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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암 권철신이 천주교 서적을 들고 찾아온 광암 이벽을 만나고 있다.(그림 탁희성 화백)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은 1736년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양근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이었다.
양근리(楊根里)에 연결된 바로 갈산리(葛山里)이다. 그 마을은 탕기(湯器)나 똬리처럼 둥글게
생긴 낮은 산자락으로 북쪽, 동쪽, 서쪽이 산으로 빙둘러 있고, 서남쪽으로만 약간 열려 있는 곳이다.
현재는 왜정 때 신규 도로를 낮은 산자락 능선으로
내었다가 계속 높낮이를 평탄케 하며 확장한 신장로 때문에 좀 넓혀져 보인다.
조선 건국 공신이며 주자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후예로 그의 5형제가
모두 지식과 덕망으로 유명하였다.
남인 대가의 자손으로서 그는 경학과 예학에 있어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이다.
그는 경서의 철리와 윤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일찍이 광암 이벽이 한국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주초로 삼고자 선택한 학자였다.
그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동생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을 양자로 삼았다.
해박한 학식에 못지 않게 덕행이 또한 놀라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권철신이 처음으로 스승인 성호 이익을 만난 것은 1759년(영조 35)으로
그의 나이 24세였다. 반계 유형원을 이어 사회개혁과 위민정책을 연구한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만난 것은 그의 행운일뿐아니라 우리 역사의 기쁨이었다.
이익은 만년에 얻은 제자 권철신을 누구보다 사랑하였다.
양반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바지를 걷고 논에 들어가 일을 했던 스승을 보면서
그는 인간의 평등과 그들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 학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 깨달은 내용이라면 굳이 스승의 언설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성호 이익은 권철신의 뛰어난 학문재질을 높이 평가하면서 학자로서 평생 견지해야
할 자세로 자득(自得)의 중요성을 하교(下敎)하였다.
이익이 세상을 떠나자 이익의 큰 제자였던 순암 안정복의 문하로
그의 동생이었던 권일신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순암 안정복이 성호 우파라고 불리면서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의 사제인 권철신에게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줌으로써
그가 성호 좌파라는 또 다른 학맥을 형성하게 한 것이다.
어쩌면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이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권철신이라는 존재는 한강 주변이 작은 마을에서 독서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름모를 학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정약용은 권철신을 누구보다 흠모하였다.
당시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남인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권철신에게 학문을 배운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약용이 자신보다 10배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그의 형 정약전은 정식으로
권철신에게 제자의 예를 갖춰 사제관계가 형성되었고 정약용 역시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성호 이익의 실학을 정식으로 계승한 권철신은 정조시대 가장 뛰어난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의
영도자로서 수많은 젊은 실학자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비단 남인계열이 젊은 실학자들만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문예군주이자 개혁군주인 정조 역시 그의 사상의 세례를 듬뿍 받은 인물이었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세손시강원에서 정조의 학문을 가르친 스승이 다름아닌 권철신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권철신으로부터 경학과 역사 그리고 실학을 전수받음으로써
그가 훗날 주자성리학만이 아닌 이단으로 취급받던 양명학 도교 불교 서학도
널리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문효세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스승을 임명할 때
권철신을 임명하였지만 문효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아마도 문효세자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국왕과 세자 모두의 스승으로 조선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스승으로 만나느냐가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정조는 가장 이상적인 스승을 만난 것이고 더불어 권철신의 제자였던
정약용을 등용하고 아끼게 된 것이었다.
성호 이익의 가르침을 따르는 실학적인 노선을 중시했던 그의 주변에는,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정약전이 예물을 바치며 가르침을 청하고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정약종, 이승훈, 김원성, 등 당대 어진 젊은 선비들이 그의 주위에 점점 모여들었다.
훗날 광암 이벽은 녹암 권철신과 직암 권일신 형제들과 그 주위의 선비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면
따라오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라 하며 그를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고
다블뤼 주교가 말할 정도로 당시 한양에서도 매우 명망이 높았다.
1779년 겨울 녹암 권철신은 정약전이 주선한 천진암 강학회에 지도자 겸 주제 강연자 격으로 참석했다.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모임은 아니었고, 흔히 유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학문 연구를
위하여 종종 개최한 그런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 광암 이벽이 참여하면서부터는 유교적인 강학회가 아닌,
천주교 교리연구와 일부 신앙 실천의 계기가 되는 강학회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이때 녹암 권철신은 광암 이벽의 해박한 지식과 명쾌한 논증을 통하여 천주교 교리를 대강 알게 되었다.
녹암 권철신은 그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로 인해 천주교 신앙을 즉시 실천하지는 않았다.
광암 이벽이 참여한 천주교 교리 논증과 관련된 천진암 강학회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비망기」에는 1777년 정유년에 강학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학술의 이벽전에는 1778년 무술년과 1779년 기해년에 강학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정약용은 1779년 기해년 겨울에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분명한 것은 1779년을 전후하여 광암 이벽의 천주교 교리 논증 강학이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제5대 조선교구장이던 다블뤼 주교가
그의 저서에서 진솔하게 논파하였다.
김대건 신부도 「조선천주교회 약사」에서 '이벽박사의 위대한 강학'을 한국 천주교회의
자발적인 교회창립의 출발로 적고 있다.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녹암 권철신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논증을 듣고 알고 믿음을 가졌다하더라도 그것과 이를 즉시 실천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강학회 당시 연령을 보면 녹암 권철신 43세, 광암 이벽 25세, 이승훈 23세, 정약전 21세,
정약종 19세, 정약용 17세, 등이었다. 권철신은 이들 젊은이들과 달리 그리 자유로운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저명한 대학자의 위치에 있는 양반대가의 맏아들이었다.
