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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라는 이름은 본래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강을 보산테(Bosante) 혹은 보사니우스(Bosanius)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강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된 것이다. 그 후 7세기에 슬라브 족이 정착하면서 이 이름을 부족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보스니아는 지형 조건이 좋은 데다 아드리아 해로 통하고 있어 주변의 민족이 힘을 좀 길렀다 하면 반드시 쳐들어와 이곳을 정복하곤 했다. 역사 자체가 이민족 침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스니아는 12세기까지 나라를 건설하지 못한 채 이른바 주페(Zupe)라는 부족 단위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나마 부족 연합의 시대라 열린 것은 탁월한 부족장인 쿨린(Kulin; 1180~1204)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시대를 기점으로 동방 정교회측과 로마 카톨릭이 보스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하는 상황에서 보스니아는 과연 어느 쪽 눈치를 봐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을 했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대명사라 할 이단 종교는 난세일수록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게 마련이다. 10세기경 불가리아의 수도사 보고밀(Bogomil)이 창시한 보고밀 교가 바로 그것인데 이 종교는 실로 발칸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쿨린 보고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완성된 보고밀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물질 세계는 사탄(satan)에 의해 만들어졌다. 인간이 이러한 사탄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금욕주의 생활을 하여 물질과의 접촉을 피해야 한다. 심지어 성경의 구약은 사탄이 만든 것이라 하여 보고밀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했으며 기독교의 핵심 개념인 부활도 부정하였다. 이들은 특히 십자가나 미사 의식, 기독교의 종교 조직 등이 물질과 관계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보고밀주의는 동서의 줄다리기 속에 지쳐 가고 있던 보스니아 인에게는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의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평민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영주나 귀족들까지도 보고밀주의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보고밀 교는 보스니아를 뒤덮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보스니아에 보고밀 교회사 성립되었고 전 보스니아에 영향력을 미쳤던 부족장 쿨린도 보고밀 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곳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의 협조를 얻어 쿨린에게 엄청난 압력을 넣었다. 결국 이에 굴복한 쿨린은 죽기 1년 전인 1203년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이로 인해 보스니아의 보고밀 교는 일시적으로 쇠퇴하지만 향후의 보스니아 역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쿨린이 사망하자 보스니아 내에도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1254년부터 남부 보스니아는 각 지도자인 반(Ban)이 주체가 되어 통치하는 과거의 제도로 복귀했고, 보스니아 북부 지역은 헝가리의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입되고 말았다. 헝가리는 이 지역을 세르비아 북부 지역과 합쳐 마츠바-보스니아 공국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불가리아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로 급조된 것이었다. 보스니아 인은 헝가리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1322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주민이 선출한 ‘반’은 스테판 코트로마니치(Stephan Kotromanic)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바로 보고밀 교도였다. 그의 주도로 1325년 아드리아에 접한 훔(Hum 혹은 흘룸(Hlum)이라고도 함)이라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후일 헤르체고비나로 불리게 된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보스니아는 이 훔을 정복하면서 처음으로 바다로 통하는 땅을 갖게 되었다.
스테판 코트로마니치
헝가리는 잠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세력을 회복해 코트로마니치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보스니아를 초토화시키겠다는 것이 요지였는데, 코트로마니치의 입장에서 헝가리와 싸운다는 것은 결국 자살이라는 의미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그도 쿨린 했던 것처럼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민들의 다수인 보고밀 교도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갔다. 그들은 ‘배교자’ 코트로마니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두산이라는 반을 새 지도자로 뽑아 강력히 밀어 주었다. 두산과 코트로마니치의 전쟁은 결국 두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나면서 보고밀 교도가 다시 득세하는 기회를 잡았다. 이후 두산이 죽자 1353년 그의 사촌인 스테판 트브르트코(Stephan Tvrtko)가 반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 헝가리 군대는 훔 지역으로 몰려가 이를 장악했으며, 이교도 보고밀을 처단하라고 지령을 내리는 바람에 혼전이 가중되었다. 사력을 다한 보스니아 인의 저항 끝에 마침내 1370년 트브르트코가 보스니아의 완전한 주인이 되었다.
