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누(漏)가 있고 누가 없는 문을 밝힘
次第四 明漏無漏門者
여기에는 대략 두 구(句)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법을 통틀어 말하여 유루와 무루의 뜻을 나타내고, 둘째는 정토를 따로 잡아 유루와 무루의 모양을 밝히는 것이다.
略有二句 一者通就諸法 顯漏無漏義 二者別約淨土 明漏無漏相
첫째의 통문(通門)이란, “유가론”에 말하기를 “유루, 무루에 각각 5문이 있으니, 유루의 5문이란, 첫째는 일(事)을 말미암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면(睡眠) 때문이며, 셋째는 상응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반연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루의 5문이란, 첫째는 모든 얽매임을 떠나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면을 끊기 때문이며, 셋째는 끊어 멸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은 번뇌를 대치(對治)하여 자성(自性)을 상속(相續)하게 하여 해탈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수도위(修道位)에서 끊는 번뇌를 대치하므로 자성을 상속하게 하여 해탈하기 때문이다”하였으니, 그 자세한 것은 저기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初通門者 瑜伽論說 有漏無漏 各有五門 有漏五者 一由事故 二隨眠故 三相應故 四所緣故 五生起故
無漏五者 一離諸纏故 二隨眠斷故 三是斷滅故 四見所斷之對治自性相續解脫故 五修所斷之對治自性相續解脫故 於中委悉 如彼廣說
지금 여기 4구(句)로서 대략 그 모양을 나타내면, 첫째는 어떤 법은 한결같이 유루이니, 이른바 모든 더러운 마음과 심소법(心所法) 등이 상응하는 이치에 의한 것인데, 그것은 유루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무루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어떤 법은 한결같은 무루이니, 이른바 도를 보았을 때 마음과 심소법등이 자성해탈의 이치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유루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어떤 법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한 것이니, 이른바 과보로서의 무기심과 심소법 등이 수면에 얽매이기 때문이며, 또 모든 얽매임을 떠났기 때문에 비록 무루이기는 하나 그것은 고제(苦諦)이니 업의 번뇌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어떤 법은 유루도 아니며, 무루도 아닌 이른바 매우 깊은 법이니 수(數)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今作四句 略顯其相 一者有法 一向有漏 謂諸染汚心心所法等 由相應義 是有漏故 而無五種無漏相故
二者有法 一向無漏 謂見道時 心心所法等 由有自性解脫義故 而無五種有漏相故
三者有法 亦有漏 亦無漏 謂報無記心心所法等 隨眠所縛故 諸纏所離故 雖復無漏 而是苦諦 由業煩惱所生起故
四者有法非有漏謂甚深法不墮數故
다음에 따로 밝히는 가운데에도 또한 두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분제(分際)가 있는 문이요. 둘째는 장애가 없는 문이다.
次別明中 亦有二門 一有分際門 二無障礙門
분제가 있는 문이란, 만일 부처님께서 사시는 정토에 대해 말한다면, 이 사구중에 오직 두 구만이 있으니, 색이 있고 마음이 있는 문에 의하면 그것은 곧 한결같이 무루로서, 자성 상속(自性相續)에서 해탈하는 이치 때문에 다섯 가지 유루의 모양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만일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닌 문에 의하면, 그것은 곧 유루도 아니요 무루도 아니니, 유루도 아니요 무루도 아니기 때문에 모양도 떠나고 성품도 떠났기 때문이다.
有分際門者 若就諸佛所居淨土 於四句中唯有二句 依有色有心門 卽一向是無漏 自性相續解脫義故 遠離五種有漏相故
若就非色非心門者 卽非有漏 亦非無漏 非有非無故 離相離性故
보살에 대해 말해도 또한 두 구가 있으니 논(論)에서와 같이 두 지혜로 나타난 정토는 한결같이 무루의 도로서 도제(道諦)에 포섭된다. 저 “섭론(攝論)”에서 말한 “보살과 여래의 유식(唯識)의 지혜는 모양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나니 그러므로 청정이라고 하고, 일체의 장애를 떠나 퇴실(退失)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자재라고 하며, 이 유식의 지혜는 정토의 체(體)가 되기 때문에 고제(苦諦)로 그 체를 삼지 않는다…(이하 생략)…”한 것과 같다.
若就菩薩 亦有二句 恰論二智 所顯淨土 一向無漏 道諦所攝
如攝論說 菩薩及如來唯識智 無相無功用 故言淸淨 離一切障 無有退失 故言自在 此唯識智 爲淨土體故 不以苦諦爲體 乃至廣說故
만일 본식(本識)이 변한 문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무루이니, 삼계의 유루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무루의 세계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루이다.
