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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중봉기-작자 미상
▒ 줄거리
선옥의 조부 김완국이 간신의 모함을 받아 적소(謫所)로 떠나 죽고 가족들은 고향 안동으로 낙향한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선옥은 절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집에 몰래 내려와 보니 부인의 침소(寢所) 사창(紗窓)에 남자의 의관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재산을 탐낸 팔촌 형옥이 선옥과 용모가 비슷한 인물을 데려오니 모두 반기나 선옥의 처만은 가짜임을 간파한다. 이 일을 나라에서 알게 되어 진 어사를 파견한다. 진 어사는 전국을 3년 동안 돌아다닌 끝에 선옥을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한다. 일본이 변경을 침범하자 선옥이 정남도원수로 출정하여 대승을 거둔 후, 조부를 모함한 간신의 죄를 상주하여 제주에 안치시킨다. 이후 김씨 가문은 부귀영달을 누리게 된다.
▒ 핵심정리
▶ 갈래 : 송사소설, 가문소설, 영웅소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권선징악, 아녀자의 의리와 절개, 어이없는 오해가 빚은 인간사의 희비
▒ 등장인물
▶ 선옥 : 사소한 오해로 인해 집을 등질만큼 심성이 여린 인물이다. 고전 소설 주인공으로서 특이한 인물형이라 할 수 있다.
▶ 이씨 부인 :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현명한 인물이다. 시가 가문 전체를 상대로 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을 만큼 지조 있는 여인이기도 하다.
▶ 진어사 : 용의주도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이다.
▶ 형옥 : 가짜 선옥을 데려와 진짜라고 우겨 재산을 차지하려는 부정적 인물형이다.
▒ 이해와 감상
창작 연대 미상의 고전 소설로, 하바드대 연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진가쟁주(眞假爭主)이야기를 근간으로 한 송사(訟事) 소설이지만 영웅의 일대기로서의 성격과 가문 소설적 성격도 아울러 지닌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지닌 진가쟁주 이야기는 설화나 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이는데, 핍진(逼眞)한 내면 묘사와 치밀한 구성이 두드러진다. 기존 고전 소설의 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을 의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흥미를 필요로 했던 독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 작품은 영웅 일대기의 구조적 원형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수용하면서, 송사 소설적 특징· 열행록적 특징· 가문 소설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 생각해보기
1. 형옥의 행적을 따라서 조선후기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국토를 순례했는지를 추정해 보자.
▶ 조선후기는 국토 순례의 시대였다. 여러 편의 기행 가사가 지어졌고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유람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경로와 당시 사람들에 의해 손꼽히던 절승지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화산중봉기>에는 형옥이 선옥을 찾아 팔도를 헤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과정에서 거론된 지명들이 당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의 순으로 형옥의 국토순례는 이루어졌다.
2. <옹고집전>과 비교하여 가짜 선옥이 만들어지는 장면의 특징을 밝혀봅시다.
▶ <옹고집전>은 도사가 허수아비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지만 <화산중봉기>에서는 형옥의 음모로 김흥룡이라는 남자가 김선옥 흉내를 내게 된다.
따라서 가짜 옹고집은 술법에 의해 진자 옹고집보다 완벽하게 옹고집 행세를 할 수 있지만 김흥룡은 아무리 김선옥 행세를 하려고 해도 몇몇 미흡한 점이 있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가짜 옹고집은 옹고집의 하인 친척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모두 진짜 옹고집으로 인정을 받지만 김흥룡은 이농옥에 의해 가짜임을 의심받게 된다.
이렇게 그 소설상의 구조가 다른 것은 <옹고집전>에서는 옹고집을 징치(懲治)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면 <화산중봉기>에서는 이농옥의 지인지감을 부각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3. 이농옥이 처한 상황을 토론해 봅시다.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 부녀자의 삶과 비교하여 살펴봅시다.
▶ 이농옥은 형옥이 데리고 온 선옥이 가짜임을 단번에 안다. 그러나 그녀의 시가와 친정 사람들은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지아비를 섬기지 않으려는 못된 여자로 비난한다.