스테판 트브르트코
트브르트코는 1378년 불가리아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세르비아의 왕인 라자르(Lazar)의 도움으로 소원이던 왕관을 쓰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아드리아 해에서부터 흑해까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정복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이때가 바로 보스니아 왕국의 전성기였다. 보스니아는 1390년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인 1391년 죽고 말았다. 그 뒤 50년간 보스니아에서는 패권을 잡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라자르
당시 떠오르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발칸으로 서서히 올라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1459년 세르비아 함락, 그리고 1463년 보스니아도 떠오르는 초승달 오스만 투르크에게 떨어졌다. 그런데 오스만 투르크의 보스니아 점령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아오던 보고밀들이 쌍수를 오스만 투르크를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스만 투르크를 환영한 데에는 보고밀의 교리 중 상당 부분이 이슬람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종교적인 친연성도 큰 영향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보스니아의 보고밀 교도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과 함께 그야말로 살판이 났다. 그들은 보고밀과 비슷한 종교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세속적인 특권을 얻을 수 있는 점을 간파해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물론 그들은 제국으로부터 토지와 봉건적 특혜를 부여받아 보스니아의 새로운 특권층이 되었다. 슬라브 인이지만 이슬람 교도인 그들은 오늘날 왜 보스니아에 이슬람 교도가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된다. 보스니아는 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 충원의 보고였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도들에 비해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은 예니체리를 통한 출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의 종교에 대한 관용 정책에 따라 이 지역에서 정교회가 세력을 확장하긴 했지만 카톨릭은 완전히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세르비아측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때부터 하나는 이때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보스니아의 정교회 세력이 세르비아 인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와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보스니아는 1688년, 1690년, 1693년 그리고 1697년 네 차례에 걸쳐 오스트리아 군의 침공을 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마지막 전투 때에는 약 4만 명의 카톨릭 교도들이 슬라보니아(크로아티아 동중부 지역의 한 주)로 이주하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힘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1908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체제에 편입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스니아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목표이며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목표이기도 했다. 항상 두 민족은 보스니아를 장악하기 위해 싸워왔다. 그 대표적인 이론 논쟁이 바로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는 과연 누구인가를 놓고 한판 벌어진 이른바 ‘보고밀의 기원에 관한 이론 논쟁’이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의 주장은 이렇다. 보고밀 교가 번성하던 시대에 보스니아 지방에는 이미 상당수의 크로아티아 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인의 상당수가 보고밀 교를 믿고 있었는데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모두 보고밀 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종교 정책에 그나마 상대적으로 관용을 보여 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곳을 정복하게 되자 이들 보고밀 교도들은 집단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따라서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들은 대부분이 원래는 크로아티아 인이었으며 보스니아 전 인구의 65% 이상이 크로아티아 인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주장도 대동소이하다. 즉 보스니아 지역에는 원래 세르비아 인이 많이 거주했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침략하자 그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 교로 개종했다. 그러므로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 대부분은 세르비아 핏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여기에 한술 더 떴다. 16세기나 17세기에도 많은 세르비아 인이 보스니아로 이주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세르비아 정교회를 버리고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을 믿으며 자신을 크로아티아 계로 생각하는 상당수의 보스니아 인은 사실은 크로아티아 인이 아니라 세르비아 인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의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런데 보스니아의 이슬람 쪽에서는 정작 자신들을 두고 세르비아 인이니 크로아티아 인이니 하는 논쟁이 치열해지자 여간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슬람 쪽은 나름대로 이론을 세워 이 논쟁에 끼여들었다. 이른바 ‘이슬람 민족주의자’로 칭하던 이들이 내세운 자신들의 기원에 관한 이론은 우선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는 원래 오스만 투르크 인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조상은 모두 아나톨리아(오늘날의 소아시아 지방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내륙 지역)에서부터 보스니아로 이민을 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이론은 보고밀 교에 관한 기존의 학설을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즉 보고밀 교도는 원래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라는 것이 거의 정통의 기존 학설이었다. 그런데 이슬람 쪽이 내세운 이론에 따르면 보고밀 교리 자체가 처음부터 이슬람 교로부터 탄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이 이론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슬라브적 요소는 민족적 기원도, 종교적 기원도 아닌 언어뿐이라는 주장이었다. 1966년 공직을 박탈당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수였던 란코비치는 바로 두 번째 이론인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기원을 신봉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란코비치의 숙청은 물론 세르비아의 숙적 크로아티아의 승리이며 동시에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의 승리이기도 했다. 란코비치가 제거되면서 이슬람 교도의 지위는 그 전에 비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란코비치가 건재하던 때에는 이슬람 교도는 민족으로 분류되지도 않았고, 항상 ‘기타 민족’ 등으로 분류되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티토는 이후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는 유고 연방 내에서 여섯 번째 민족임을 내외에 공표했다.
