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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12년 여름호.
<서정시학 집중 조명> -신작시
쇠물닭의 책
―우포늪에서 외 4편
윤후명
마름열매 까만 별처럼 물속에 가라앉은
가을 늪에 이르렀다
읽지 못하고 덮어둔 책들처럼
가을 늪은 어둡다
그러나 쇠물닭 날갯짓하던 물길은 어디엔가 있으리라고
눈을 열면 어두운 늪 속에 하늘이 열린다
어두운 게 아니라 맑은 것
땅과 함께 하늘이 열린다
푸드득푸드득, 살아온 날의 소리
가을은 잎사귀를 떨구며
뿌리마다 마음을 갈무리하고 있다
뿌리마다 마음을 닦고 있다
닦은 마음이 거울 되어 쇠물닭의 물길을 열면
읽지 못한 책들이
푸드득푸드득, 날개 치며 살아나
맑은 페이지를 펼친다
마름열매 별빛에도 글자들이 매달린다
망고나무의 사랑
원숭이들이 망고나무에서 망고를 딸 때
나는 원숭이가 되고
원숭이는 내가 된다
나 일찍이 넓적한 망고씨앗으로 배를 만들어
그곳으로 저어간 것을
아는 짐승들 많기에
원숭이 무리에 묻혀 산 지 오래
망고 살 발라먹고 씨앗 버릴 때마다
다시 사람 되는 몹쓸 꿈 버리고
싹틔워 그늘 이루는 나무 한 그루 되기를
기도올린다
감자
새싹 난 감자를 땅에 묻었다
새싹이 무섭게 나를 본다
감자는 무섭다
끼니마다 감자를 먹던 시절이 나타난다
그 시절을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
감자 같은 과거
내가 아닌 나를 보는 두려움
그리움으로 위장한 나는
변복을 하고 그 시절로 간다
들키는 순간 나는 스캔되어
과거에 남고 원본은 폐기될 터
주문진 가는 길 감자밭 가에 서서
흰 꽃 보라 꽃을 헤아려본다
빡빡머리 의용군들이 지나가던 길에 핀
흰 꽃 보라 꽃
유리창
유리창에 부딪쳐 떨어져 죽은 새
피가 부리뿌리에 배어 있다
그다음부터
아무리 닦아도
유리창은 맑아지지 않는다
피가 흐르고
꿈틀대기까지 하는 유리창에
비춰 나오느니 내 모습
뒝벌
뒝벌이 날아드는 집에 살며
뻐꾸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하루 종일
봉창 귀퉁이 오려 붙인 유리조각창
바투 내다보며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뒝벌이 벽을 돌며 웅웅거려도
뻐꾸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오뉴월 볕 익어가는 하루 종일
곧 보리누름이었다
뒝벌 날아드는 집에 하염없이 있었다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윤후명
1946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명궁』『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먼지 같은 사랑』, 소설집 『둔황의 사랑』『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원숭이는 없다』『여우사냥』『협궤열차』『새의 말을 듣다』『꽃의 말을 듣다』, 산문집 『꽃』『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등이 있다.
<대담>
시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것
윤후명․맹문재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근래에 『꽃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를 간행하셨는데,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윤후명 : 지난 3월 21일부터 27일까지 종로구 관훈동의 인사아트센터에서 ‘꽃의 말을 듣다’라는 주제로 미술 개인전을 열었어요. 소설집 제목과 같지요. 첫 개인전이었어요. 여러 매체에서 소개해주었고 관객들의 반응도 괜찮았어요. 화가들이나 화랑에서도 관심을 많이 보였어요.
맹문재 : 그런 좋은 일이 있었네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려요. 선생님께서 주신 도록을 보니까 엉겅퀴꽃이 유독 눈에 띄는데 의도가 있으신지요.
윤후명 : 엉겅퀴꽃은 전 세계에 있는데, 그만큼 잘 자라는 꽃이에요. 척박한 땅에서도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해 서민적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오래 전에 거제도에서 한 3개월 지낸 적이 있어요. 어느 날 거제도 포로수용소 자리에 가보았는데, 황무지 같은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게 엉겅퀴꽃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안고 피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때의 느낌이 강렬했는데, 얼마 전 술을 끊고 간이 안 좋아 약을 먹는데 그 약이 엉겅퀴에서 추출한 거라고…… 그래서 그 꽃을 그린 것이에요.