그러나 이농옥은 절개를 결코 굽힐 수 없다고 하면서 가짜 선옥이 그녀와 동침하려는 것을 번번이 회피한다. 급기야 이농옥의 친정 아버지는 이농옥에게 자결을 강요하나 그녀는 헛되이 죽을 수는 없다고 버틴다. 이농옥의 행동은 지아비와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꿋꿋하게 물리치는 사대부 부녀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특히 이농옥의 성격은 흔히 나약하고 삶에 곧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자신의 앞길을 가려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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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지문>
각설(却說), 선옥의 나이가 이팔(二八)이라. 본디 영웅의 재주로 일찍 문무 병행하니 이두(李杜)의 문장과 손오(孫吳)의 병법을 일신(一身) 겸비(兼備)하였으니 과연 당시 일인이라. 보는 자 저마다 동상(東床)에 맞고자 하나 처사 그 연천(年淺)함으로 허락지 아니하더니, 이때에 춘임이라 하는 매파가 나이 칠십이요, 위인이 조용하고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또한 당시 제일이라. 이러므로 명문대가에 모르는 곳이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예모(禮貌)로써 용접(容接)하여 별호를 춘파라 하는지라. 이날 처사(處士) 부중에 이르러 예를 마치고 좌정한 후, 부인께 고하기를,
“소파 다년간 매작(媒妁)에 늙었사오나 귀댁 공자 같사온 선풍도골(仙風道骨) 영웅호걸(英雄豪傑)은 보던 바 처음이라. 이 배필이 어디 있는가 은근히 찾았사오나 마침내 만나지 못하였더니 하늘이 지시하사 공자의 가우(佳偶)를 얻었사오니, 부인께서는 모름지기 처사 존전에 여쭈어 가기(佳期)를 잃지 마소서.”
부인이 청파에 물어 가로되,
“이 어떠한 집 규수이뇨?”
춘파 대답하여 이르되,
“경주 땅 이 통판 댁 소저이오니 이제 방년이 삼오(三五)라. 그 화용월태(花容月態)와 유한숙덕(幽閑淑德)함이 고금에 처음인가 하나이다.”
부인이 처사를 청하여 춘파의 전후수말을 일일이 고하고,
“이 통판은 누구이니까?”
처사 대답하여 가로되,
“이 통판은 어사 봉구의 아들 성일이니, 일찍 벼슬을 사례하고 초야에 한가로이 있어 풍월을 소요하매, 그 맑은 바람과 높은 덕행이 또한 당시 사림 중 영수라. 이제 그 여아가 부풍(父風)을 모습(模襲)할진대 반드시 유한 현숙할지라. 결친함이 마땅하나, 일인의 말로 거연히 의혼하기 경선(輕先)할지라. 부인은 지감 있는 시비로 춘파와 같이 보내 자세히 보고 오라 하소서.”
부인이 즉시 향임이라 하는 시비를 이고(尼姑)의 모양으로 장속(裝束)하여 춘파와 같이 보내며 일러 왈,
“이부(李府)에 가 여차여차하라.”
하더라.
차시, 이 통판이 부인과 더불어 농옥의 쌍이 없음을 정히 차탄(嗟歎)하더니, 일일은 부인이 사창(紗窓)에 의지하였더니, 문득 공중으로서 한 조각 종이 내려오거늘, 바라보니 ‘안동’이라는 두 글자가 뚜렷이 써 있거늘, 보기를 다하매 마음에 가장 의혹하다가 깨달으니 침상일몽이라. 몽중사를 생각하매 길흉을 알지 못할지라. 정히 침음하더니 시비 고하되,
“문밖에 춘파가 어떠한 이고로 더불어 청알(請謁)하나이다.”
부인이 들어옴을 허하거늘 춘파와 이고가 정하(庭下)에 예배하매, 부인이 청상에 앉히고 주찬(酒饌)을 내어 와 은근 상대하며 물어 왈,
“저 여관은 누구이뇨?”
춘파가 여쭈오되,
“이 여관은 곧 태백산 학선관에 있는 이고로소이다. 소파가 일찍 부처께 공양하러 갔다가 저 이고를 만나매, 그 재주가 신출귀몰이라.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보면 평생 우락을 잠시에 분석하오매, 낭랑께 천거하오니 낭랑은 용접하소서.”
하니, 부인이 예로써 관대(款待)하고 왈,
“선고께서 진애(塵埃)를 헤쳐 누지(陋地)에 굴림하시니 자못 감사한지라. 우리 부부는 이미 상유지말경(桑楡之末境)이어니와 늦게야 일개 여식을 두었으니 이는 곧 우리의 낙이라. 바라건대 선고는 한 번 수고를 아끼지 말고 여아의 길흉화복을 가르침이 어떠하뇨?”
하고 시녀를 명하여 소저를 부르니, 소저가 침소로 나와 부인 곁에 앉거늘, 향임이 불감함을 재삼 사양하고 눈을 들어 한 번 보매, 태양이 형산에 처음 돋고 호월(晧月)이 설상에 돋았는 듯 정신이 황홀하여 말할 바를 모르더니, 한참 후에 여쭈되,
“소저는 진실로 천상 선녀라. 인간의 육안으로 평론치 못하옵거니와, 일후 후비(后妃) 아니면 반드시 영웅호걸을 섬기리니 녹록(碌碌)한 규중처자와 같이 적은 부덕으로 의논할 바가 아니로소이다.”
하고, 춘파를 돌아보며 왈,
“이상하도다. 소저가 비록 여중기골(奇骨)이나 안동 김 처사 댁 공자와 방불(彷佛)하도다.”
