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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양 사
위 치 :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창 건 : 백제무왕 33년(632년), 여환선사 백암산 백암사 종 파 : 대한 불교 조계종(18교구 본사) 상주교직자 : 교직자 100여명 신도수 3,500여명 관리소 : 고불총림백양사(061)392-7502 내장산 국립공원 남부관리사무소 (061)392-7288
황룡면 장산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적지는 1894년 4월 23일, 반봉건의 제폭구민과 반외세의 척양척왜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서울에서 파견된 경군을 무찌른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전국에서 헌수운동을 통해 지난 98년 이곳에 동학기념공원을 조성했다. 황룡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현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라도의 수도요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 곳에서 경군과 일대접전을 벌였던 전투이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군이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의미있는 전투로서 동학농민군에게는 사기와 자신감을 주고 경군에게는 낭패와 당혹감을 주어 그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동학군은 양총 1백여정 등 많은 무기를 빼앗아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하게 됐고 몇차례 공방전을 벌인 후 휴전을 서두르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했던 전주화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대포와 기관총, 그리고 신식무기를 갖춘 경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장태(닭의 둥지)라는 무기가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길게 만들어 그속에 많은 짚을 넣어 굴리면서 경군의 총알을 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곳에는 동학사상을 일깨우고 후세에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동학혁명 승전기념공원(1997년)을 조성하고, 기념탑1기와 면암 최익현 선생이 비문을 지은 경군대장 이학승 순의비가 세워져있다.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적비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1998년, 국가사적지 제406호로 지정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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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동학 농민운동 전적지
위 치 :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356 외 17필지 면 적 : 20,388㎡(6,167평) 지 정 : 사적지 406호(1998.4.10) 조성시기 : 1997~1998
황룡면 장산리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적지는 1894년 4월 23일, 반봉건의 제폭구민과 반외세의 척양척왜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서울에서 파견된 경군을 무찌른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격전지다.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전국에서 헌수운동을 통해 지난 98년 이곳에 동학기념공원을 조성했다. 황룡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영광, 함평현을 차례로 점령한 후, 전라도의 수도요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 곳에서 경군과 일대접전을 벌였던 전투이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군이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한 의미있는 전투로서 동학농민군에게는 사기와 자신감을 주고 경군에게는 낭패와 당혹감을 주어 그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동학군은 양총 1백여정 등 많은 무기를 빼앗아 곧바로 전주성을 점령하게 됐고 몇차례 공방전을 벌인 후 휴전을 서두르면서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했던 전주화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대포와 기관총, 그리고 신식무기를 갖춘 경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장태(닭의 둥지)라는 무기가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것은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길게 만들어 그속에 많은 짚을 넣어 굴리면서 경군의 총알을 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곳에는 동학사상을 일깨우고 후세에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이용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동학혁명 승전기념공원(1997년)을 조성하고, 기념탑1기와 면암 최익현 선생이 비문을 지은 경군대장 이학승 순의비가 세워져있다. 동학농민혁명 황룡전적비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1998년, 국가사적지 제406호로 지정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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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위 치 :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 규 모 : 대지 1,764평 건물 18동 지 정 : 국가사적지 제242호(1975. 4. 23) 연락처 : 김병삼(061)394-0833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대지 1,764평으로 18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국가사적지 제242호로 지정돼 있다. 서원이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이 직접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내려보내 주었고 162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우동사(祐東祠)는 필암서원의 사우로, 북쪽에 하서 김인후 선생, 동쪽에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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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영화마을
위 치 :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금곡마을 면 적 : 121 ha
축령산을 뒤로 한채 동향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태양광선이 좋고 소음 차단이 완벽한 지역으로 영화촬영의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지금까지 금곡마을은 오지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50~60년대의 마을경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30여개의 고인돌, 연자방아, 당산나무 당산석, 모정, 가옥 등 전통유적이 산재해 있다. 아이들에게 옛 조상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 보다 좋은 곳이 없다. 마을 어귀의 울창한 당산나무로 시작해 고샅길 넘어 싸리나무 담장에 초가집, 다랑이 논, 황소를 이용한 재래식 영농법, 동네 어귀에서 만난 주름진 할머니의 표정까지 모두 박물관에서나 만날법한 순 토종이다. 이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이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 장성군 남면이 고향인 임권택 감독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 '태백산맥'(1994년 제작)을 촬영했고 이영재 감독이 '내 마음의 풍금'(1998년 제작), 김수용 감독이 '침향'을 찍은 것을 비롯해 MBC TV 드라마 '왕초' 등이 이 곳에서 촬영됐다. 또 화가 황순칠씨가 이 마을을 주제로 한 작품 '고인돌 마을'로 지난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다. 실제로 마을 건너 들판에 여기저기 고인돌이 놓여있어 마을의 유래가 깊음을 말해주고 있다. 장성군은 지난 1995년부터 전통초가집 건립, 전선주의 지중화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 영화 민속촌으로 가꾸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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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 백비(白碑)
위 치 :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산33-1번지 지 정 : 도기념물 제193호(2001.12.13) 규 모 : 높이 130cm, 폭 45cm, 두께 15cm 연락처 : 박래호(019-832-4562)
이 세상에는 많은 사연을 갖은 비석들이 있다. 하지만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는 희한하게 생긴 비석하나가 서 있다. 높이 130cm, 폭 45cm, 두께 15cm의 어린 아이 키 만한 이 비가 다른 비석과는 달리 표면이 하얗고 아무런 문구도 없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상징인 아곡 박수량 선생을 기리는 비다. 박수량 선생은 25세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9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공직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했을 뿐 명예와 재물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명종은 박수량 선생이 너무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 보았더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라고 하였다. 박수량 선생은 1554년(명종 9년) 1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 장사를 지내 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 유언을 했다. 명종께서는 선생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판서까지 지낸 분이 운상비가 없어 고향으로 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비용을 마련해 주고 예장을 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했는데 비문을 새기다가 선생의 고결한 삶에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대로 묘 앞에 비문이 없는 돌을 세우니 이 비가 유명한 백비다. 그 뒤 박수량 선생은 1806년(순조 11년) 2월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성군은 박수량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하여 군청광장에 모형 백비를 세워 현재의 공직자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