알렉산더 란코비치
티토는 또 보고밀의 기원에 관한 이론 논쟁에도 그 견해를 표시했는데 세 가지 이론 모두 옳다는 다소 애매한 말을 했다. 그것은 물론 이러한 이론 자체가 민족주의를 경쟁적으로 활성화시키려는 악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 이 같은 논쟁을 중단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음을 물론이다.
티토
티토가 이슬람 교도를 유고 연방 내의 민족 집단으로 분류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보스니아 인은 1961년부터 민족 집단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1964년 사라예보에서 여린 보스니아 공산당 제4차 전당 대회는 보스니아 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세르비아 인이나 크로아티아 인처럼 완전한 민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보스니아 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민족 집단으로 규정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요소가 강했다. 이 개념 속에는 세르비아 인, 이슬람 교도, 크로아티아 인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도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문제 제기를 처음으로 한 사람은 사라예보 대학교 교수였던 모하메드 필리포비치였다.1967년 그는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교도 집단이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 인처럼 독자적인 민족 집단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필리포비치 교수는 공산당에서 축출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논리는 그대로 보스니아 공산당으로 흡수되었다. 이듬해 2월 열린 보스니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제18차 회의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이 독자적인 민족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측은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같은 해 5월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세르비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제14차 회의에서는 보스니아측의 일방적 선언을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넌센스’라는 말이 그 결론이었다. 보스니아측의 이니셔티브는 사실상 유고 연방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보스니아 인이 유고 연방 내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는 연방에서 실시한 인구 센서스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실시된 인구 센서스(1948)에서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는 세 가지 민족 집단으로 나누어 분류되었다. ‘세르비아 계 이슬람’, ‘크로아티아 계 이슬람’ 그리고 ‘인종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이슬람’이 바로 그것이었다. 1953년에 실시된 인구 센서스에서는 여전히 이슬람 교도가 민족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종교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이 센서스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인종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이슬람 교도’라는 과거의 분류와는 달리 ‘인종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유고슬라비아 인’이라는 민족 집단 개념이 일부 도입되었다. 여기에서 인종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유고슬라비아 인의 대부분은 물론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였다. 1961년에 실시된 인구 센서스에서도 이슬람 교도에 대한 개념 규정에 있어 일부 글자 수정이 이루어졌지만 그 내용은 1953년 인구 센서스와 대동소이했다. 즉 1953년의 ‘인종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유고슬라비아 인’에서 ‘인종적인 의미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인’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슬람 교도가 독자적인 민족 집단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세르비아의 란코비치가 제거된 후인 1971년 실시된 인구 센서스에서였다. 특히 이때에는 보스니아에서 민족주의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슬람 교도들은 인구 센서스에서 스스로 민족 집단의 의미로 ‘이슬람 교도’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유고 연방 내에서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른바 ‘이슬람 민족주의 운동’은 사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이슬람 부흥 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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