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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이 머물고 간 자리 원문보기 글쓴이: 모탕
[이 클라이머의 삶] 김기섭씨 최다 암릉·암벽 루트 개척한 김기섭씨 "산 오른다 생각하며 장애 이겨내고 있어요"
▲ <사진=허재성 기자>
김기섭(金起燮·46)은 벌써 1년 넘게 병상에서 지내고 있다. 양팔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올릴 수 있다는 것 외에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암릉과 암벽에 새로운 길을 내겠다고 설악의 곳곳을 휘젓고 다니고, 북한산과 도봉산 바위 곳곳을 파고들던 그였다.
인수봉서 10여m 추락 뒤 3,4번 경추 골절
완경사 슬랩을 오르고 역층 크랙을 올라선 다음 크랙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크랙 상단부가 불룩 튀어나온 항아리처럼 생겼다 하여 ‘항아리크랙’이라 불리는 크랙은 몸을 크랙에 집어넣고 팔과 다리로 바위를 밀면서 오르는 게 안전하기는 하지만 대개 그보다는 힘이 덜 드는 레이백 자세로 오른다. 기섭도 평소와 다름없이 레이백으로 올랐다.
급히 출동한 경찰구조대와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기섭에게는 이후 모진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단 결과 3, 4번 경추 골절이었다. 1, 2번 골절을 피해 목숨을 잃는 일은 피했으나, 재활치료를 마친 뒤에도 하반신마비는 회복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 설악을 유난히 좋아했던 김기섭씨는 토왕골·노적봉·만경대·석화사골에 6개의 루트를 개척했다.
기섭은 지난 12월9일부터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삼육재활병원에서 재활치료는 받고 있다. 아침 6시 일어나 밤 10시 다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재활운동에 전념한다. 현재 그는 양팔은 움직일 수 있으나 손목 이하로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안전벨트도 없이 바위를 타던 시절이었다. 암벽화도 되는대로 신고 바위를 탔다. 그래도 즐겁고 재미있었다. 78년 서울고에 입학하자 잠시 갈등이 생겼다. 서울고 산악부 OB 모임인 마운틴빌라는 꽤 잘 나가는 산악회였다. 그래도 선배들과 의리를 지켜보겠다는 생각에 용암산악회와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악회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 98년 1월 두타산에서 폭설을 헤치고 나오는 김기섭씨.
술 좋아하고 사람 좋기로 이름난 산꾼
경원대 국어국문과 출신인 기섭은 시인이기도 하다. 그 길을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라 지었다. 그 이상 적절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곤 곧바로 한편의 시를 위한 길에 봉헌하는 시를 지었다. 제목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다.
‘암벽화 끈을 조이며 / 이마에 붉은 스카프를 묶는다. / 피너클 아래 까마득한 / 소토왕골의 / 시퍼런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우리가 가는 이 길은 / 동해 푸른 바다가 생기고 / 바람이 생기고 / 우리가 처음인지도 모른다…(중략)…우리는 / 인간의 언어를 다 동원해도 / 표현치 못할 /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를 보았다. / 그리고 / 푸른 바다 / 동해가 밀려들고 /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리꽂는 / 저 까마득한 수직의 물줄기 / 우리가 구름 위에 서 있다는 것을 / 바람 가운데 있다는 것을 / 태어난 처음 비밀처럼 깨달았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을 만든 뒤 그의 개척등반에 대한 열정이 나날이 뜨거워져갔다. 설악산과 북한산을 유독 좋아했던 그는 백운대에 ‘시인 신동엽길’(93년), ‘녹두장군길’(94년), ‘김개남장군길’(94년)을, 노적봉에 ‘경원대길’(96년)과 도봉산 자운봉에 ‘배추흰나비의 추억‘(98년)을 개척하고, 설악산 토왕골 경원대리지(96년)와 ’별을 따는 소년들‘(97년), 설악산 망경대 별길(99년)과 석황사골 몽유도원도(01년) 등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암릉이나 벽등반 루트를 개척해왔다. “설악산 별길은 오련폭에서 망경대로 이어지는 루트에요. 경치가 죽여줘요. 오련폭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풍덩 뛰어들고 싶을 정도지요, 제주도 중문암장에도 개척한 게 있어요. ‘푸른 물결의 선율’, ‘어느 모델의 하루’ 두 코스예요. 해안 관광지다 보니 이름을 그렇게 짓게 되었어요. ‘배추흰나비의 추억’은 개척 당시 산에서는 보기 힘든 배추흰나비가 날아들었어요. 거기다 추억이란 단어만 덧붙인 거죠.”
