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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여행 주제: ‘숨겨진 보물찾기’ 가급적이면 덜 알려져 눈에 띄지 않는 것, 널브러진 채 방치된 것, 별 효용이 없어 사라져가는 것들을 찾아가 그곳에 따뜻한 눈길을 한 번 보내고, 담겨진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 ‘의미’가 가슴과 머리에 각인되면서 만만치 않은 ‘보물’이 될 것입니다. |
오래지 않은 옛 사람 만나러 고창 땅에 갑니다!
1. 여행지 : 전라북도 고창군 일대
2. 세부 일정
광주 출발(09:00)⇒정읍 보화리 석불입상(10:20)⇒인촌 생가(11:30)⇒미당 서정주 문학관(12:10, 점심 식사)⇒선운사(14:00)⇒광주 도착(17:00)
3. 이번 주 Theme!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단연 인촌 김성수 선생과 미당 서정주 시인입니다. 비교적 현대를 살아간 그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호불호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현장을 답사하면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 떠나기 전 읽을거리
①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보물 제914호)
전라북도 정주시 소성면 보화리의 야산 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이다. 최근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확인되었는데, 백제 불상의 예를 정읍까지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두 불상은 모두 비슷한 형식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오른쪽 불상이 왼쪽 불상보다 약간 커서 원래는 삼존불(三尊佛)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른쪽의 큰 불상은 뒤편의 광배(光背)가 깨지고 대좌(臺座)의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완전한 모습이며, 두 눈이 파여진 것이 흠이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는데, 백제시대의 불상인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흡사하다. 얼굴 역시 길고 풍만하며 부드러워 백제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옷차림새인데,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는 옷을 입고 있으며 속에 입은 옷과 아래의 치마도 보인다. 옷 주름은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한 편으로 어깨나 손, 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팔이 없어진 작은 불상도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의 각 부분은 마모가 심하나 입가로부터 양쪽 볼에까지 미소를 짓고 있어 어린 아이와 같은 느낌이 든다.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 아기 같은 체구, 특징 있는 옷차림새 등에서 백제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인촌 선생 생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 대지 안에 낮은 담을 경계로, 북쪽에 큰집이, 남쪽에 작은집이 있다. 큰집 안채는 1861년, 사랑채는 1879년, 작은집 안채는 1881년에 조부 김요협이 건립하였다. 큰집 사랑채의 문간채는 1893년 김성수의 양아버지인 김기중이, 작은집 사랑채는 1903년 친아버지인 김경중이 건립하였다. 이곳은 안채·사랑채·곳간 등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호남 토호의 집 규모를 보여준다.
1907년 그의 일가는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의 행패와 귀화의 출몰로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마을 사람에게 맡겨 보존해오다가, 1977년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金秊洙:1896~1979)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함과 동시에 복원하였다.
# 인촌 김성수(1891~1955)
1891년(고종 28)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송진우 · 백관수 등과 교유하였고,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뒤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17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자립과 민족자본 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8년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동(同)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후에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0)·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했다.
1945년 8·15광복 뒤에는 미군정청 수석고문관을 거쳐, 1946년에만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총재, 동아일보사 9대 사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47년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어 1951년 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여 이듬해 5월 사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었으며 그 후 야당에서 활약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③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고향의 생가와 묘역 근처에 있어서 더욱 뜻 깊은 공간이며, 게다가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 분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지었으므로 <친환경>과 <배움>의 건축미학을 지향하고 있다.
이곳 시문학관은 그 어느 문학관보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자랑한다. 산과 바다, 변산반도와 곰소만, 그리고 이들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넉넉하게 자리 잡은 질마재 마을. 그 한가운데 시문학관이 있다. 미당의 유품 2천여 점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 미당 서정주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41년 〈화사(花蛇)〉〈자화상(自畵像)〉〈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 《화사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하였다.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작에는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세계민화집》(전5권) 등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의 시집 외에 《흑산호》(1953), 《국화 옆에서》(1975), 《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하여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708명)'에 포함되었다.
④ 선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 《선운사사적기》에 따르면 577년(백제 위덕왕 24)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후 폐사가 되어 1기의 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다. 1472년(조선 성종 3) 부터 10여 년 간 극유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무장현감 송석조가 일관 · 원준 등 승려와 함께 재건을 도모, 3년에 걸쳐 대웅전 · 만세루 · 영산전 · 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있으며, 대웅전도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선운사 삼인리 동백숲
대웅전 뒤에는 수령 약 500년, 높이가 평균 6m는 되는 동백나무들의 군락이 천연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룬다.
# 도솔암 마애불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 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 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불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5. 도움 받은 곳 : 검색엔진 <네이버>,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등
의미 있는 답사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자세한 일정과 유적지 설명, 완벽한 준비!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로움 잊지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