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사와 동학사상
대신사와 동학사상 <표 영 삼>

사진설명; 대신사의 존영. 1894년 4월 17일자 일본 동경일일신문에 게재했던 대신사의 존영. 일본 특파원이 사진을 찍어 보낸 것을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사진설명; 귀미산 전경. 1984년 9월에 촬영한 것으로 앞에는 대신사 출생지인 가정리가 있고, 정면 골짜기에는 용담정이 있으며. 길게 뻗은 능선 중간에는 대신사 태묘가 있다.
머 리 말집의 구조는 주춧돌과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지붕이 있고, 바람벽과 구들장과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념의 틀도 여러 요소들로 짜여져 있으며 동학 역시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가 형이상적(形而上的) 역사관이고, 둘째가 한울님 관념이고, 셋째가 선악의 기준이고, 넷째가 수행과 신앙의 방법이고, 다섯째가 교단 조직이고, 여섯째가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한 꿈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구조를 검토하여 보듯이 먼저 창시자인 대신사(大神師 水雲 崔濟愚)가 포덕(布德) 1년(1860)에 무극대도(無極大道, 天道)라는 신념체계를 창시하기까지의 구도과정을 알아보고, 동학은 종교인가 도학(道學)인가를 살피는 한편 그 신념의 핵심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대신사의 창도과정대신사 수운 최제우(이하 대신사로 약칭함)는 갑신년(1824) 10월 28일(양 12월 18일)에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가정리(稼亭里)에서 태어나 갑자년(1864, 포덕 5년) 3월 10일(양 4월 15일)에 대구에서 좌도난정죄(左道亂正罪)로 41세에 순도하였다. 부친은 몰락 양반인 경주 최씨 근암(近庵) 최옥(崔옥, 1772∼1840)이요 모친은 곡산 한씨(谷山 韓氏)이다. 근암공은 63세 때에 30세의 한씨와 결혼하여 만득자(晩得子)로 대신사를 얻었다.
10세에 당시 40세였던 모친과 사별하였고, 17세(1840년)에는 부친과 사별하였다.
19세(1842년) 때 울산의 밀양 박씨(密陽 朴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넷째 딸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큰아들 최세정(崔世貞, 仁得, 士衡, 1851?∼1872)은 관의 지목을 피해 인제면 쇠말랭이 산골에 숨어 있다가 1872년 양양 군교에 체포된 뒤 그해 5월 12일 장살(杖殺)되어 22세(?)의 나이로 순도하였다. 둘째 아들 최세청(崔世淸, 1854?∼1874)은 1874년 2월에 영월 소미원 장기서(張基瑞)의 집에 갔다가 병을 얻어 객사하였으며, 이로써 대가 끊기게 되었다.
대신사는 어머니 한씨 밑에서 자랐으나 10세에 모친이 별세하자 양형(養兄) 최제환(崔濟 ) 부부가 돌보아 주어 17세까지 글공부를 하였다. 19세에 울산의 박씨(1826?∼1873)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렸으나 20세에 집이 불타버리자 부친이 쓰던 용담골 귀미산 골짜기 용담서사(龍潭書社)로 들어가 살았다. 살림살이가 쪼들리자 21세 되던 이듬해(1844년)부터 장사 길로 나섰다.
봇짐 장사로 전국을 누비기를 31세(1854년)까지 10년간 계속하였다.
당시 나라 안은 세도정치로 조선왕조의 틀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탐관오리들의 행패는 민중의 삶을 핍박하였다. 나라 밖에서는 1840년에 영국이 광동(廣東)에서 아편전쟁을 도발하자 이를 계기로 서구열강들이 중국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앞서 공업화를 이룩한 서구열강의 침략은 오랫동안 농업사회 속에 잠들어 있던 동아시아를 뒤흔들어 놓았다. 중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이는 조선왕조에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대신사는 독특한 형이상적 역사관으로 19세기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한마디로 세계질서가 대전환기를 맞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깊은 고민 끝에 대신사는 자신이 그 길을 열어보고자 장사 길을 청산하고 31세 되던 봄부터 "다시 개벽"의 길(道)을 찾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경주 용담에서 반년을 보내다가 9월에 박씨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裕谷洞) 여시바윗골로 옮기었다. 논 여섯 두락을 사들이고 초가 삼간을 지어 이사한 후 "다시 개벽"의 새로운 틀을 찾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새해인 을묘년(1855) 3월을 맞아 뜻밖에 이인(異人)으로부터 신비한 책 한 권을 받게 되었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백일 기도를 마치고 얻었다는 이 책은 아주 난해하였다. 이인은 사흘 뒤에 찾아올 테니 읽어보라고 하였다. 다시 나타난 이인은 대신사로부터 책을 해독했다는 말을 듣자 이 책은 선생의 것이라며 건네주고 방문을 나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 책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하는데 책 말미에는 한울님(?鐸〈?)에게 기원하라고 적혀 있었다.
33세 때인 병진년(1856) 4월에 어떤 납자(衲子)의 소개로 언양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으로 들어가 49일간 기도하기로 하였다. 사색을 위주로 한 수행을 쌓아 왔던 대신사는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구도 방법을 바꾼 것이다. 이 첫 번째 기도는 숙부인 최섭(崔섭)이 환원하는 바람에 47일만에 중단하고 하산하여 제날짜를 채우지 못하였다.
34세 때인 정사년(1857) 6월에 다시 천성산으로 들어갔다.
내원암에서 좀 떨어져 있는 자연 동굴 적멸굴(寂滅窟)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무사히 마쳤다. 이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대신사는 생계 대책으로 언양군 두동면(斗東面) 봉계리(鳳溪里) 중리(中里) 마을에 용광로 시설을 차리고 철점업(鐵店業, 鎔鑛業)을 경영하였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하였으나 1년이 지나면서 실패를 거듭하여 2년 만인 1859년 봄에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여섯 두락의 논을 담보로 하여 자금을 빌렸던 것인데, 경영이 부실해지기 시작하여 계속 돈을 빌리다보니 채무자가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결국 문을 닫게 되자 이들은 여섯 두락의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대신사를 괴롭혔다. 결국 소장을 써서 채권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문제를 관에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관에서는 돈을 빌려준 순서대로 청산토록 판정하였는데, 나중에 빌려준 채무자는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되어 그 행패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빚으로 집도 넘어가고 거처할 곳이 없게 되자 신세타령이 절로 나왔다.
"어려운 팔자를 헤아려 보니 춥고 굶주릴 것이 염려되었으며, 나이 사십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이루지 못한 것을 탄식치 않으랴. 거처를 정하지 못했으니 누가 천지를 넓다고 말했는가. 하는 일마다 어긋나 이 한 몸 감추기 어렵게 되니 자신이 가련하다"고 한탄하였다. 대신사는 36세 되던 1859년 10월에 경주 용담의 낡은 옛집으로 돌아갔다.
이삿짐을 푼 뒤 곧 자와 호와 이름마저 바꾸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자를 도언(道彦)에서 성묵(性默)으로, 호를 수운(水雲)으로 고쳤다. 37세(1860년) 1월(양 2월 4일경)에 입춘을 맞아 구도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졌다. "도의 기운을 길이 간직하면 삿(邪)된 기가 침입하지 못하리라.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입춘시를 써서 벽상에 붙였다.
어둡고 춥던 겨울은 지나가고 만물이 화창한 경신년(1860) 4월 5일(양 5월 25일)을 맞았다. 산과 들은 연두색으로 뒤덮였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훈훈한 바람이 골짜기를 메웠다. 오전 11시경 한울님 말씀이 문득 공중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대신사는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희 집안 운수로다" 하는 말씀이 들려왔다.
"이 말씀 들은 후에 심독희(心獨喜) 자부(自負)로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내 운수 기장하다." 드디어 한울님으로부터 다시없는 큰 길의 가르침을 받는 신비스러운 종교체험을 겪게 된 것이다.
이 때 얻은 체험들을 되새기며 한 해 동안 헤아려 보니 스스로 그러한 이치가 없지 않아 주문을 짓고 법을 만들어 38세 되던 1861년 6월부터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시 신유년을 맞으니, 때는 유월이요 절기는 여름이었다. 어진 벗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먼저 법을 정하니, 어진 선비들이 물어왔으며 또한 포덕하기를 권하였다. 가슴에 불사약을 지녔으니 그 형상은 궁을이요, 입으로 장생의 주문을 외우니 스물 한 자이니라.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아들이니 그 수가 그럴듯하며, 자리를 펴고 설법하니 그 재미가 그럴듯하도다"고 하였다.
7월에 이르자 뜻밖에 사방에서 찾아오는 이가 줄을 이었다. "통개중문(洞開重門) 하여두고 오는 사람 가르치니 불승(不勝) 감당 되었더라. 현인군자 모여들어 명명기덕 하여내니 성운성덕 분명하다"고 하였다. 대신사는 이들에게 창조적 순환사관의 논리로 새 세상의 도래를 알려 주었고,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신(神) 관념을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가치기준을 밝혀 주었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 또한 전해주었다.
8월에 이르자 고루한 유생들과 관원들은 대신사를 지목하기 시작하였다.
한울님, 즉 천주(天主)를 신앙한다는 점을 들어 천주학쟁이로 몰아간 것이다. 10월에는 경주관아에서 대신사를 불러다 사술(邪術)로 혹세무민한다며 활동 중지 명령을 내렸다. 민중을 대하지 않으려면 경주 땅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11월 초에 이르러 장기(長 )의 제자 최중희(崔仲羲)를 대동하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세상을 능멸한 듯 관장을 능멸한 듯 무가내라 할 길 없네, 무극한 이 내 도는 내 아니 가르쳐도 운수 있는 그 사람은 차차차차 받아다가 차차차차 가르치니 내 없어도 당행일세. 행장을 차려내어 수 천리를 경영하니 수도하는 사람마다 성지우성 하지마는 모의 미성 너희들을 어찌하고 가잔말고" 하며 길을 떠났다.
"사람마다 낯이 설고 인심풍속 하는 거동 매매사사 눈에 거쳐 타도타관 아닐런가 … 동지섣달 설한풍에 촌촌(村村) 전진 하다가서 일소일파 하여보세"라고 하여 어간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한 달 반 동안 여러 곳을 거쳐 12월 중순께 전라도 남원(南原) 땅에 도착하였다.
광한루 옆에서 한약상을 하는 서형칠(徐亨七)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공윤창(孔允昌)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게 되었다. 12월 그믐에는 교룡산성(蛟龍山城) 덕밀암(德密庵)으로 들어가 자리잡았다. 임술년(1862) 새해를 맞아 <권학가(勸學歌)>와 <동학론(東學論)>을 지었으며 암자를 은적암(隱跡庵)이라 이름하고 6월까지 체재하였다. 이곳을 떠나기 전인 6월에 <수덕문(修德文)>과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를 지었다.
남원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서형칠, 공창윤, 양국삼(梁國三), 서공서(徐公瑞),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에게 전도하였고 전주군 신모(申某, 이름 미상)가 대신사께 내알하여 입도하였다 한다. 그리고 인근 임실(任實)과 전주(全州), 고산(高山), 진산(珍山), 금산(錦山) 등지에도 왕래하며 활발히 포덕을 하였다. 대신사가 경주로 돌아간 뒤에도 이곳 도인들은 멀리 경주까지 왕래하면서 오랫동안 도맥을 이어 왔다.
대신사는 남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학을 동학(東學)이라 선포하였다.
동학은 서학을 물리치기 위해 창도된 것이라고들 하나 이 세상에 다른 종교를 배척하기 위해 대항 종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대신사는 자신의 신념을 무극대도 또는 천도(天道)라고 하였다. 동학이란 명칭은 포덕 후 반년이 지나서 "도는 비록 천도라 하지만 학은 동학이라"고 하여 비로소 자신의 학을 동학으로 선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39세 때인 임술년(1862) 7월에 남원으로부터 경주로 돌아왔다.
관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용담으로 가지 않고 서면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가서 머물렀다. 용담 집에는 남원에서 지은 글과 노래 두 편을 보내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8월이 되자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9월에 이르러서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서면 일대에 길이 메어질 정도였다.
임술년(1862)에는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나 세상이 시끄러웠다. 경주 관아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세태를 감시였다. 그러던 차에 대신사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는 보고를 받은 부윤은 영장을 시켜 9월 29일에 대신사를 체포토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학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수백 명에 이르게 되자 당황한 것은 부윤이었다. 사흘 뒤 10월 4일경에 5∼6백 명이 떼지어 영장에게 항의하자 민란으로 발전할까 두려워 닷새 째인 10월 5일에 서둘러 석방하고 말았다.
용담으로 돌아온 대신사는 10월 14일자로 통문(通文)을 띄웠다. "이 훌륭한 도가 서양 오랑캐의 학과 같이 취급된다면 수치스러움이 절실하지 않으랴. 어찌 예의를 숭상하는 향중에 섞일 것이며 어찌 우리 집안의 가업에 참여할 수 있으랴. 이제부터는 비록 친척의 병이라도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 것이며 앞서 전도한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은밀히 조사하여 이 뜻을 알려주어 도를 버리도록 하여 다시는 욕을 보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용담에 오래 머물러 있을 형편이 못되어 떠날 채비를 하였다.
