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령 [銅鈴]
한국에서는 흔히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제 방울을 뜻한다. 형태상 손에 쥐거나 막대에 매달아 흔들어 소리를 낸 종교적 ·주술적 목적의 의기(儀器)라고 믿어진다. 한국 선사시대의 청동제 방울은 불가사리 모양의 손잡이에 방울이 8개 달린 팔주령(八珠鈴)과, 막대모양의 손잡이 양끝에 방울이 달린 쌍주령(雙珠鈴)이 많이 발견되며,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그 사례가 많이 알려졌다. 동령은 거마구(車馬具)와 같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말재갈의 용도로도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동령은 방울소리를 울려 사악한 기운을 쫓는 벽사(僻邪)의식을 수행하거나 의례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 칼뱅 [1509.7.10~1564.5.27]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神政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15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 무지개 [rainbow]
베이컨은 무지개는 구름 속의 물방울이 구슬 모양의 거울로 작용하기 때문에 상(像)이 휘어서 색조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제1차 무지개는 물방울에 의한 2회의 굴절과 1회의 반사에 의해서, 제2차 무지개는 2회의 굴절과 2회의 반사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최초로 주장한 것은 M.A.도미니스이며, 이것과 독립적으로 R.데카르트도 굴절 원리에 의해 무지개를 설명하였다(1637). I.뉴턴은 프리즘의 실험에 기초를 두고, 서로 다른 색의 광선은 굴절률에 차이가 있고, 이 차이로 무지개가 생기는 것으로 설명했다. 또 영국의 천문학자 G.B.에어리는 물방울의 크기의 차이에 의해서 여러 종류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을 밝혔다.
무지개에 얽힌 전설은 수없이 많다. 중국에서는 무지개는 연못의 물을 빨아 올려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아메리카인디언들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옛날에 무지개 현상을 보고 홍수를 예상했다. 한 가지 예로서 ‘서쪽에 무지개가 서면 소를 강가에 내 매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즉 서쪽 무지개는 동쪽에 태양이 있고 서쪽에 비가 오고 있음을 뜻하며(아침 나절에 나타나는 무지개), 한반도는 편서풍 지대에 속해 있어 모든 날씨의 변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비오는 구역이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여 자기가 사는 곳까지 비가 올 가능성이 크다.
또 무지개는 소나기에 잘 동반되는데, 소나기는 빗방울이 굵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홍수가 일어나기 쉽고, 홍수로 하천이 범람하여 귀중한 농우(農牛)를 떠내려 보내는 일이 없도록 예고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에 반하여 아메리카인디언들은 물을 빨아 올리므로 가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동남아시아의 원시민족들은 아침 무지개는 신령(神靈)이 물을 마시기 위해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 무지개가 선 곳을 파면 금은보화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 나라도 있다.예를 들면 아일랜드에서는 금시계가, 그리스에서는 금열쇠가, 노르웨이에서는 금병과 스푼이 무지개가 선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였다. 이들 전설의 기원은 아마도 무지개를 잘 동반하는 강한 소나기가 내린 뒤에 고대 유적과 같은 곳의 표토가 씻겨져 내려서 아름다운 유물들이 발견된 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서에서는 노아의 홍수 후 신이 다시는 홍수로써 지상의 생물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보증의 표시로서 인간에게 보여준 것으로 보았다.그리스신화에서는 이리스(Iris)라는 여신이며 제우스의 사자(使者)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여러 민족에 따라 하늘과 땅 사이의 다리(북유럽 신화), 뱀(아메리카인디언)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바이라족(族)은 지상신(至上神), 말레이반도의 원주민은 하늘나라의 거대한 뱀 또는 뱀이 물을 마시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지개를 타고 뱀이나 용이 물을 마시러 내려온다는 전설은 적지 않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무지개를 신령이 지나다니는 다리 또는 사닥다리라고 해석했다. 한국에도 선녀(仙女)들이 깊은 산속 물 맑은 계곡에 목욕하러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 베네딕트 계율
수도원은 중세의 정신생활이나 文化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도원은 중세교회가 타락하고 속화했을 때, 이를 정화하고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중세 초기의 문화적 암흑기에 희미하게나마 문화의 등불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중세 후반기에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것도 수도원이었다. 로마제국 초기의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敎의 교세는 확장해 갔으며, 4세기에는 크리스트교의 집단적인 개종현상이 광범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커지자 敎會는 큰 재산의 소유자가 되었고, 이에 따라 세속화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건한 열성적인 신자나 성직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초기교회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생기고, 그것이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낳게 하였다.수도원생활은 먼저 동방에서 시작되었다. 3세기 말 聖 안토니(St. Anthony)는 북부 이집트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주변에 집을 지어 함께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역시 이집트의 파코미우스는 사막에서의 은둔생활이 너무나 고퉁스러워, 일정한 계율을 정하고 한 건물에서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여 수도원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에서의 수도원제도의 확립자로는 일반적으로 4세기 소아시아출신의 그리스인 교부 聖바질(St. Basil the Great)을 꼽는다. 그는 노동과 자선과 공동생활을 토대로 한 수도원의 계율을 정하였고, 그 계율은 비잔틴제국내의 수도원의 표준적인 계율이 되었고, 현재도 그리이스政敎 세계에서 통용되고있다.
· 룸비니 [藍毘尼(남비니)]
네팔 남부 테라이 지방의 한촌(寒村).
'남비니(藍毘尼)'로 음역한다. 불교의 시조 석가가 탄생한 곳으로, 샤카족의 도읍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석가 탄생 이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인도의 아소카왕은 이곳에 석가를 찬미하는 기념 돌기둥을 세웠다. 이 돌기둥은 1896년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샤카족의 성자(聖者) 불타가 탄생한 것에 연유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하고, 또 생산량의 1/8만을 납입한다'라는 의미의 법칙이 새겨져 있어 석가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곳곳에 불타의 탄생과 연관된 고고유적들이 남아 있다. 1997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스투파
본시 사물이 퇴적한 것을 의미하였는데 점차 죽은 자를 장사지낸 다음 흙을 높이 쌓은 무덤을 가리키게 되었다. 졸탑파(卒塔婆)의 약칭인 탑파(塔婆) ·탑(塔)이라는 말도 스투파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입적했을 때 불사리(佛舍利)를 8등분하고 8개의 불탑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아소카왕 때 이 불사리를 재발굴하여 8만 4000의 탑에 분납하였고, 이것이 불교도들의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스투파가 건립되어 예배의 대상 또는 봉헌(奉獻)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스투파의 기본형은 원통형의 기단 위에 반구형(半球型) 복발(覆鉢)을 포개어 그 위에 상자 모양의 평두(平頭)와 산개(傘蓋)를 세운다. 기단의 둘레를 난순(欄楯)으로 에워싸고 난순의 4방에 탑문을 설치하며 복발의 몸통 ·난순 ·탑문 등을 부조(浮彫)형식으로 조각하여 장식한다. 주요 유품으로는 인도의 바르후트 및 부다가야의 난순, 산치 제1 ·2 ·3 탑, 마니캬라 대탑(大塔), 아리마스지드탑, 톱 다라탑 등이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Aurelius, 354.11.13~430.8.28]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 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 원불교 [圓佛敎]
1916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개창한 민족종교.
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O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교조 중빈은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우주와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가득찬 의문을 한학(漢學)공부로는 풀 수가 없었으므로, 범인(凡人)보다는 높은 차원의 경지에 있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산상기도와 도사(道士)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같은 그의 구도정신은 결국 그를 외부로부터의 문제해결을 포기하고 독자적 수도 고행에 들어가게 만들었는데, 어떤 일정한 수행법을 택하지도 못한 채 망아(忘我)의 침잠(沈潛)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다.
