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의 달
이언 김동수
꽃이 흐드러진 지난 4월 봄,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에 가서 시 한 수를 낭독하게 되었다. 계간 『불교문예』 에서 주관하는 ‘현대불교 문학상 시상식 및 봉축 시낭송회’에 참석하여 자작시 한 수를 낭독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올라 간 길이었다. 먼 길이었지만, 불교 문학 행사이고 더구나 그 장소가 조계사란 점이 마음에 들어 구경삼아 응하기로 했다.
구작(舊作)도 좋다하기에, 몇 편을 골라 주변 문우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내 등단작 중의 하나인 「새벽달」을 골라 주었다. 좀 오래되긴 하였지만, 시를 낭독할 장소가 서울 한 복판인 점을 감안하여, 도시 문명에 시달린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또 옛 고향의 향수가 되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시를 낭독하기로 하였다.
「새벽달」은 지금부터 30여 년 전, 전북 순창에 있는 쌍치 중학교로 발령을 받아 하숙하던 시절에 쓴 시다. 이 학교로 오기 전 나는 전남 신안군 비금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먼 남쪽 바다였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5시간 정도 흑산도 쪽으로 통통거리며 검푸른 물살을 가르고 가다 보면, 도초도 윗녘에 비금도(飛禽島)가 있고 섬의 중심부에 비금중학교가 하나 있었다.
이 곳에서 6개월간 근무하면서 시말서를 3장이나 썼다. 낙도로 좌천되어 내려온 교장의 전횡에 맞선 불령교사(?)라는 죄목으로 낯설고 물 설은 비금도에서 견디다 못해, 그 해 가을 전북에서 실시한 채용고시를 거쳐 두 번째로 발령을 받은 곳이 전북 순창의 쌍치중학교였다. 이 곳 또한 6개월 동안 섬에 갇혀 지낸 비금도 못지않게 낯선 산골의 오지(奧地)였다.
쌍치의 밤은 춥고 어설펐다. 하숙방이 어찌나 춥든지 선배 교사의 권유에 따라 퇴근길에 소주를 몇 잔을 들이키고서야 잠이 들곤 하였다. 한 때 기고만장하게 호기를 부리던 젊은 날의 나는 어디로 가고, 힘들게 얻은 교직마저 그렇게 낙도(落島)에서 또다시 첩첩 산골 오지로 밀려 긴 긴 겨울 밤, 나는 올빼미처럼 잠들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불러주거나 찾아주는 이 없는 산골의 겨울밤은 춥고 깊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어느새 눈이 한 자나 내려 쌓여 있었다. 눈 덮인 마당을 지나 변소로 가던 중, 덜컥 발을 멈추고 말았다. 너무나도 환하게 달이 떠 있었던 것이다. 온 천지가 눈 속에 잠들어 있는데 달(月)이 하나 떠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쌍치에까지 오셔서, ‘얼마나 고생이 많느냐?’ '객지로 떠돌아다니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느냐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따끔거린 가슴을 가누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와 그날 밤 그 달의 충격을 나도 모르게 메모지에 끄적거리게 되었다. ‘누가 놓고 간 등불인가 / 서편 하는 높이’ - 나도 모르게 첫 구절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가 놓고 간 등불인가
서편 하늘 높이
千年 숨어 온 불덩인가
속살로만 타오르다
피어 난 하늘의 꽃등
먼 길을 가는 나그네
여기 멈추어
부드러운 네 치맛자락을
보듬고 밤을 뒹군다
별빛마저 무색한 밤
오늘도 내 키보다 둥실
높이 떠서, 끝내
눈을 감지 못하는 聖女
오, 내 어머니여
-「새벽달」 전문
평생, 불덩이를 속살로만 품고 살아온 어머니의 애간장이 하늘의 ‘달’이 되고, ‘등불’이 되고 , 또 ‘꽃등’이 되어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 달이 30년이 지난 오늘, 이 서울의 한 복판 조계사에까지 따라와 나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그 어느 분의 원력(願力)이었을까? 도착한 조계사의 일주문의 주련(柱聯)에 아래와 같은 시구가 이미, 전주에서 올라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계산상일륜월 (曹溪山上一輪月) 조계산 위에 뜬 둥근 달
만고광명장불멸 (萬古光明長不滅) 만고에 이 광명 오래토록 멸하지 않으리.
아! 그렇구나. 썩어도 썩지 않고, 죽어도 죽지 않는 부처의 광명, 아니 십 수 년 전에 돌아가신 부처의 화신이 지금 여기 조계사 법당 위에까지 오셔서 일륜월(一輪月)로 떠 계시는구나.
전국에서 모여든 사부 대중들 앞에서 「새벽달」 을 낭독하고 일주문을 나서는 순간, - ‘조계산 위에 뜬 둥근 달 / 만고에 이 광명 영원히 멸하지 않네.’ -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2012. 4.28)
첫댓글 하하! 이원님도 그리 힘든 세월을 보내셨군요!
그러나 새벽달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30년 전에 쓴 시기 지금도 저 둥근달처럼 영롱하게 비추다니오?
참으로 이원님의 시작에 고개가 절로 절로 흔들어 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