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뻗어나가는 삼척은 산세가 아주 빼어난 고장이다.
청옥산 덕항산 등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험하고 깊은 산들이 자리잡고 있는 고장 삼척이다.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의 묘가 우리나라 최고의 금강송 숲에 둘려 쌓여 있는 전설의 고장이다.


조선조의 뿌리,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 이양무 장군의 무덤인 준경묘가 금강송의 군락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성계의 5대 조부 준경묘는 금강송이 군락지를 이루는 대명당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한 도승이 시키는 대로 이곳에 조상 묘를 쓰니, 5대에 이르러 이성계가 탄생하여 조선을 건국했다는
그 유명한 백우금관(白牛金冠)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묘지 입구에는 보은의 정이품송과 혼례를 치룬 혼례소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나무는 나이 95살, 키 32m, 둘레 2.1m이다.
2001년 산림청장이 주례가 되고 보은군수와 삼척시장이 혼주가 되어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졌다.
이후 아기 금강송 100여 그루가 인공수정되어 전국으로 분양됐다.

준경묘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의 묘이다.
이양무는 개성에서 상당히 활약하는 장군이었는데 권력 다툼에서 패하여 고향인 전주에 내려와 살았다.
이양무의 아들 李安社가 전주에서 살다가 삼척으로 쫓겨와 살았다. 이안사가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그가 스무 살 때 전주에 부임한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놓고 갈등관계에 놓였다.
이안사는 부하들을 시켜 산성별감을 혼내주고 추종세력 170가구를 데리고 삼척으로 왔다. 삼척에 외가가 있었다.
<전주군지>에는 7,000여 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만 명도 안 될 전주에서의 그의 세력이 얼마였는지 알만 하다.

이안사는 삼척에서 피신 온 지 1년 만에 부친상을 당했다.
아버지 묏자리를 구하려고 좋은 산을 찾아다니다 지쳐 현 준경묘 자리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한 도승이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천하의 명당이로다. 이곳에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태어날 자리다.
반드시 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금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야 한다.”
백마리의 소를 제물로 바칠 재력이 없는 이안사는 퍼뜩 처가의 흰소가 떠올랐다.
아내에게 신신당부하여 밭을 가려 하니 백우를 빌려오게 하였다.
백 마리의 소를 흰소 백우로 대치하고 마침 유월 보리타작 때라 누른 보리짚으로
아버지 관을 감싸 금관으로 삼았다. 이른바 백우금관(百牛金棺)설의 묘자리다.
전주의 산성별감이 다시 삼척 지역의 안렴사로 승진하여 부임하게 되었다.
이안사는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안사는 170호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함경도 의주 용주리로 이동했다.
그 뒤 간도 지역에 정착, 원의 관리로 들어가 기반을 쌓았다.
이후로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 증손자 이자춘(李子春)까지 대대로 원의 관리를 지내며 성장하게 된다.
왕업의 꿈은 당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성계의 6대조 이인(李麟)은 이양무(李揚武)를 낳았고,
그의 아들 이안사(李安社)가 왕업의 꿈인 삼척에 바로 그 백우금관(百牛金棺)의 묘를 써
그의 5대손에 이르러 이씨조선을 개국하게 된다는 전설이다.