신사(崔慶翔)에게 머물 곳을 마련하라고 부탁하여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11월 9일 흥해 매곡동(梅谷洞) 손봉조(孫鳳祚)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젊은 제자들이 찾아옴에 따라 활기를 되찾아 동해안 여러 고을에 포덕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대신사는 대구, 신령(新寧), 영천, 청하(淸河), 영덕, 영해 등지를 순회하였다.
직접 다니며 가르쳐 보니 지역이 넓고 도인수도 많아 혼자서 가르치기에는 벅찬 것을 느끼게 되었다. 교단을 조직하여 도인들을 관리, 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12월 26일 납일(臘日)에 접주(接主)를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동학의 교단조직은 이 때에 처음 이루어졌다. 손봉조의 집에서 30여 개의 접(接)을 공식화하고 각 접에 접주를 임명한 것이다.
계해년(1863) 3월초까지 각 접을 순회하던 대신사는 용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용담에 돌아가면 다시 탄압이 있으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먼 장래를 위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일반 도인들은 아직 동학의 신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용담으로 돌아가 대대적인 교화사업을 벌일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대신사가 1893년 3월 9일에 용담으로 돌아오자 민중은 또다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뒤에 도차주(道次主)의 중책을 맡았던 영덕 직천(直川)의 강사원(姜士元, 洙)도 4월에 찾아와 입도하였다. 한편 각 접에서는 도인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여 용담에 모이게 하였다. 6월부터는 개접(開接)이라 하여 한 번에 30∼40명씩 동원되어 4∼5일씩 묵으면서 체계적인 교화를 받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각지에서 동학 활동이 활발해지자 유생들은 7월 중순부터 서원 단위로 조직적인 동학 배척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대신사는 7월 23일에 통문을 띄워 파접(罷接)을 명하고 모이지 말도록 하는 한편 40∼50명이 모인 자리에서 수제자인 최경상(海月 崔慶翔, 자는 敬悟, 1827∼1898)을 불러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이라는 직책을 맡겼다. 북도중은 경주 북쪽 지역을 말한다. 아마도 경주 남쪽은 남도중(南道中)이라 하여 대신사가 직접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생사적(大先生事蹟)}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선생께서 몸소 탄식하며 노여운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노기를 가라앉히고 부드러운 말로 진실로 성공자는 가는 법이니라. 이 운을 생각하니 그대를 위해 나온 것이다. 신중히 처리하여 나의 훈계를 어김없게 하라" 하였다.
최경상은 흥덕(興德), 청하(淸河), 영덕(盈德), 영해(寧海), 평해(平海), 울진(蔚珍), 영양(英陽), 안동(安東), 진보(眞寶) 등지에 많은 포덕을 펼쳐 사실상 북도중의 주인 역할을 하여 왔다. 그를 북도중 주인으로 임명한 것은 후계자 선정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20여 일이 지난 8월 14일에는 37세인 최경상에게 도통(道統)까지 넘겨주었던 것이다.
추석을 지내고자 8월 14일에 스승님을 찾아갔던 최경상은 "이 도는 너를 위해 나온 것이다"라며 도통을 물려주고자 하였다. 당황한 신사는 안절부절하였으나 스승님은 "성공자는 가는 법이다(成功者去也)"고 하면서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하였다. 즉 이제부터는 네가 대도의 중임을 맡아 이끌어야 한다고 부탁한 것이다. 40세인 스승이 37세인 제자를 서둘러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정부의 탄압이 점점 심해져 오기 때문이었다.
1863년 9월이 되자 각지 유생들은 동학을 비난하며 정부가 엄금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들은 동학을 "금수같은 야만의 도(夷狄禽獸之道)"라고 몰아붙였으며 상주 도남서원과 옥성서원(玉城書院), 우산서원(愚山書院)에서는 동학 배척 통문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통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요망한 마귀와 같은 흉칙한 무리들이 하는 짓은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 분명한데, 옛날에는 이 땅(상주)에 감히 들어와 어정거리지 못했다. 이 어찌 매우 한심스러운 처지가 아닌가. … 그 동학이란 것은 바로 선과 악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싹을 어지럽히는 가라지 잡초와 같다. 이제부터 햇빛을 못 보게 뽑아 없애며 어리석음을 없애야 한다. 이 어찌 우리들의 급선무가 아니겠는가.
… 귀천이 같고 등위의 구별이 없으니 백정이나 술장사들이 모이며, 남녀가 혼입하여 부녀자들 품행이 단정치 못하니 원광자(怨曠者,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인다. 좋은 재화를 유무상자(有無相資)하니 궁핍자들이 기뻐한다. 마침내 도당을 널리 모으는 일을 첫 번째 업으로 삼게 되니 마을에 거(居)하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을 모두 휩쓸며, 향리에 거하게 되면 온 향리를 휩쓸고 만다. 차례 차례로 전해져서 그들의 세력은 하늘을 뒤덮을 것 같으며, 장각(張角)을 36방에 배치하고 교주를 받들며, 우두머리는 숨어서 장차 사목(司牧, 지방관)의 권한까지도 빼앗아 마음대로 행사하게 될 것이다.
유생들은 동학이 서학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동학과 동학도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몰아세웠다. 하층 민중들뿐만 아니라 지식층 인사들과 양반신분인 이들도 동학교문에 들어가 스승님을 성인으로 모시며 그 가르침인 사인여천의 신조를 실천하며 양반 상놈의 신분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앞장서는 것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8월에 <도덕가(道德歌)>를 짓고 이후에 <흥비가(興比歌)>를 지었다.
어느덧 10월 28일이 되어 40세 탄신을 맞게 되었다. "선생은 원래 연회를 베푸는 것을 마음으로 거북스럽게 여겼으나" (신사를 비롯한) 제자들이 은밀하게 준비하여 영덕접에서 큰 잔치를 마련하였다. 잔칫상을 받은 스승은 수저를 들면서 "세상에서 나를 천황씨라 하리라"고 하였다. 천황씨란 문화 전시대에서 문화 시대를 연 최초의 임금을 말한다. 대신사는 자신이 새 세상을 다시 열었다는 의미에서 천황씨임을 자처한 것으로 해석된다.
잔치 상을 물리고 난 대신사는 제자들에게 <흥비가>를 일일이 강(講)을 받고 나서 며칠 전에 꾼 이상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에 태양의 살기가 비치더니 불로 변해 내 허벅지 위에 사람 인(人) 자를 오래도록 그리었다. 깨어나서 허벅지를 살펴보니 보라색 흔적이 한 점 남아 3일 동안이나 지워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꿈 이야기는 머지않아 화가 미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암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의하면 앞으로 처신하는데 신중하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 천운은 순환하여 무왕불복하는데 내가 천명에 의해서 오만 년의 무극대도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내 집안의 성덕뿐만이 아니로다. 옛날에도 듣지 못하고 지금에도 듣지 못하던 사리(事理)요, 옛날에도 비할 수 없고 지금에도 비할 수 없는 도법이라. 아??, 세상 사람들이 도를 험담하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도인들은 경건하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11월초에는 마지막으로 <불연기연장(不然其然章)>과 <팔절구(八節句)>를 지었다. {수운문집}에는 "주동접(鑄銅接, 盈德) 전시황(全時晄)이 팔절척대(八節隻對)에 응한 날짜가 11월 13일이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팔절>은 11월 초순에 지은 것이 분명하며,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도 <불연기연>을 먼저 짓고 <팔절>을 다음에 지었다고 했으므로 모두 11월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불연기연>은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그러하지 않은 측면(不然)과 그러한 측면(其然)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불연이란 단정짓기 어려운 측면이요 기연이란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측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불연은 근원을 따져 들어가는 '소자(所自)'의 측면이요, 기연은 나타난 그대로인 '소견(所見)'의 측면이라 하였다.
<불연기연>은 생명체계의 근원을 따진 글로 여겨진다.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기연 살펴내어 부야흥야(賦也興也) 비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 하여 생명체계의 높은 차원에 이른 심경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에 <팔절>을 지었는데 <팔절>은 여덟 가지 글자를 골라 정의한 글이다. 즉 명(明), 덕(德), 명(命), 도(道)와 성(誠), 경(敬), 외(畏), 심(心)의 여덟 가지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자들은 이미 불도나 유도에서 많이 사용하고 해석한 낱말들이다. 대신사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뜻을 풀이한 것이다.
11월 중순경에 결시(訣詩) 하나를 지었다.
이 결시는 동해안 지역에서 유행했던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당시 동해안 교도들은 온 몸에 물집이 생기고 가려운 증상을 나타내는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특히 동학도들에게만 전염되어 일반인들은 동학에 들어가려도 이 피부병 대문에 내키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 대책을 대신사에게 청원했던 것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앞서 선생께서 풍습(風濕)을 앓았는데 구슬 같은 물집이 온몸에 두종(痘 )처럼 생겨 통증은 없었지만 가려움이 심했다. 이후 북도중에 크게 번져 남녀와 노약자가 풍습으로 수행을 전폐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대신사가 먼저 앓았으며 전염이 되어 영해지방 도인들에 옮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날 영해 접주 박하선(朴夏善)이 찾아와 이런 사실을 고하자, 돌아가서 한울님에게 올리는 소지(所志=陳情書)를 지어 오라고 하였다. 박하선이 진정서를 준비해 오자 "한울님의 명교를 받아 해답을 얻어내리라"며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얻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어려우나 실지는 어렵지 않다. 마음을 온화하게 하고 기운을 온화하게 하여 만물이 화하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후 영해지방에는 피부병을 앓는 이가 없어졌다고 한다.
11월 하순경에 관의 지목은 더욱 심해졌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이 때 사방이 시끄럽고 인심도 빗나가 세상은 본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양학(洋學)이 널리 퍼지니 믿을 수 없는 허무한 말들이 돌아다녔다. 세인들은 단지 음해하는 단초로만 알고 … 동도(東道)의 이치를 모르고 서학에 들어가 해를 끼치니 안타깝도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랴. 집에 들면 마음으로 아니라 하고 나오면 길거리에서 수군거고 있으니 막아내기 어려워 마음이 두렵도다"고 하였다.
정부는 10월 20일경에 대신사를 체포하기로 이미 결정하고 11월 20일에는 정운구(鄭雲龜, 龜龍)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였다. 무예별감 양유풍(梁有豊)과 장한익(張漢翼), 그리고 좌변포도군관 이은식(李殷植)과 종자 고영준(高英晙) 등을 거느리고 22일에 경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과천, 양지, 장호원, 충주 숭덕, 보안, 문경 요성(堯城)을 거쳐 유곡(幽谷)에서부터 경주 인근 고을에 이르기까지 매일처럼 탐문하였다.
그는 장계에서 문경 새재를 넘자 고을마다 동학도들이 극성스럽게 움직였다고 하였다. "거의 날마다 동학 이야기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모두 동학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운구는 장계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새재에서 경주까지는 4백여 리이며 고을이 십 수 개가 있었다.
거의 날마다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경주 인근의 제읍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했다. 주막의 아낙네와 산골의 초동들까지도 … 위천주(爲天主) 또는 시천지(侍天地: 侍天主의 잘못)라는 글을 외며 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물든지 오래여서 극성스럽게 된 것을 알겠다.
12월 5일경에 경주로 들어온 정운구 일행은 시장과 사찰 등을 찾아다니며 철저히 탐색하였다. 9일 밤이 되어 대신사를 체포하기로 결심하고 10시경에 경주부 교졸 30명을 출동시켰다. 곧 용담으로 달려가 10일 새벽 1시경에 도착하여 포위한 다음 일제히 습격하였다. 대신사와 제자 23명은 그들이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피를 흘렸다.
교중 기록에 의하면 9일 오후에 경주 도인이 달려와 조정에서 선생님을 체포하러 내려 왔다고 알렸다 한다. 스승님은 자신이 피신하면 많은 도인들이 시달릴 것을 생각하여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한다. 김기전(小春 金起田)은 경주 김정설(金鼎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경주 … 형산강변(兄山江邊)의 어떤 나무 밑에 얽매어 놓아두었는데 얼굴에는 전면이 피가 되어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 체포된 신사(수운 선생)는 사닥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
일단 경주 진영에서 일일이 신원을 확인한 다음 이튿날인 11일 아침에 대신사와 이내겸(李乃謙)만 포박하여 말에 태워 서울로 압상(押上)하게 되었다. 손발에 형구를 채워 말 등에 오르니 그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때는 엄동설한인 12월 중순이었다. 영천, 대구, 선산, 상주, 화령, 보은, 청안, 직산, 오산을 거쳐 과천으로 올라갔다. 12월 22일경 과천에 당도하니 철종(哲宗) 국상으로 한강을 건널 수가 없어 며칠을 머물러야 하였다.
12월 25일경 조정으로부터 "경상감영으로 돌려보내 심문하여 죄의 경중을 가려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튿날 판교, 양지, 장호원, 충주 숭덕, 보안, 문경 요성의 노순으로 유곡(幽谷)에 이르렀다. 그믐이었으므로 사흘간 머물며 신정을 보내고 나서 낙동, 금호를 거쳐 갑자년(1864) 1월 6일에 대구 감영에 도착하였다.
