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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che815 (2006-02-16 12:23) | 신고하기 | 이의제기 |
1. 서론 전국시대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로의 문을 활짝 열어 제낀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가치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새로운 시대를 향한 서막을 올렸다.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재주를 한껏 발휘하여 그 터전 위에 새로운 집을 지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집에 '에도 바쿠후'라는 현판을 내걸고 주인이 되었다. 그 집은 250여 년 동안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에도 바쿠후의 바쿠한(幕藩)체제를 통해 에도시대의 쇼군과 다이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바쿠한(幕藩)체제 바쿠한 체제란 에도시대에 막정(幕政)과 번정(藩政)으로 이루어진 정치/사회적 통치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기본 틀이 만들어졌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이에쓰나에 이르는 4대에 걸친 쇼군 아래에서 거의 완성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이에야스는 각 다이묘들이 쇼군가(家)와 맺고 있던 관계를 기초로, 토지를 매개로 하는 주종관계의 면밀한 계층조직을 만들어 냈다.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氏 일가로 그 중 오와리(尾張), 기이(紀伊), 미토(水戶)는 고산케(御三家)라 하여 중요시 여겨졌으며, 종가의 대(代)가 끊어질 경우 쇼군의 후계자를 낼 특권을 지녔다. 그 다음으로는 후다이 다이묘라 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氏의 가신이었던 자들로, 이들의 충성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氏에 복종한 자들로 경원시되었다.
쇼군은 이들 신판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들의 봉토를 배치할 때 상당히 신중을 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도자마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복종하였기 때문에 차후에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에도 주위에는 신판 다이묘들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후다이 다미요들을 배치하고, 에도와 가장 먼 쪽에 도자마 다이묘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자마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그리하여 막부 말기 반란이 일어나 천황에게로 정권이 이양될 당시 그 주축을 이루었던 세력이 바로 도자마 다이묘들이 었다.
또한 쇼군의 직속군사로는 하타모토(旗本) 5,000명, 고케닌(御家人) 약 1만 7,000명이 있었다. 그 외에 천황과 황가, 조정의 귀족들이 있었으며, 사원도 있었다.
바쿠한 체제는 이러한 큰 틀안에 막정(幕政)과 번정(藩政)이라는 또 하나의 작은 틀이 존재하였다. 막정(幕政)은 쇼군이 막부 내부를 통치하는 체제로 그 직제는 로쥬(老中)가 최 고위직으로 정무 전반을 총괄했다. 와카도시요리(若年奇)는 로쥬를 보좌하고, 하타모토(旗本)를 통솔했다. 와카도시요리 밑에는 메쓰케(目付)라는 감찰기관이 있었다. 사사부교(寺社奉行)는 사원 신사의 관리와 먼 지방의 재판을 관장하였으며, 마치부교(町奉行)는 에도와 오사카, 교토 등 주요 도시 및 쇼군의 직할 도시에 설치되었다. 간죠부교(勘奉行)는 바쿠후의 직할령의 관리와 관동 지역의 재판을 담당했다. 이 세 부교는 효죠쇼(平定所)에서 영지에 대한 소송을 비롯한 중요한 재판을 집행하면서 정책 입안에도 관여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에도 바깥으로는 각 마치부교 외에 교토에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오사카에 오사카죠다이(大坂城代)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쇼군의 직속으로 로쥬와 거의 동격으로 여겨졌다.
로쥬의 밑으로는 오오메쓰케(大目付)라는 총 감찰 기관이 있어, 각 다이묘들의 기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각 도시마다 부교(奉行)와 마치부교(町奉行)가 있었고, 특히 간죠부교 밑에는 다이칸(大官)이라하여 쇼군의 직할령을 관리하는 지방행정관이 있었다.
번정(藩政)은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체제로 쇼군으로부터 부여받은 통치권을 영내에서 가신단을 통하여 행사하였다. 가신단은 봉토의 크기나 녹고(綠高)에 따라 등급별로 편성되며, 전원은 다이묘와 서약으로 맺어져 다이묘의 병적부인 사무라이 쵸오(侍帳)에 등재되었다. 카로오(家老)라 불렸던 최 고위의 가신들은 봉토를 받은, 자주적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이들은 다이묘듸 자문회를 형성하였고, 다이묘의 대리로서 행동하거나 번(藩)의 최고법정을 주재하였으며, 유사시 전장에서 부장(部將)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다음 고위 가신들은 상비군인 번(藩)의 수비군을 지휘하며 재정, 치안, 막부와의 연락업무 등 문관행정기능을 감독하였다. 그 아래로 중급 가신들은 구체적 행정실무를 맡아 죠카마치(城下町)나 농촌지역의 행정, 과세, 경찰 또는 다이묘의 집안일, 군수조달, 토목, 교육, 종교업무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였다. 아시가루(足輕), 코쇼오(小性), 코모노(小者) 등은 다이묘의 하급졸개들로 영지행정 중 허드렛 일 등을 맡아서 하였다.
행정기구로는 불교와 신도의 시설을 관리하는 사사부교(寺社奉行), 농촌행정을 맡은 다이칸(大官)이 무라(村)를 감독하였으며, 죠카마치(城下町)의 부교는(奉行) 도시 몇 개로 나누어진 행정구역 마치(町)에 그 권한을 사용하였다. 그 외의 하부행정은 각 무라(村)나 마치(町)의 주민들 중 長의 권위 아래 이루어졌다.