태조 이성계 6대조에 벌써 왕권을 넘보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
고려중기, 이의방(李義方)이 임금을 경호하는 하급 장교로 있을 때 노비출신 궁녀 무비(無比)를 사랑했다.
노비 출신이지만 비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하여 無比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무비는 이의방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의종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황궁의 주인만이 나를 취할 수 있다”여 그의 사랑을 거부하였다.
무인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의방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6대조 큰할아버지다.
의종은 폐위되고 3남 9녀를 낳은 무비를 데리고 거제도로 귀양 갔다.
권력을 쥔 이의방은 거제도의 무비를 데려와 사랑을 이루었다.
12명의 아이를 낳고 마흔이 넘는 나이었으나 무비는 원숙한 미모로 이의방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무비는 황궁 밖의 사찰에 머물면서 이의방의 연인으로,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다.
무신정치가 문란해지자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거제에 유배되었던 의종을 경주로 모시고 나와 웅거했다.
무비는 이의방에게 의종을 죽여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의방은 심복부하를 시켜 경주 곤원사 연못가에서 의종에게 술을 먹이고 등뼈를 부러뜨려 연못에 던져 수장시켰다.
무비는 이의방에게 친형인 이준의를 멀리하고 문극겸과 이인李麟을 곁에 두라고 조언했다.
이의방이 형 이준의와 싸우는데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형제가 왕도 갈아 치운 거물들이니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까 보아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한 사람만이 나서 말리는데 문극겸(文克謙)이었다.
무비는 동생 뒤에서 호가호위하며 권세를 누리던 형 이준의보다는 충직하고 자기분수를 지킬 줄 아는 동생 이인(李麟)을
적극 천거했다. 이인은 문극겸의 사위였다.이의방이 권력을 쥔지 3년, 서경유수 병부상서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이의방은 진압군을 독려하러 갔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칼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전날 밤 궁성이 무너지는 꿈을 꾼 무비는 이의방에게 몸조심하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이미 살해당하고 난 후였다.
무비는 저자거리에 버려진 이의방의 시신을 거둔 뒤 삭발하고 여승이 되었다.
이의방의 아우 이인은 이성계의 6대조이다.
이의방은 최고 권력을 쥐고 3년간 집권하였지만 성격이 포악하고 잔혹하여 인심을 얻지 못했다.
결국 이의방의 공포정치는 정중부의 쿠데타로 일망타진되어 그의 유족들은 전주로 낙향하게 되었다.
문신들에게 풋대접받던 무인들이 쿠데타를 하여 무신정권은 무신들 12대에 걸쳐 100년간 지속되었다.




준경묘 백호쪽 뒤편으로 올라가면 어명을 받고 잘라진 금강송이 나타난다.
경복궁, 남대문 중건에 이곳의 금강송이 사용되는데 100년 이상을 길러야 재목으로 성장된다.
주변에는 일제 강점기에 송진을 채취하던 역사적 증거의 소나무도 있고 이곳에서 가장 오래 된 소나무도 모습을 드러낸다.
준경묘역에는 수령 150년에서 200년의 금강송이 14만 그루나 자라고 있다.
이 가운데 지름 60cm이상의 나무도 1,000그루가 넘는다. 모두 문화재청 소유의 국유림이다.
조선 말기 경복궁 중건에 쓰였을 정도로 재목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숭례문 복원용으로 베어진 준경묘 금강송은 모두 20그루, 평균 지름이 74cm에 높이가 30m, 수령은 150년 안팎이다.

예로부터 겨울에는 쌀값보다 땔감 값이 더 비싸므로 땔감 값이 더 들어서 서민들은 산에서 초목을 긁어 모아 겨울을 났다.
소나무는 화력이강해서 땔감으로 알맞고 향 또한 좋았으나 그러나 한번 밑동을 베면 새 줄기가 돋아나지 않는다.
활엽수는 땔감으로 베더라도 그 밑동에서 줄기가 나기에 사람들은 다른 잡목들은 잘라다 때고 소나무는 남겨 놓아 남아있다.
고려 시대부터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상목(上木)이라하고 다른 나무는 잡목(雜木)이라 불렀다.
소나무는 땔감 건축재 토목재 조선재 관등으로 쓰였다.
예로부터 솔바람 소리는 청아하고 기품있다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를 들으며 즐겼다.
눈 내리는 날 그 밤에 듣는 ‘설야송뢰(雪夜松籟)’ 비오는 날에 듣는 ‘우중송뢰(雨中松籟)’ 천하제일로 꼽았다고 한다.
첫댓글 글 강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