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지도 섬마을
글 :서양화가 오 세 효
우리섬마을 산들은 우리 동네 뿐만 아니라 모든 섬마을들을
당연한 것처럼 아무 말이 없이 폭풍우나 태풍이 휘몰아쳐 와도
항상 보호해 주고 차가운 겨울이 오면 바람을 막아 언제나
따뜻하게 감싸주는, 무척 고맙다기보다 우리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하느님이 천상에서 내려주신 구세주와도 같은 산들이다.
특히 우리 섬마을 사람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신선한 푸른
수목들이 우거진 바위틈과 산속 깊숙이 감추어진 진수 같은 맑고
깨끗한 완전 무공해 천연수로 식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욱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복된 마을이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밤이나 낮이나 산기슭이 뻗어 내린 여러
섬마을 해변들을 따라 항해하면서 풍요로운 수자원의 보고를
더듬으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거센 파도와 싸우다시피 생존의
풍요로움을 만끽해 오는 지상 낙윈의 산과 바다를 동시에 지닌
섬마을인 것도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남단에 차지하고 있는 다도해로서 수
영겁을 통해서도 아무 변함없이 푸른 산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섬들이 마치 오목조목 삼삼오오 짝짓기도 하고 때로는 외따로
떨어져 주마등처럼 홀로 고수하는 신들의 자연과도 같으며
더구나 안개에 가리워져 있는 섬산들 의 모습들은 우아하기도
하고 신비롭기까지 한 자태는 가히 꿈속의 무지개어린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해발 329m의 천황산은 웅위함을 자랑하듯 안개 낀 날이면
다섯 갈래로 뻗어 내린 언덕의 허리에 하얀 구름을 만들어 내고
그 아래로 괴암 괴석으로 빚어진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천해의
조각 작품과도 같은 암벽들이 수영겁을 지새우면서 푸른 파도를
만들어내고 멀고도 가까운 곳들에는 작고 큰 섬들의 절묘한

최남단 좌사리 섬
풍경들을 수놓은 듯 갈라놓았다. 일명 욕지도는 사슴 섬 이라고도 한다.
상촌 부락이라는 용 천사가 있는 곳에 무자년 개척비(戊子년 開拓비)
60주년 기념탑이 있는데 사슴섬에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이라 한다.
처음 이곳 주민들이 이주한 때는 1887년으로 추정된다. 실제 행정적
사료에 따르면 1888년에 임금님으로부터 입도 허가가 내려져 그해 5월에
각처에서 외지인들의 이주가 허용됨에 원산만으로 되고 1923년 사랑도를
병합하여 원량면으로 칭하게 된 후 1955년 7월 1일에 사랑도가 면으로
승격되면서 욕지면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1988년 10월 26일에 입도개척(入道開拓) 100주년 기념 축제를 성대히
치렀는데 올해가 102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곳에서는 신라시대의 금동 여래입상이 출토되었고(국립박물관 소장)
노대리의 패총 동물뼈로 사용한 낚시 바늘 송곳 연모동 후기 구석기
유물과 신석기 시대의 돌도끼 돌 받침 등 토기들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볼 때 아주 그 옛날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들이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고 볼 수 있는 이 섬들의 아름다운 경관과 천혜의
풍요로운 어자원을 지닌 이곳 역사적 사료들이 뚜렷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되는 일이다.
특히 이 곳은 남해의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임진왜란 당시의 왜적의
침입에서 용케도 비켜났던 섬이고, 역사적 현장으로도
뚜렷하게 드러난 적도 없었고, 그야말로 섬마을 그대로의 전설적
사연과 순수성을 지닌 이름 하여 사슴 섬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불가에서 전해온 ‘처음과 끝을 알고 싶거든 석가세존에게 여쭈어봐라
욕지두미(欲知頭尾) 하거든 향어세존(向於世尊)하라)’는 말에서 유래된
듯하다. 구한말까지는 녹도(鹿島) 즉 사슴섬이라 불려왔다는 것은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으로 보아 녹용을 왕실에 진상하기
위해 관에서 사슴을 자연 속에 그대로 방목시켜 왔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외에도 사자섬 총바위 와등개 부근에 많은 전설적
얘기와 유난히 달밝은 밤이면 노적끝 잿고닥 부근에는 지금도 거대한
죽상어들의 울음소리가 사슴 무리 지는 허공에 맴돌다가 밤이슬 되어
내린다고들 한다.