· 아수라 [阿修羅, asura]
인도 신화에서 선신(善神)들의 적(敵)에 대한 총칭.
아소라(阿素羅) ·아소락(阿素洛) ·아수륜(阿須倫) 등으로 음사(音寫)하며 수라(修羅)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비천(非天) ·비류(非類) ·부단정(不端正) 등으로 의역하는데, 천룡팔부중(天龍八部衆)의 하나로서, 귀신의 한 동아리로 친다. 그러나 어원적(語源的)으로는 페르시아어의 아후라(ahura)와 같은 말로 신격(神格)을 뜻하며(예:아후라 마즈다), 인도의 여러 신들 중 바루나나 미트라는 옛날부터 아수라라고 불리었다. 아마도 인도 아리아인(人)이 신앙하는 신격 가운데 아수라의 일군(一群)과 데바[天]의 일군이 있어 인드라를 비롯한 데바의 무리가 제사의 대상으로서 우세해짐에 따라, 아수라가 마신(魔神)으로 취급된 것으로 추측한다(페르시아에서는 다에바스가 마신이다). 불교에서는 육도(六道)의 하나에 아수라도(阿修羅道)를 꼽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로서 설명한다(예:수라장 등). 조각에서는 삼면육비(三面六臂)를 하고 있고 세 쌍의 손 가운데 하나는 합장을 하고 있으며 다른 둘은 각각 수정(水晶)과 도장(刀杖)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 브라만교 [婆羅門敎(바라문교), Brahmanism]
고대 인도에서 불교보다 먼저 브라만 계급을 위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여 생성된 종교.
특정 교조(敎祖)를 갖지 않는다. 바라문[婆羅門]교라고 한자로 음사(音寫)한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의 4베다와, 베다의 주석 및 제사에 관한 규칙을 기록한 《브라마나[梵書]》 《아란야카[森林書]》, 그리고 철학서 《우파니샤드[奧義書]》 등을 계시성전(啓示聖典:ruti)이라고 한다. 그 외에 6종의 보조학(Vednga:音聲 ·祭式 ·文法 ·語源 ·韻律 ·天文), 《마하바라타:Mahbhrata》와 《라마야나:Rmyan》의 2대 서사시, 그리고 《마누법전(法典)》 등의 성전문학(聖傳文學)이 전해지고 있다. 브라만교는 인도 아리아인(人)이 BC 1500년경에 인도에 침입한 이후 신봉하였던 민속종교로, 넓게는 힌두교(인도교)에 속한다.
· 리그베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으로, 브라만교(敎)의 근본경전(根本經典)인 4베다 중 첫째 문헌.《리그베다 상히타》의 약칭. 리그는 성가(聖歌), 베다는 경전, 상히타(sahit)는 경전의 집성(集成)을 뜻하는 말인데, 본집(本集)으로 한역(漢譯)한다. 제식(祭式) 때에 신들을 제장(祭場)에 초청하여 호트리 제관(祭官)이 부르는 찬가(讚歌)의 집록(集錄)이며, 베다 문헌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10권 1,028의 운문(韻文)의 찬가로 되어 있고, BC 2000∼BC 800년에 현재의 형태로 정비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암송에 의하여 후세에 전해졌다. 내용은 베다의 여러 신(神)을 찬미하는 종교시(宗敎詩)로 간결 ·소박하여, 후세 고전기(古典期) 시인의 미문체(美文體)에서 보는 바와 같은 난해한 기교의 수식은 보이지 않지만, 그 언어(Vedic Sanskrit)가 결코 평이한 것만은 아니다.
· 베다 [Veda]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적 제식문학(祭式文學)의 일대 집대성.
베다란 ‘지식’ 또는 ‘종교적 지식’을 의미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gveda》 《사마 베다:Smaveda》 《야주르 베다:Yajurveda》 《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의 4종류가 있다. 이 4종류의 구별은 고대 인도의 침입민족인 아리아인(人)이 제식(祭式)을 지낼 때 제관(祭官)의 역할에 따라 구분한 데 유래한다. 《리그 베다》는 제신(諸神)을 제장(祭場)으로 불러들이는 권청(勸請), 《사마 베다》는 제장에서의 가창(歌唱), 《야주르 베다》는 제사의 진행과 관계가 있고, 《아타르바 베다》는 재앙 제거, 조복(調伏) 등의 주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BC 1500∼BC 1000년경에 이루어졌다. 출생 ·결혼 ·장례 등 인생에 있어서의 통과의례(通過儀禮), 조상 공양이나 신월제(新月祭) ·만월제(滿月祭) ·계절제(季節祭) ·공수제(供獸祭), 또는 신주(神酒)를 신에게 바치는 소마제(祭) 등, 인사백반(人事百般)에 걸친 제식에 관한 복잡한 규정과 그에 관한 신화적 의의가 부여되어 있다.
· 이슬람과 개
원님이 심기가 불편한 일을 겪고 등청을 했다. 그 화를 무고한 이방에게 퍼부었고 이방은 역시 무고한 아전에게 전위(轉位)시킨다. 아전은 퇴청하여 그 스트레스를 무고한 아내에게 퍼부었고, 아내는 부엌에 들어가 낮잠 자고 있는 강아지 배때기를 차 깨갱거리게 하는 것으로 해소하려 든다. 이렇게 불평불만이나 화는 힘이 약한 아랫것으로 하향 전위를 하여 무고한 개에게까지 가서 멈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독·모욕하는 욕말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끼인 말이 ‘개’인 것도 개가 하위개념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권에서 흔히 쓰는 욕말이 S.O.B., 곧 선오브비치다. 암캐만 해도 욕이 되는데 그 암캐가 낳은 새끼, 더욱 강조해서 들암캐가 낳은 새끼로 모욕농도를 높여나간다. 러시아에도 같은 욕말이 있는데 암캐 새끼를 뜻하는 ‘수킨 신(Sukin sin)’이 그것이다. 심하면 개의 성기나 물개의 성기로 모욕농도를 높인다. 영어와 같은 게르만계 언어에서도 돼지와 개를 합성한 ‘돈견(豚犬)!’이라는 독일 욕이나 ‘바보개!’ 하는 네덜란드 욕말이 있다.개가 가장 농도 짙은 욕말이 되고 있는 것은 이슬람권이다. 이슬람의 시조 마호메트가 수색을 피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한 마리 개가 짖어대는 바람에 발각의 위기를 맞게 됐다 하여 이슬람교도에게 있어 개는 종교적 저주가 가중된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을 전승하는 하디트에는 개가 핥은 음식이나 개가 들어갔던 방도 부정 탄 것으로 돼 있다. 개가 냄새만 맡아도 그 옷은 저주받았다 하여 버려야 한다. 하물며 ‘개새끼’라는 욕말을 듣고도 대들지 않는다면 이슬람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있다. 이 문화권의 개를 둔 인식의 문화마찰로 바그다드는 지금 고통을 받고 있다. 자살테러가 심해지자 경비하는 미군은 현지 주민에 대한 수색을 강화하고 있는데 지난주 석유청사 앞에서 한 여자직원이 개의 후각에 의한 핸드백 검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수갑을 채우자 이 말이 청내로 삽시간에 번져 약 200여명이 사표를 내고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 여름에 남부 아마라에서 영국병 6명이 현지 주민들의 폭동으로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발단은 중화기 수색을 위해 개를 썼던 것이었다. 문화마찰까지 피해가며 전쟁하려다 보니 현대전 이기기란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 파고다 [pagoda]
동양에서 볼 수 있는 탑. 특히 불탑(佛塔)·사원(寺院)을 가리키며, 포르투갈어 pagode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어 부트 카다(butkadah:신이 사는 곳), 또는 산스크리트의 바가바트(bhagavat:聖者·신)가 전화(轉化)한 것이라고 하나 명확한 어원(語源)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얀마에서는 보통 구미인이 불탑·사원을 호칭할 때 사용하며, 버마어로 파야(phaya:神·佛), 제디(Zedi:塔·塔廟:산스크리트의 chaitya와 같다)라고 불리고 스투파 (st後pa:塔)와 마찬가지로 불타와 제자의 유골·의복 등을 넣어 두는 것과 불교경전·불상을 넣어 두는 것이 있다. 금박으로 덮인 미얀마 양곤 시내의 웅대한 슈에다곤파고다는 대표적인 것이다.
