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내일 날씨 좀 봐줘”
“비 안 온대. 걱정 마.”
봄 내내, 조카는 가뭄에 시달리는 듯했다. 부산, 바다, 비록 입 밖으로는 두어 번 꺼냈을 뿐이지만 퍽퍽해진 마음에 켜켜이 쌓이는 누런 흙먼지를 씻어내려면 망망대해가 필요했으리라. 조카 친구 S도 동행이다. 이번 부산 여행이 조카 가슴의 봄 가뭄을 촉촉하게 적셔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침 발걸음이 가벼웠다.
서울 나가는 길 시내버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쿵! 가슴이 출렁였다. 순간 아찔했다.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그가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에 동의하고, 퇴임 후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삶의 모형을 만들어가는 것에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퇴임 후에 비로소 그를 재발견한 셈이다. 어느 유명인인들 각색되지 않으랴. 그러나 그의 모습은 그렇게 각색되었다 해도 남달랐다. 나는 거들먹거리지 않는 그의 소탈함과 진지한 탐구와 치열한 논쟁을 좋아했다. 한 마디로 그는 멋졌다. 그를 둘러싼 정치자금 추문들이 들릴 때는 속상했지만, 잘못이 있다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될 일이다. 검찰과 언론의 주고받기를 보며 산 권력이 죽은 권력을 상대로 못난 싸움을 참 오래도 한다, 싶었는데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동안 검찰 수사가 정도를 벗어나 '노무현'이라는 인격을 향해 교묘하게 모욕주기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는 자살이란 방법으로 이 치사한 정치놀음을 거부했다. 조카와 나는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간간이 이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나눴다. 이건 자살이 아니라 정치적 타살이다.
KTX 빨라서 좋다. 책 두어 쪽 읽고, 군것질 한 번 하고, 수다 몇 번 나누고 차창 밖 풍경 몇 점 구경하고 잠깐 졸고 나면 부산이다. 대전 부근에서 잠시 가랑비가 내리더니 부산은 약간 흐리기만 했다. 여행하기 딱 좋은 날씨다.
부산대교를 지나자 도로는 갑자기 좁아져 꼬불꼬불 골목길이다. 승용차나 관광버스를 탔을 때는 못 알아차렸다. 태종대 가는 시내버스에서 새로운 여행의 매력을 느낀다. 가로수도 낯선 나무다.
“이 나무 이름이 뭐지? 특이하다.”
“아마, 야훼나무일걸”
“야훼?”
“아, 아왜”
몹시 허기졌다. 태종대를 일주하는 다누비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부산오뎅 하나를 먹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던데 별맛이 없는 것 보니 부산오뎅의 명성도 이제 한물 간 옛말인가 보다.
전망대를 지나 등대에서 내렸다. 태종대 전망대는 유리벽에 갇혀 있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바다는 한 겹 경계선 밖에 존재한다. 한 겹 경계선의 재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대상은 달라 보인다. 보이는 것이 본질을 우선하는 세상이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일은 피곤하다. 그것은 늘 각성을 요구한다. 바다만이라도 그런 피곤 없이 그냥 보고 싶어 태종대에 오면 전망대가 아닌 등대에서 바다를 만난다. 부산, 가 본 곳이 그리 많지 않지만 태종대 등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살짝 낀 연무에 바다는 햇빛과 놀지 못한다. 흐릿한 바다 위로 간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전하는 목소리들이 파도 소리에 묻혀 흩어진다. 낭떠러지 바위 끝에 앉아 있는 조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물끄러미 한동안 조카의 등을 바라보았다. 과연 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며 조카를 현실과 타협해서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나, 내가 타성에 젖은 어른이어서일까. 나도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잘 적응해왔다. 그래서 이 세상 직업으로서의 일은 아주 싫지만 않다면 자기 삶을 지탱하는 구조물로서 수행할 수 있고 그 수행과정에서 보너스처럼 보람과 즐거움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십대 후반, 나는 안정된 직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소통하는 일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얻고 있었다. 비록 유능하지는 못할지라도 좋은 교사는 되고 싶던 그 시절 내 청춘은 푸르게 넘실거리는 바다였을까.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었을까. 그저 졸졸졸 흐르는 실개천이었을까. 내 삶이 푸른 바다이기를 꿈꿔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실개천 같은 내 삶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가끔 강물을 향해 부러운 시선을 무심히 툭! 한 번 던져 보기는 했으리라.
