택했습니다.
밀양의 향토사료인 밀주지(密州誌)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그 당시에 정승동은 경승지(景勝地)로서 보다는 은자(隱者)가 숨어살기에(또는 국사범 등의 죄인을 가두어 놓기에) 적합한 지형적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외부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지역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배(流配, 귀양)가 아닌 목적으로서 한 나라의 정승(위 밀주지의 신라 왕, 태자, 고질병, 영정 등과 관련하여)이 왕(王)을 먼 곳에 두고서 이 곳에 머물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안성김씨종친회에 올려진 김희곤님의 글을 옮겨 왔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