· 예루살렘 : 역사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城市)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의 파라오(王)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뒤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고, 그 북쪽, 지금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이며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뒤 페르시아 왕 키루스(고레스)가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뒤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로데스(헤롯)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왕 이래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뒤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로데스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로데스가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그뒤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야훼의 성전을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신(神) 앞까지 갔다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아크사의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사원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편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예외로는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1)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에서 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결국 이 땅은 맘루크왕조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다마스쿠스 총독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 자비 [慈悲]
'자'는 최고의 우정을 의미하며, 특정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우정을 갖는 것이다. 또 '비'의 원래 의미는 '탄식한다'는 뜻으로 중생의 괴로움에 대한 깊은 이해·동정·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광대한 자비를 '대자대비(大慈大悲)'라고 하는데, 이는 석가의 자비를 나타내는 데 흔히 사용된다. 석가의 자비는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하기 때문에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하며, 그 이상이 없는 최상의 것이기 때문에 '무개대비(無蓋大悲)'라고도 한다. 《열반경(涅槃經)》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에 따르면 자비에는 중생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중생연(衆生緣)의 자비, 모든 존재를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법연(法緣)의 자비, 대상이 없이 일으키는 무연(無緣)의 자비라는 3연(緣)의 자비가 있다. 그 중 무연자비가 평등·절대의 공(空)의 입장에 선 것이므로 최상의 것이다. 이러한 자비는 '반야(般若)'와 함께 불교이념의 2대 지주이다.
· 칼리프 [caliph]
대행자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하리파가 와전된 말이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죽은 후 그가 이룩한 교단국가(敎團國家)의 최고지도자로 뽑힌 아부 바크르가 ‘신의 사도의 대행자’라고 칭한 이래 ‘대행자’, 즉 칼리프가 이슬람제국의 주권자의 칭호로 되었다. 단 이 대행자는 마호메트의 예언자 성격으로서의 대행자가 아니고 그의 정치 ·군사 지도자 성격으로서의 대행자였다. 이 칭호는 정통(正統) 칼리프 시대 ·우마이야왕조 ·아바스왕조로 인계되었다. 또 10세기에는 에스파냐의 후(後)우마이야왕조 군주와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군주도 칼리프라고 칭하였으며, 한때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의 칼리프와 함께 이슬람 세계에 3명의 칼리프가 병존하였다. 13세기에 아바스왕조가 망하자 각지 지방정권의 군주로서 칼리프라고 칭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칼리프라는 직위의 권위가 저하되었다. 19세기 이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술탄이 칼리프의 칭호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황이 전체 그리스도교도를 대표하고 있듯이 칼리프라고 칭함으로써 술탄이 전체 이슬람교도의 대표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1924년에 터키 공화국은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였다.
· 술탄
이슬람교의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
코란에서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증시(證示) 또는 권위의 의미로 사용되는 비인격적인 것이었으나, 후세에 특정한 지역을 지배하는 개인의 칭호로 되었다. 875년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무타미드(재위 870∼892)의 동생이 맨처음으로 이 칭호를 수여받았으나, 13세기 이후 세속권력의 최고권위를 지니는 이슬람 전제군주의 공식칭호로서 투르크계(系)의 가즈나왕조에서부터 사용되었다. 이 칭호를 실제적으로는 셀주크왕조의 투그릴 베그가 최초로 사용하였고, 소아시아의 루므셀주크왕조, 이집트의 맘루크왕조, 오스만투르크제국 등이 이 칭호를 습용(襲用)하였다. 이란에서는 지방지사(地方知事)의 칭호로 사용되었고 모로코 ·아라비아반도 남부 ·카슈미르 ·인도네시아에서는 토호(土豪)나 작은 군주가 정치적 지배자로서 이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오스만투르크제국에서는 왕녀의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 천부경 [天符經]
대종교(大倧敎)의 기본 경전. 대종교의 설명에 의하면 한배하느님께서 환웅을 통해 백두천산에 내려와 천하만민에게 직접 가르친 것으로서, 교화를 끝내고 어천(御天:승천)하면서 내렸다고 하는 《삼일신고》와 더불어 교훈경전에 속한다. 태백산에 있는 단군전비(檀君篆碑)를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것은 묘향산에서 10년간 수도한 계연수(桂延壽)가 1916년에 암벽에 새겨진 내용을 발견하여 이듬해 대종교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1975년 교단의 교무회의에서 경전으로 공인하였으며 1983년의 《대종교요감》에 처음 경전으로 수록되었다. 3장 81자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의 연역이 360자로 이루어진 《삼일신고》이고 《삼일신고》의 귀납은 다시 이 경전이 된다고 한다.
· 시스티나성당 [Cappella Sistina]
건축가 조반니 데 도르티의 설계로 1473년 착공, 1481년에 완성하였다. 건물 자체는 깊이 40.5m, 너비 13.2m의 장당(長堂)을 높이 약 30m의 요면(凹面) 궁륭천장(穹天障)으로 덮고, 좌우에 고창(高窓)을 배열한 평범한 것에 불과하나, 내부의 벽화와 천장화(天障畵)는 르네상스 회화의 보고(寶庫)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본당(本堂)의 완성에 이어 교황 식스투스 4세는 피렌체와 움브리아의 대표적 화가를 불러 좌우 벽면에 《모세의 생애》와 《예수의 생애》 등 도합 12점의 벽화를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보티첼리를 중심으로 D.기를란다요, P.디코시모, L.시뇨렐리, 페루지노, 핀트리코 등이 3개년에 걸쳐 그린 이들 그림에는 성기(盛期) 르네상스의 도래가 가까운 젊은 이탈리아 회화의 싱싱한 감각이 넘치고 있다.
그 뒤 얼마간의 시기를 두었다가 미켈란젤로에 의한 유명한 천장 그림의 제작이 시작된다. 1508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이 대역(大役)을 명령받은 그는, 먼저 화필로 넓은 천장에 기둥과 인방(引枋) 등의 건축적인 구조부분을 그리고,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틀 안에 여러 장면을 그려 넣는 수법을 썼다. 이런 식으로 1512년까지는 천장 중앙부에 《창세기》를, 그 주위에 《12명의 무녀(巫女)와 예언자》를, 삼각형 모양의 요면벽(凹面壁)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조상》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각각 그렸다. 1534년 그는 다시 바울로 3세의 위촉으로 정면의 제단화(祭壇畵)를 그렸다. 벽면전체를 상하 4층으로 나누어 7년에 걸쳐 위에서부터 천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심판의 장면, 묵시록의 7천사, 그리고 맨 아래층에는 지옥을, 지난번의 고전적 작풍과는 다른 격렬한 터치로 표현하였다. 이 회화의 완성으로 최초의 12점의 측벽화(側壁畵)와, 미켈란젤로의 고전적 화경(畵境)을 말하는 천장화, 그리고 앞으로 닥칠 바로크 회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제단화, 바꾸어 말하면 성기(盛期) 르네상스를 중간 시기로 하는 전후 세 시기에 속한 작품이 이 성당 안에 모이게 되었다.