경상감영은 명사관(明査官)으로 상주목사 조영화(趙永和)와 지례(知禮)현감 정기화(鄭 和), 산청현감 이기재(李沂在)를 선임하였다. 이들은 1월 20일부터 경주옥에 수감된 제자와 박씨 사모님 그리고 큰아들 인득(仁得, 崔世貞)을 대구로 이감시켜 심문에 들어갔다. 1개월간이나 계속된 심문은 혹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신사는 전후 네 차례의 심문을 받았으며 2월 20일 마지막 심문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야 하였다.
관은 수제자로 최자원(崔子元), 강원보(姜元甫), 백원수(白源洙), 최신오(崔愼五), 최경오(崔景五) 등 5명을 거명하였다. 그 중 최자원, 강원보, 백원수(白士吉)는 체포했으나 북도중주인인 최경오(崔景悟, 慶翔)는 체포하지 못하였다.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신사를 체포해야 하는데 소재를 몰랐으므로 대신사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감옥으로 돌아온 대신사는 시 한 수를 남겼다. "물위에 등불을 밝히니 혐의할 틈새가 없고. 기둥은 마른 것 같지만 그 힘은 남아 있어라"는 시였다. 서학으로 몰아 세우나 나에게는 혐의할 틈새가 없으며, 비록 나를 죽이겠지만 그 힘은 남아 있으리라는 뜻이다.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은 심문 결과를 조정에 보고하니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복술(福述)은 본시 요망한 종류로서 감히 황당한 술수를 품고 주문을 만들어 요언(妖言)으로 부추기며 천주(天主)를 위한다고 말한다. 서양을 배척한다면서 오히려 사학(邪學)을 도습하여 포덕의 글을 만들었다. 고로 거짓으로 꾸며 음으로 불순한 생각을 꾀하였으니 궁약(弓藥 靈符)을 비방이라 하고 칼춤과 검가를 퍼뜨려 흉악한 노래로 평세(平世)에 난리를 걱정토록 하여 남몰래 취당하였다. … 그 술책은 하내풍각(河內風角)이요 … 후한(後漢)의 미적(米賊)이라 법이 통치 않으니 조금도 허용하기 어렵다.
조정은 서학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을 적용시켜 효수 경중(梟首警衆)하라고 명령하였다. {일성록}에는 대왕대비가 2월 하순에 묘당에서 서헌순의 장계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뒤이어 3월 2일에는 처리한 결과를 집행하도록 명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은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크리스트교)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 것이다. 세상을 현혹시키고 어지럽히니 엄벌로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 법을 세울 수 없다"는 교지를 내린 것이다. 형량은 다음과 같았다.
대신사는 효수경중(梟首警衆)하고, 강원보(姜元甫), 최자원(崔子元)은 엄형 2차 후 절도(絶島)에 정배 보내 종신케 하고, 이내겸(李乃謙), 이정화(李正華), 박창욱(朴昌郁), 박응환(朴應煥), 조상빈(趙常彬), 조상식(趙相植), 정석교(丁錫敎), 백원수(白源洙)는 엄형 2차 후 원지에 정배 보내고, 신덕훈(申德勳), 성일규(成一奎)는 엄형 1차 후 정배 보내고, 나머지 죄수들은 도신(道臣)이 처리하라.
대신사는 결국 41세의 나이로 갑자년(1864) 3월 10일에 대구 남문 앞 관덕당(觀德堂) 뜰에서 참형 당하여 순도하였다. 대신사가 활동한 기간은 1860년 4월에 득도한 다음 1년 후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겨우 2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남긴 글은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한글로 된 가사 8편(龍潭諭詞) 및 시문 몇 편이 있다. 묘소는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귀미산(龜尾山) 줄기에 있다.
2. 종교와 도학모든 신념의 틀은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독자적인 정의를 내리게 마련이다. 종교학이나 종교 행정 분야에서는 연구와 행정의 범위를 정할 목적으로 공통점들을 추려내어 가설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종교 문화현상의 범위를 정해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행정 대상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정의는 서구 종교학자들이 처음으로 시도하였으며 종교 문화현상은 주로 중동이나 서양의 종교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종교의 정의는 하도 많아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기가 어려우나 중동과 서구 종교 문화현상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들 종교 문화현상의 공통점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었다. 'religion'의 개념에서 보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없는 신념체계는 종교가 아니다. 이들은 크리스트교를 원형으로 삼아 종교의 개념을 정의했던 것이다. 때문에 19세기초에 서구적인 종교 개념을 받아들인 동양에서는 전통적 신념체계들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진독수(陳獨秀)는 1916년에 유도를 국교로 만들자는 강유위(康有爲)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유도는 신과 사후 세계와 종교적 의례가 없으므로 종교가 아니다"고 하였다. 'religion'의 개념으로 보면 유도뿐만 아니라 원시불도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신념들은 종교라고 할 수 없다. 동양적인 신념들은 신을 내세우지 않고 수행을 주로 하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단일화 된 'religion'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종교학회 로마회의(1990)에서도 단일한 의미의 종교개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일본의 종교학자 키시모토(岸本英夫)는 1962년에, 종교란 "인간 생활의 구극적(究極的)인 의미를 밝혀서, 인간 문제의 구극적인 해결과 관련이 있다고 사람들에 의해 믿어지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문화현상이다. 단 종교의 영위와 관련하여 신 관념이나 신성성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정의하였다. 서구적인 종교의 정의에 동양적인 신념 체계를 반영시켜 절충한 것이다.
동양에도 서구의 종교 개념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신념의 틀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도와 학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왔다. 우리 나라에서도 1876년 개항 이전까지 신념의 틀을 도라 하여 유도, 불도, 선도, 서도(西道)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수행적인 측면을 지칭하는 말로 유술(儒術, 儒學), 불법(佛法), 서학(西學), 성교(聖敎), 선술(仙術)이라 하여 학, 법, 교, 술 등의 낱말을 사용하였다. 도는 신념의 틀을 이르는 말이요, 학, 법, 교, 술은 종교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일제 시대를 거쳐 해방 후 미군과 더불어 서양 종교문화가 휩쓸고 들어오면서 전통적인 도와 학의 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서구적인 종교개념만이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유도, 불도, 선도라고 하면 부자연스럽게 들리고 유교, 불교, 도교라고 해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끔 되고 말았다. 결국 동양적인 신념들을 이해하는 데 혼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동양의 도는 우리말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오솔길, 큰길, 산길, 물길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길도 도요, 우주 천체가 움직이는 법칙의 길이나 식물과 미생물, 동물이 스스로 조직하고 복제하며 생성 소멸하는 이치의 길도 도라고 한다. 즉 눈에 보이는 길도 도요, 눈으로 볼 수 없는 길도 도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 무수히 있는 길들을 동양에서는 도라고 총칭하였다.
도에는 크게 나누면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있다고 하였다. 즉 천체나 자연의 길을 천도라 하였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나 행해야할 인륜의 길을 인도라 하였다. 천도의 개념은 삼라만상이 이루어지게 된 근원이며 생명의 뿌리로 이해되어 왔으며, 인도의 개념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당위로 이해되어 왔다.
{도덕경(道德經)}은 길(道)이란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 만물을 생성하고 형성시킨 근원이 되므로 만물의 어머니(萬物之母)가 된다"고 하였다. "도는 분명히 실재하지만 너무도 신묘하여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그저 이름하여 길이라 한다"고 하였다. 노자의 도는 우주 근원에 실재하는 원리와 같은 것을 일컫는다.
{중용(中庸)}에서도 "하늘과 땅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랜 것이다"고 하였다. 천지의 도는 하도 무궁무진하여 언어로 규정지을 수 없어 그저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중용}은 {도덕경}과는 달리 천도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요, 그 성품에 따르는 것이 도요, 도를 닦는 것이 교(敎)라"고 하였다.
우리의 성품은 하늘이 준 것이며 이 성품에 따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도가의 도 개념과는 달리 인륜의 도나, 사람이 지켜 행해야 할 도덕적인 규범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 주자(朱子)에 이르면 우주와 인간세계를 관통하는 질서의 근본원리를 리(理)라고 하였으며 유가에서는 이 리를 도라고 하였다.
대신사도 천도의 측면과 인도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보고 있다. <논학문>에서 "무릇 천도란 형상이 없는 듯하나 자취가 있다(夫天道者 如無形而有迹)"고 하였고, <수덕문>에서는 "만물을 낳고(元) 키우고(亨) 이루고(利) 거두는(貞) 것은 변함없는 것이 천도의 모습이다(元亨利貞 天道之常)"고 하였다. 앞서 얘기한 하늘의 도 개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무극대도 또는 천도라는 개념에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바른 길을 지칭하는 뜻이 들어 있다. 무극대도 또는 천도는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길이요, 사회적으로 이루어 내야 할 길이다. 개인이 지켜야 할 길에 대해서 "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나의 신념이 한결같은가 헤아려 보라. 도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거든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도요 다름이 아니다"고 하였다. 개인이 참되고 뜻 있고 바르게 사는 길을 말하고 있다.
공동체적인 길에 대해서는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길이 바로 천도이며 무극대도라 하였다. 대신사에 의하면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이 무극대도이며 천도라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마르크스의 신념도 도의 범주에 들어가며 손문의 삼민주의도 도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된다. 개인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신념체계라면 모두가 도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학(學, 法, 敎, 術)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동학, 서학, 유학 등으로 이름하는 학은 "객관적 사실을 가치 중립적으로 통일되게 규명하려는 학문적인 학"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도를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는 것"을 학이라 하는데, 대신사는 특히 "도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을 학이라 하였다. 동학의 학은 넓은 의미에서 무극대도를 닦(修)고 익히(習)고 행(行)하는 수행과 한울님을 믿고 섬기고 위하는 신앙을 모두 합친 종교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대신사는 <좌잠(座箴)>에서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니 많은 말로 뜻풀이 할 필요가 없다. 다른 도리가 아니라 성하고 경하고 신하는 석자에 있다"고 하였다. 도(길)를 바로 알(信)고, 내 것으로 만들어(敬受), 실천하는(誠) 것이 학이요, 법이요, 교요, 술이라는 말이다. 즉 신념의 틀을 바르게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학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도와 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동양의 신념체계는 서구의 종교적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일 종교라는 잣대로 보면 동양의 신념체계들은 불완전한 종교가 되고 말며 심할 경우에는 종교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한다. 동양 전통의 신념체계는 도와 학의 개념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종교개념 보다는 도와 학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특히 대신사의 도와 학의 용어는 종교 개념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사용된 용어이다. 따라서 동학을 바로 이해하려면 종교의 개념을 잠시 유보하고 도와 학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논학문>에 "도는 천도라 하지만 학인즉 동학이다"고 하였고 크리스트교도 서도 또는 서학으로 호칭하였다. 서구의 종교도 도와 학의 개념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개별 신념체계를 종교개념이나 도학의 개념으로 일반화시켜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모든 신념체계들은 독자적인 시각에서 과제상황을 설정하였으며 그에 따른 해답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특성을 무시하고 일반화시킨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신념체계가 제기한 과제상황과 얻어진 해답의 체계를 있는 그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불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와 유도의 공자를 예시해 보면 적절할 것 같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 전 654년에 인도 북부의 작은 나라 카비라 성에서 태어나서 80세까지 살았다. 왕궁생활을 떨쳐버리고 구도에 나선 것은 29세 때였고 깨달은 것은 35세 때였다. 그의 과제상황은 인간의 기본조건인 생로병사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데 있었다. 당시 인도에는 원환적(圓環的) 순환관과 연기법(緣起法)이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이런 사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는 것이 그의 구도적 과제상황이었다.
히말라야 산중에 들어가 6년간 고행 끝에 드디어 해탈의 길을 찾아내었다.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로 이루어진 고집멸도의 수행방법이 곧 해답의 길이었다. 인간은 집착과 애욕이 뭉쳐(苦集) 고통이 생기므로 이 집착과 애욕의 욕망을 단멸시키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욕망을 단멸시킨다는 것은 삶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끝내 해탈의 길을 찾아냈으니 팔정도(八正道)가 바로 그것이었다. ① 바르게 보고(正見) ② 바르게 생각하고(正思, 正思惟) ③ 바른 말을 하고(正語) ④ 바르게 행하고(正業) ⑤ 바르게 살고(正命) ⑥ 바르게 힘쓰고(正勤,正精進) ⑦ 바르게 염원하고(正念) ⑧바르게 마음의 자세를 정하는(正定) 것이 팔정도이다. 이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해탈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른 생각이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생각이다. 만물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며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치를 깨닫고 나의 존재에 집착하지 말고 털어 버리는 것이 바른 생각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생로병사라는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기원 전 552년에 노나라 창평(山東省曲阜)에서 태어나 74세인 기원 전 479년까지 살았다. 당시는 춘추시대의 말기로 사회는 몹시 혼란하였다. 공자는 그 원인을 정치와 사회규범이 무너진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공자의 구도적 과제상황은 바른 정치와 건전한 규범을 세우는 일, 즉 '정명(正名)' 또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였었다.
