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조각보의 탈-관념론
- 고종목의 현대 조각보전에 붙여
吳 南 球
전통의 조각보가 전위작가 고종목을 만나 디지털 시대의 현대적 의미를 갖는 예술로 승화된다. 그는 시인으로, 바느질 장인으로 이미 “바늘구멍”이란 시집을 상재한 바 있고, 실험 작가 그룹인‘시류’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조각보는 그들[시류]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탈-관념이란 이슈를 내걸고 있다. 많은 실험이 그렇듯, 이번 전시는 임상실험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으며 삶과 혼을 온통 쏟아 붓고 있다. 그는 미완성을 전제로 하고 있고 끝없이 도전할 것이다.
조각보의 현대적 의미
현대의 회화적 시각으로 보면 우리의 전통 조각보는 어떻게 보일까?
조각보는 헝겊 조각을 이어 바느질하여 만든 보자기이다. 옛날 사용했던 조각보를 펴보면 사각형이나 삼각형 등 다양한 모양의 조각이 삐뚤어진 것은 삐뚤어진 대로 이어져 있다. 옷을 짓거나 쓰고 남은 헝겊조각들을 사용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천이 귀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런 모양새가 오히려 인위적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아름답다.
이런 조각보의 구성미는 현대에 이르러 높이 평가 되고 있는데, 서구의 몬드리안[Piet Mondian,1872~1944]이나 클레[Paul Klee,1879~1940] 등의 회화작품들과 비교된다. 이들 추상의 작품이 직선과 직각 그리고 단순한 원색의 조화를 바탕으로 순수한 리얼리티를 표현하거나, 독창적인 회화 언어(공상적인 상형문자와 자유로운 선묘)로 사물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표현한다. 그러나 수평과 수직으로 나눈 화면(조각)이 비례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기하학적 질서를 강조하거나 색의 질서와 조화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제작된다. 이에 비해 오래전 앞서 제작된 우리나라 조각보의 색채 구성은 자유롭고 순수하다.
이것을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 등 전위작가의 시각으로 보면, 기하학적인 질서나 색의 질서와 조화 등이 인위이므로 깨뜨려 버려야 하는 고정관념이다. 그들은‘색깔을 혼합하여 그리는 선묘기법’이 인위적이라 하여 붓으로 색깔을 하나하나 찍어 병열하기도 하고, 화판을 향해 붓을 던지기도 하고 페인트 통을 매달고 화포(畵布)위에서 뛰어 페인트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조각보의 자연스러움은 그들 작품과도 통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와서 새로운 디지털시대가 열리고 인식의 혁명이 일어났다. 아날로그시대의 개념들이 무차별 무너졌다. 예술도 해체철학 등 영향을 받아 급속히 해체되고 이 시대의 실험 작가들이 혼돈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질서에 의한 통합을 모색하고 있다.
조각의 부호와 회화성
고종목은 실험 작가 그룹인「시류」동인으로 활동하며 디지털의 ‘유니트와 모듈’등의 개념을 도입한‘디지털시 쓰기’에 동참하고 있다. 그것이 문학이라 해도 그의 조각보와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언어의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어 탈-관념하고 있는데, 옷감이 조각조각 잘라진 것과 다르지 않다. 해체된 조각은 하나하나가 단위가 되어 디지털의 '유니트(단위)나 모듈'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조각이 각기 모양과 색 등 캐릭터가 있고 '집합하고 결합됨'으로써 ‘조각보’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조각보는 해체(解體)와 통합(統合)의 예술이라고 본다. 해체된 조각은 삼각형, 사각형, 다각형, 원이 곧거나 삐뚤어진 선으로 그 모양이 다양하다. 이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건들의 더 이상 해체될 수 없는 도형이며 원형이다. 여기에는 부호(기표, 언어)의 원형이 있고 회화의 이미지가 있다. 부호와 회화성은 작가가 다시 통합하는 바탕이된다.