· 이차돈 [異次頓, 506~527]
자 염촉(厭觸)·염도(厭都). 거차돈(居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 속성 박(朴).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당시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였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조신들의 의견에 반대,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던 끝에, 527년 순교(殉敎)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려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 시크교
힌두교인인 나나크가 창시한 종교. 힌두교의 신애(信愛:바크티) 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을 융합한 것으로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에 퍼졌다. 교조(敎祖) 나나크는 펀자브의 라호르 주변에서 태어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성자(聖者)들을 만났는데, 특히 바크티의 성자 카비르(1440?~1518)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가 죽은 후에 대대로 구루(guru:法主) 밑에서 교단조직이 정비되어 오다가 제5대 구루인 아르준(1563~1606) 시대에 교전(敎典)이 성립되고 암리차르에 본산(本山)이 건설되는 등 일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단으로서 그 세력이 확대해 감에 따라 무굴제국(帝國)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아르준은 1606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무굴제국과의 항쟁을 통하여 교단은 전투집단화하였는데, 무굴제국 쇠퇴 후에는 영국과 끝까지 싸웠다. 이 전쟁을 시크전쟁이라고 한다.
· 가야
인도 비하르주(州)에 있는 도시. 인구는 38만 3197명(2001)이다. 주도(州都) 파트나 남쪽 99.8km 지점에 있으며, 바라나시 다음가는 힌두교 성지로 유명하다. 여기서 순례자들은 조상의 영혼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의식을 올린다. 순례의 중심은 비슈누신(神)의 발자국을 모신 비슈누파다 사원이지만, 순례자들은 다시 시내 몇 군데(본래는 45개처)에 핀더라고 부르는 과자를 놓으며 돌아다닌다. 비슈누파다 사원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브라마지니 언덕의 기슭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하는 바니안(banyan) 나무가 있는데, 그곳이 순례의 최종점이다.
· 천도교 [天道敎]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남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 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 퀘이커교 [Quakers]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프렌드 협회라고도 한다. 1647년 영국인 G.폭스가 창시하였고 1650년대 이후 미국에 포교가 적극적으로 행해졌다. 특히 1681년의 W.펜에 의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건설은 영국과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에서 박해를 받고 있던 퀘이커 교도에게 신교(信敎)의 자유천지를 약속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들은 ‘안으로부터의 빛’을 믿고, 그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나 또 인디언과의 우호(友好), 흑인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반대, 전쟁 반대, 양심적 징병거부, 십일조 반대 등 일반 사람의 태도와 달라 특수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정통파와 히크사이트로 분열하였다가 화해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에 약 13만 이상의 교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퀘이커교도로는 함석헌(咸錫憲)이 있으며, 그는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대표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 코란 [Koran]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619년경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의 계시 ·설교를 집대성한 것이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40세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근교의 히라산(山) 동굴에서 천사(天使) 가브리엘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코란》이란 아랍어로 ‘읽혀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계시받은 마호메트의 말은 초기의 사도(使徒)들에 의해 기억되어 낙타의 골편(骨片)이나 야자의 엽피(葉皮), 암석의 파편 등에 불완전한 문자로 기록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전승이 다양해져 그의 집성 ·통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코란》의 결집(結集)이 이루어졌는데,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루가 시도하여 본격적인 결집은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이 646년에 완성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코란》은 당시 정리된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코란의 구성】 《코란》의 용어는 아랍어의 메카 방언이었으나 이것이 후에 고전 아랍어로 널리 쓰이게 되어 현행 아랍어 문어체의 기초가 되었다. 문체는 ‘사주아’라는 일종의 운(韻)을 단 산문체로 되어 있어 독송할 때 그 리듬감이 매력을 느끼게 한다. 현행 《코란》은 6,342아야[句節]와 114수라[章]로 되어 있으며, 각 수라에는 ‘암소’, ‘이므란 일가(一家)’, ‘여자’ 등과 같이 그 장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제가 붙어 있다. 제1수라의 개경장(開經章)은 7아야로 된 짧은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에 해당하며, 이슬람교도는 자주 이것을 독송해야 한다. 다른 수라는 대개 아야의 수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서 최종 장에 이르러서는 아야의 수가 아주 적어진다. 예를 들면, 제2수라는 286아야, 제3수라는 200아야인데, 제113수라는 5아야, 제114수라는 6아야로 되어 있다.모든 수라에는 ‘메디나 계시(啓示)’ 또는 ‘메카 계시’라는 표시가 있는데, 메카 시대의 계시는 극히 신앙적인 짧은 것이기 때문에 현행 《코란》에서는 대개 후반에 집성되어 있고, 후대의 메디나 계시는 대부분 전반에 편입되어 있다.
【코란과 주해서】 《코란》에는 아랍의 고속(古俗)과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전승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또 당시의 사회적 관습이나 역사적 사건에 관한 부분도 적지 않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졌기 때문에, 《코란》에 주해(탑시르)를 첨기(添記)할 필요성이 생겨 그것이 이슬람 신학자들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되었다. 각 시대마다 수많은 주해서가 출간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아 타바리, 아 자마후샤리, 알 바이다위 등이 만든 것이며, 그 중에서도 알 바이다위의 주해는 오늘날 《코란》을 이해하는 데 기초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코란과 독송】 이슬람교도(무슬림)는 일상생활에서 《코란》을 독송하며, 각종 의식에서는 정규 독송자가 소리 높이 독송한다. 초기에는 10여 파의 유파(流派)가 각기 다른 정지(停止)나 성조(聲調)로 독송했으며, 10세기경 이후 7파로 통일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란의 번역】 《코란》은 유일신 알라 자신의 말로 되어 있으므로 이슬람교도는 이것을 직접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번역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계가 이슬람교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11세기 이베리아반도에서 전쟁을 한 뒤부터 급속히 고조되어 12세기에는 최초의 라틴어 번역이 시도되었다. 1543년에 간행된 비브리안델의 라틴어역으로부터 독일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로 중역(重譯)했으며, 1698년에 간행된 마리치의 라틴어역은 널리 읽혀졌다. 그 후 프랑스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한국에서는 1980년 김용선(金容善)의 《한역주해(韓譯註解) 코란 역편(譯編)》이 간행되었다.
· 티베리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BC 42~AD 37]
로마제국 제2대 황제(재위 AD 14∼37). 아우구스투스 황제비(妃)인 리비아의 전남편의 아들. BC 20년경부터 제국의 동방·북방의 변경에서 싸워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정복사업을 도왔다. BC 6년 로도스섬에 물러나 있다가 AD 2년 로마로 돌아가, AD 4년에는 제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며, 공화정치의 전통을 존중하여 제국통치는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궁정은 음모가 난무했는데, 그 양상은 타키투스의 사서(史書)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AD 26년 로마를 떠나 카프리섬에 은둔하면서 공포정치를 자행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 비로자나불 [毘盧遮那佛, Vairocana]
석가의 진신(眞身)을 높여 부르는 칭호.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 ·노자나불·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法界)를 두루 비춘다고 한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노사나불(盧舍那佛)·석가불(釋迦佛)·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으로 쓰고, 비로자나불은 자성신(自性身)이라 하여 구별하고 있다. 또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을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에 배치하여 설명하고 있고, 밀교(密敎)에서는 《대일경(大日經)》의 설을 계승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와 동체라고 한다.