태종대 등대 근처 바위 높이는 꼭 봉하마을 뒤 부엉이 바위만큼 되지 싶었다. 같은 높이라 해도 바다에 투신하는 것과 산 아래로 투신하는 것은 참 달리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깊이 잠수해서 안기는 것과 바위에 부딪쳐 몸이 부서지는 것은 고통의 감각이 다를 것이다. 나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가끔 까르르 웃기도 하고, 가끔 다리 아파 쉬기도 하고, 가끔 사진도 찍다가 좌판에서 멍게와 소라를 먹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좌판에는 술 한 잔이 곁들여져야 제격인데 그러지 못했다. 두 젊은이는 사이다로 소주를 대신했다. 내 눈치를 보았을까? 아직 술 마시기엔 너무 이른 대낮이었을까?
센텀시티역 신세계에 도착했을 땐 이미 7시가 훌쩍 넘었다.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은 나란했다. 두 공룡 유통업체가 부산의 돈들을 빨대처럼 빨아들일 것 같다. 거대 자본의 외양은 늘 쾌적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이런 곳에 들어서면 잠시 이성이 마비되고 감각만이 도드라지게 살아나는 것 같다. 물신의 욕망은 참 무섭다. 소비를 통해 내 존재가 확인된다. 필요가 아닌 욕망에 의한 소비가 자본주의를 키우는 거름이니 이 또한 탓할 일만은 아니다. 나도 70% 할인이라는 유혹에 넘어갔다. 두 젊은이는 이 상표가 70% 할인을 한다는 것 자체에 반응했다. 저 옷을 입고 출근할 수 있을까. 사고 보면 출근용 옷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왜 출근용 정장보다 단순한 외출용 옷들이 더 마음에 들까. 출근보다 일반 외출이 한 사람을 더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다. 아무렇게 걸친 듯하지만 멋스러워 눈길 주게 만드는 옷을 입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다. 어차피 옷일 뿐이다. 개성적으로, 멋있게, 유행 따라 제 아무리 용을 써 입는다 해도 결국 외피인 것인데 입고 싶은 욕망을 밀어내는 일은 때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입고 싶던 옷도 들고 싶은 가방도 신고 싶은 구두도 참 많았지만, 화려한 꽃무늬의 38만원짜리 후레아 롱스커트는 끝내 눈에 밟혔다.
센텀시티 신세계에 온 목적은 쇼핑이 아니다. 네이버에서 ‘밥장’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미술가의 벽화를 보러 왔다. 조카와 친구는 이 사람의 펜화를 좋아한다. 그의 이력이 이채롭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잘 나가던 회사원, 그림이 좋아서 사표내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하여 이제 여기저기 벽화도 그리고 발표도 하고 있다. 하얀 벽에 그려진 그의 펜화는 섬세하고 동화 같다. 스케치도 없이 그린다니 놀랍다. 두 작품은 조명이 제대로 안 되는 구석진 곳에 걸려 있어서 안타까웠다. 갤러리에서는 스누피전이 열리고 있다. 말풍선 속 '행복이란?'를 찬찬히 읽었다. 행복, 참 소박하다. 노무현, 그도 봉하마을에서 동네 사람들과 소박하게 저런 행복을 누리고 싶어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배가 고파 지쳤다. 마침 전문식당가에 ‘금수복집’이 있다. 부산에 오면 이곳에서 복지리를 먹고 싶어진다. 해운대 원조집보다는 맛이 덜했지만 국물 한 숟갈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지아님과는 10시 넘어서야 통화를 했다. 내일 아침에 만나기로 하고 해운대로 갔다. 나는 숙소가 우선이었는데 젊은이들은 밤바다가 먼저였다. 덕분에 밤바다를 잠시 즐겼다. 어둠 속을 맹렬히 달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예전엔 그저 ‘참 멋지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엔 좀 다르다. 부서져 소멸하는 것이 어디 파도뿐이랴. 부서져 소멸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파도의 숙명에서 문득 노 전 대통령의 투신이 오버랩되었다.
더블 침대와 싱글 침대 하나 놓인 숙소는 주말요금 12만원을 요구했다. 좀 비쌌지만 이미 밤 11시다. 다른 숙소 찾아 헤매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오늘 밤 저들이 나눈 몸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맹렬히 달려와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랑을 나눴다면 이 밤을 오랫동안 기억하겠지. 조카와 친구S는 옷을 갈아입고 놀러나가고 나는 인터넷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었다. 비로소 그의 죽음이 실감났다.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연민과 비통함과 분노가 뒤섞여 가슴이 저렸다.
