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 황제 존 트라볼타를 기억하는가? 그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타임]지 표지에 두 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전세계적인 디스코붐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토요일 밤의 열기][그리스] 등 존 트라볼타의 디스코 춤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운 영화들은 흥행에 대성공을 했고, 그때까지의 고고나 허슬같은 춤을 일거에 격퇴시키고 디스코를 새로운 춤의 황제 자리로 등극시키게 했다. 존 트라볼타는 새로운 문화현상을 선두에서 끌고간 척후병이었고, 디스코를 정립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아니, 그 자체가 디스코와 동의어였다.
존 트라볼타는 당시의 신세대 문화를 주도했던 핵심세력이었지만 80년대 후반 이후 디스코 열기가 쇠퇴하면서 그의 인기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스크린에서 사라졌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다. 한물간 퇴물배우 존 트라볼타를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낸 사람은 우리 시대 최고의 악동 감독인 퀜틴 타란티노였다.
타란티노 감독은 [펄프 픽션]에서 멋지게 뒤로 머리를 빗어 넘긴 올백 스타일의 킬러 존 트라볼타를 창조해냈다.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제비족같은 몸매에도 살이 붙어 둔중해졌고, 눈빛은 바람둥이 춤꾼에서 삶의 단맛과 쓴맛을 아우르는 깊은 시선으로 변해 있었다. 샤뮤엘 잭슨과 한 팀을 이룬 마피아 킬러 존 트라볼타는 왕년의 춤 솜씨를 잊지 않고 우마 써먼과 레스토랑의 춤 경연대회에서 맛보기로 잠깐 옛 실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미 그의 몸에서 우리는 날렵하고 감각적인 춤꾼의 체취 대신 진정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장인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칼리포니아](1993년)와 [식스티 세컨즈](2000년)를 만든 바 있는 도미니크 세나 감독의 [스워드 피쉬]는 존 트라볼타의 매력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영화이다. 물론 도미니크 세나는 뮤직비디오나 CF로 성장한 이력 답게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간단없이 보여주기도 하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극우주의자 존 트라볼타와 천재 해커 휴 잭먼의 대결에 집중되어 있다.
[스워드 피쉬]는 초반 10분의 강렬한 인상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인질들을 붙잡고 느긋하게 당국과 협상을 진행하는 존 트라볼타의 모습에서는 악당의 전형적인 교활함과 잔혹함이 배어나온다. 125대의 카메라, 그리고 135대의 초고속 스틸 카메라를 연결하여 찍은 초반 10분의 오프닝 시퀀스는, 할리우드 기교주의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가브리엘(존 트라볼타 분)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탈법적인 일도 서슴치 않으며, 테러조직을 힘으로 응징하는 비밀결사 조직의 우두머리급이다. 그는 마약 단속국이 불법으로 모은 비자금 95억불을 빼내기 위해 해커를 동원한다. 하지만 외국에서 데려오던 해커는 공항 출입국 심사에 걸려 심문을 받게 되자, 비밀노출의 위협을 받은 그는 조직원을 보내 해커를 살해한다. 그리고 지금은 은퇴한 천재 해커 스탠리(휴 잭먼 분)를 고용한다.
스탠리는 FBI의 감시시스템을 해킹했다가 2년이나 수감생활을 하고 나와 컴퓨터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는 가정적으로도 이혼한 상태이다. 그가 사랑하는 어린 딸은 전 아내가 기르고 있다. 하지만 스탠리는 딸에게 떳떳하게 나타날 수 있을만큼 변변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다. 이런 약점을 존 트라볼타는 돈의 유혹으로 파고든다.
[스워드 피쉬]는 존 트라볼타와 휴 잭먼의 버디 무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다. 흔히 이런 대결은 선/악의 구도로 짜여지는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또 대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대부분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렇듯이 이런 소재는 권선징악의 상투적인 결말로 끝난다. 그러나 [스워드 피쉬]는 조금 다르다.
우선 권선징악이 아니다. 존 트라볼타는 죽지 않는다. 벌도 받지 않는다. 그는 수십억불에 이르는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서 애인과 함께 멋진 생활을 즐긴다. 물론 그의 정치적 목표인 테러리스트 응징도 쉬지 않고 계속한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명백히 매우 문제가 있는 극우적 결말이다. 극우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듯한 이런 결말은 이 영화의 정치적 노선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주의 경향의 한 극단을 보여준 스탠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스탠리는 이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딸과 함께 지낼 수 있다. 즉 주인공 어느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차라리 할리우드 공식대로 영화가 끝났다면? 화려한 액션 볼거리에 치중해서 화끈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냈다면 꽤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미니크 세나 감독은 굳이, 그 손쉬운 길을 피해서 간다. 영화의 정치적 모호함은 감독의 영화예술에 대한 태도의 모호함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현실이 상업적 시스템 아래 있지만, 그의 머리는 관습적인 것에서 일탈하려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워드 피쉬]는 그 양자간의 갈등의 소산, 모순의 한 표현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배우는 존 트라볼타의 애인으로 등장하는 진저(할 베리 분)이다. 그녀의 벗은 젖가슴을 쓸데없이 노출시키기도 하는데, 진저를 이용한 관객 교란작전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진주만][미이라2][혹성탈출][주라기 공원3][A.I] 등이 버티고 서 있는 올 여름 블록버스터 대열에 끼어들기에는 약하지만, 도미니크 세나 감독의 감각적 연출과 존 트라볼타의 악당연기, 그리고 [엑스맨]과 [썸원 라이크 유]로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받고 있는 휴 잭먼의 매력, 거기에 할 베리의 관능미가 양념처럼 버무러진 영화가 [스워드 피쉬]이다. 이 영화가 걸작이 되려면, 극우 테러리스트와 해커 사이의 정치적 구도에 대한 새로운 설정, 더욱 극단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연출이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류의 영화가 좋다. 관습과 대중추수주의가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그나마 이 정도의 숨통을 트이는 영화를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유사감각상표군에 속하겠지만, 도미니크 세나가 [칼리포니아] 시절의 날카로운 감각을 잃어버리고 할리우드에 순응했던 [식스티 세컨즈]보다는 훨씬 진보된 발전이다. 그래봐야 그는 결코 할리우드 주류에서 일탈하지 않을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