그러나 무명주지(無明住地)가 반연이 되어 생겼기 때문에 과보토(果報土)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유루가 비록 무루라 하더라도 그것은 세간이다.
그러므로 지음이 없는 사제문(四諦門) 안에서 고제의 과보에 포섭되는 것이다.
저 경에 “삼현(賢) 십성(聖)은 과보에 머무른다”고 한 것과 같다.
若就本識所變之門 亦是無漏 以非三界有漏所起 樂無漏界 故是無漏
無明住地爲緣出故 名果報土
故是有漏 雖亦無漏而是世間
故於無作四諦門內 苦諦果報之所攝也
如經言 三賢十聖住果報故
“보성론(寶性論)”에 “무루계에 의하여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이 있으니, 그것은 무루의 선근으로 인해 지어진 것으로서 이름을 세간이라 하며, 유루의 모든 업의 번뇌로 지어진 세간법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또 이름을 열반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 뜻에 의해 “승만경”에는 “세존님, 유위(有爲)의 세간이 있고 무위(無爲)의 세간이 있으며, 유위의 열반이 있고 무위의 열반이 있습니다”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의생신이란 곧 아리야식(阿梨耶識)이 변한 정보(正報)이다.
정보가 그렇다면 의보도 또한 그러하니, 그것은 다같이 본식(本識)이 변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리야가 변해서 된 국토와 두 지(智)로 나타난 정토는 비록 고제와 도제의 이제(諦)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그 별체는 없는 것이요, 뜻을 따라 달리 포섭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저 분별로 가지는 예토에 대해 청정을 얻은 이는 그것을 청정하다고 볼 때 청정하고 더러움은 비록 다르나 별체가 없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이치도 또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상은 분제문(分際門)에 대해 말한 것이다.
寶性論云 依無漏界中 有三種意生身 應知彼因無漏善根所作 名爲世間 以離有漏諸業煩惱所作世間法故 亦名涅槃
依此義故 勝鬘經言 世尊 有有爲世間 有無爲世間 有有爲涅槃 有無爲涅槃
故此中說意生身 乃是梨耶所變正報
正報旣爾 依報亦然 同是本識所變作故
然此梨耶所變之土 及與二智所現淨土 雖爲苦道二諦所攝 而無別體隨義異攝耳
如他分別所持穢土 得淸淨者 卽見爲淨 淨穢雖異 而無別體 當知此中二義亦爾
此約有分際門說也
다음에 장애가 없는 문에 대해 말하면 네 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次就無障礙門說者 應作四句
첫째는 부처님의 몸과 국토가 다 유루이니, 일체의 누(漏)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경에 “모든 부처님이 삼독(三毒), 사루(四漏) 등 일체 번뇌 속에 편히 머무르면서 아뇩보리를 얻는다…(이하 생략)…”한 것과 같다.
一者諸佛身土 皆是有漏 不離一切諸漏故 如經說言 諸佛安住三毒四漏等 一切煩惱中 得阿耨菩提 乃至廣說故
둘째는 범부들의 몸과 국토가 다 무루이니 모든 눈의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다. 저 경에 “색(色)도 무루 무계(無漏無繫)요, 수, 상, 행, 식도 무루 무계이다…(이하 생략)…” 한 것과 같다.
二者 凡夫身土皆是無漏 以離一切諸漏性故 如經說言 色無漏無繫 受想行識 無漏無繫 乃至廣說故
셋째는 모든 범부와 성인의 예토와 정토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한 것이니, 앞의 두 문(門)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三者 一切凡聖穢土淨土 亦是有漏 亦是無漏 以前二門不相離故
넷째는 모든 범부와 성인의 예토와 정토가 유루도 아니요 무루도 아닌 것이니, 그것은 얽매이는 성품[縛性]도 없고 해탈의 성품[脫性]도 없기 때문이다.
저 경에 “색도 얽매이는 성품도 없고 해탈의 성품도 없으며 수, 상, 행, 식도 또한 그렇다…(이하 생략)…” 한 것과 같다.
四者 一切凡聖穢土淨土 非有漏 非無漏 以無縛性及脫性故
如經說言 色無縛無脫 受想行識 無縛無脫 乃至廣說故
이상은 제4의 누가 있고 누가 없는 문이다.
此是第四有漏無漏門也
이상의 4문을 합해 첫째의 정토의 과덕이라고 한다.
上來四門合爲第一淨土果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