하거늘, 소저가 아미를 찡그리고 침소로 가니라. 부인이 안동이란 말을 들으매 그 전의 몽사를 생각하고 신기하게 여겨 물어 왈,
“안동 김 처사 댁 공자는 누구뇨?”
춘파가 대답하여 왈,
“문하시중 완국의 손자요, 처사 수중의 아들이라. 시년 이팔이요, 재덕이 쌍전(雙全)하며, 준수 화려한 기골이 당시 영웅이라. 소파가 경향으로 열력(閱歷)이 많사오나 김 공자와 비할 자가 없는지라. 알지 못하겠노라, 소저가 어디 청혼을 하였나이까?”
부인이 대답하여 왈,
“연광(年光)이 아직 차지 못하므로 정혼치 못하였노라.”
춘파가 다시 여쭈오되,
“그러하오면 이는 반드시 천생연분이니 달리 구혼치 마시고 상공께 의논하시어 김 공자와 성친(成親)하심이 가할까 하나이다.”
부인이 통판을 청하여 춘파의 말을 자세히 고하고 물어 왈,
“안동 김 처사는 어떠한 사람이니까?”
통판이 대답하여 왈,
“김 처사는 이전 시중 완국의 아들이라. 그 부친이 무죄하게 절도(絶島)에 죽은 바 되었으매, 청운에 뜻이 없어 농부 어옹과 짝이 되어 세월을 보내니, 또한 지상의 신선이라. 내 비록 일면의 지분이 없으나 그 덕행을 짐작하매 그 아자(兒子)도 반드시 충효를 겸전(兼全)하였을지라. 속담에 하였으되, 호랑이가 호랑이를 낳고 개가 개를 낳는다 하였으니, 부인은 시비를 보내어 자세히 탐지하라.”
하거늘, 부인이 춘파를 보고 왈,
“춘파의 말을 들으매 진실로 반가운지라. 이제 여아의 혼사를 의논코자 하여 시비를 시켜 한 번 보고 완전히 정하고자 하니, 춘파는 한 번 걸음을 아끼지 말라.”
하고, 시비 추월을 불러,
“춘파와 같이 가서 공자(公子)를 보고 오라.”
하고, 춘파를 재촉하니 춘파 왈,
“이같이 신근)하오시니 바른대로 말씀하오리이다. 저 여관이 과연 이고가 아니오라 김 처사 댁 시비 향임이라. 소저의 화용을 보러 왔사오나, 바른대로 말씀하오면 자세히 뵈올 길이 없을 듯하여 잠간 기망(欺罔)하였사오니 죄송하오이다.”
하며 향임이 복지청죄하거늘 부인이 시비로 붙들어 청에 올리고 위로 왈,
“사세 그러할지라. 무슨 청죄하리오?”
하고, 즉시 삼인을 안동으로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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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却說): 주로 글 따위에서,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꺼낼 때, 앞서 이야기하던 내용을 그만둔다는 뜻으로 다음 이야기의 첫머리에 쓰는 말. ☞화설(話說)
* 동상(東床): 남의 사위를 높여 이르는 말
* 연천(年淺): 나이가 아직 적다
* 매파(媒婆): 중매하는 할멈
* 지인지감(知人之鑑): 사람을 잘 알아 봄, 또는 그러한 능력
* 예모(禮貌): 에절에 맞는 몸가짐
* 용접(容接): 손님을 맞음
* 춘파: 남녀 간의 사랑을 중매하는 노파
* 처사(處士):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 부중(府中): 높은 벼슬아치의 집안
* 공자(公子): 지체가 높은 집안의 나이 어린 아들
* 매작(媒妁): 중매
* 선풍도골(仙風道骨): 남달리 뛰어나고 고아한 풍채
* 가우(佳偶): 좋은 배필
* 가기(佳期): (결혼하기에) 좋은 시기
* 통판(通判): 판관
*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맵시
* 유한숙덕(幽閑淑德): 인품이 조용하고 그윽하며 행실이 정숙하고 착하고 어짊
* 전후수말(前後首末): 자초지종,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
* 사례: 예의를 갖춰 사양함
* 풍월을 소요(逍遙)하매: 자연을 벗 삼아 자유롭고 한가로이 지냄
* 사림(士林) 중 영수(領袖): 유학자 무리중 우두머리
* 모습(模襲): 본받음
* 결친(結親): 사돈 관계를 맺음
* 거연(遽然)히: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득. 갑자기
* 의혼하기: 혼사를 의논함
* 경선(輕先)하다: 경솔하게 앞질러 하는 성질이 있다.
* 이고(尼姑): ‘비구니’를 낮잡아 이르는 말.
* 장속(裝束): (무슨 일을 하기 위하여) 몸을 꾸며 차림, 또는 그 몸차림.
* 상유(桑楡):
1) 저녁 해가 뽕나무와 느릅나무 위에 걸려 있다는 뜻으로, 해가 질 무렵을 이르는 말.
2) 노년이나 만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동쪽에 상대하여 서쪽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