조각보는 어떻게 통합되는가, 시침질을 하고 '홈질' '감침질' '공글리기' 등 바느질을 하게 되는데, 한 땀 한 땀 기워 두 조각을 이어갈 때에 한쪽 조각이 가지고 있는 선을 원형 그대로 살려두어 자연스럽다. 여기에 만든 이의 연출이 있고 기획이 있지만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의미들은 보는 이의 마음대로 일 것이다. 이런 바느질은 곧 신부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처녀들이 조각보를 만들며 바느질을 익히고, 귀한 물건을 싸두는 혼수품으로 만들어가게 되면서 조각보가 점차 아름다운 소장품이 된다.
이렇듯 삶속에서 실용된 조각보, 그 바탕에는 지혜와 덕목이 깔려 있다. 그 원류를 찾아보면, 부처가 출가한 승려에게 천 조각을 모아 만든 누더기 옷을 입게 하였는데 수행승의 청빈을 강조한 이런 가사(袈裟)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조각보에는 근검절약하는 삶의 정서가 배어 있다.
고종목의 조각보는 전통의 기법과 그 바탕에 깔려있는 정서가 전승되고, 탈-관념 즉 해체된 조각들의 원형이미지의 부호와 회화성이 집합하고 결합되어 디지털의 현대적 의미를 갖는 예술로 승화된다.
작품해설/ 시 그리고 의, 식. 주
고종목은 탈-관념을 이슈로 내걸고 조각보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소재로서의 조각은 고정된 물건(옷감)의 모양이 깨뜨려진, 즉 탈-관념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순한 모양이다.
그는 공방의 바닥에 깔린 수없는 조각의 세모나 네모나 원을 만난다. 문득 조각들이 부호로 보였다 한다. 그래서‘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을 조각으로 조합하여, 인위성을 배제하고 단순히 원근이 없이 접사하듯 화면 가득 채운다.
‘모음나무’는 나무의 가지를 모음으로 그려 놓고 있는데, 자연의 나뭇가지에서 원형을 찾아내고 있다. 또한 ‘자음이 꽃핀 화분’은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자음이 담겨 있는데, 역시 꽃잎의 모양에서 원형을 찾아내고 있다.
특히‘모음나무’는 가지로 표현된 모음(ㅏ~ㅣ)에서 보면 모두 달(0)이 보이는데‘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심리적인 음양의 글자 조합이 가능하다.
그와 평생을 같이 해온 실과 바늘은 의식주를 해결하고 시는 공방의 창으로 보이는 푸르름였다 할까, 조각보에는 이런 삶의 자취가 담기고 있다.
‘족적’은 좁은 공간에서 일을 하며 조각 위를 밟고 다닌 그의 맨발자국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 방향으로 있는 환상적인 발자국 모습은 창밖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는 오색 꿈만 같이 느껴진다.
‘식(食)’은 몽돌이라고 할지 두상석이라고 할지 그런 조각 위에, 빵 같은 노란 원과 반원이 두 눈의 위치에 자리한다. 그리고 커다란 입 속으로 범선이 가고 있는데, 그의 남대문 공방시절 잠재했던 것들이 초현실적으로 표현된 듯싶다.
‘구멍’은 변기 위에 커다란 입술이 놓여 있다. 먹고 배설하는 두 구멍으로 삶의 단면을 표현하는데, 입의 위치가 아래에 있어 아주 유니크하다. 그는 계속 구멍을 통해서 삶을 표현한다. 삶은 '샷다구멍'이 열고 닫히는 짧은 순간일 것이며, '유택'은 블랙홀 같은 구멍인지도 모른다.
*吳 南 球(1946'11~):
시인,평론가. "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 2005.4.15)"을 상재하여 '디지털리즘 문학선언'을 한다. 그외 "탈관념의 Showing", "디지털시대의 시 전망" 등 논문이 있고 시집으로, "첫나비 아름다운 비행" 을 비롯 5권이 있다. 2001년에 '제26회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