맹문재 : 『꽃의 말을 듣다』에 나오는 패모(貝母)라는 꽃도 이번 전시에 그리셨군요.
윤후명 : 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차마고도」를 본 적이 있어요. 말을 타고 가던 원주민들이 쉬면서 나무 아래서 무얼 캐는 것을 보았는데, 그게 패모더라구요. 소설에도 등장하지요.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고 나중에 알았어요. 패모는 한약재로 쓰이는데 특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좋다고 해요. 집에서 화분에 키우고 있어요. 백합 종류인데 꽃이 좀 어두워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시와 소설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하신다니 놀랍네요.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새로운 점을 발견하셨는지요?
윤후명 : 그림을 그린 지 한 10년 되었는데 글쓰기와는 다른 과정이 아주 재미있어요. 일찍 시작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요. 한정 없이 빠져드니까요. 하지만 저는 글과 그림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소위 보여주기라는 점에서 그렇지요. 저는 문학과 미술이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장르가 너무 분화되어 있어요. 한 작가가 때에 따라서는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수필도 쓰고, 그리고 그림도 그릴 수 있어야 하지요.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잖아요. 이번 그림 전시는 삶을 정리할 때가 왔으니 전체를 종합해보자 하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해요.
맹문재 : ‘서정시학’에서 곧 시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최동호 선생님께 들었는데 준비는 잘하고 계시는지요?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추구하시는 면이 있는지요?
윤후명 : 이번 시집에서는 물론이고 저는 시를 위한 시를 쓰는 경향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요. 시가 언어를 학대해서는 안 되지요. 시는 삶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가상 세계가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삶을 노래하는 시를 추구하면서 그 속에 심오한 세계인식을 쉽게 담을 수 없을까 고민하지요. 1992년 러시아 공항에서 짐 검사를 하는데 제 가방 속에서 시집이 나오니까 아예 나머지 짐은 검사도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는 경험을 했어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푸슈킨을 초등학생들까지 좋아하는 러시아의 인문주의가 생각나요. 이번 시집은 소설가가 쓴 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쓴 시라는 점을 강조해야겠군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 간행한 시집들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1977년 첫 시집 『명궁』(문학과지성사)을 간행하셨습니다. 시집의 자서(自序)에 “시를 시작할 무렵의 나는 고독함으로 짓눌려 있었으나 지금의 나는 무서움으로 짓눌려 있다.”고 쓰셨는데, 그 상황을 좀 더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실제의 작품들에서는 죽음, 슬픔, 울음, 아픔, 어둠 등의 시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네요.
윤후명 : 그때의 삶이란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었어요. 시를 일상의 삶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보니 보편적인 사회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때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시기였어요. 경제적인 면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지요. 첫 시집은 그와 같이 저의 어려운 삶의 자취라고 볼 수 있어요. 감당하기 어려운 삶에서 빚어진 비명이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첫 시집의 작품들은 호흡이 짧은 편이지만 비유와 문법이 낯설고, 空閨(공규), 熟麻(숙마), 擊劍(격검), 曠闕(광궐), 앵속(罌粟), 無嗣(무사), 孤雁(고안), 老鶯(노앵) 등의 한자어 사용으로 또한 낯설게 느껴집니다. 특별히 의도한 바가 있는지요?
윤후명 : 네, 있어요. 그때는 현대시 계열이 주류였어요. 산뜻한 이미지를 추구하고 삶의 의미를 잘 정리한 작품들이 평가를 받았지요. 저는 그것에 반발했어요. 우리의 삶이란 결론이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다시 말해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본 것이에요. 또 그때는 서양의 이미지나 세련미 등을 시인들이 추구했어요. 저는 그것과 다르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서양에 의지하는 풍조에 반발한 거지요. 그래서 동양 정신을 내세웠는데, 한자어는 그와 같은 저의 의도가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지요.
맹문재 : 첫 시집을 간행한 뒤 15년 만인 1992년에 두 번째 시집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민음사)를 간행했습니다. 이 시집에서 관심을 끄는 어휘는 「빈자(貧者)의 자장가」 등에서 보듯이 ‘양식’이나 「너는 외로운 짐승」 등에서 보듯이 ‘술’입니다. 특히 「끓는 사랑 1」 등에서 보듯이 ‘사랑’이 눈에 뜁니다. 이와 같은 면들이 맞물려 이 시집의 정서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시집을 간행한 즈음의 상황을 듣고 싶네요.