· 아미타불 [阿彌陀佛]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
아미타란 이름은 산스크리트의 아미타유스(무한한 수명을 가진 것) 또는 아미타브하(무한한 광명을 가진 것)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아미타(阿彌陀)라고 음역하였고,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 등이라 의역하였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서는, 아미타불은 과거에 법장(法藏)이라는 구도자(보살)였는데,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그 원을 성취하여 지금부터 10겁(劫) 전에 부처가 되어 현재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처는 자신이 세운 서원(誓願)으로 하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데, 그 원을 아미타불이 되기 이전인 법장보살 때에 처음 세운 원이라고 하여 본원(本願)이라고 한다. 모두 48원(願)인데, 이 48원의 하나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심에 가득한 이타행(利他行)으로 되어 있어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를 이룩하고 있는 이 부처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13번째의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과 15번째의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은 아미타불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18번째의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은 “불국토(佛國土)에 태어나려는 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하여, 중생들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정토왕생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 구루 [guru]
스승 또는 부모 등을 뜻하는 말. 원래 ‘무겁다’는 뜻이었으나, 전화되어 ‘존경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존경하는 장로(長老)나 한 교단(敎團)의 통제자에 대한 존칭으로 통한다.
· 게세마니동산 [Gethsemane]
이스라엘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橄欖山)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 게세마니는 히브리어로 ‘기름짜기’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종종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기도한 곳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밤에도 이곳에서 피땀을 흘리며 최후의 기도를 한 곳이다(마태오 26:36, 마르코 14:32, 루가 22:44). 이곳에는 감람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올리브나무가 많으며, 수령(樹齡) 1,000년이 넘는 올리브나무도 8그루나 되고,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둘레가 7.3 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번민하며 최후의 기도를 하였다는 바위 위에는 만국교회가 세워졌다.
· 부두교 [Voodoo]
서인도제도의 아이티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애니미즘적 민간신앙. 넓은 뜻으로는 서인도제도와 미국의 흑인들 사이에 행해지는 악마숭배 ·주물(呪物)숭배 ·주술(呪術) 등을 포함하는 관습을 말하기도 한다. 쿠바의 산테리아교(Santeria), 브라질의 마쿰바교(Macumba)와 유사하다. 아이티의 부두교는 아프리카 서부에서 서인도제도로 팔려 온 흑인 노예들이 퍼뜨렸기 때문에, 초자연에 관한 근본적 관념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다. 이 일반적인 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신념과 숭배 양식이 존재하거니와, 여기에서는 서인도제도 토착민 특유의 종교에서 오는 요소와 함께, 특히 가톨릭교적 의식(儀式)의 강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부두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로아(Loa)라고 하는 정령(精靈)과 사령(死靈)에 대한 숭배이고, 고유의 농경의례(農耕儀禮) ·통과의례(通過儀禮) ·주술 등도 있다. 로아는 주로 아프리카의 신들이지만, 가톨릭의 성인(聖人)이 로아와 동일시되고, 때로는 그들 자신이 로아의 신으로 숭배되는 경우도 있다. 부두교에는 중앙 조직 또는 성직(聖職)의 계급제도는 없으나, 남성 또는 여성 제사(祭司)를 중심으로 한 자치적 ·자발적 집단을 이룬다. 의식은 대개의 경우 밤중에 특정의 성소(聖所)에서 행하고, 동물 등의 산 제물을 바친다. 로아와 사령에 대한 공포감은 절대적인 것인 만큼 이 정령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산 제물의 역할이 크다. 이 의식에서 행해지는 성스런 북의 리듬에 맞추어 추는 춤이나 로아에 홀렸을 때의 엑스터시 상태는 유명하다.
· 구약성서 [舊約聖書, Old Testament]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함께 경전으로 인정하는 종교문서들.
본래 헤브라이어로 쓰여진 24권의 책들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39권으로 재편집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서 최초의 5권의 책, 즉 모세 5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외경을 구약성서와 동등한 권위로 수용하였다. 구약의 제1부인 토라(Torah), 즉 모세 5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한다.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졌으나, 후대의 편집과정을 거쳐 BC 586년 바벨론 포로 이후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제2부는 네비임(Nebiim), 즉 예언서들이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소예언서 등이다. 그리스어 번역인 70인 역본에서는 사무엘 ·열왕기를 상 ·하권으로, 소예언서 12편을 각기 1책씩으로 분리하여 편집하였다.제3부는 케투빔(Kethubim), 즉 성문서(聖文書)들이다.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룻기 등의 11권의 책이다. 이 책들은 거의 대부분 운문(韻文)들이며, 일부는 역사를 서술한 서사시들이다(다니엘서와 역대기 등).
헤브라이성경의 정경화과정은 긴 세월과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바벨론 포로 시기에 이스라엘민족의 종교적 정체성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기존의 전승들을 묶어 펴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토라가 정경으로 공인되었을 것이다. 역시 동일한 정체성의 위기에 몰렸던 마카비혁명시대(BC 2세기)와 예루살렘 멸망(AD 70년경) 이후 헤브라이성경의 제2부와 제3부의 책들이 정경으로 공인되었다.구약성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책이다. 우주와 만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세계와 역사는 하느님이 친히 다스리며 심판한다는 신의 통치신학은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구약의 인격신 개념은 인간의 자기 이해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헤브라이민족이 이집트의 내세지향적 현세부정의 종교를 극복하고, 또 근동 여러 나라들의 자연숭배 종교들을 이겨낸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는 인격신 야훼에 대한 신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구약성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당시 유대교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앞세움으로써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것이다.
· 신약성서 [新約聖書, New Testament]
그리스도교 경전(經典) 중 예수시대 이후 초대교회에서 성립된 정경(正經).
보통 ‘신약(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으로 약칭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한 4권의 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복음서), 그 제자들의 전도행각에 관한 기록(사도행전), 여러 사도들의 편지글(서간서) 및 예언서(요한의 묵시록) 등 27서(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부 그리스어로 쓰여 있다. 신약성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죄에 빠져 허덕이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약속하였다는 신앙으로 일관되어 있다. 모두가 1세기경에 쓰여졌는데, 최종적으로 오늘의 형태로 정경화(正經化)한 것은 397년의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였다. 하느님이 구약성서에서 약속한 인류 구원을 신약성서에서 성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외경 [外經, Apocrypha]
성경의 편집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도 한다. 정경(正經)과 대비되며, 그리스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구약의 ‘70인역’에는 포함되고 헤브라이어 성서에 들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처음엔 문학적 용어로 일반대중에는 금지된 책이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여진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 《제2에스드라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외경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명칭도 서로 다른데, 가톨릭 학자들은 외경을 제2정경(正經: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종교적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외경의 형성 경위는 이스라엘 역사 중 바빌로니아 포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하였던 이스라엘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성전의 재건과 헤브라이어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헤브라이어 정경이 율법서(《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예언서(《여호수아서》부터 《12소선지서》까지), 성문서(聖文書:그 이외의 《시편》 《잠언》 등을 대표로 하는 문학서)로 확정되면서 유대인들에게 규범적인 문서로 등장하였다(90년경).
