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 |
혼 |
영 |
가인 |
아벨 |
셋 |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출애굽 |
광야 |
가나안 |
유월절 |
칠칠절 |
초막절 |
뜰 |
성소 |
지성소 |
사울 왕 |
다윗 왕 |
솔로몬 왕 |
애굽 교회(성도) |
광야 교회(성도) |
가나안 교회(성도) |
손과 발의 못 자국 |
가시 면류관 |
허리의 창 자국 |
성막(성부) |
참 성전(성자) |
심령성전(성령) |
성부의 사역(설계도) |
성자의 사역(견본) |
성령의 사역(실체건축) |
성부(언약, 계시) |
성자(증거, 성취) |
성령(적용, 완성) |
1단계사역 |
2단계사역 |
3단계사역 |
씨앗 |
성장 |
열매 |
49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역사를 통하여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이 모든 절차와 내용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3단계 사역을 바탕으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육과 혼과 영의 3단계 성화의 과정으로 동일한 섭리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과정은
성도의 육과 혼과 영의 성화과정을 표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한 단계 한 단계 정해진 과정을 통과하면서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진주와 정금과 같이 영성의 결정을 이루는 것이다.
(계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도는 진주요 정금이다. 진주와 정금은 고난의 결정체이다.
새 예루살렘의 열 두 성전의 문은 성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상징하는 한 진주와 점도 흠도 없는 정금으로 단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아래 이 땅의 고난을 통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언약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광야 40년 42처소의 기나긴 여정 속에서 혹독한 시험과 연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다.
출애굽 2세대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다.
출애굽 1세대는 자기중심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는 육신에 속한 옛 사람을 표상한다.
자기중심의 출애굽 1세대는 모두 다 광야에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새사람으로 출애굽 2세대로 온전히 거듭나는 것이다.
광야의 공과를 통과하며 세상중심, 육신중심, 나중심의 자아가 파쇄되고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던 육에 속한 사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하나님 중심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광야를 지나며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 아래 거할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광야의 공과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공과와 연결선상에 있다.
자기중심의 이스마엘을 잘라내고 하나님 중심의 이삭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없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성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기 위하여
세워져야 할 영혼의 영성(심령성전 건축)의 장이다.
가나안의 공과는 에서와 야곱의 공과와 연결선상에 있다.
에서로 인하여 야곱이 시험과 연단을 받고서 이스라엘로 세워졌던 것처럼
성도 역시도 세상에 속한 죄악 된 육신(에서)의 성분으로 인하여 심령(야곱)은
시험과 연단을 받으며 체험과 경험을 통하여 온전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가나안의 공과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를 앞세워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듯이 성도는 말씀을 앞세워 세상과 환경과 육신을 다스리고 정복하며
심령을 성령의 열매로 아름답게 신부단장하며 세우고 건축하는 과정이다.
광야의 공과는 자기의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을 학습하고 공급받는 것이다.
가나안의 공과는 대적과의 실전을 치루며 체험과 경험을 통하여
육체의 성분이 제거하고 심령으로 새롭게 성령의 성분으로 신부단장 하는 것이다.
50
하나님의 본질적 목적은 출애굽 1세대에게 있지 않았다. 출애굽 2세대이다.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
에서(육신)는 미워하고 야곱(영)은 사랑하시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을 세우고 건축하기 위한 재료와 도구에 불과하다.
육체(표상)에 속한 옛사람은 영혼(실체)에 속한 새사람을 세우고 건축하기 위하여
마련된 연단의 도구요 건축의 재료인 것이다.
사단에 속한 육신의 죄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의 신실한 자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며
모세가 이끌었던 출애굽 1세대는 죽고
여호수아가 이끄는 출애굽 2세대만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였다.
광야의 공과는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기중심의 육에 속한 사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하나님 중심의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공과이다.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내 뜻대로 살던 옛 사람에 속한 육신의 자아가 파쇄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인 것이다.
인본주의의 자기중심의 인간 육신의 능력과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없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함을 배우며 나아가는 것이 광야의 공과이다.
