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판(Ulpan) : Hebrew Language Course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를 배운다면?
엘리에젤 벤예후다 -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다
히브리어는 19세기까지 기도문 같은 종교적인 책 안에 갇혀 있었다. 히브리어를 일상의 언어로 살려낸 사람이 있다. 엘리에젤 벤예후다(1858-1922).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유대인 아이와 마찬가지로 종교교육을 받으며 히브리어를 습득했다. 가족들은 그가 랍비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의 관심은 당시 동유럽의 젊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가 아닌 일반 세상에 있었다.
벤예후다가 20세 되던 해에 발칸 반도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에 자극을 받아 유대인도 그들의 조상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도 다른 민족처럼 그들 조상의 땅과 언어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조상의 땅과 언어를 회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벤예후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팔레스타인 땅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878년 벤예후다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려면 의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폐결핵 때문에 벤예후다는 파리에서의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1881년 그 당시 터키가 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그는 여러 히브리어 잡지에 유대 민족, 그들의 땅과 언어의 르네상스에 대한 주제로 기고했다. 벤예후다는 히브리어
의 재생을 위해 세 가지 실천 목표를 정했다.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히브리어 단어, 단어, 단어"
벤예후다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해서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로 말하기를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는 히브리어로만 말하기로 결심했다. 벤예후다와 그의 부인은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만 말하는 첫 가정이 된 셈이다. 아들 이타말이 태어나자 히브리어로만 말을 가르쳤다. 벤예후다는 아들이 이스라엘 현대사에서 완전하게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첫 사람이 되도록 했다. 벤예후다는 아들이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듣지도 못하도록 했다. 만일 그의 집에 히브리어를 할 줄 모르는 방문객이 찾아 올 경우 그는 아들을 방으로 들여보낼 정도로 철저했다. 아버지의 이런 열심 때문에 아들 이타말은 4살이 되서야 뒤늦게 말문을 열게 되었다.
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벤예후다는 예루살렘의 알리앙스 학교에서 교사직을 제안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어린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쓸 수 있는 공통의 언어는 없었다. 벤예후다는 건강이 악화되어 오랜 기간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히브리어 교습은 성공적이었고 이것은 다른 교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히브리어를 가르칠 교재도 교육법도 숙련된 교사도 모두 부족했다.
벤예후다는 어른들이 히브리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신문 하쯔비를 1884년에 발행했다. 19세기말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전세계 유대인 남자의 50%는 구약의 모세오경과 기도문을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었다. 벤예후다가 만든 히브리어 신문은 히브리어가 종교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은 어려움 없이 히브리어 신문을 소화할 수 있었다. 신문은 새로운 히브리어 단어를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10년 벤예후다는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방대한 이 사전은 벤예후다의 사후 그의 부인과 아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벤예후다가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부활의 꿈은 당시 유대인 사회 분위기와 부합했기에 실현 가능했다. 벤예후다가 팔레스타인에 이민을 온 1881년은 초기 유대인 이민자의 물결이 시작되던 해 이기도 하다. 벤예후다와 같이 젊고 교육받은 이상주의자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유대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탈무드 학교에서 이디쉬로 공부하기를 원치 않았다.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예루살렘, 욥바, 리숀레찌온 등에 생겨났다. 팔레스타인에서 공통의 언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이민자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히브리어 사용을 확산시켰다. 이들의 노력으로 히브리어는 유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권을 갖고 있던 영국은 1922년 11월 29일 히브리어를 팔레스타인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그러나 한달 뒤 벤예후다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온주의자로 잘 알려진 헤르즐조차도 이스라엘의 독립 국가는 꿈꾸었지만 히브리어의 부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헤르즐은 그의 소책자 '유대국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어떤 체계를 갖게 될 것인지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국어에 관해서는 스위스의 예를 들면서 이스라엘도 이민온 유대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독어, 영어 등 몇 개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헤르즐은 정치적인 독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언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이상한 언어 배우기