3. 쇼군과 다이묘 좁은 의미로 볼 때, 에도에 본거지를 둔 막부란 단순한 쇼군 집안의 가정9家政)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 직접적인 행정 권력은 쇼군 자신의 영지인 천령(天領)에만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면적이 전 국토의 1/4로 상당히 넓은데다가, 국내의 대도시를 포용한 부유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 인구의 과반수가 쇼군의 친정(親政)이 미치는 권역 안에 살고 있었다. 더욱이 쇼군은 도쿠가와家가 갖게 된 법제적이며, 실제적 권력을 쥐고 외교정책을 결정하며, 군사와 국방의 최고 책임을 지는 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엿다.
에도시대의 다이묘는 1만 석 이상을 생산하는 영지를 보유하고, 그 규모에 따라 행정, 군사 기구를 구성한 무사로 모든 다이묘는 쇼군의 가신이며, 원칙적으로 쇼군의 뜻대로 종속된 것이었다. 다이묘의 영지는 세습적으로 사여(賜與)받아 보유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들의 보유권은 불안정한 것이었다. 영지의 몰수나 전봉(轉封)은 바쿠한 체제초기에는 예사로 이루어졌고, 몇몇 강대한 도자마 다이묘와 신판 다이묘만이 끝까지 자신의 세습영지에 머물러 있는데 불과했다.
다이묘의 권리와 의무는 명시된 적은 없으나 관습상 군역의 의무, 요구에 따른 특별지원을 제공할 의무, 영지를 잘 통치하라는 기대충족에 대한 의무가 있었으며, 더불어 쇼군의 법령을 따르고, 쇼군에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으며, 쇼군에게 성실히 봉사할 것을 개인적으로 서약하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서약 외에도 부케 쇼핫토(武家諸法度)라는 공적인 규칙에도 묶여 있었다. 이 문서는 이에야스가 1615년 처음으로 다이묘들에게 제시한 것으로 1635년 보충되어 21개조로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이묘의 개인적인 행동, 혼인, 의상을 규제하며, 도당의 결성, 군비 증강을 막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에도에서 쇼군의 시중을 들 것, 인질의 제공, 대형선박의 건조 금지, 기독교의 금지 등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쇼군의 법령을 나라의 최고법으로 인정할 것을 약속하는 조항으로 끝나고 있다. 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산킨코타이(參勤交代)로 모든 다이묘는 에도에 집을 짓고, 그곳에 처자 및 에도성과의 연락책을 포함한 특정 종자를 두게 하였으며, 다이묘 자신은 에도와 영지에 번갈아 가며 거주하였다. 칸토오 지방의 후다이 다이묘는 반 년마다, 에도에서 더 먼 다이묘는 일 년마다 교체시켰다.
이외에 쇼군은 각 다이묘들에게 정기적으로 공물을 거두어 들였고, 특히 경제적으로 번영했던 토자마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코쿠야쿠(國役)이라하여 각종 성, 도로, 다리, 궁전을 짓기 위한 경제적 지원도 요구하였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에야스가 죽자 그 혼령을 토오쇼 다이곤겐(東照大權現)으로 신격화하여 쇼군과 다이묘 등이 토오쇼쿠(東照官)신사에 참배를 하였으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다이묘들도 자신의 영지에 토오쇼쿠(東照官)를 세워 매년 참배하였다.
4. 결론 마침내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전쟁을 종식시키고, 일본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등장한 것은 꽤나 오래 살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구어 놓은 통일사업을 이어받아, 상당히 안정된 막부를 수립하였으며, 이는 마침내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바라던 평화의 시대가 열림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은 그 전 시대의 쇼군처럼 "무가의 동량"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정치권력의 핵심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신분제를 넘어선 무사계급간의 권력투쟁의 결과로서, 명실상부 일본 최고의 주권자이며,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나타난 쇼군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대의 다이묘 역시 전 시대의 슈고 다이묘(守頀大名)나 센코쿠 다이묘(戰國大名)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슈고 다이묘는 장원체제에 입각한 영주화된 슈고라 할 수 있다. 반면, 센코쿠 다이묘는 기존의 장원체제를 부정하며 하나의 작은 쿠니(國)의 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다이묘는 자신의 봉토 안에서는 비교적 그 자율성을 인정받으나, 그 자율성 또한 쇼군이 정한 법령에 구애받고 있어 개인적으로는 쇼군의 가신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시대는 전국적인 정부의 형태로서 바쿠한(幕藩)체제에 의해 일본은 마침내 하나의 국가라는 모습을 비교적 잘 갖출 수 있게되었다. 또한 전쟁이 종식되어 평화의 시대가 열린만큼 무사계급에게 요구되던 것은 기존의 전투뿐만 아니라 관리로서의 추가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실제로 관료 엘리트가 된 이들의 지도하에 국가행정은 두드러지게 조직화되고 합리화 되었다. |
내용출처 : [기타] 1.<日本史: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존W. 홀 2.<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카와이 아츠시3.<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박경희 4.<일본 역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 박동석 외이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