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손학규의 부친 손병화 씨의 고향은 경기도 파주시 장단(長湍)이다. 공부와 인연이 닿았는지,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교에 다녔다. 학교 졸업 후 교사가 되었고, 같은 교사로 재직하던 양현자 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시흥 일대 여러 곳의 초등학교 설립을 맡아 교장을 지냈는데, ‘손 교장’을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성격이 엄하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약주를 즐겼다고 입을 모은다.
손학규는 부친 얼굴을 기억 못한다. 사진으로 보긴 했어도, 실제 얼굴을 본 기억은 없다. 손학규가 아주 어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손학규가 세 살 때 6. 25 전쟁이 터졌다. 그 무렵 그의 부친은 시흥 온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는데, 그 해 12월, 피란민을 위한 교육 문제를 협의하러 안양 교육구청으로 가던 길에, 그를 태운 군용 지프가 철도 위 구름다리에서 전복되는 사고로 그만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쟁 때 북한군이 손학규 마을의 집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부친의 장례는 손학규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치러졌던 모양이다. 그 장례식의 한두 장면이 아직도 손학규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다. 울음이 가득했고, 사람들이 많았고, 별나게 음식도 많았던 것 같은데, 번쩍거리는 모자에 옷을 잘 차려 입은 큰 키의 사람들을 본 기억이 난다. 나중에 커서 들으니, 그 사람들은 헌병들이었다. 손학규의 부친이 군용 지프에 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헌병들이 문상을 온 것이었다. 그런데 학규는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헌병들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죽음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나이에 학규는 부친을 여의었다.
어느 해 설날, 동네 어떤 아이가 ‘털신’을 무척 자랑을 하고 다녔다. 자기 아버지가 사준 신발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학규는 그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렇게 부럽고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아이들에게 그다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게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는 늘 안고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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