· 올리브 [olive]
열매는 핵과(核果)로 타원형이며 자흑색으로 익는다. 터키가 원산지로 BC 3000년부터 재배해 왔고 지중해 연안에 일찍 전파되었다. 주요 생산국은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스 ·프랑스 ·미국 등이다. 과육에서 짠 기름을 올리브유(油)라고 하며 용도가 매우 많다. 열매 자체를 식용한다.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비둘기가 저녁 때가 되어 돌아왔는데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있었다. 그제야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8:11)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탕이 되어 올리브 잎이 평화와 안전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교도 자신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다 하여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현교(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인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의 종교적 공유재산에 근원을 둔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경전 《아베스타》에 의하면, 태초에 앙그라 마이뉴(훗날의 아리만)는 악을 택하고, 스펜타 마이뉴(아후라 마즈다의 성령)는 선을 각각 택하였다. 신자도 생각 ·말 ·행동에서 어느 것을 택하는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한쪽은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상호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의 천사들이 원래의 자연종교적 ·물신숭배적(物神崇拜的) 특성이 약화되고 아후라 마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비주체적 천사가 되어, 저마다의 추상적 직능이 이원론과 함께 강조됨으로써, 악의 천사들은 주체성을 회복하고 아후라 마즈다와 직접 대결하게 된다.종말론은 2단계로 되어 있다. 사자(死者)의 육체는 그들의 독특한 장사(葬事)법인 풍장(風葬) ·조장(鳥葬)에 의해 독수리와 들개들의 밥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의 입구까지 와서 올바로 믿은 자는 그곳에 있는 다리(칼이라고도 한다) 위를 안내받으면서 무사히 건너 천국에 들어가나, 거짓으로 믿은 자는 발을 헛디뎌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한편 조로아스터가 가고 3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천국 ·연옥 ·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용해된 금속으로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악은 멸한다고 한다. 이 사상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의 일부 등 그 후 종교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엑스터시 [ecstasy]
일상적인 의식수준이 저하되면서 빠져드는 망아(忘我)상태 또는 황홀상태. 일반적으로 종교적 신비체험의 최고 상태를 가리키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나타나는 심리의 이상상태까지도 포함한다. 본래 엑스터시는 그리스어 ek, exo(∼의 밖으로)와 histanai(놓다, 서다)의 복합어인 엑스터시스(ekstasis)에서 나온 것으로, '밖에 서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있는 상태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후 고대 말기에 이르러 신비체험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엑스터시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종교로서 샤머니즘을 들 수 있다. 대개 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엑스터시를 겪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태에 스스로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엑스터시 상태에서 샤먼은 자신의 혼이 육체를 떠나 하늘로 상승하거나 지옥으로 하강하는 경험을 한다.
· 하디스
이슬람교의 예언자 마호메트의 언행(言行:수나)의 전승(傳承). 이슬람교의 유일한 경전(經典)은 《코란》이지만, 코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호메트의 ‘수나’를 알 필요가 있다. 또 이슬람법(法)도 코란을 기초로 하지만, 코란에 언급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수나’를 기초로 했다. 이와 같은 신학과 법학의 필요에서 ‘수나’의 전승은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하디스의 대부분은 신학자나 법학자가 자기의 견해를 하디스에 가탁(假託)한 것이었다. 8세기 중엽 이후는 학자 사이에 하디스 비판이 일어 참 하디스와 가짜 하디스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하디스학(學)이다. 비판은 하디스의 내용과 전승자의 계보(系譜)에 대하여 두 방향에서 행하여졌으며, 그 이후의 하디스는 전승자를 명기하도록 하고 있다. 9세기 중엽 이후 하디스는 체계적으로 수집되었는데, ‘육서(六書)’ 또는 ‘6전승집’이라 일컫는 권위 있는 하디스집(集)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히흐집(集)》(2권)과 《수난(Su-nan)의 서(書)》(45권)이다.
· 힐티 [Hilty, Carl, 1833.2.28~1909.10.12]
주요저서 《행복론》,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베르덴베르크 출생. 독일의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학과 철학강의를 들었다. 1855년 고향인 쿨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약하였고, 1873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하였으며, 1892년 이후는 육군재판장직을 맡았다. 한편 1890년에는 고향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또 1909년에는 국제법의 대가로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정치적 저서로는 1886년 이후에 그가 혼자 편집한 《스위스 연방 정치연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가》 등이 있으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종교적 ·윤리적 저작에 의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으로는 《행복론》(3권, 1891∼1999)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2권, 1901∼1919) 등이 있는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의 기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주의적 사회개량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생활 자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이 저서는 2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1901년에 출간되었고, 제2부는 그가 사망한 지 10년 뒤에 유고로서 간행되었다. 제1부의 서문에서는 불면(不眠)의 원인과 불면에 대한 대책 등을 설명했으며, 본문은 1년을 365일로 나누어, 그날 그날의 불면, 특히 침사(沈思)할 사항들이 서술되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은, 우리가 자신의 생활 방법에 반성을 시도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며, 이런 뜻에서는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성서의 장절을 지시한 데도 많으며 성서를 문자 그대로 머리맡에 두는 책으로 삼음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희망에 찬 생활의 충실화를 꾀할 수 있다고 했다.
· 우신예찬 [愚神禮讚, Encomium Moriae]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유명한 풍자문(諷刺文). 《모리아예찬》이라고도 한다. 1511년 간행. 작자의 친구 T.모어의 라틴어 이름인 모르스에서 모리아[痴愚女神]를 연상하여 이러한 책이름을 붙였다. 이 책은 모리아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치우(痴愚)로 충만되어 있는가를 낱낱이 들어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체재로 쓴 것이다. 인간이 탄생하는 원인은 결혼에 있으나 사람들이 결혼할 마음이 생기는 것은 모리아의 시녀인 ‘난심(亂心)’ 때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자 ·신학자들의 쓸데없는 논쟁,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위선, 칼과 불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고위 성직자들, 이런 것들이 모두 모리아의 승리라고 쓰여 있다. 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신봉하는 것이 그리스인(人)들의 지혜에 대비(對比)하면 바로 치우를 의미한다는 바오로의 말을 인용한다. 이와 같이 이 책은 사이 사이에 교회의 부패를 비꼬는 조소(嘲笑)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 배론성지 [舟論聖地]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鳳陽邑) 구학리(九鶴里)에 있는 가톨릭 성지.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재단법인 천주교원주교구에서 소유, 관리한다.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천주교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머무르며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과 최양업(崔良業:1821∼1861) 신부의 묘가 있으며,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주문모(周文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많은 천주교도가 구학리 배론 산골에 숨어살았다. 황사영도 배론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조선교회의 박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방안을 호소하는 백서를 써서 황심(黃沁)·옥천희(玉千禧)에게 중국에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가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발각되었다. 이 배론의 토굴에서 쓴 밀서를 황사영백서라고 한다. 1856년(철종 7)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이곳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신부들이 처형당하고 신학교가 폐쇄되었다.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도 이곳에서 1861년 순교하였는데 뒷산에 그의 묘가 있다.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 삼귀의 [三歸依]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일. 삼귀 또는 삼귀례(三歸禮)라고도 한다. 즉 석가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르는 교단에 귀의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삼귀의는 원시불교 이래 수계식(受戒式) 등 여러 의식에서 실행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남아시아의 불교에서는 팔리어(語)로 "부처님께 귀의하나이다", "가르침에 귀의하나이다", "스님들께 귀의하나이다"를 세 번 가창한다. 한문으로는 여러 형식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歸依佛兩足尊)", "일체의 탐욕을 벗어난 가르침에로 귀의합니다(歸依法離欲尊)", "모든 무리 중에서도 존귀한 승단에 귀의합니다(歸依僧衆中尊)"의 삼귀의 계문(戒文)을 합송한다. 아비달마(阿毘達摩) 불교의 《구사론(俱舍論)》은 삼보에 귀의하는 취지에 대하여 구제(救濟)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즉 일체의 고통에서 해탈하고자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 사홍서원 [四弘誓願]
보살(菩薩)의 공통된 네 가지 큰 서원.