윤후명 : 그때는 세상에서 둘째로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지요. 생활도 어려웠구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모든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저의 이 말에는 정리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맨 위에 있는 가치이고, 맨 아래에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외로움은 안으로 자기를 탐구하는 것, 즉 자아 탐구이지요. 자기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고립되고 혼자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외로움이 벽에 부딪히면 그리움이 생깁니다. 외로움의 결과가 발생된 것이지요. 따라서 그리움은 자기 밖으로 탐구하는 것이지요. 사물에 대한 그리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삶에 대한 그리움…… 이렇게 밖으로 탐구하는 목적이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만남이지요. 외로움이 그리움으로 가서 완성을 향해서 만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헤맬 수밖에 없지요. 모든 탐구의 완성을 사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맹문재 : 두 번째 시집은 평론가의 해설이 수록되는 대신 선생님께서 ‘시인의 말’을 직접 쓰셨습니다. 이 글에서는 선생님께서 얼마나 시인이 되고 싶어 했는지, 가난했던 집안의 상황과 학창시절의 모습, 우리의 현대시가 지향해야 할 방향, 김현 선생님과의 인연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현대시가 전통과 단절되어 있는 점을 아쉽게 여기고 계승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새길 점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이 산문에 근거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들을까 합니다. 우선 선생님께서는 왜 그렇게도 시인이 되고 싶어 했는지요?
윤후명 : 어렸을 때부터 시를 썼기 때문에 시인에 대한 특별한 자각은 없었어요. 무엇을 알고 쓴 것이 아니었어요. 중학교 때 서울에 올라와 친구도 없고 해서 외롭기도 했는데, 아마 글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에요. 흔히 자기 자신에 무엇이 있는 줄 알지만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글을 쓰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맹문재 : 시인이 되려고 하셨으면서 국문과가 아니라 철학과로 진학하신 일 또한 궁금하네요. 철학과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는지요. 학창 시절 얘기를 듣고 싶네요.
윤후명 : 저는 군인 가족으로 자라났어요. 아버님께서는 군법무관이셨어요. 아버님께서는 법조인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문학하는 길을 허락할 리가 없었어요. 아버님께서는 왜 승리자의 길로 가지 않고 패배자의 길로 가려고 하느냐고 저에게 말씀했어요. 왜 법을 공부하지 않고 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느냐며 막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타협안으로 철학과에 진학한 거예요. 아버님께서 국문과 대신 철학과에 가서 자신을 좀 생각하다보면 법 쪽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철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 줄도 모르고 진학했어요.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저에게 법 공부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시를 쓴다고 철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겨우 학점만 받을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소중한 시기였어요. 플라톤, 장자, 맹자 등 고전 강독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고전을 읽고 해석해보는 시간이었는데 참으로 좋았어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김현 선생님과도 소중한 인연이 있지요. 『문학과지성』 창간호에 선생님의 시가 재수록된 일이며, 첫 시집 『명궁』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일이며, 술집에서의 만남 등이 그러합니다. 김현 선생님과의 일들을 듣고 싶네요.
윤후명 : 김현 선생이 간암으로 49살에 세상을 떴지요. 대단한 분이었지요. 김현 선생은 글쓰기, 글 읽기, 술 먹기가 생활의 전부였어요.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아니라 술 마시기를 즐겼어요. 저는 술에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마셨는데, 김현 선생은 그렇지 않았어요. 저에게 청주에 복어 지느러미를 태워서 마시는 술을 처음으로 가르쳐주기도 했지요. 김현 선생은 당시에 인정받는 작가들보다 묻혀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내는 노력이 대단했고 혜안이 있었지요. 참으로 진지한 사람이었어요. 우리 시에 대해서 그만큼 애착을 가지고 천착한 사람이 드물다 싶어요. 문학평론도 문학이어야 한다는 자세는 지금도 본받아야 할 점이겠지요. 『문학과 지성』은 창간호부터 재수록 제도가 있었는데, 정평이 나 있었어요. 그때 제가 시 부문에, 최인호의 「술꾼」이 소설 부문에 재수록되면서 시작되었지요. 저한테는 여러 가지로 고마운 분이었지요. 큰 업적을 남겼는데 일찍 세상을 떠 아쉬움이 커요.