성소에 떡 상(말씀)과,
분향단(성도의 기도)과,
금등대(하나님의 일곱 영, 성령의 조명하심)가 있듯이
성도는 자기를 내려놓기 위하여 조석으로 말씀을 먹으며
호흡 하듯이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주와 동행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살과 피(말씀과 성령)를 먹고 마시는 것이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여섯 항아리 아구까지 가득 채워야 할 성도의 본분이다.
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이 있다.
(성도는 세상과 육신에 대하여 온전히 죽어야 한다).
성소에는 떡 상과 분향단과 금등대가 있다.
(성도는 진리의 말씀(떡상)과 기도(분향단)로써 성령의 인도하심(금등대)을 받아서
자기중심의 사람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온전히 거듭나야 한다).
이 두 곳을 점도 흠도 없이 통과해야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벧전1:7).
(히12:1~13)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 이니라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성도는 성령이 예비한 처소를 지나며 시험과 연단의 반복적인 훈련 속에서
체험과 경험을 통하여 인본주의의 자기중심, 육신중심의 악한 사람에서
신본주의의 말씀중심, 영중심의 의로운 사람으로 건축되고 세워지는 것이다.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심기어진 극상품 포도나무 (사5:1).
이제 우리는 광야의 인생을 살 동안 우리의 육신에 흐르는 사단의 선악과의 성분을
제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의 씨앗을 우리의 심령 안에
심고 가꾸고 다듬고 만들고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51
성막은 ①뜰, ② 성소, ③ 지성소의 3단계 공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도표는 성막과 심령성전과 십자가의 사역과의 관계성을 비교대조한 것이다.
①뜰(육) |
②성소(혼) |
③지성소(영) |
번제단(육신을 죽임) |
진설병(진리의 말씀) |
언약궤(하나님임재) |
물두멍(성령세례) |
분향단(성도의 기도) |
만나(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
금등대(성령의 인도) |
십계명(율법의완성이신예수) | |
싹난 지팡이(부활이신 예수) | ||
출애굽 |
광야 |
가나안정복 |
아브라함(부르심) |
이삭(자아파쇄) |
야곱(영혼의 영성) |
①손과 발의 못 자국 |
②가시면류관 |
③허리의 창 자국 |
뱀의 활동을 멈춤 |
뱀의 머리를 파쇄 |
뱀의 죄성을 죽임 |
자기를 부인하고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나를 좇을 지니라 |
육의 영성 |
혼의 영성 |
영의 영성 |
1단계 |
2단계 |
3단계 |
①의 공과는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성도의 부르심이다.
성도는 세상의 것과 육신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오는 것이다.
②의 공과에서 나 중심의 자아를 파쇄하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③의 공과에서 육신의 소욕이 제거되고 성령의 소욕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로 가득한 심령성전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택정된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부르신다.
우리를 구원하심이 주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사항이 아닌 것이다.
광야의 과정이 강제적 견인이라면 가나안의 과정은 자율적 견인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그 날 그 날의 양식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연명을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서 비로소 땅을 경작하여 땅의 소출을 먹게 된 것이다.
광야의 과정이 고립과 통제 아래 인도함을 받지만
가나안의 공과는 스스로 부딪치며 싸우는 실전적 체험과 경험을 통한 인도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의는 ①과 ②를 거치고 ③의 공과 가나안의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있는 곳이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 임재의 표현이다.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십계명)이 있다.(히9:4)
만나는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십계명은 율법의 완성이신 의로우신 예수.
싹 난 지팡이는 성도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부활이신 예수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52
성도는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부활이신 예수를
담고 있어야 함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예수를 모실 때 온전한 율법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말씀이 생명이 되어
흘러넘치게 되며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령성전의 건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덧입어 정금과 같이
나오는 것이다.
(요17:21~2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십자가의 공과는 예수님의 가신 길을 좇아 성도가 걸어 가야할 인생여정이다.
① 손과 발의 못자국은 육에 대한 결박이다.(뱀의 활동을 멈춤).
② 머리에 가시면류관은 혼에 대한 자아파쇄이다.(뱀의 머리를 파쇄).