새벽 한 시가 넘어도 조카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노파심에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좀 멀리 나왔어요. 프론터에서 보조키 받아서 들어갈 테니 먼저 주무세요.’
나는 잠들지 못했다. 이런저런 상념들에 뒤척였다. 3시 가까워진다.
‘빨리 들어와. 새벽 유흥가 걱정된다. 난 보호자니까.’
‘알았어요.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 마시고 있는데 들어가서 마저 마실게요.’
젊음, 참 좋다!
첫댓글 젊음, 참 좋다..란 말이 인상적이네요. 간결하게 그 말이외에 다른 수식어를 굳이 쓰지않아도 그 풋풋한 느낌이 들어오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저번 주 내내 저를 지배했어요. 회사가 시청 근처라서 노제 가고 분향소 가고 해서 그동안 미안함을 상쇄해본다고는 했는데.. 정말 많이 아프더군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최진실,노무현 전대통령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것 같아요.~미루님 보내주신 글 너무 잘 읽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못드리고..감사하게 생각해요.~^^
젊음, 참 좋다, 조카도 이 문장이 좋다고 하더군요. '젊음, 부럽다.'로 하지 않아서 좋대요. 시청 근처가 직장이었으니 일주일 동안 마음이 무거웠을 것 같아요. 가까이서 보는 것이 다르잖아요. 사람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다르겠지만 참 안타까워요.
태종대에서던가? 그 바위들에 올라 오륙도를 맨눈으로 찾던 기억만이 남아 있군요! 가볍게 떠나 올 여행이 조금 무거워진 듯 해보이지만 마지막 문장이 그래도 그 무거움을 조금은 덜어내는 느낌입니다.
나는 가나아트에서 오륙도를 맨눈우로 찾아보았어요. 작년에 선명히 보이더니 올해는 연무 때문에 부옇게 형체만 살짝 보였어요. 그 동안 너무 가볍게 살았어요. 잠시 무겁게 생의 의미를 물어보는 순간이 있ㄴ느 것도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요.
실개천은 작은 생명들 아무데로나 흐르지만 아무렇게는 살지 않는 햇빛과 달빛 가난한 곳,^^ // 전 부산에서만 이십년 넘게 살았습니다. 이 밤에 괜히 읽었다,, 이럼시롱 궁시렁거리고 있습니다만 근황이 궁금했던터라 _반가운 마음 내려놓습니다.
연꽃만나러가는...님 부산에 사시는군요. 부산, 갈수록 매력이 넘치는 멋진 도시더군요. 속속들이 이뻐하며 즐기세요. '햇빛과 달빛 가난한 실개천' 너무 좋아요.
살았습니다에 '-었-' 과거시제가 빠졌네요. 실수가 잦은 요즘입니다. 이쁘게 봐주세요.^^ // 물체의 밖에서 노닐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즐거운 거라는 옛 사람의 말처럼, 오늘내일,, 즐거운 웃음소리와 함께 잘 보내세요. 저도 그러겠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들은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울림이 있군요.
네~ 권력의 무상, 삶의 무상,죽음=생 이라는 화두에 젖었던 기억이 되살아 나는군요. 해운대,수영만이 제가 소년기(초등5,6학년)를 보낸곳입니다. 바다의 4계를 몸소 체험하고 느꼈던,...여름이면 해녀들과 미역,파래,담치,멍게도 따고, 왼 종일 해수욕을 하고, 까맣게 그을려서 눈알만 하얗게 반짝이는 소년이 여름바다의 거친 파도와 싸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네 삶도 파도와 같죠? 출렁임이 클수록 아름다워지는거 아닐까요? 잇빨이 억센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 종벽한 곳의 삶 말입니다. 어차피 우린 에고의 거친파도위를 항해 하는 중이니까요. 실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네 그래서 우리들은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감동하지요.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두려움이 많아서 바다의 파도도 삶의 파도도 회파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겨서 큰일이랍니다. 파도를 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데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어요. 소유윤미은 그러지 않은 분이시겟지요. 근래에 자주--일년에 한두번--부산에 가는데 정말 깔 때마다 멋진 도시라는 인상을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