공자는 30세에 뜻을 세우고 50세에 노나라 요직을 담당하여 꿈을 실현해 보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56세에 노나라를 떠나 14년간에 걸쳐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통치자들을 설득하였다.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국왕이 하나도 없자 69세 때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정치를 담당하는 지배자들은 선왕의 어진 정치와 예를 본받아 그 정치를 되살리는 동시에 건전한 가정과 건전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특히 예악과 법도가 엄정한 주(周) 시대의 어진 정치를 그대로 본받아 치국평천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꿈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싯다르타와 공자의 예에서 보듯이 과제상황에 따라 해답이 다르므로 일반화된 도학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세계종교학회 로마회의에서 언급된 것처럼 단일한 의미의 종교개념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동학을 바로 이해하자면 대신사의 구도적 과제상황과 그 해답의 체계를 낱낱이 접근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대신사의 독특한 역사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3. 창조적 순환사관대신사는 21세 때부터 장사 길에 나서 전국을 누비다가 10년 만에 온 세상이 병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종말상도 보았고 1840년을 전후하여 영국이 도발한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도 들었다. 또한 중국의 왕조가 해체기에 접어들었고, 서양 문명도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아서라 이 세상은 요순지치(堯舜之治)라도 부족시(不足施)요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不足言)이라" "유도 불도 누 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평생에 하는 근심, 효박한 이 세상에 군불군 신불신과 부불부 자부자를 주소간 탄식하니 울울한 그 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 사람 전혀 없어 처자산업 다 버리고 팔도 강산 다 밟아서 인심풍속 살펴보고…"라 하여 주유천하의 동기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정치와 도덕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경제가 핍박할 대로 핍박해졌으니 답답한 마음을 억제할 길이 없어 팔도 강산을 두루 밟아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생계의 어려움도 해결할 겸 장사를 하면서 팔도 강산을 누비었다.
관변기록에는 무명(白木)장사를 했다 하며 교중 기록에는 무술 공부를 하다가 활을 거두어들이고 반천(飯泉, 장사)길에 나섰다 하였다. 돌아다니다 집에 와 머물고 다시 돌아다니기를 10년간이나 계속하였다.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대신사는 31세 때(1854년)까지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제일 큰 충격은 조선왕조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반상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졌고 세도정치는 온갖 횡포로 점철되었으며 수취체제는 민중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있었다. 한편 서양 세력들이 앞다투어 동방세계를 침범해 들어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영국은 중국의 남부 광동(廣東)에 거점을 잡고 아편을 밀수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의 아편 밀무역은 1837년에 3만4천 상자에 이르러 청국의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많은 국민이 마약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은 1838년에 아편 금수조치를 취하고 아편을 몰수하는 강경책을 취하였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1840년 7월부터 중국을 공격하였다. 연패를 거듭한 중국은 영국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 엄청난 배상과 함께 여러 항구를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아편 몰수 보상금 6백만 달러, 공행(公行) 부채 3백만 달러, 영국 군함 원정 비용 1천 2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주유팔로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왕조의 봉건체제가 해체기에 이르렀다는 점이요, 둘째는 서양 침략세력이 동방을 무력으로 침공함으로써 동양 각국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점이요, 셋째는 우리 문화를 지탱해 왔던 유도·불도가 한계에 이르러 우리 문화가 몰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유도·불도의 몰락을 중시한 것은 문화와 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도의 씨앗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씨앗 역할을 하는 도의 기능이 한계에 이르게 되면 문화도 쇠퇴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문화사가인 도슨(Christopher Dawson)은 "한 사회의 생명력이 종교와 얼마나 밀접하고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종교를 잃어버린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문화를 잃어버린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문화와 도(종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10년간 팔도 강산을 누비던 대신사는 온 세상이 병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깨닫고 돌아다니기를 중단하는 한편 국운을 되살릴 길을 모색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몽중노소문답가>에 보면 "이 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시요,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이라. … 윤회시운 구경하소. 십이 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 개탄지심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고 하였다.
"십이 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이 한마디에는 대신사의 역사관이 들어 있고 구도적 과제상황이 담겨져 있다. 모든 종교와 도는 나름대로의 형이상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 유형은 크게 순환사관, 영원 회귀사관, 발전사관 등으로 대별될 수 있다. 대신사의 역사관은 이 중 어느 하나에 속하기보다는, 순환사관과 발전사관을 합친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할 수 있다.
달이 둥글었다가 이지러지기를 반복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물이 성쇠하며 순환하는 것처럼 역사도 주기적으로 순환한다고 믿는 것이 순환사관이다. 그러나 사막 지역에서는 계절의 순환보다 천체의 운행에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이런 지역에서 천문학(점성술)이 발전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천체는 돌고 도는 영원한 회귀 속에 있을 뿐이므로 인간의 역사도 영원히 회귀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중동 지역과 인도에서 회귀사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서구에서는 종교적인 신념과 18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과학 기술이 혼합하여 발전사관을 형성하였다.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언젠가는 이상사회가 실현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고 믿는 역사관의 토대 위에 과학 기술은 후퇴하지 않고 발전만을 거듭할 것이라는 신조가 더해져 발전사관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면 창조적 순환사관은 어떤 것인가. 대신사는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말 속에 자신의 역사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다시 개벽이란 개념을 분석해 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개벽이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모두 세 번 사용되었다. 한 번은 "개벽 후 오만 년"이라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개벽(開闢)이란 말뜻은 "열었다"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개벽은 열었던 무엇을 다시 연다는 뜻이다. 원래 개벽은 천지 개벽을 이르는 말이다. "개벽 후 5만 년"이라 하였으므로 천지만물이 처음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지구상에 생물이 처음 나타난 것(열린 것)은 35억 년 전이라 하며 사람이 지상에 나타난 것도 150만 년 전이라 한다.
5만년 전이라면 농업사회의 출현을 상정하여 인문 개벽을 생각할 수 있다. 인문이란 인류의 문화이며 쉬운 말로 바꾸면 '삶의 틀'이라 할 수 있다. 즉 개벽 후 5만년이란 삶의 틀이 열린 지 5만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삶의 틀을 문명이라 해도 좋고 문화라 해도 좋다.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는 여럿이 공존한다는 다원론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양 문명, 동양 문명,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불교 문명, 유교 문명 등 지역이나 종교별로 나뉘어 다원화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신사는 삶의 틀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라고 생각하는 점이 특이하다. 지역이나 종교에 따라 나뉜 다원적인 문명과 문화는 전체로서의 삶의 틀에 속하는 하위 개념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틀은 다시 몇 개의 틀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크게 나누면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법률, 규칙, 전래의 습속 및 습관 그리고 도?痔岵? 요소들을 합친 규범적인 틀이 첫 번째 틀이요, 과학과 기술에 의한 생산관계 및 시장관계, 배분관계 등을 포함한 경제적인 틀이 두 번째의 틀이다. 그리고 다양한 음향과 글자, 몸짓과 색채, 공간장식 등을 통한 언어 표현 및 전달수단의 틀이 세 번째 틀이요, 세계와 인간의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방향을 지향시키는 생각하는 틀이 네 번째 틀이라 할 수 있다.
대신사는 이 삶의 틀이 하나의 유기체와 같이 탄생→성장→융성→노쇠→해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순환의 측면은 동양적인 순환관과 통하고 있다. 맹자는 일찍이 왕조의 역사는 일치일란(一治一亂)으로 순환한다고 하였다. 요순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5백년마다 한 번씩 질서가 잡혔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 왕조들은 주기적으로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개벽 후 5만년", "5만년지 운수"라 하여 지난 시절도 5만년이요, 오는 시절도 5만년이라 하였다. 이 5만년을 실수(實數)로 보면 왕조의 순환사관처럼 5만년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순환사관이 된다. 실수로 보지 않고 온 시간의 절반이라는 상징적인 햇수로 보면 해석이 달라진다. 즉 상징수의 5만년이라고 할 때는 질적으로 다른 낡은 것이 새로운 것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는 역사관으로 해석 될 수 있다.
고고학에서는 실제로 문화의 발상 시기를 5만년 전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대신사는 "지난 시절, 오는 시절", "하원갑(下元甲), 상원갑(上元甲)", "전 만고 후 만고", "전 춘추(春秋), 후 춘추(春秋)" 등으로 온 시간을 과거와 미래, 전과 후, 하와 상으로 나누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실수의 5만년이 아니라 온 시간의 절반을 상징하는 5만년을 나타낸 것이다.
소옹(邵雍, 邵康節)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을 예로 들면 대신사의 10만년의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원(一元)을 129,600년으로 잡고 다시 64,800년씩 둘로 나누어 음양(陰陽) 또는 하원과 상원으로 나누었다. 소옹은 12(하루의 시간)와 30(한 달의 날짜)을 기본수로 하여 원회운세설에 따라 일원의 연수를 산정하였다. 이처럼 소옹은 일원 즉 온 시간을 129,600년으로 잡은 데 반해 대신사는 10만년을 온 시간으로 잡았다. 10만년은 어떤 계산에 의해 산출한 수가 아니라 온 시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수인 것이다. 동양에서는 십을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수로 여기고 있다. 십은 온 시간이며 그 절반은 5로써 상징한 것이다.
이 전후와 상하의 절반을 상징하는 5만년의 표현은 창조적 순환사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창조적 순환사관에 의하면 경신년 즉 1860년 4월 5일은 낡은 전반기의 5만년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후반기의 5만년 시대가 시작되는 대전환의 역사적 시점이다. 지금까지의 순환사는 커다란 삶의 틀 속에서 일어나는 잔물결과 같은 변화였다면 이제부터 맞게되는 변화는 지난 시절의 삶의 틀이 완전히 해체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의 틀로 뒤바뀌는 대전환의 변화인 것이다.
그 동안의 사회 변동은 다른 문화와 접촉하거나, 다른 집단에 정복되거나, 과학 기술이 발전하거나,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거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등 여러 요인들이 겹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그 사회의 기본 틀은 변화하지 않고 외형적으로 동일한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변동의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변동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는 것이므로 과거의 변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외적인 요인들이 종합하여 이를 유발시키지만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창조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이루어 낼 수 없는 대변동인 것이다.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생각하는 틀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새로운 삶의 틀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춘하추동의 계절 변동은 자연의 법칙이요 숙명적인 것이지만 어떤 농법으로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는 농부의 주체적 선택에 달려 있듯이 어떤 삶의 틀을 창조하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인 우리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낡은 삶의 틀이 해체되고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려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생각하는 틀을 바꾸어 놓는 일이다. 생각의 틀이 새롭게 바뀌면 이어서 규범의 틀, 경제의 틀, 언어표현의 틀과 교호작용을 일으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틀과 그 밖의 틀은 어느 시점에는 한쪽이 선도적 지위에 있기도 하다가 어느 시점에는 뒤따르기도 하는 교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창조적 순환사관이라 한다. 그 특징은 삶의 틀이, 탄생→성장→융성→노쇠→해체라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일정한 시점에서 낡은 삶의 틀과 새로운 삶의 틀이 대전환하며 이는 새로운 생각의 틀을 갖춘 인간들의 창조적 역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4. 시천주의 신 관념 새로운 삶의 틀의 씨앗이 될 도, 즉 새로운 생각의 틀을 찾아내기 위해 대신사는 31세 때(1854년)부터 6년간의 고행에 들어갔다. 여러 정신적, 육체적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드디어 경신년(1860, 포덕 1년) 4월 5일(양 5월 25일)에 한울님으로부터 새로운 생각의 틀을 얻게 되었다. {용담유사}에서는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라고 하여 새로운 생각의 틀이 될 도를 받아냈다고 하였다.
종교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의 틀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매우 엄숙하였다.
종전의 가치체계들이 전도되는 체험은 너무나 생생하였으나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의 선약(仙藥)을 받아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건져내고 나의 글(呪文)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그것은 천명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William James)에 의하면 아무리 선명한 종교체험이라도 그 내용을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우며 만일 개념화시켜 말로 표현하면 본래의 체험이 변질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체험하는 순간에 지금까지 과제로 삼았던 일들이 일시에 해결된다고 하였으며 체험은 일회적이어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본의 키시모토도 종교체험은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직관성과 실체감을 느끼게 되며, 기쁨이 솟아오른다고 하였다. 종교학자 바하(Joachim Wach)는 세상 모든 것이 조건지어 지며, 무한한 궁극적 실재를 대면하는 실체감이 생기며, 지(知), 정(情), 의(意)의 전인격에 걸친 변화를 나타내며 행동하게끔 강제하는 힘을 느낀다고 하였다.
경전에 나타난 대신사의 종교체험을 보면, ① 천지가 진동하고 무섭고 두려웠으며 마음이 섬뜩해지고 몸이 떨려 정신이 혼미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② 꿈도 아니오 생시도 아닌 여몽여각(如夢如覺)의 상태에 이르러 마음이 순수해지고, 기운이 맑고 바르고 깨끗해지며 한울님 말씀이 생생하게 들려왔다고 하였다.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생전 못 본 물형부(符圖)가 완연하게 나타났다고 하였다. ③ 한울님 마음과 하나되는 순간 과제로 삼았던 일들이 일시에 풀리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충만감이 솟아올랐다고 하였다. ④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으며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솟아올랐다고 하였다. 관련된 글귀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 물구물공 하였어라.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보냐 …
깜짝 놀라 일어났다.