③ 허리의 창 자국은 악한 영에 대한 물과 피를 쏟아
사단의 근성, 악성, 독성, 죄성을 죽이는 3단계 공과이다.(뱀의 죄성을 죽임).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죽어야 부활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만큼 십자가의 고난이 가중되고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① 자기를 부인하고 (육신의 소욕)
②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아파쇄)
③ 예수를 좇아가는 (영의 영성) 것이다.(마16:24).
성도는 육신의 소욕을 버리고 자아를 파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가는 것이다.
뜰, 출애굽, 아브라함의 공과는 십자가 사역의 ①의 공과인 것이다.
성소, 광야, 이삭의 공과는 십자가 사역의 ②의 공과인 것이다.
지성소, 가나안, 야곱의 공과는 십자가 사역의 ③의 공과인 것이다.
성도는 ①, ②, ③ 한 과정 한 과정 각각의 공과를 깨닫고 체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덧입기 위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섭리와 같이
육과 혼과 영으로의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인생은 예수님의 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성취의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짊어지신 십자가의 고통을 아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멸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 길을 가셨다.
이제 성령은 성도 안에 오셔서 죄악으로 가득한 사단의 근성을 완전히 뿌리 뽑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꾸시며 다듬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도는 어두움에 속한 사람에서 빛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인생의 곳곳에 넘어야할 장애물이 성도를 연단하기 위하여 예비되어 있다.
이 과정을 지나며 육신의 소욕이 제거되고 성령의 소욕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는 성분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내재된 감추인 만나인 것이다.
53
인간은 스스로 사단을 이길 수 없다.
사단을 이김은 오직 말씀, 오직 예수, 오직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경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 안에서 진리와 생명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뜻이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도에게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성도가 어린아이 같은 초보의 수준에서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지만
장성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성도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성도에게 이루어질 때 성도는 모든 것을 이기고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실체적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공급받아서 사용하고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된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데 쓰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육신의 정욕을 앞세워 세상의 것을 탐하고 누리는 것은 곧 죄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골3:1~10).
세상의 물질과 부귀와 영화를 마치 자기의 것인 양 독식하며 누리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상적, 육신적 가치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한다.
선민 이스라엘의 국기는 정삼각형이 위 아래로 연합하여 별을 형성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사랑과 공의, 섬김과 나눔의 표상인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추구하는 세상적인 출세와 성공 부귀와 명예와 권세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요일2:15~17).
불빛을 찾아 날아드는 불나방과 같은 육신의 인생이다.
인생을 다 바쳐 수고와 노력을 했음에도 결국 죽음 앞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초라하게 무너지는 그들의 아픔을 본다.
보이고 나타나는 외형적인 성분이 멸망할 선악과의 성분임을 아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선악과의 산물이다.
선악과의 변형물이 먹음직(육체의 욕구), 보암직(혼의 욕구), 지혜롭게 할 만큼(영의 욕구)
탐스럽게 주렁주렁 여기저기에 가득한 것을 영의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의 방법대로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잠깐 있을 헛된 세상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어리석게도 선악과에 눈이 멀어 생명나무를 볼 수가 없다.(고전2:13~14),(고후4:4).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슬픈 인생인 것이다.
성도는 그 어느 곳에 있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신령한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경배 드리고 기쁨으로 찬양하며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육신으로는 다스리고 정복할 수 없다.
다스리고 정복하려는 만큼 한없이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것과 육신의 것을 내려놓고 하늘의 것과 영의 것을 바라볼 때 가능한 것이다.
성도는 영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늘에 속한 참 평안을 누리며
그 어느 곳에 있든지 다스리고 정복하며 세상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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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것은 자기욕심에 미혹되어
스스로 시험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애3:39),(미7:9),(야1:12~15).
여전히 처리 받지 못한 죄의 성분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죽으리라 육신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을 때
세상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기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자라나고 성장한 만큼, 믿음의 분량만큼
세상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요1:1~).
예수님은 곧 말씀이시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
성도는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성도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요17:21~26).
성도가 지성소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임재의 영광 앞에 있는 것이다 .
성도가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뜰과 성소의 공과를 통과해야 한다.