유교의 관례상 조상 제사를 비롯한 각가지 문제 때문에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주저했다기보다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다.
1784년 가을, 광암 이벽이 말을 타고 양근에 와서 녹암 공을 입교시키고자 10여일간을
머물면서 토론을 겸한 전도활동을 하였을 때 마침내 동생 권일신의 뒤를 따라 권철신도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하기 전에는 망설였다. 입교한 후부터는 온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입교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이미 누리고 있던 신망은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녹암 선생님 형제분들이 믿는 종교라면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 종교'로
확신하게 함으로써 광암 이벽의 선택과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권철신은 직접 나서서 전도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천주교회의 운영에도 결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
도를 닦는 고승들처럼 초연하게 기도와 참선을 즐기면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권씨 가문은 박해 세력의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본래가 이름있는 집안이 천주교를 믿자, 남들의 비난과 박해도 역시 대단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791년의 진산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로 동생 직암 권일신이 모진 형벌과 참혹한 고문 끝에
귀양 길 첫 주막 밤에 뒤따라간 자객에 의해서 거룩히 순교하게 된다.
이 박해로 전라도의 여러 유력한 교우들도 순교하여, 천주교회 지도계급의 손실이 컸다.
따라서 아직 남아있던 정씨 집안과 권철신만이 천주교 신앙인으로 존재하는 듯했었다.
이런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직접적인 포교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학문과 기도를 통하여 천주교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실천하였다.
박해자들은 그런 녹암 권철신을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더 심해갔다.
기미년(1799), 박해자들은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모함하는 고발을 하였다.
권씨 집안의 자제들도 역시 이에 맞서 대항하여, 일이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지방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밝혀내어, 박해자들의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간교한 계획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과 결탁하여 더욱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해 여름,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과 정약종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 하여 정조에게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상소를 올린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고, 천학사건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하였다.
박해자들은 다시 경신년(1800) 5월에 다시 왕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양근 고을에 사학이 아주 성하여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이 없는데,
군수는 태평으로 들어앉아 조금도 사찰하지 아니하니, 그 군수를 징계해야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관에서는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므로 양근 군수를 인책 사퇴시켰다.
새로 부임한 군수는 과거지사를 들춰내어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으므로,
녹암 권철신은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가두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군수는 허락하지 않고, 기어코 녹암공을 불러 가려고 하였으므로,
사건은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다.
또한 정조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록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마는,
그는 본래 무슨 일이든지 크게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예컨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사건도 두 나라 사이에 관련되었기 때문에,
만약 일이 드러나면, 그 처리가 매우 난처하겠으므로 1795년 을묘년에 있었던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인해 일어났던 박해이후,
대신들이 천주교를 엄중히 금하기를 많이 청하였어도, 일체를 담당 관리에게
내맡기고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해박해 등, 여러 박해가 모두 은밀한 정조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설도 없지 않으니,
짐짓 모르는 체함으로써 교우들의 마음을 늦추어, 몰래 주문모 신부를 찾아 암암리에 결말을 지어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은 그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 버렸다.
천주교를 믿던 남인학자들에게 관후하여, 일말의 광명을 주었던 정조가 1800년에 승하하자,
정조에게 원한을 품었던 정순왕후 김씨와 기회를 만난 노론 벽파의 박해자들은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녹암 권철신과 선암 정약종, 만천 이승훈 등, 남인 학파 양반들을 전부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권철신의 서찰
항상 집에서 학문연구와 신앙생활에 전심하며, 통문과 공문으로 자기를 몹시 욕하는 것도 도무지 상관하지 않고,
의연히 기도생활을 하던 녹암 권철신은, 왕에게 을 모함하는 나쁜 고발서나 진정서가 올라가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교우들이 형벌에 이기지 못해 배교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가련한 사람들, 참 애석도 하다. 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만들고,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는도다."하면서 탄식하였었다.
1799년 대사간 신헌조(申獻朝)에 의하여 정약종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피소되었다.
정조는 오히려 신헌조의 품계를 박탈하면서 서학 사건을 거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에 다시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가 집권하게 되자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마침내 그도 1801년 음력 2월 11일 경에 체포되니, 재판관들 앞에 끌려나가서도 천주교와
그 신앙 실천에 관해 용감하게 변호하였다.
형벌을 당하면서도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매우 조용하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그래서 직무상 그 심문을 참관해야 하였던, 가장 철저한 원수 중의 한사람이 법정에서 나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양근성지 순교자 성당
"형벌과 심문을 당할 때에 다른 죄인들은 몹시 당황하는데, 권철신 공만은 마치 잔칫상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 같았소."
박해자들은 65세의 신선과 같은 대학자를 형조에서 형벌하면서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참혹히 때려 마침내 음력 2월 25일
모진 매질아래 순교하니, 그와 천주교회에 대한 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형 집행에 앞서 1801년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은 것이다.
권철신은 광암 이벽의 부인이었던 '柳閑堂權氏 言行實錄'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 남인학파의 연장자이며 지도자로서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서학파(西學派)의 대가로 손꼽힌다.
"오호라! 인후(仁厚)하기가 기린 같고 자효(慈孝)하기를 호랑이나 원숭이처럼 하고 영특한 지혜는 샛별과 같고
얼굴 모습은 봄날 구름의 밝은 태양 같은데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저자의 구경거리로 널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
-<다산산문선>105쪽 '녹암 권철신 묘지명' 에서-
정약용은 <녹암권철신묘지명>을 지어 권철신의 학덕을 기리면서 신유옥사 당시 억울하게 사학죄인으로 몰렸음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