…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 의심치 말고 의심치 말라.
몸이 몹시 섬뜩하고 떨렸으며 밖으로부터는 신령의 기운이 접했으며, 안으로는 한울님의 말씀이 내렸다. …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 너는 이미 무궁무궁한 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닦고 익혀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을 만들어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세상에 빛나게 하리라.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 사월 초 오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성언(成言)할까.
어찌 이리 망극한고 전 만고 후 만고를 역력히 생각해도 글도 없고 말도 없네.
윤회같이 둘린 운수 내가 어찌 받았으며 억조 창생 많은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
무가내라 할 길 없네 사양지심 있지마는 어디 가서 사양하며 문의지심 있지마는 어디 가서 문의하며.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귀미산수 좋은 풍경 아무리 좋다 해도 내 아니면 이러하며 내 아니면 이런 산수 아동방 있을소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기장하다 기장하다 이 내 운수 기장하다.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 후 오만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의 집안 운수로다.
이러그러 안심해서 칠팔삭 지내나니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 … 유도 불도 누천 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 … 일세상 없는 사람 내가 어찌 있었던고. 아마도 이내 일은 잠자다가 얻었던가 꿈꾸다가 받았던가 측량치 못할러라.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아닌가.
종교체험을 한 대신사는 새로운 생각의 틀이 이루어지면서 딴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 체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알 수 있다. 득도 이전인 1859년 10월에 용담으로 찾아오던 대신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절한 것이었다.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 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 마음 비감회심 절로 난다"는 이 대목은 울산에서 용담으로 들어올 때의 처절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종교체험을 겪고 난 대신사에게는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귀미산 일대가 선경으로 변해 있었다.
"좋을시구 좋을시구 구미산수 좋은 풍경 물형?막? 생겼다가 이내 운수 맞혔도다. 지지엽엽 좋은 풍경 군자 낙지 아닐런가. … 아무리 좋다해도 내아니면 이러하며 내아니면 이런 산수 아동방(我東方) 있을소냐. 나도 또한 신선이라 비상천(飛上天) 한다해도 이내 선경 귀미 용담 다시 보기 어렵도다"라고 하였다. 어제 보던 산과, 어제 보던 시냇물과, 어제 보던 하늘과 땅이 아니었다. 쓸쓸하고 어두웠던 용담 골짜기는 일순간에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산천으로 바뀌었으며 선경으로 바뀌어 버렸다.
불교에서는 회심(回心)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재생(再生)이라 한다. 종교체험으로 세상을 보는 시점(視點)이 전도되어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담고 나타났다. 물론 귀미 용담의 자연이 바뀐 것이 아니며 대신사의 생각하는 틀이 바뀐 것이다. 생각하는 틀의 변화는 곧 최고 가치체계인 신(神) 관념으로 나타났다.
경전에 나타난 신 관념을 추려보면 유신론과 다르지 않으며 색다른 점은 내재성을 지닌 생성 과정의 신으로 묘사된 것이다. 한울님은 인격적이며 유일하신 분이며 초월해 있는 분이라는 점에서는 유신론과 다를 것이 없으나 한울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생물)의 몸 안에 모셔져 있는 내재하는 신이며, 완성자로서 초월해 있는 신이 아니라 생성 변화해 가는 과정에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내재성을 지닌 생성 과정의 신 관념에 대한 대신사의 생각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울님은 저 높은 초감성계에 계시면서 만물을 수직적으로 규정하는 분이 아니라 이 울 속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 속에 계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라 하여 한울님은 모든 사람의 몸 안에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논학문>에서 모셨다(侍)는 뜻은 모든 생물의 몸 안에 신령으로 계시면서 밖으로 기화(氣化)하고 있는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둘째로 한울님은 무엇을 이루려고 애를 썼으나 아직 못다 이룬 노이무공(勞而無功)한 분이라고 하였다. "내 또한 공이 없어 너를 세상에 내서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치 말고 의심하지 말라." "나도 또한 개벽이후 노이무공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희 집안 운수로다"라 하여 자신의 뜻을 펴려고 애쓰는 과정에 있는 분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 관념은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요, 지금도 비할 데 없고 옛날에도 비할 데 없는 도법이니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가 대신사의 신 관념에서 특이한 점이다. 이런 신 관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천주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시천주에서 "한울님을 모셨다"는 뜻은 무엇인가.
먼저 시천주라는 용어는 "한울님을 잘 모시자"는 말인가, 아니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말인가 하는 것부터 분명히 밝히고 들어가야 한다. "한울님을 잘 모시자"는 말로 알고 시자를 해석하면 잘 모시는 방법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요, "한울님을 네 몸 안에 모시고 있다"는 말로 알고 시자를 해석하면 모셔져 있다는 입증으로 풀이 될 것이다.
<교훈가>에 보면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까"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시천주의 시자는 한울님을 잘 모시라는 뜻이 아니라 "한울님이 네 몸 안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 해석을 보면 "모셨다는 것(侍者)은 신령이 몸 안에 있으며, 밖으로 기화(氣化)하고 있다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옮길 수 없는 사실이라(不移者)고 각기 알고 있다" 하였다. 각지불이자(各知不移者)는 각기 불이자(不移者, 옮길 수 없음)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주목되는 것은 "신령이 몸 안에 있다(內有神靈)"는 표현이다.
신령이란 낱말은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 식물의 예를 보면 씨앗이 자라 제 모습을 하고 있다. 씨앗이 없으면 식물이 생겨날 수 없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씨앗으로부터 생겨났다. 씨앗에는 온 우주의 생명 체계가 압축되어 있다. 신비스러운 조화를 담고 있는 이 씨앗을 신령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한울님 씨앗을 몸 안에 모시고 있다는 뜻에서 내유신령이라 하였다.
다음은 외유기화(外有氣化)이다. 직역하면 밖으로 기화함이 있다는 말이다. 몸 안에 있는 신령이 밖으로 기화하여 드러난다는 뜻이다. 기화라는 용어는 "기화지원(氣化之願)", "기화지신(氣化之神)", "외유기화(外有氣化)" 등으로 사용했다. 기화지원은 한울님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화합하기를 소원한다는 뜻이요, 기화지신은 높은 덕을 간직한 인품을 나타내는 말이다. 외유기화는 씨앗이 자기조직력에 의해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논학문>을 통해서 기(氣)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지(至)는 지극한 경지에 이른다는 지(至)이다.
기(氣)는 허령(虛靈)이 창창(蒼蒼)하여, 사물에 섭리하지 않음이 없고(無事不涉), 사물에 관여하지 않음이 없다(無事不命). 형상이 있는 것 같으나 상태를 표현하기 어렵고(如形而難狀), 생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나 보기는 어렵다(如聞而難見). 이 또한 혼원의 한 기운이다(是亦 渾元之一氣也)."
첫째로 기는 허령창창(虛靈蒼蒼)하다고 하였다.
허령이란 명덕(明德)이 영묘함을 말한다. 서화담(花潭 徐敬德)은 "허(虛)는 곧 기(氣)의 모습이다"고 하였다. 태허(太虛)란 "기가 가득 차서 빈틈이 없는 상태(塞充實無有空闕)"이며 "터럭 하나 용납할 수 없이 가득 찬 상태(無一毫可容間也)"라고 하였다. 허령이란 곧 영그러운 기가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창창은 초목이 무성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기는 초목이 싱싱하게 자라듯이 생명력이 넘쳐흘러 약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창창은 푸르고 푸르다고 표현한 것이지만 생동하는 생명력의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둘째로 기는 무사불섭 무사불명(無事不涉 無事不命)하다고 하였다. 사물에 내재하여 섭리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물을 사물답게 이루어지게 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진순(陳順)은 "기가 이 사물에 이르면 곧 이 사물이 생기고, 저 사물에 이르면 곧 저 사물이 생기니 마치 누구의 분부나 명령에 의한 것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기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조직하며 형성시키는 것을 말한다. 야뢰(夜雷 李敦化)는 기의 무사불섭 무사불명을 자율적 창조력이라고 하였다.
셋째로 기는 여형이난상 여문이난견(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이라 하였다. 기는 분명히 형상이 있으나 말로 그려내기 어려우며, 기는 생동하므로 소리가 들릴 것 같으나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즉 기는 유행(流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언어로 그 상황을 형용하기가 어려우며, 쉬지 않고 생동하므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나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넷째로 기는 역시 만물의 본바탕이 되는 혼원의 한 기운이라(是亦 渾元之一氣也) 하였다.
혼원(渾元)은 "천지의 바탕"을 말하며 일기(一氣)는 오직 하나의 기운이라는 뜻이다. 즉 한 기운이 천지의 본바탕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의 뜻을 생명체에 비유하면 그 뜻이 분명해 진다. 모든 단위 생명체는 자체의 힘에 의해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위 생명체계는 상위 생명체계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 단위 생명체계는 우주적인 생명체계와 하나로 얽힐 때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혼원의 한 기운이라 한 것이다.
지기(至氣)는 곧 생명력이며 동적인 에너지라 할 수 있으므로 기화(氣化)는 단순한 생명력이 아니라 사물을 사물답게 이루어 놓는 자기조직력이다. 즉 생명체계를 압축하여 복제된 씨앗(內有神靈)을 해석하며 형상화시키는 힘이다. 이 자기조직력은 만유의 근저에서 통일적으로 섭리하며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여 나가게 하는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어 물리적 현상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차원의 생명체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비한 힘이기도 하다.
이돈화(1888∼1950)와 백세명(白世明, 1899∼1970)은 교중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일찍이 한울님과 지기를 대우주 대생명체로 보았다. 이돈화는 1924년에 {신인철학(新人哲學)}에서 "만유는 한가지로 대우주 대생명의 표현으로 생물계의 현상과 의식현상은 동일한 생명에 근본을 두는 것이다. 부단히 창조하며 유속(流續)하는 지기의 생명력이 일체의 의식현상과 생명현상의 근저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백세명은 1963년에 {동학경전해의(東學經典解義)}에서 한울님을 대우주 대생명 그 자체로 보았다.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 하신 것으로 보아서 대우주(무궁한 이 울)의 본체생명(무궁한 나)을 한울님의 실체로 규정하였다. 더욱이 대우주의 본체 생명이신 한울님과 지기 본체를 다른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상 지기도 또한 생명체로 확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한울님을 네 몸에 모셨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이 신 관념이 주요한 것은 한울님의 소재를 새롭게 밝혔을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데 있다. 첫째로 지금까지의 이원론적인 생각을 깨뜨려 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수 천년간 이 세계가 초감성계와 감성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믿어 왔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성스러운 세계와 속된 세계라는 도식으로 감성적인 세계와 초감성적인 세계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천(天)이나 상제(上帝)와 같은 최고가치체계들은 저 세상인 성스러운 세계, 초감성적인 세계에 속해 있는 반면에 만물과 사람들은 이 세상인 속된 세계, 감성계에 속해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근거하여 개체 영혼을 숭상하게 되었고 천당과 지옥이 만들어졌다. 사회구조에 있어서도 귀족과 상민이라는 신분제가 정당화되었고 중앙집권제와 가부장제도 등 여러 형태의 피라미드형 위계 구조가 이러한 이원론적 틀 위에 구축되었다.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해 대신사는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라고 하여 초감성계의 가상을 허무지설로 돌렸다. 그리고 최고 가치체계인 한울님은 우리 몸 안에 모셔져 있으므로 가까운 곳을 외면하고 멀리서 취하려하지 말라(捨近取遠)고 하였다.
초감성계의 부정은 개체 영혼의 부정, 내세의 부정으로 통하게 마련이다.
대신사는 고전 종교들이 개체 영혼과 천당 지옥을 주장한 것을 일축하였다. 내세가 있으려면 불멸하는 자아 의식을 가진 개체 영혼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자아 의식은 생물학적인 생명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개체 생명이 죽어버리면 자아 의식도 사라지는 것이다. 개체 영혼설이나 내세설은 모두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유래한 잘못된 생각이다.
대신사는 크리스트교를 비판하면서, "우습다 저 사람은 저희 부모 죽은 후에 신도 없다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 지내며 오륜에 벗어나서 유원속사(唯願速死) 무슨 일고, 부모 없는 혼령혼백 저는 어찌 유독 있어 상천하고 무엇하고 어린 소리 말았어라"고 하였다. 또한 귀신 숭배에 대해서는 "한나라 무고사가 아 동방 전해 와서 집집이 위한 것이 명색마다 귀신일세. 이런 지각 구경하소 천지 역시 귀신이요 귀신 역시 음양인줄 이같이 몰랐으니 경전 살펴 무엇하며…"라고 통박하였다. <논학문>에서도 "귀신 역시 나(한울님)니라(鬼神者吾也)"고 하여 한울님 이외에 어떤 귀신이나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였다.
대신사는 일관되게 살아있는 이 세계 이외의 어떤 초감성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장생론에 대한 설명이다. 한울님은 대신사에게 "내 부도를 받아 질병에서 사람들을 건져내고 내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 나를 위하도록 하면 너 역시 장생하여 천하에 덕을 펴리라"고 하였다. 앞 뒤 문맥으로 보아 죽지 않고 장생한다는 말은 아니다. 즉 "장생하여 천하에 덕을 펴리라"고 하였으니 삶을 통해서 길이 남길 수 있는 어떤 덕을 상징한 말이라고 여겨진다.