성도는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체험이 있어야 이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삭의 체험이 있어야 야곱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안에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 안에서 야곱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곧
성도의 육과 혼과 영의 점진적, 계시적 발전사의 모델이요, 성화과정의 표상이다.
아브라함의 공과는 세상으로부터 성도의 부르심을 표상하고 있는
출애굽(뜰)의 공과요,
이삭의 공과는 자기중심의 자아가 파쇄 되고 하나님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화되는 것을
표상하고 있는 광야(성소)의 공과요,
야곱의 공과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과의 싸움이다.
성도의 영혼의 영성을 성취하기 위한 가나안(지성소)의 공과이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통과하며 출애굽 1세대(옛사람)는 죽고 출애굽 2세대(새사람)가 태어났다.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2세대(거듭난 성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다.
이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언약궤(말씀)를 앞세워
가나안의 정착민들(일곱 족속, 성도 안에 내재된 육신의 근성)과 전쟁을 치뤄야 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에서와의 갈등으로 인하여 많은
시험과 연단을 받았다.
야곱이 에서로 인하여 많은 시험과 연단과 다루심을 받았듯이
성도는 자신의 육신의 성향 때문에 시험과 연단을 받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성도의 육(육신의 소욕)과 영(성령의 소욕)의 대립을 비유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내안의 육에 속한 마음과 영에 속한 마음,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이다.
먼저 나온 형(육체, 겉사람)과 나중 나온 동생 (영혼, 속사람)이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의 싸움인 것이다.(창25:19~34).
성도의 성화과정은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을 받아
이스마엘 사상이 제거되고 이삭으로 세워지고
에서의 사상이 제거되고 야곱이 변화되어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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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장자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에서에게 떡과 팥죽(예수의 살과 피)을 내어 주었다.
이는 곧 성도는 말씀과 성령으로 육신을 다스리고 정복 할 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떡과 팥죽은 성도는 세상의 것과 육신의 것을 내려놓을 것을 동시에 함축하여
표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야곱은 하늘의 것을 차지하기 위하여 세상의 것과 육신의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성도 역시도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위하여 한시적인 세상의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의 축복(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궤휼과
간사를 행함으로 형에서의 미움을 받고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하기에 이른다.
야곱은 모친 리브가(성령을 표상)의 도움으로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성령이 예비한 처소)에서 기거하며 20여년의 세월을 시험과 연단을 받는다.
때가 되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야곱은 자기 조상의 땅 자기 족속에게로 귀향하게 된다.
이제 에서와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에서와의 만남을 두고
자기와 처자식(자기본능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며 겁을 냈다.
오랜 기간 시험과 연단을 받았음에도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야곱의 자아는 또 다시
고개를 들고 교활하고 간사한 술수로 최대한으로 자기의 방어전술을 구축하게 된다.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까지 야곱은 여전히 계략과 잔꾀가 밝은
자기 본능의 간사한 야곱 이였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아가 강한 것을 보고 그를 만지셨다.
(창32:24~25)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 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 되었더라. "
마침내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었고 다리를 절었다.
하나님의 다루심으로 야곱은 자기를 의지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야곱의 교활하고 간사한 자기 본능의 자아는 파쇄 되었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간사하던 야곱은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오늘 날 성도 역시도 큰 문제와 사건과 환란과 핍박이 닥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이미 마음 깊숙이 고정화 된 자기의 방법, 자기의 의지, 자기의 고집대로 해결하려고 한다.
자기로 고정화 된 여리고 성은 무너져야 한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가나안 땅의 철옹성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무너졌다.
하나님은 이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도를 치실 것이다.
성도 안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철옹성 같은 자기로 고정화 된 육신의 쓴 뿌리
여리고성(자기 안에 고정화 된 강력한 악성, 독성, 죄성 )은 하나님의 다루심의 손길 아래
철저히 무너지는 것이다.
성도가 출애굽하여 광야의 과정을 지나며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의지하며
율법 아래 강제적 견인으로 환경의 제약과 육체적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광야의 공과는 살기 위하여 억지로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의 공과는 자율적 견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과 체험과 경험을 위한 실전적 싸움이다.