나는 이스라엘에 가기 전 히브리어 알파벳 조차 알지 몰랐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처음 생활을 한 곳은 키부츠였다. 작업 시간 중간에 커피를 마시는 휴식 시간이 되자 모두 다 테이블로 모였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는 곧 싸움이라도 할 듯이 커지기 시작했다.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히브리어를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걱정도 되었다. 다음날도 키부츠닉의 말투는 여전했다. 히브리어는 무척 거칠게 들렸고 매력적으로 들리는 언어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 이왕 이스라엘에 왔으니 성경이 쓰여진 언어 히브리어를 배워서 구약 성경을 원어로 읽어보겠다는 무모한 꿈(?)을 갖고 울판을 시작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학교를 울판이라고 부르는데, 키부츠에서 운영하는 울판도 있고 대학이나 시에서 운영하는 울판도 있다. 때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히브리어 배우는 것은 울만한 일이 아니냐며 울판이라고 해석한다. 키부츠는 주로 외국의 유대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울판을 개설한다. 키부츠 울판에 오는 이들의 동기도 다양하다. 모국을 알기 위해 온 사람, 이민을 오기 전에 미리 탐사차 온 사람, 이민을 왔으나 도시에 정착하기 전에 키부츠에서 언어를 배우며 적응하는 사람들.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다 모였으니 울판에서는 공통의 언어가 없다. 울판의 히브리어 교사는 히브리어로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은 언어를 단어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배운다. 그러나 알파벳부터가 워낙 생소하다 보니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꼬부랑 글씨는 그렇다 치고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것이다. 글씨가 오른쪽부터이니 책이나 노트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간 노트를 뒷장에서부터 써야 했다. 글이 오른쪽에서 시작하다 보니 대부분의 순서는 오른쪽에서부터 1이 시작된다. 건물 안의 복도에서도 가장 오른쪽에서부터 1호실 그 옆이 2호실으로 순서가 매겨지기 때문에 방향에 혼란이 온다.
약 이천 년 동안 사람들이 구어로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를 부활시킨다는 것은 실현 가능한 일일까? 한 세대 동안 우리말과 글을 잃어 버렸던 우리는 언어의 회복은 나라의 회복과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히브리어를 쓰고 읽고, 문학과 학술어로 손색이 없지만 약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자유로운 히브리어의 구사는 소수만이 꿈꾸었던 이상이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마'(엄마), '아바'(아빠)를 시작으로 히브리어를 배운다. 그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이런 일상의 언어가 사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구사하지 못하던 언어였다고 말해 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골목 어디에서든지 들리는 히브리어, 오래된 새로운 나라의 또 다른 기적의 한 모습이다.
성서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
성서 히브리어를 배운 사람이 이스라엘에 가면 히브리어가 모음점 없이 사용되는 것과 필기체가 있다는 것에 낯설어 한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으로 이루어진 언어인데 주후 10세기경 맛소라 학자들이 정확한 모음의 보존을 위하여 모음 기호를 고안했다. 그러나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이런 모음점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 히브리어 단어를 배울 때는 먼저 모음을 붙여서 정확하게 읽고 기억하면 그 다음에는 모음을 붙이지 않아도 단어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처음 보는 단어도 몇 가지 원칙을 안다면 읽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순수한 히브리어가 아닌 외래어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어떻게 읽어야 될지 망설이게 된다. 예를 들면 워싱톤은 외래어이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단어이기에 읽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신문에 홍길동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면 홍길동의 히브리어 표기에는 모음점을 붙여서 독자들이 어떻게 발음해야 되는지를 알려준다.
원래 성서 시대에는 모음점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모음점이 없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것은 원래의 히브리어에 가까운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 동사는 인칭과 성에 따라 변한다. 우리말에는 동사에 성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할 때마다 늘 상대방의 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히브리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다. 내가 주어가 되어 말을 할 때는 여성형 동사를 사용하고 상대방이 나와같은 동성의 여성이라면 내가 말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지만, 대화의 상대방이 남성일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실수를 하곤 했다.
영어는 대문자와 소문자가 있어서 고유명사의 첫 스펠링은 문장 중에서 대문자로 표시한다. 한글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도 대문자와 소문자가 없다. 히브리어는 모음도 없고 고유명사가 대문자로 시작되지도 않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는 외래어나 고유명사라도 무조건 사전을 찾게 된다. 울판에서 공부할 때에 한번은 선생님이 본문에서 모르는 단어에만 줄을 치라고 요구했다. 우리 반의 학생들이 모르는 단어는 대부분 공통적이었는데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차근차근 읽어보았더니 모짜르트, 스웨덴, 비타민 같은 외래어여서 학생들은 박장대소했다. 선생님의 의도는 모르는 단어라고 무조건 사전을 찾지 말고 우선 잘 읽는 시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니 외국인이 한글을 배우고 나서 문패에 쓰여져 있는 대로 "개조심씨 계십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현대 히브리어와 성서 히브리어는 어떤 관계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현대 히브리어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며 성서 히브리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단어의 뜻은 대체적으로 변함이 없으며 시제에서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