이돈화는 {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에서 "내가 늙었다는 것은 나의 본체가 노(老)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며, 죽었다는 것은 나의 본체가 사(死)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색다른 장생론을 폈다. 나의 본체란 영생 불변하는 생명 그 자체를 이르는 말이며 현상이라는 것은 본체가 때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즉 불멸하는 본체 생명은 영원히 장생하는 것이며 살았다, 늙었다, 죽었다는 것은 본체가 어떤 현상에 의지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물에 비유하였는데, 요약하면 물 자체의 본체는 영원히 지속하는 실체이지만 강이나 폭포나 바다라는 현상에 의존해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는 현상으로 나타나면 강이라 하고 절벽을 만나 아래로 떨어지는 현상으로 나타나면 폭포라고 한다. 폭포의 시작은 생(生)이고 폭포가 그치면 사(死)라고 할 수 있다. 생사의 현상은 물 자체가 아니라 의존하여 나타났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장생론은 대신사의 장생론과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신사의 장생론은 생명 본체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개인의 덕이 길이 길이 장생한다는 장생론이다. 이 덕은 은덕으로서 가르침, 예술, 제도, 단체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공들여 길이 남도록 하여 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몸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신 관념은 인간관을 바꾸어 놓았다. 한울님을 몸 안에 모시고 있으므로 사람이 존엄하기가 한울님 존엄하기와 같다는 인내천(人乃天)의 인간관을 자리잡게 하였다. 나아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사인여천의 실천덕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신사는 종의 신분인 두 여인을 며느리와 양딸로 삼았으며 신사는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라 하여 사인여천의 생활지침을 세우게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이상사회의 꿈을 갖게 하였다.
끝으로 생성 변화 과정에 있다는 신 관념은 인간이 스스로 창조적 주체임을 확인시켜주었다. 한울님은 온 천지의 생명체계 그 자체로서 자기조직력에 의해 생성 발전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의 예정설이나 역사의 결정론과 같은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책임 있는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신사의 신 관념은 새로운 생각의 틀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첫째로 이원론적 세계관의 피라미드 구조를 수평적으로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사회구조를 지향하게 하였다. 동위일체란 온 천지의 생명체계와 개체 생명은 한 몸이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말한다. 둘째로 인간을 역사의 창조적 주체로 만들어 책임 있는 선택을 하도록 하였다.
5. 선악의 기준모든 종교는 선과 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선이란 인간 생활을 완성시키며 보편화되도록 힘쓰는 것을 이르는 말이요, 악이란 인간생활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과거에 선이었던 것이 지금에는 악이 되고, 과거에 악이었던 것이 지금에는 선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생각하는 틀이 바뀌거나 시대 상황이 달라지면 선악의 기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대신사가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논학문>에 보면 "한울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면 어찌하여 선악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선악의 기준에 대해 언급하였다. "사람의 품행(德)에는 귀천이 있게 마련이요 살아가는 데는 고락의 이치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군자의 품행에는 기운이 바르게 작용하여 마음이 정해져 천지의 덕과 합하도록 행하고 소인의 품행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게 작용하여 마음이 늘 변이하게 되므로 천지의 뜻에 어긋나게 행한다. 이 어찌 성쇠를 가늠하는 이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귀한 행동과 천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살다보면 고된 삶도 있을 것이요, 즐거운 삶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군자의 삶과 바람직하지 못한 소인의 삶은 기의 작용과 마음 씀씀이에 달렸다고 하였다. 즉 군자의 삶은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어 천지의 덕과 합일하게끔 행동하고, 소인의 삶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정해져 있지 못하여 천지의 뜻에 어긋나게끔 행동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기운과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도덕가>에서도 "선악간 마음 용사(用事) 이는 역시 기운이라" 하여 선악간 마음 씀씀이에 기운이 작용하여 좌우한다고 하였다. 군자와 소인의 갈림길은 바로 기운이 바른가(맑은가), 바르지 못한가(흐린가)에 달렸다는 말이다. 마음이 바로 서고(定, 正也),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운에 달렸다고 하였다.
이 말에는 인간의 본바탕 마음은 바르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은 한울님 마음을 타고났으므로 바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마음이 바르고(正) 바르지 못하게(不正) 되는가. 한마디로 기운이 청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군자와 소인이란 결국 기질론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희(朱喜)도 "사람이 태어날 때 받은 기는 모두 천지의 정기(正氣)였지만 그 기가 유행하면서 혼명후박(昏明厚薄)의 차이가 생겨 선악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대신사도 "흐린 기운을 말끔히 씻어 내고 맑은 기운을 잘 기르면" 착한 본바탕 마음이 맑은 유리알을 통해 보듯이 바르게 잘 드러날 것이며, 반대로 기가 탁해지면 본바탕 마음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여 마음도 바르지 못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한울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도 기가 맑아서(氣有正) 마음도 바르게 드러나야 여천지합기덕(與天地合其德)하여 군자의 행실이 나타나게 될 것이요, 반대로 기가 맑지 못하여(氣不正) 마음도 바르게 드러나지 못하면 여천지위기명(與天地違其命)하여 소인의 행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행실과 바람직하지 못한 행실의 갈림길은 기의 질에 달렸으며, 여천지합기덕과 여천지위기명의 행실의 차이에 달렸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지는, 합기덕과 위기명을 연계시켜 볼 때 온 세상의 생명체계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합기덕은 나의 삶이 온 천지 생명체계에 합치하도록 하는 것을 말하며, 위기명은 이에 어긋나는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천지 생명체계를 "성하고 쇠하게 하는 이치가 아니랴(此非盛衰之理耶)"라고 한 것이다. 결국 여천지합기덕은 온 천지 생명체계를 성하게 하는 삶이요, 여천지위기명은 이를 쇠하게 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장회익(張會翼)은 "온 생명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개체 생명의 가치만을 내세운다는 것은 마치 온 몸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온 천지 생명체계와 개체 생명은 하나의 몸체이므로 조화를 잘 이루는 삶은 바람직한 품행(德)일 것이요, 개체 생명의 이익만을 위해 온 천지 생명체계에 어긋나는 삶은 바람직하지 못한 품행이 될 것이다.
고금을 통해 여러 종교에서는 박애와 자비를 가르쳐 왔다. 고매한 이 가르침들은 인간 공동체의 생활에 자양분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박애?? 부르짖던 영국에서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미국에서는 노예 매매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자비를 외치던 일본이 아시아 민족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실은 이러한 가르침들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일단 종교간, 민족간에 분쟁이 일어나면 박애주의와 자비사상은 찾아볼 길이 없이 되고 만다. 이것은 결국 인간 중심주의가 지닌 한계라고 보여진다.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가치기준의 확립은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다.
오늘의 세계질서를 보면 미국이 주축이 되고 유럽과 일본이 손잡은 시장경제 질서가 얼마나 인간 중심주의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시장경제가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적자생존에 따른 처절한 경쟁이 판을 칠 것이요, 남북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지나친 소비의 조장으로 자원이 낭비되고 공기가 탁해지고 토양과 물이 썩고 생물의 종이 멸종되는 등 지구라는 온 천지 생명체계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주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온 천지 생명체계를 돌보는 가치기준을 확립시켜야 한다. 육체적 욕구를 자제하고 정신적인 차원을 높여 새로운 생각의 틀을 이루지 않으면 생명체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바람직한 세계질서를 세울 수 없을 것이다.
대신사는 "효박한 이 세상을 동귀일체 하단말가", "시운을 의논해도 일성일쇠(一盛一衰) 아닐런가.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라고 하였다. 동귀일체란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생각(各自爲心)을 하나의 몸체로 돌려놓는다는 뜻이다. 또, "한 몸체로 같이 돌아가자"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대신사가 의도한 동귀일체의 뜻은 보다 큰 나의 몸체로 돌아가자는 데 있다. 알알이 흩어진 단위 생명체의 차원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생명체계의 차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인류 전체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한층 더 높이 지구 생명체계의 차원으로 돌아가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가려 생각하자는 것이다.
현재까지 개인과 민족 집단과 국가 공동체는 자기 중심주의로 모든 행동을 선택하여 왔다. 자기 중심주의나 인간 중심주의적인 시각은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게 되어 지구의 생명체계는 점점 더 위협받게 되고 만다. 전체 생명체계의 안위를 돌볼 수 있는 생각의 틀로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6. 수행과 신앙 종교행위는 신념체계에 따라 그 방법이 달라진다. 크리스트교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신앙에 치중하는 종교행위로 나타났으며 동양 종교들은 사람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하여 어떤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밝혀내고 삶의 길을 찾아내려는 수행에 치중하는 종교행위로 나타났다. 대체로 서양 종교는 신앙 중심으로, 동양의 도학은 수행 중심으로 종교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동학의 종교행위는 수행과 신앙을 겸한 방법을 택하고 있다.
동양의 수행방법은 대개 간단 명료하게 만들어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단순 반복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정신세계를 집중시키는 방법이 주로 쓰이는 것이다. 동학의 수행법도 간단한 성주문(聖呪文) 읽기와 호흡조절 방법이 전부이다. 성주문을 반복해 읽어서 맑고 깨끗하고 바른 기운을 모으게끔 하는 한편 정신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순수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주력하게 한다.
주문은 주술행위라고 규정하는 경우가 많으나 동학의 성주문은 한울님을 위하는 글로서 수준 높은 종교행위이다. 주술(magic)은 초자연의 힘을 빌려 자기의 욕구를 해결하려는 행위로서 마음의 수행이나 도덕성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동학의 성주문은 한울님의 덕과 마음과 하나되게 하려는 글로써 주술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성스러운 주문은 강령주문 여덟 자와 본주문 열 세 자로 모두 스물 한 자이다.
강령주문은 기운을 맑고 바르게 하는 공부(수행법)이고 본주문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여 바른 길을 깨닫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는 공부(수행법)이다. 대신사는 주문을 지은 경위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울님은 "너는 무궁무궁한 도의 경지에 이미 이르렀으니 네 스스로 닦고 익혀서 글(주문)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법(수행법)을 정하여 포덕한다면 너로 하여금 길이 살도록 하여 온 세상에 빛나게 하리라"고 대신사에게 말하였다. 이 말씀을 들은 대신사는 1860년 4월부터 이듬해인 1861년 4원까지 1년간에 걸쳐 종교체험에서 얻어진 것을 되새겨보며 수행을 쌓아 자연한 이치를 깨닫고 주문을 지었다. "나는 거의 한 해 동안 닦고 헤아려 본즉 스스로 그러하게 되는 이치(自然之理)가 없지 아니하여 일단 주문을 지었다. 하나는 강령의 글이고, 하나는 불망의 글로서 도를 수행하는 절차는 오로지 이 스물 한 자에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주문을 지은 경위를 보면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잘못된 삶을 바르게 살도록 이끌어주는 것을 말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천지합기덕의 삶을 통하여 군자가 되게끔 가르치자는 것이다. 그 방법은 강령주문을 읽어 기운을 바르게 하고, 본주문을 읽어 바른 길을 알고 내 것으로 만들어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논학문>에서 주문 21자(강령주문 8자, 본주문 13자)를 자세히 해석하였다. 먼저 강령 주문인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에 대한 해석을 보면 기운을 바르게 하는 공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기(至氣)는 우주의 본바탕인 기로서 만물을 이루게 하는 영묘하고 신비스러운 힘"이라고 하였다. 금지(今至)는 "이제 입도하여 한울님의 기운에 접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요, 원위(願爲)는 "청축한다"는 뜻이요, 대강(大降)은 "한울님의 기와 나의 기가 화하기를 청원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나의 기운을 한울님의 기운과 화하게 함으로써 나의 기를 맑게 하자는 것이다.
본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는 나의 덕과 마음을 한울님의 덕과 마음으로 하나되게 하며 평생에 걸쳐 바른 길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의 글이다. 시천주(侍天主)는 "내 몸 안에 모시고 있는 한울님"을 말하고, 조화(造化)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이고, 정(定)은 "한울님의 덕과 합일하고 한울님의 마음으로 정한다(合其德定其心)"는 뜻이다. 영세(永世)는 "사람의 평생(人之平生也)"이고 불망(不忘)은 "생각을 늘 간직한다(存想之意也)"는 뜻이다. 만사(萬事)는 "수가 많은 것(數之多也)"을 뜻하며 지(知)는 "그 도를 알고 그 앎을 받는다(知其道而受其知也)"는 뜻이라고 하였다.
강령 주문은 한울님의 신비스러운 지기와 화합하여 나의 기를 깨끗하고 맑고 바르게 하려는 수행방법이다. 비유하면, 방안 공기가 탁하면 창문을 열고 대기를 순환시키면 방안 공기가 맑아진다. 이처럼 나의 몸 안에 한울님의 맑고 깨끗하고 바른 기운을 순환시킴으로써 나의 기운을 한울님의 기운처럼 맑고 깨끗하고 바른 기운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본 주문은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의 덕과 합하고 한울님의 마음으로 정하려는 다짐이요, 평생토록 만사에 도를 알고 그 앎을 받아들여 살겠다는 다짐"의 글이다. 대신사의 자세한 해석을 보지 않고 이 주문을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즉 "한울님을 잘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侍天主造化定), 평생 한울님을 잘 모시면 만사지가 된다(永世不忘萬事知)"고 그릇 해석하는 사례가 있다.