성도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아닌 비로소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으며
대적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는 것이다.
성도는 그동안 내 안의 잠재되어 있었던 옛 사람의 근성이 슬며시 머리를 들고
성도를 괴롭히고 훼방하며 또 다시 성도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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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의 자아, 습관, 버릇, 중독, 혈기, 음란, 탐심 등 가나안 7족속이 세상 이방인들이
성도를 대적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스9:1~2).
하나님의 거하실 심령성전을 건축하며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야할 성도들이 또 다시
안일한 생각으로 옛 사람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과 같이 세상과 벗하고
육신의 욕망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고전10:1~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성도는 이 과정을 통과하며 처절한 자기 무너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자기의 모습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며 자기의 무능함과 초라함을 느끼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고 온전히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사람의 성분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야3:15).
하나님과 원수가 됨이요 죄와 사망의 성분이다.
악성, 독성, 죄성으로 가득하다. 그 안에 독사의 독이 가득하다.
냄새나고 더러운 똥은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것의 종합적인 표상이다.
인간은 간사하고 교활하다.
탐심과 탐욕, 거짓과 술수, 시기와 질투, 다툼과 분쟁 자기중심의 사상으로 가득하다.
짐승 중에 가장 사악한 짐승이 인간짐승이다.
성도 안에 숨어있는 옛 사람의 근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야 한다.
육신의 소욕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 모두는 세상에 속한 가인의 것이요, 에서의 것이요, 이방인의 것이다.
성도에게 세상에 속한 것과 자기에 속한 것은 철저히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이다.
가나안의 공과는 성전의 무너짐을 체험하며 무너진 성전의 이유를 되돌아보고
더욱 더 신실하고 온전한 성전으로 세워지는 성전 재건축의 과정인 것이다.(학개서).
성전 재건축의 재료는 말씀과 예수와 성령이다.
성부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성령의 지도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심령성전은 온전하게 세워지고 건축되는 것이다.
창세기33장은 야곱과 에서의 감격스러운 눈물의 상봉을 담고 있다.
에서도 울었다. 야곱도 울었다.
서로 입을 맞추며 부둥껴 안고 피차 울었다.(육과 영이 주 안에서 연합함을 표상).
야곱은 에서를 향하여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기를 낮추어
에서를 대면하였고 준비한 예물로 예를 갖추었으며 에서의 얼굴을 보면서
자기를 섭리하고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까지 영의 성숙을 이루었던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 은혜를 덧입고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브니엘의 체험이다.(창32:30).
브니엘의 체험은 지성소의 하나님 임재의 영광이다.
성도는 영에 속한 사람이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성도는 세상과 육신에 속한 地(지)의 성분을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한다.
영으로써 육신의 행실을 죽이고
주 안에서 영과 육이 온전히 연합하여 순종할 때
성도는 야곱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공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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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있는 곳에 모든 어두움은 소멸되는 것이다.
궤휼과 간사가 가득한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무너졌다.(창32:22~32).
동방의 의인 욥이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무너졌다. (욥42:1~6).
예수를 핍박하던 율법에 무흠한 자 신약 최고의 학식 사울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무너졌다.(행9:1~22).
이제는 성도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무너져야 한다.
육신의 생각으로 율법 아래 종이 되어 자기로 행했던 모든 노력과 수고와 열심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빛을 떠나 자기가 하려고 한다.
그 결국이 어두움이요, 죄와 사망인 것이다.
인간은 결국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허상이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바벨탑과 같이 무너지고 있는 현 세상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하는 것은 진리와 생명이 될 수 없다. 인간이 하면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왕인 인본주의의 현 세상은 그 결국이 망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만이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공급하여 주실 때 인간은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빌4:13).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요,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이 연합을 이루는 곳이다.