①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일체의 중생, 즉 생명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겠다는 맹세.
②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다함이 없는, 인간의 그 많은 번뇌를 끊겠다는 맹세.
③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광대무변한 불타의 가르침을 모두 배워 깨닫겠다는 맹세.
④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가장 존귀하고 그 이상 뛰어난 것이 없는 불도를 닦아 깨달음에 이르러 성불하겠다는 맹세이다. 《심지관경(心地觀經)》에 그 원형은 나타나지만, 위와 같은 형태로 정립된 것은 수(隋)나라 지의(智)에 이르러서였다.모든 보살에 공통적인 서원이라는 의미에서 총원(總願)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의 모든 불교의식 및 법회에서는 끝으로 사홍서원을 외우고 마친다.
· 불국사 [佛國寺]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 불국사 : 사상적 배경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 ·안평(安平) ·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 ·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 ·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 삼매 [三昧]
불교 수행의 한 방법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 삼마지(三摩地) ·삼마제(三摩提) ·삼매지(三昧地) 등과 같이 산스크리트 사마디의 음역이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정(定)으로, 또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등지(等持), 또 정수(正受) ·정심행처(正心行處) 등으로 의역한다. 일체의 자아(自我)나 사물이 공(空)임을 깨닫는 공삼매(空三昧), 공이기 때문에 차별의 특징이 없음을 관찰하는, 즉 무상삼매(無相三昧), 무상이기 때문에 원해서 구할 것이 없음을 관찰하는 무원삼매(無願三昧)의 삼매 또는 삼 해탈문(解脫門)은 이미 《아함경(阿含經)》 시대에 설파되었다. 이 삼매는 《반야경(般若經)》 등에서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더 나아가 독자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삼매 즉 정신통일에는 지(止:마음의 집중)와 관(觀:관찰)이 있는데, 지일 때에만이 올바른 관찰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에는 소승불교와 다른 수행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여 새로운 삼매가 설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대품(代品)반야경》의 대승품에 108 삼매가 설명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처음의 수능엄삼매(首楞嚴三味 ·勇健三昧:번뇌를 깨뜨리는 용맹견고한 삼매)는 반야바라밀(지혜의 완성)을 실현하는 등 대승불교의 수행을 추진하는 실천력을 기르는 힘으로 《반야경》뿐만 아니라 《십지경(十地經)》 《화엄경(華嚴經)》과도 관계가 깊다.
또한 관불삼매(觀佛三昧)는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서 말하는 반주삼매(佛立三昧라고도 함)가 유명하다. 이는 불타를 마음에 떠올리고 삼매에 들어가면, 불타가 수행자 앞에 현전(現前)하는 것이다. 당시에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법이 불탑 앞에서 행해진 것으로, 불탑예배와 관련하여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 자이나교 [Jainism]
자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非正統)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出家主義) 종교이다. 불전(佛典)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vra)가 재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勝者)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하여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하여 '불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조(敎祖)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문화사적 배경, 교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支派)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예수의 제자와 석가의 제자
예수의 12제자
베드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토마,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타대오, 혁명당원인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판 가리옷 사람 유다
석가의 10제자
부처님 생존시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가려 뽑은 10인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바, 부처님 제세시에 언제나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며 섬겨왔던 부처님 제자 중의 제자라 말할 수 있다.사리불과 목건련님은 초기불교교단을 이끄신분으로써 사리불님이 교단의 안살림을 목건련님이 전도를 맡았습니다.두분다 부처님보다 일찍 돌아가셨다.
사리불(舍利弗, Sariputra) - 지혜제일(知慧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 중의 으뜸으로, 인도 왕사성의 북쪽 나라촌에서 출생. 목건련과 함께 외도인 회의론자 산자야 벨라따뿟타(Sanjaya Belatthaputta)를 섬기다가 후에 마승비구의 외양에 이끌려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수행·정진·교화에 노력하였는 바, 부처님께서는《화엄경》《반야심경》등 어려운 경전을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사리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셨다.
목건련(目連, Maudgalyayana) -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인도 왕사성 근처의 구리가촌에서 태어나 사리불과 함께 외도의 제자가 되었으나 후에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다.
불교에 귀의한 후 여러 고장을 찾아 부처님에 교화의 법을 전하였다.《목련경》등 목건련을 중심으로 설해진 경전이 여럿 있다.수제자로 부처님의 사후 교단을 이끈다.
마하가섭(摩訶迦葉, ㅡMahakasyapa) -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 인도 왕사성에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결혼하였으나, 세속적 욕망의 무상함을 깨달아 부부가 함께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부처님께 귀의한지 8일만에 바른 지혜의 경지 즉 아라한(阿羅漢)의 과위를 증득한 그는 항상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두타행을 행하였으며, 불교교단의 으뜸가는 제자로 존경받고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불교교단을 운영하게 되었다. 부처님 입멸 후 500명의 제자들을 모아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율(律)을 결집하였으며,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 법을 전한 제1조 조사로서 받들고 있다.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석가족 출신의 왕자.정반왕의 동생 감로반왕의 아들로서, 부처님의 사촌동생이 된다.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고서 고향을 방문했을 때 난타·아난다·데바 등과 더불어 출가하였으며, 오랜 수행으로 인하여 하늘까지를 관찰할 수 있는 하늘 눈을 얻었기에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 불려진다.
수보리(須菩提, Subhuti) - 혜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우주의 평등한 진리, 공(空)한 이치를 깊이 체득하였다.《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부루나(富樓那, Purna) -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말을 잘하여 남을 교화시킴이 훌륭해서 부처님 제자 중 설법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법화경 500제자 수기품》에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으며, 이후 법명여래라 불리게 될 것이라 한다.
가전연(迦?延, Katyayana) -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남인도 사람이다.부처님 제자 중 논의(論議)를 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질을 가졌다고 한다. (부처님의 사후 왕사성결집에서 율의 송출을 담당합니다.)
우바리(優婆離, Upali) -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인도의 4성계급 중 가장 천한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출가한 그는 원래는 석가족 궁중의 이발사였다고 한다.
석가족 왕자들이 출가할 때 같이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는 바, 부처님 제자 중 계율을 가장 훌륭히 지켰다고 한다.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마하가섭의 주재하에 경전을 결집할 당시 율(律)을 확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고 전한다.