강령주문이 기의 공부라면 본주문은 마음의 공부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앞서 자세히 언급한 바와 같이 시천주는 "한울님을 네 몸 안에 모셨다"는 말이며, 조화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 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이면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는 말이다. 정(定)은 "합기덕 정기심(合其德定其心)"이라 하였다. 한울님의 덕과 합일시키고 한울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정하겠다는 뜻이다. "한울님을 잘 모시면 조화가 정해진다"는 해석은 크게 벗어난 것이다.
영세불망(永世不忘)은 "한울님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잘 모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평생토록 늘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을 평생토록 늘 잊지 않고 간직하겠다는 것인가. 다름 아닌 만사지(萬事知)이다. 만사지는 "모든 일에 임할 때 지기도이수기지(知其道而受其知) 하겠다"는 뜻으로 "그 도를 알고 그 앎을 받겠다"는 말이다.
이 성스러운 주문은 나를 천인합일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요, 평생토록 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겠다는 글이다. 나는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다음 순간을 살아가려고 의욕한다. 되는대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뜻 있고 보람있고 바르게 살아 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있고 바른 삶인가를 평생토록 물으며 살아가야 한다. 바로 영세불망 만사지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동학의 종교행위에는 심고(心告) 드리는 방법이 있다.
이는 한울님을 부모처럼 섬기는 종교행위(신앙)로서 <내수도문(內修道文)>에 몇 가지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잘 때에 잡니다 고하고, 일어날 때에 일어납니다 고하고, 물 길러 갈 때에 물 길러 갑니다 고하고, 방아 찧으러 갈 때에 방아 찧으러 갑니다 고하라"고 하였다. 마치 부모님에게 고하듯이 한울님을 지극히 섬기는 신앙행위이다.
당시에는 심고와 더불어 종교의례의 하나로 축문을 읽었으나 지금은 입도식 축문만 전해지고 있다. 그 요지는 "한울님의 은덕을 입었으나 아직 참 길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해에 잠겨 오래도록 마음을 잃음이 많았다. 이 성세에 도를 선생으로부터 깨달아 종전의 허물을 참회하고 선에 따라 길이 모셔 마음공부를 하겠다"는 뜻으로 되어 있다. <수덕문>에 "한 번 치제(致祭)하는 것은 평생 한울님을 섬기겠다는 중한 맹세라(一番致祭 永侍之重盟)"고 하였다. 축문은 한울님을 평생 섬기겠다는 맹세의 상징행위로 되어 있다.
동학의 제례의식으로는 1887년을 전후하여 구성제(九星祭) 또는 인등제(引燈祭)가 널리 행해졌었다. 구성제는 "하늘에는 구성이 있어 지상의 구주와 응해 있다"는 <논학문>의 글을 따서 이름한 것이다. 1년 후인 1888년에는 인등제로 바뀌어 음식 대신에 쌀과 과일과 천을 제수로 차리게 하였다.
포덕 38년(1897년)에 이르면 벽을 향해 차리던 향벽설위법(向壁設位法)을 향아설위법(向我設位法)으로 크게 바꾸었다. 개체 영혼이나 저 세상을 부인하는 신념에 따라 현세 중심의 제례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제례방법은 동학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조상과 스승님의 혼령에 제례를 올리던 것을 조상님의 은덕과 스승님의 은덕에 감사드리는 제례로 바꾼 것이다.
이상으로 동학의 종교행위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중 수행 체제를 학이라 한데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학은 학문의 학이 아니라 닦고(修), 익히고(習), 실천한다(行)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종교 또는 도학에는 나름대로의 가르침이 있을 것이요, 그 가르침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실천하거나 생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학이라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좌잠>에 "우리 도는 넓고도 간략하여 많은 말로 뜻을 풀이할 필요가 없다. 다른 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경성(信敬誠) 세 글자에 있다"고 하였다. 즉 학을 하는 구체적인 수행절차는 먼저 신(信)하고 다음으로 경(敬)하고 끝으로 성(誠)하라는 말이다. 신은 학구에 해당되고 경은 학습에 해당되고 성은 학행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수덕문>에서도 "먼저 신하고 다음에 성하라"고 하였다.
무릇 이 도는 마음으로 신(信)하고 성(誠)을 다해야 되느니라. 신 자를 파자하면 사람(人)의 말(言)이니 말에는 옳은 말과 그른 말이 있다. 그 말 중에서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물리치되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작정하라. 작정한 뒤의 말은 신하지 않는 것이 신이니라. 이같이 닦으면 그 성(誠)을 이루게 될 것이니 성과 신은 그 이치가 멀지 않다. 사람의 말(言)로써 이루어지는(成) 것이니 먼저 신하고 뒤에 성하라.
말하자면 동학의 학은 신경성으로 요약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신, 경, 성은 각각 무엇을 뜻하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신 자는 일반적으로 믿을 신이라고 하지만 대신사는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를 가리는 신 자라 하였다. 사전에도 신 자는 진야(眞也) 명야(明也)라 하여 참을 밝힌다는 뜻이 들어 있다. 대신사는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를 왈가왈부(曰可曰否)하여 일단 참 길을 가리면 다른 길을 신하지 않는 것이 신이라 하였다.
<팔절>에는 "내가 나답도록 하는 것이 도"라고 하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많은 길 중에서 바른 길을 가려내는 수행이 필요하다. 바른 길을 밝혀내지 못하면 참된 수행을 할 수가 없다. 수행의 첫 번째는 바른 길을 밝혀내는 일이다. 대신사가 가르쳐 준 것을 바르게 가려내어 신(信)을 세워야 한다.
둘째는 경의 단계로서 바른 신을 경건하게 받아들여 몸에 익힌다는 뜻이다. 즉 경건한 자세로 닦고 단련하여 몸에 푹 배도록 익히는 것을 말한다. 대신사는 수이연지(修而煉之)라고 하였으며 공부라고 하였다. 공부는 본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단련하여 익혀서 언제 어느 때도 가르침이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알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정의의 길을 알지만 사람들이 그 길로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의로운 정신이 몸에 푹 배지 않으면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몸에 무르익지 않으면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 경건한 자세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몸의 공부가 있어야 한다.
셋째로 성(誠)이란 무슨 일을 하든지 거짓됨이 없게 마음을 다 기울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대신사는 성 자를 파자하여 "사람의 말(言)을 이루는(成) 것"이라고 하였다. 우선 참을 밝혀 신을 세우고 그 신(人言)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성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옳은 인언을 거짓됨이 없게 마음을 다 기울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신경성은 바로 무극대도를 바르게 규명하고(학구) 그것을 공경히 받아들여 내 것으로 익혀서(학습) 참되게 생활화하며 사회화하는 실천(학행)을 말한다.
대체로 동학의 종교행위는 유도나 불도처럼 믿음의 측면을 배제하고 수행에 치중하는 것도 아니요, 크리스트교처럼 수행보다 신앙을 중시하는 종교행위도 아니다. 인격적인 한울님과 관계하는 신앙적인 측면과 자신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한 수행을 겸하고 있다.
<논학문>에 "몸이 몹시 떨리고 섬뜩해 지면서 밖으로는 신령과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가르치는 말씀이 내렸다. (금세 보았던 것을 다시) 보려 하니 보이지 아니하고, (금세 들었던 것을 다시) 들으려 하니 들리지 아니하여 더욱 괴상하게 여겨졌다. 수심정기(修心正氣)하고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물으니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의 경지에 이르자 한울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수심정기의 경지는 종교체험의 경지이며 의미의 세계를 열어주는 경지라고 보인다. 이 경지는 꿈의 상태도 아니요 깨어 있는 현실도 아닌 비일상적인 세계와 일상적인 세계가 혼재된 경지라 할 수 있다.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 완연한 영부를 보고 놀랐으나 일상적인 상태로 돌아오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수심정기의 비일상적인 경지로 돌아가자 다시 들리고 보였던 것이다. 대신사는 이러한 경지를 여몽여각(如夢如覺)의 경지라고도 하였다.
이 수심정기의 경지는 한울님의 맑고 깨끗하고 바른 지기와 화하여 하나된 경지이며, 한울님의 성스러운 덕의 차원에 이른 높은 경지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개체 생명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각자위심의 세계에서 한 단계 초월하여 여천지합기덕하는 높은 차원의 경지이다. 다시 말하면 온 천지의 생명체계와 하나되는 동귀일체의 경지라 할 수 있다.
동학의 종교행위는 한울님과 진정한 관계를 가지는 신앙적인 측면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노력으로 어떤 경지에 도달하여 인생의 의미를 밝혀내고 삶의 길을 찾아내어 실천하려는 수행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간단한 성주문을 읽고 심고 드리는 수행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종교행위의 목적은 수심정기의 경지에 이르도록 나를 한 차원 높여 온 천지의 생명체계와 합일하는 동귀일체의 삶을 실천하자는 데 있다.
7. 접과 포의 교단조직1861년부터 포덕을 시작하여 연원(淵源) 집단을 이루게 되자 이것을 접(接)이라고 하였다. 전도인(傳道人)과 수도인(受道人) 사이에 이루어진 인맥을 조직화한 것을 연원이라 한다. 처음에는 접 조직이 곧 연원조직이어서 접주가 연원주였고 연원주가 접주였었다. 대표자의 성을 따서 아무개 접중(接中) 아무개 접내(接內)라고 불렀다. 관의 탄압이 심해지자 대신사는 교단 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포덕 3년(1862) 12월 26일(양 1863년 2월 14일) 납일에 접제를 공식화하고 최초로 접주(接主)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접으로 최초의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접주는 50호 내외로 1인씩이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접과 접주라는 명칭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 임명된 접주는 16명이라고 전해지나 당시의 도인 규모(약 2천 호)로 보아 30명은 넘었을 것이다.
포덕이 늘어 연원조직이 확장되면서 50호 내외의 단위로 조직했던 접도 여러 개로 늘어나 한 연원에 수 개의 접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인가 연원을 포(包)라고 칭하게 되었고 접 조직은 포내(包內) 조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접과 포 조직의 변천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84년에 이르면 포라는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시천교종역사} 1884년(갑신)조에는 "10월 28일 대신사 탄신기념제례에 각포 두령 82명이 참석했다"고 되어 있다. 1892년의 통유문(通諭文)에는 "이쪽 포 연원이 저쪽 포 연원으로 옮기고, 저쪽 포 연원이 이쪽 포 연원으로 옮긴다"고 지적하였다.
초기에는 연원 대표자의 성을 따서 이 아무개 포, 김 아무개 포라고 불렀다가 1893년(계사) 3월 18일에 보은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 때 포명을 공식으로 지어 주었고 큰 접주는 대접주라 하였다. 포제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도인 수가 계속 늘어나자 대접주 혼자서 포내 사무를 처리하기가 어렵게 되자 1893년 가을부터 포의 형편에 따라 수접주(首接主)와 사무를 처리하는 접사(接司)를 두게 되었다.
1887년에는 육임제(六任制)가 새로 생겨났다. {천도교서}에는 1884년 10월 24일에 공주 가섭사(迦葉寺)에서 강서(降書)로 육임제를 구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육임직을 임명하고 육임소를 설치한 것은 1887년 6월 중순경에 보은 장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직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알차고 덕망 있는 사람은 교장으로, ② 성심 수도하여 가르칠 사람은 교수로, ③ 위풍을 갖추고 기강을 세워 다스릴 사람은 도집으로, ④ 시비를 밝혀 기강을 잡을 사람은 집강으로, ⑤ 공평을 유지하며 근후한 사람은 대정으로, ⑥ 능히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사람은 중정으로 삼는다.
육임제는 교(敎)와 집(執)과 정(正)이라는 세 가지 직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는 가르치는 직분이요, 집은 기강을 세우는 직분이요, 정은 자문하고 직언하는 직분이다. 처음에는 대도소(大都所)에만 두었다가 교세가 늘어나자 각 연원에서도 형편에 따라 포 단위의 육임직을 두게 되었다. 포 단위 육임직의 임명은 1893년 교조신원운동 이후라고 여겨진다. 학식과 영향력이 큰 원로급 인사들은 교장과 교수에, 접주와 격이 같은 사람에게는 나머지 직분을 주었다.
이밖에 동몽육임제(童蒙六任制)와 편의장제(便義長制), 도찰제(都察制), 교령제(敎領制)가 있었다. 1887년에는 대도소에다 봉교(奉敎=丈室의 비서)를 두었다가 1년 후인 1890년에는 동몽육임직을 임명하였다. 봉도(奉道) 봉좌(奉座) 봉헌(奉軒) 봉규(奉規) 봉령(奉令) 봉교(奉敎)등은 어린 사람들로 구성하여 육임을 보좌하게 하였다. 편의장제도 1890년경에 생겼으며 도별로 1명 또는 2명(좌도·우도)을 임명했다. 이들은 각 포의 연원관계를 바르게 조정하고 지도하는 직책을 수행하였다.