뜰과 성소에서는 육신적으로 느끼고 지식적으로 알기만 하던 하나님에서
지성소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만남으로 연합하여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사랑과 빛으로 충만하신 온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앞에 비로소
자기의 무능함과 제한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스스로 자기의 허물과 죄성을 깨닫고
돌이켜 온전히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임재의 영광 앞에 창조자와 피조물의 신분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고
성도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율법적인 자기의 의가 드러나게 되고
바로 이것이 자기로 행한 죄악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창조자의 거룩하심과, 전지전능하심과, 광대하심과 사랑과 빛으로 충만하신 자존자의
위엄 앞에 피조물은 재와 티보다도 못한 아무것도 아닌 제한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엎드려 순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앞에 스스로를 의지하던 자아는 온전히 파쇄 되고 비로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와의 만남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야곱은 자기 안에 숨겨진 자아가 발동하였다.
욥은 율법적인 의 자기의 의로 갇혀있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의로 동서분주 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새롭게 변화 되었던 것이다.
머리(육신, 지식, 율법)의 표면적인 신앙인에서
가슴(영, 진리, 사랑)의 이면적인 신앙인으로 온전히 변화 되었던 것이다.
58
우리의 육신은 율법 앞에서 곤고할 수밖에 없다.(롬7:18~25).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 질수 없다.
인간의 육신은 선악과의 산물이다. 사단의 기지요, 죄의 요새이다.
선악과의 죄성이 인간의 육신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로 의로워 지려고 하는 만큼 율법 앞에 육신의 죄는 끊임없이 드러나게 되고
성도는 더욱 곤고하고 초라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죄 없는 자가 없다.
(롬3:1~18)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우리가 의로워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이다.
하나는 믿는 강도요, 하나는 안 믿는 강도다. 둘 다 동일한 강도인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사망을 향하고 있는 실체적 죄인이다.
성도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져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거룩한 피는 능히 성도를 정결케 하시는 것이다.
(사53:1~1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대속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믿음의 의로써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롬8:1~4)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의 정도는 여전히 유효하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한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복음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다 치루셨다.
성도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정죄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된 것이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죄 사함과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말씀과 성령)를 먹고 마심으로 온전하고 거룩하여 지는 것이다.
59
예수는 말씀과 성령으로 행하셨다.
성도는 말씀과 성령을 먹고 마셔야 한다.(요6:22~59).
말씀과 성령의 능력은 사단에 속한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의 능력은 영의 속한 새사람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충만함에 이를 때
하나님 형상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품어져 나오는 것이다.
성도의 본향은 하나님나라요, 천국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이방인의 나라에서
이방인의 옷을 입고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곳저곳 방황하며 환란과 핍박,
시험과 연단을 받으며 마음을 찢는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눈물 속에 피는 꽃이 조개의 진주이다.
점도 흠도 없이 제련을 거친 것이 정금이다.
성도 역시도 진주와 정금이 되기 위하여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히12:5~13).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비유를 보면서 그가 바로 나 자신임을 고백해야 한다.(누15:11~32).
어두움을 체험한 사람은 빛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체험한 사람은 평안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다.
성도 안에는 영에 속한 마음과 육에 속한 마음, 두 마음이 있다.(롬7:21~25).
성도 안에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어두움을 물리치고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한다.(사60장~61장).
성도 안에서 빛(말씀, 예수, 성령)이 나와야 한다.
성도 안에서 어두움(사단, 자기, 육)이 나오면 넘어지는 것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살고 있는 한 대적과 죄 앞에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성도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내 안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 채우고
성령의 열매를 신실하게 맺음으로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온전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더욱 더 배우며 익히고 다듬어져야 할
실수와 허물과 죄로 가득한 죄인 중에 괴수이다.
나는 교만하고 간사하여 말씀을 떠나 넘어지는 체험을 하나님 앞에 서기 부끄럽고
사람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곤혹스러울 정도로 많이 한 사람이다.
다만, 하나님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힘입어 매일 매일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라서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온전함을 이루기까지
육체의 가시는 그 사람의 교만을 무너트리고 자중하여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도의 인생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이요
예수와 함께 심령으로 새롭게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과정이다.
성도의 인생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심은 자기중심의 육신(사단)에 속한 옛사람을 멸하시고
말씀중심의 영(예수)에 속한 새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함이다.
예수의 살과 피(말씀과 성령)는 성도를 정결케 하시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고 가꾸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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