자칭 386세대라는 그는 안티 성향도 높다. ‘시인 신동엽길’, 녹두장군길, 2003년 설악산 장수대 석황사골에 개척한 ‘체 게바라길’ 루트 등에는 사회주의 성향이 높은 인물들의 이름을 루트명으로 삼았다.
그가 이렇듯 개척등반에 심혈을 기울여온 까닭은 무엇보다 남들이 안 가본 길을 가장 먼저 가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자화자찬 같지만 제가 개척한 길은 대부분 아름답고, 특히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언제 가도 매력적이고 또다시 찾고픈 암릉”이라 말한다. 그는 사고 전까지 암릉과 암벽 루트 14개를 개척했다. 가히 국내 최다 개척등반가라는 평을 들을 만한 클라이머인 것이다. 그 사이 위험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거의 의식도 못한 채 넘겼다. ‘별을 따는 소년’의 첫 피치는 100~110도의 오버행이다. “거기를 겁도 없이 확보가 없는 상태에서 넘어섰어요. 파트너가 없어 혼자 나섰던 적도 많았죠. 아무래도 직장 다니는 친구들과 시간 맞추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럴 때는 매달아놓은 로프를 어센더로 확보해가면서 루트를 개척하죠. 설악산은 암질이 물러 볼트 하나 박는 데 10~20분이면 되지만 노적봉 같은 바위는 워낙 단단해 하루종일 망치질해봤자 한두 개 박으면 고작이에요. 당연히 힘들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는 산꾼들 사이에서 엉뚱하기로도 이름나 있다. 사실 그는 변변한 직업 한 번 못 갖고 젊은 날을 보냈다. 등산잡지사에 한두 해 지낸 게 전부다. 하지만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지내왔다. 오히려 어느 자리이건 남들을 즐겁게 하는 데 애를 써왔다. 요리 솜씨도 뛰어나 야영장에 도착해 배낭을 풀어놓으면 앞장서 칼을 들고, 각종 야채를 썰어대기를 즐겼다. 많이 마시지는 못하지만 술을 마다해보지 않았을 만큼 술도 즐겼다. 10여 년간 인연을 맺어온 기자는 8년 전 두타산행에 나섰다 댓재 고갯마루 아래의 식당을 숙소로 잡았다. 소주 한 병씩 나눠 마신 뒤 잠자리를 펼 즈음 그는 식당 밖으로 나섰다. 딱 한 잔 술이 모자란다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그는 딱 한 잔 담긴 소줏잔을 손에 들고 그 가을밤을 즐기다 스스르 잠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지는데도 그의 잠든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쳤다. ‘소주잔에 무수히 아롱지는 달빛을 받아 마시면 / 소주 맛이 한결 좋을 거다. / 내 오래된 친구여. / 우리 술잔을 부딪칠 때마다 / 지상의 가장 높은 바람과 그 맑은 달빛으로 / 세상사에 찌든 삶의 때를 벗겨내며 /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삶의 잔잔한 이야기로 / 세상살이 멍든 상처 씻어내고 / 그 빈 자리에 / 우리가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산을, / 그리고 우리의 우정을 / 정갈하게 담아놓자.’ - ‘술 땡기는 날’(김기섭)
“멀리서 바라보면 제가 오르는 기분 들 거예요”
2005년 홍천강에 ‘별과 바람과 시가 있는 풍경’이란 강변 리지도 개척한 그는 2006년에는 영월 서강에 ‘봄날은 간다’와 ‘내가 눈물처럼 사랑했던 여인’ 2개 루트를 개척하다 말았다.
그는 한두 해쯤이면 휠체어를 마음대로 밀고 다닐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며 재활치료에 매진하고 있다. 3년 전 그는 태국 프라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해안에 솟아오른 해벽들이 무척 매력적이었고,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다가도 루트를 하나 내는 게 꿈이었다. |
첫댓글 갑짜기 한편의 시을 위한길 을 개척한 김기섭 선배를 생각하며...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네... 김기범씨에게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만큼 좋은 결과 있기를 빌어 봅니다. 헬멧 필수- 하드프리두라두...
끝까지 희망의끈을~~~ 가지고~~~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