라후라(羅?羅, Rahula) -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의 아들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다고 전하는 라후라는 15세에 출가해 사리불을 은사로 최초의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그의 이름을 '라후라'라 한 것은 그가 태어날 때 라후라아수라왕이 달을 가렸기 때문이라 하며, 이후 출가한 그는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선행 및 수행을 철저했기에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불린다.이후 법회회상에 태어나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부처님의 비서로써 25년간 부처님을 섬깁니다 )
아난다(阿難陀, Ananda) -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다.데바닷다의 친동생으로, 8세에 출가해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잘생긴 얼굴 탓으로 여러 차례 여자들로부터 유혹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바, 부처님 입멸 후 수행에 전력한 끝에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언제나 부처님을 따라다닌 까닭에 부처님 법의 내용을 가장 많이 들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렸으며, 부처님 입멸 후 마하가섭에 의해 경전이 결집되던 당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 경전을 결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고린토인에게 보내는 편지 [The Letters of Paul to the Corinthians]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가 있다. 항구도시인 고린토는 그 당시에 국제적인 상업의 중심지였다. 항구에는 부도덕한 행위가 성행하여 '고린토식 생활'이라고 하면, 곧 방탕과 방종의 대명사와 같았다. 바울로는 여기에 교회를 세우고 1년 반 후에 이곳을 떠났다. 《…첫째 편지》는 55년경 에페소(에베소)에서 써 보낸 것으로 16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고린토 교회의 재단결을 호소하고 신도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성문제·결혼문제 등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이며 그리스도의 부활 등에 관한 중요한 교훈도 들어 있다. 《…둘째 편지》는 56년 마케도니아에서 써 보낸 13장(章)의 편지로서, 바울로 자신이 겪은 큰 환난과 마음의 심한 괴로움을 겪는 가운데서 눈물로 썼다는 '눈물의 편지'이다. 바울로의 편지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색채가 짙은 편지이다.
· 쿠시나가라 [拘尸那揭羅(구시나갈라)]
인도 힌두스탄 평야에 있는 지금의 카시아(Kasia)이다. 불타의 생애와 관련되는 4대 성지의 하나로서 그 가까이에 히란냐바티강(江)이 흐르고 있다. 불타의 시대부터 외딴 곳으로서 당시는 마라족(族)이 살았고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열반에 들어간 불타를 화장(火葬)한 곳이다. 현재 5세기경의 것이라고 하는 거대한 열반상을 안치한 열반당(涅槃堂)이 있다.
· 갈릴리 [Galilee]
갈릴레아라고도 한다. 중심지는 나자렛. 성서에 나오는 지방으로, 현재 이스라엘의 행정구로서 북부지방(동서 약 40km, 남북 약 100km)이라 하며, 지중해 해안에서 갈릴리호(湖)까지가 포함된다. 남부 갈릴리는 비옥한 에스드라엘론평야에 접하는 약간 평평한 지방이지만, 북부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높은 메이론산(1,208m:아랍 이름은 얄마크)이 있고, 대체로 산이 많은 지역이다. 남쪽의 사막지대에 비하면 매우 습윤하며, 근대농업이 이루어지고 녹지(綠地)도 많다. 레바논 ·시리아 국경의 헤르몬산에서 발원하는 요르단강은 갈릴리지방의 동쪽 끝을 지나 훌라 저지(低地)로부터 갈릴리호로 흘러들어간다. 이 호수의 남쪽에는 유대인이 처음으로 만든 키부츠(집단농장) 데가니아(1909년 건설)가 있으며, 20세기 초부터 개척이 추진되어 지금은 많은 키부츠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유대인 외에도 이스라엘 독립 후에 이 땅에 남은 아랍인이 적지 않아, 사페드 ·나자렛 및 기타 도시는 아랍색이 짙다. 한편 이곳은 예수가 대부분의 종교활동을 전개한 곳이어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자리와 가나의 샘을 비롯하여 성서와 관계 있는 유적이 많다.
· 수피즘 [Sufism]
이슬람교도의 일부가 신봉하는 일종의 신비주의 신념 또는 사상.
원어인 아랍어로는 타사우프(Taawwuf)라고 한다. 그 어원은 수프(양모)를 몸에 걸친 것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말에서 수피(이 주의를 신봉하는) 및 영어의 수피즘이 파생하였다. 신(神)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요구하는 신비주의는 《코란》 속에 이미 나와 있다는 설도 있으나, 본래의 수피즘은 8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수니파(派)와 시아파(派)로 분열된 후 시아파 속에 나타난 것이다. 초기의 신도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독신자(篤信者)가 있어서 수프 등을 몸에 걸치고 고행이나 유행(遊行)을 한 것이 그 시초로서, 거기에는 인도·이란의 종교 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엿보인다.수피즘의 특징은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지상(至上)의 경지를 감득하는 데 있는데, 타와클[信賴], 마리파[恩寵], 파나[忘我]와 같은 특유의 용어가 그런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상은 특히 시(詩) 형식을 취하여 아랍어로는 알아라비, 이븐, 파리도 등, 페르시아어로는 루미, 하피즈, 자미 등, 터키어로는 네시미, 니자지 등의 시작(詩作)으로서 표현되었다. 수피즘을 신봉하는 많은 교단(敎團:타리카)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터키계(系) 데르비시는 자가도취의 수단으로서의 회전춤으로 알려져 있다. 또 지크르(염불의 일종)도 많이 쓰인다. 수니파는 수피즘을 비아랍적, 비정통적이라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와하비즘 [Wahhabism]
18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이자 사회·정치 운동.
이슬람 전통주의(원리주의)를 이어받은 보수주의 운동으로, 와하비야(al-Wahabiyah) 운동이라고도 한다. 이슬람문명의 주요 성지를 돌아다니면서 18세기 이슬람 사회의 병폐를 직접 경험한 압둘 와하브(Muhammad ibn Abdul Wahab)가 1745년 창시하였다. 와하비즘은 창시자 와하브에서 유래한 것이다.와하브는 당시 이슬람 사회가 낙후한 원인은 전통 이슬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의 근본 교리와 경전인 코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인간과 신 사이에 중개자가 있다고 믿는 유일신 부정설과 수피즘을 배격하고,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또 성물(聖物)·성도(聖徒) 숭배를 배격하고, 비이슬람적인 음주·도박·춤·흡연이나 화려한 치장 등을 철저히 금하였다. 그 뒤 와하브는 네지드 지방에 있는 사우디 가문의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ud)와 정략적 동맹을 맺고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주장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와하비즘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와하브의 종교적 이념이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이자 이슬람 부흥운동을 일컫는다.
· 우바새 [優婆塞]
남자 재가신도를 이르는 말. 산스크리트 우파사카(upasaka)에서 음을 따 만든 말로, 본래 인도의 여러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통하는 말을 불교에 도입한 것이다. 한역하면 청신사(淸信士)이고, 근사남(近事男)이라고도 한다. 근사남은 부처와 경전·승려의 삼보(三寶)를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재가 남녀신도를 가리키는 가라월(迦羅越)은 본래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 집에서 수도하는 불교도를 가리키게 되었고, 남녀로 구분되어 우바새와 우바이가 되었다. 남성출가자인 비구(比丘)·사미(沙彌), 여성출가자인 비구니(比丘尼)·사미니(沙彌尼)·식차마나(式叉摩那), 여자 재가신자인 우바이와 함께 불교 교단을 이루는 칠중(七衆)의 하나이다.지켜야 할 계율로는 삼귀오계(三歸五戒)가 있다. 삼귀란 삼귀의로 삼보에 귀의함을 뜻하고, 오계는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를 이르는 말로 출가자에게도 해당되는 불교도의 기본 계율이다. 삼귀오계 이외에도 '육중이십팔실의(六重二十八失意)'라는 것이 있는데, 육중이란 오계에 사중(四衆: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의 허물을 말하지 말 것을 추가한 것이고, 이십팔실의는 스승과 윗사람을 공양하지 않음, 병자를 간호하지 않음 등 28가지 금지사항을 밝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