대접주·수접주·접주·접사 등 접 계통의 임직은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의 이름으로 발행하였고, 육임이나 기타 직은 북접법헌(北接法軒)의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신사(海月 崔時亨)의 직명은 도주와 북접대도주 및 북접법헌으로 사용하였다. 일반 문서에는 도주라 하였고, 접주와 접사 등 접의 임첩(任帖)은 발행할 때는 북접대도주로, 육임직을 발행할 때는 북접법헌이라 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기에도 이런 직함으로 각종 임첩을 발행하였다.
북접은 남접과 대응하는 호칭이 아니다. 대신사가 있던 용담 북쪽의 접들을 자연스럽게 북접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남북접설은 1894년 6월 이후에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교세가 엄청나게 늘어나던 1891년 경에는 지역단위로 호서접, 영남접, 동협접(東峽接, 강원도), 호남접이라 호칭하였다. 1894년 8월 이후 재기포를 준비하면서 호남접의 호자가 탈락되어 남접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 기포하는 포와 기포하지 않으려는 포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삼례(參禮)와 왕궁(王宮) 지역이 가장 심하여 편의상 기포하는 세력을 남접이라 하고, 반대하는 세력을 북접이라 하게 되었다. 이런 호칭은 피아를 구분하기 위해 생긴 호칭이고 교문을 달리 하는 남접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교문을 달리하는 남접이 실재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교문을 달리하는 남접이 있었다면 남접 대도주가 있어야 한다.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서장옥(徐璋玉, 仁周, 一海)이 남접 대표자라 하였으나 그는 혁명기간 중 한 번도 활동한 흔적이 없다. 더욱이 서장옥의 명의로 발행한 임첩이나 통문도 발견할 수 없다. 1894년 8월 이후에 발행한 호남지역 접주 및 육임직 임첩이 여러 장 발견되었으나 모두 북접 대도주와 북접법헌의 명의로 발행한 것뿐이다. 이 남북접설도 1894년 10월 15일경 북접통령 성사(聖師) 손병희가 대군을 이끌고 논산에 와서 전봉준 장군과 연합하면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동학의 접포조직의 특성은 다른 종교의 교회나 사원과는 다르다. 신앙집단으로서 종교적 의례를 봉행하는 조직이 아니라 동학의 이념을 사회화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는 단위조직이다. 교조신원운동과 척왜양창의운동, 동학혁명 등에서 보듯이 운동을 전개하는 데 접포라는 단위조직이 동원되었다. 이후 갑진개혁운동이나 기미독립만세운동도 접포를 동원하여 전개되었다. 개인으로 운동에 참여하려면 먼저 접에 가입하여야 하며 그 접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개인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
포의 운영은 자치제(自治制)로 이루어지며 독자적인 결의로 행동하게 된다.
동학혁명 당시 혁명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포가 스스로 결정하였다. 동학의 중앙도소가 있기는 하였으나 중앙집권제는 아니었으므로 포의 자치제는 잘 보장되고 있었다. 끝으로, 접포를 교구와 같은 지역단위 조직으로 오해하는 분이 많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맥중심의 조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8. 보국안민운동동학의 신념체계는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추구하는 도이다.
피안의 세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현실세계만을 받아들이는 동학의 신념체계는 이 땅위에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 첫째 목적이고 다음은 수행을 통해 나를 나답게 만들자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꾼 이상세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억조창생 많은 사람 동귀일체 하는 줄을 사십평생 알았던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민안 되지마는 … "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될 것이니 … "라는 구절이 있다. 지난 시절에 이상사회로 삼았던 요순성세나 태평성세와 같은 이상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로 돌아가자는 상고주의를 표방한 것이 아니라 덕치주의적인 사회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말로 하자면 온 천지의 생명체계와 한 몸이 되어 사는 사회,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세상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꿈같은 세상이다.
대신사는 이런 꿈같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국안민(輔國安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보국은 나라를 돕자는 뜻이요, 안민은 인민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자는 뜻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보국이란 그저 나라를 돕자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는 것, 즉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안민 역시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인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며 최소한의 존엄성을 보장하여 줄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보국안민은 이상사회로 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최소한의 정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지 못하면 이상사회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이 보국안민은 대신사가 과제로 삼은 이래 여러 형태의 운동으로 나타났다. 초기에는 봉건적 신분제를 타파하는 운동으로 나타났으며 외세가 몰려오자 반외세, 반침략운동으로 나타났다. 먼저 신분제 타파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신사는 득도 이전에 종의 신분으로 있던 여자 두 사람을 하나는 양딸로 삼았고 하나는 며느리로 삼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신사 역시 1865년 10월 대신사 탄신기념 제례 때 금등골(劒洞谷)에서 신분제 철폐를 위해 설법하였다. "인(人)은 곧 천(天)이라, 고로 인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인이 인위(人爲)로써 귀천을 분(分)함은 한울님 뜻에 맞지 않느니라. 우리 도인들은 일체로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스승님의 본뜻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1890년에는 천민 출신(백정의 아들)인 남계천(南啓天, 益山人)을 전라 좌우도 편의장(便義長)으로 임명하였다.
15개 큰 접주들이 몰려와 항의하자 "적서의 차별은 집안을 망치고 반상의 차별은 나라를 망친다"며 도인 사회에서 어찌 신분의 반상을 가지고 차별하겠는가 힐책하였다. 신분제 타파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 당시에 이르면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된다.
{오하기문}에는 "남의 집 종으로서 적(동학)을 따르는 자들은 물론이오, 적을 따르지는 않아도 적을 끌어다 주인에게 겁을 주어 노비문서를 불태우게 하거나 억지로 면천하게 하였다. 혹은 주인을 묶고 주리를 틀거나 곤장을 치기도 하였다. … 양반으로 노비와 함께 적(동학)을 따르는 자들은 서로를 접장이라 하며 동학의 규범에 따랐다. 백정이나 재인(才人)에 속한 자에게도 평민이나 양반과 같이 대등하게 대접해주니 사람들은 더욱 분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특히 폐정개혁안에는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엄징할 것. 노비문서는 태워 버릴 것. 칠반(七班) 천역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씌우는 평양립을 벗게 할 것. 청춘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것 등을 내걸고 실천에 옮기도록 하였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는 사인여천의 교훈은 대신사가 신사에게 수 없이 내렸던 교훈이었다. 다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서 신분제를 만들어 차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분제도는 지난 시절의 세계관인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제도이다.
다음으로 반외세운동 역시 동학초기부터 펼쳐졌다. "서양은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아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하니 천하(중국)가 멸망해버리면 (우리 나라는) 입술이 떨어져 이가 시린 탄식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보국안민의 계책을 어디서 찾아 낼 것인가"고 한탄하였다. 1840년에 영국이 중국을 침략하고 1860년을 전후로 서구열강들이 또다시 중국을 침범한 사실에 대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 … 개 같은 왜적 놈이 전세 임진(前歲壬辰) 왔다가서 술싼일 못했다고 쇠술로 안먹는 줄 세상 사람 뉘가 알꼬. … 내가 또한 신선되어 비상천 한다해도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고 전지무궁 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일본의 침략과 만주족의 침입을 되돌아보며 통분한 글이다.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공주, 삼례, 광화문전 등에서 벌인 교조신원운동과 보은 장내리 및 금구 원평에서 벌어진 척왜양창의운동 때에는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일대 시위를 전개하였다. 10월 20일경에 충청감사 앞으로 제출한 의송단자에는 "각 항구에서 왜국이 사고 팔아 취한 이득은 그들이 독차지 하니 전곡은 탕갈(蕩渴)되고 백성들은 생계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요긴한 곳의 관문과 시전(市廛), 삼림 천택(川澤)에서 생기는 이득도 오랑캐에 돌아가니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분히 여기는 바이다"고 하였다.
1893년 3월 11일(양 4월)에 척왜양창의운동을 일으키면서 보은 관아 벽에 내건 괘??에는 "지금 왜놈과 양놈들이 이 나라 중심부에 들어와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오늘의 서울 형편은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원수가 되었던 일과 병인양요 때 치욕스러웠던 일을 어찌 잠시라도 잊으랴," "우리들은 죽기로 서약하고 왜양을 쓸어버리고 보국의 의리를 다하고자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처럼 당시에 외세침략을 위기로 받아들이고 민중시위를 벌인 것은 동학뿐이었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인 9월에는 엄청난 화력을 동원한 일본의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죽창을 들고 일어섰다.
공주 우금티 전투를 비롯하여, 세성산 전투, 금산 전투, 당진 전승곡 전투, 홍성 전투, 청주전투, 논산 황화대 전투, 원평전투, 하동 고승당 전투, 해주 전투, 홍천 서석 전투, 장흥 전투, 보은 북실 전투, 대둔산 전투를 통해 얼마나 많은 동학군이 피를 흘리며 일본군과 싸웠던가. 일본 침략자와 정부군의 합작으로 동학군은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고 보국안민의 뜻은 좌절되고 말았다.
1904년에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13만 명이 동원된 동학군은 나라의 주권을 보존하고자 다시 일어났으며, 1910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저항의 몸부림을 계속해 오다가 1919년에는 기독교, 불교 및 전 민족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1920년 이후에는 청년당 운동, 어린이 운동, 농민계몽, 노동계몽, 언론계몽 등의 합법적 운동을 통해 지속적인 저항 펼쳤다.
한편 비합법적 운동으로 고려혁명당운동, 6·10만세운동, 조국광복회운동에 천도교인들이 다수 참여하였으며 교회 차원에서 오심당운동(吾心黨運動)과 멸왜기도운동 등의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식민지하의 운동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한계를 드러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동학의 보국안민운동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소련군이 북쪽 지역을 사회주의 체제로, 미국이 남쪽 지역을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몰고 가게 되자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다만 {천도교정치이념}을 만들어 운동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동학혁명 때 폐정개혁안이 나온 후 처음으로 동학의 정치이념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천도교정치이념}에서는 "민족 해방과 사회 해방을 선후 구분 없이 동시에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조선의 특수 사정"이라고 판단하고 "미국형 자본가 중심의 자유 민주주의도 아니요,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독재 민주주의도 아닌 조선의 현 단계에 적응한 민주주의는 조선적 신민주주의"라고 제시하였다.
이것은 분단된 1947년의 상황에서 마련된 소박한 정치신념이기는 하나 교회의 공식입장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계급혁명이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천도교는 "동귀일체의 이념"에 맞게 더불어 살아가는 수렴론적 사회체제를 제시한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토지와 주요 생산수단을 공영제로 하고 계급적인 대립을 일으키지 않도록 소득과 재산소유의 격차를 줄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전 인민이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자"고 하여 인민의 기본권 확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법률상 일률 평등의 보장, 정치·경제·문화·사회의 전 영역에 참여할 권리의 부여를 비롯한 현대 민주사회의 기본권을 제시하였다. 눈에 띄는 것은 "법률이 허하는 한도 내에서 재산의 사유권을 보장한다"는 독특한 주장과 근로자의 경영 참여제, 생산성과의 공정한 배분 문제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민주경제 제도의 실현을 담당할 수 있는 정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라 하였다. 대체로 시장경제, 의회 민주주의, 지방자치제의 실시, 의무교육제의 실시, 독점자본가의 제약,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결 론이상으로 대신사의 생애와 신념체계를 간추려 보았다.
대신사는 1860년에 득도 후 1년간 수행방법을 마련하여 1861년 6월부터 포교에 나섰다. 관의 탄압으로 1863년 11월까지 불과 2년 반 동안 활동하다가 12월에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41세의 나이로 순도하고 말았다. 남원에 가 있던 기간과 박대여의 집에 은신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활동기간은 겨우 2년여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사는 31세 때 독특한 역사관의 안목으로 19세기를 대전환의 시대로 규정하고 다시 개벽의 길을 찾아 나섰다. 새로운 삶의 틀을 창조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상황을 설정하고 6년간의 고행에 들어간 것이다. 드디어 1860년에 한울님으로부터 해답의 체계를 얻어내게 되었으며 이를 무극대도 또는 천도라 이름하고 자신의 학을 동학이라 일컬었다.
동학의 신념체계는 다시 개벽을 위한 해답의 체계이므로 신 관념이나 세계와 인간을 보는 시점이 독특하다. 한울님 관념은 시천주의 신 관념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인내천과 사인여천을 실천적인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원론적 세계를 극복하고 현세를 중시하는 도학으로서 개체 영혼이나 내세를 부정하고 현실 세계의 삶만이 소중하다는 철저한 현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여천지합기덕과 여천지위기명으로 그 기준을 삼았으며 여천지합기덕은 높은 차원의 생명체계에 합일하는 삶이고 여천지위기명은 개체 생명의 차원에 머무는 삶을 말한다. 결국 인간 중심주의를 지양하고 온 천지의 생명공동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하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과 수행의 목표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두고 있다.
동학의 목표는 현숙한 군자가 역사의 주체이므로 자신을 한 차원 높이는 동시에 사회제도도 한 차원 높여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을 실현시키자는 데 있다. 이상사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요 조건인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사회인 보국안민을 먼저 실현시켜야 한다. 이것이 동학의 목적이며 신념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