서민들의 교통수단이였던 3등 객실 명성호 갑판위에서
이처럼 욕지도는 가장 순수성을 간직한 남해에서도 멀리 떨어진 한바다의
섬으로서 해수도 청명할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풍부한 어자원을 자랑할
만한 해역을 소유하고 있고 전국 멸치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항만
유역이기도 하다. 욕지수협에서 위탁 판매한 어획만도 연간 약 7억원을
상회하고 부산 충무 등지로 출하한 어획고는 약 30억원에 이르는 어자원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풍부한 어자원을 보유한다는 것은 낚시 어종도
풍부해서 주로 대형의 어종은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전국 어디서나 관광 겸
진짜 멋을 안다는 사람들은 이곳을 자주 찾게 된다. 이곳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충무와 경남 그 중 부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셈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울긋불긋 갑판 위에서 그을린 표정과 희망에 부풀은
꾼들이랄까, 특히 낚시관광객들이 손을 흔들면서 이 곳 섬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민들의 객선 명성호

마을에 연방 도착하는 모습들이 아롱거린다.
나는 항상 먼동이 틀 무렵 동해의 햇살을 받으면서 천황산 중턱 기슭에
올라 사색에 잠기곤 한다. 저 멀리 보랏빛으로 가득한 수평선 너머로
까마득하게 점찍은 듯 산, 산, 산, 차츰 자태를 일깨우면서 밝은 햇살을
받으면서 멀리 보일락 말락 한 곳곳 섬들에 우리 마을을 찾아온 관광객들의
표정들이 안전하게 무인도에서의 밤을 잘 지새웠는지 내려다보면서 언제나
상념이 떠날 날이 없어 새벽잠을 설칠 때가 많다.
금방이라도 선녀와 같은 사슴의 무리들이 뛰놀 것 같은 해송 아래로
바닷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언제나 우리 섬마을은 이토록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할 텐데 요즘 들어 다소 무질서하고 인식부족한 관광객들에
의해 공해가 가중되며 타지방 사람들의 불법어로가 판을 친다는 것은
우리 마을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섬사람들은 육지 사람들과 다른 차원에서 때늦기 전에
공해와 불법 어로의 추방으로부터 상호 인식을 드높여 좀 더 진지한
연구와 대책을 세워나갈 계획에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모두가 한층 더
우리 마음과 주민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솔선수범으로 자연 보호를 해
줬으면 하고 또 나아가서 불법어도 역시 절대로 금해 주었으면 하는
우리 섬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30년동안 무인 고도들과 섬마을 들을 방황하면서 섬마을 사람들에게
갖가지 봉사와 온정들의 발자취를 남겼던 시대에 뱃사공 선장 김판몽 을
대신하여 쓴글 ( 당시 각종저널지들에 게재 )
글 : 1985년 - 오 세 효 -


30년넘게 타고 다니든 명성호 (선상에서 개인작업실 운여하던시절)

당시 80년대 명성호 갑판위 에서 제자들과 함께

당시 선상 작업실 (부산서 욕지간 항해 시간- 5시간 동안 작업할 수 있었음)

필자를 수십년간 무인고도들에 소형선박으로 항해 시켜준 김 판 몽 뱃사공

백도에서

백도의 험준한 벼랑끝에 텐트를 치고 매달려 지내는 모습 |
첫댓글 소중한 추억의 사진자료들을 올려 주셨네요
오선생님의 예술에 대한 지난 시간의 열정들이 느껴 집니다
국내 여행도 평생가도 못가보는 지역이 많지요 사무국장님은 육지 쪽에 많은 인연들을 축적하여 예술에의 영감을 동시에 일구어 나갈수 있어 참 좋은 것 같아요 잠을 자다가도 훌쩍 동으로 서로 마음 내키는데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예술가적 수련에 큰 영양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