맹문재 : 근래에 세 번째 시집인 『먼지 같은 사랑』(지식을만드는지식, 2012)을 간행했습니다. 이 시집은 육필 시집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출간한 계기가 궁금하네요.
윤후명 : 몇 년 전 육필 시집을 내자고 해서 쓴 것들이에요. 그동안 연락이 없어 안 나오는 줄 알았는데, 올해 갑자기 나오게 되었지요. 세 번째 시집이기는 하지만 육필 시집이라는 차원이 또한 중요해서 신작들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 시집에서 기억할 만한 것 몇 편도 기념 삼아 넣어 냈습니다.
맹문재 : 선생님께서 시를 등단하실 때는 다른 필명을 썼어요. 윤후명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쓰시기 시작했는지요?
윤후명 : 윤후명이란 필명은 소설가 되면서 쓴 거예요. 두터울 후(厚) 자에 밝을 명(明) 자예요. 앞으로는 빛을 많이 쌓는 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제가 옥편을 뒤져서 지은 필명이에요.
맹문재 : 그러면 선생님의 소설 세계로 옮겨볼까요? 선생님께서는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山役)」이 당선된 뒤 시 창작과 함께해오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었잖아요. 이미 여러 곳에서 말씀드렸을 것으로 보이는데, 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윤후명 :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이 되고 싶어서 1년 동안 시 1편을 썼어요. 그리고 회심의 역작으로 여기고 투고했어요. 그런데 다른 신문사의 마감일이 일주일이 남아 있어 그동안 다시 1편을 써서 투고했어요. 오랫동안 쓴 작품은 예심도 못 올라갔고 일주일 만에 쓴 작품으로 당선된 것이에요. 저도 놀랐어요. 그때는 시인이 참으로 대접받는 시대였어요. 오탁번, 권오운과 함께 『주간한국』의 표지에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소설을 쓰게 된 이유는 외면적으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었지요. 출판사에 한 10년 다녔는데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더 이상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리고 내면적으로는 시집을 한 권 내고 보니까 다 안 풀어놓은 것이 있었어요. 앙금 같은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문학을 했다면 그냥 남겨놓을 수는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인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설을 쓴 것이지요. 그때는 여러 가지로 힘들었는데, 죽지 못할 바에는 인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학 자체를 버릴 수는 없었고, 살기는 살아야겠고, 과거처럼 시를 써서는 안 되겠고, 그래서 소설을 쓰기로 한 것이지요. 겨울까지 한시적으로 소설을 시도해보기로 하고 죽기로 살기로 썼어요. 죽음 직전까지 갔었는데 다행히 소설가가 되어 지금까지 살 수 있어요. 저를 뽑아준 이어령 선생님께 인사를 갔더니 시 옆에 가지 말게, 이왕 소설가가 되었으니 시를 버려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것저것을 하다보면 한 가지도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그 당시 저에게는 시가 차지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이제는 좀 자유로워요.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1995년 제19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하얀 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 작품은 개인의 정체성이 민족 차원으로까지 확대한 면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새로운 환경을 통해 좀 더 자아를 탐구하는 면으로도 느껴집니다. 가령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는 ‘류다’라는 여성이 한국어를 배우느라 꺼낸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주인공 자신의 ‘안녕’과 연결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또는 자신을 구하기 위한 길 찾기라고도 할까요? 이 작품을 쓰시게 된 동기나 의도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윤후명 : 중앙아시아를 처음 가보고 놀랐어요. 우리 민족이 거기에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때는 여행을 자유롭게 못 가는 시절이었잖아요. 러시아를 가는데 거기를 들려 간다고 해요. 그래서 보니 그곳에 우리 민족이 살고 있더라구요. 저는 일행과 함께하는 여행에 빠져 거기 남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1달 정도 그곳에 머물렀지요. 그때 우리 민족이 쓰는 말을 새삼 발견했다고 할까요. 우리의 말을 잃어버리면 정체성이 없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1994년 다시 찾아갔어요. 그리고 ‘안녕하십니까’를 소설의 제재로 잡았어요. 「하얀 배」는 그 말을 찾아 키르기스스탄의 호수로 가는 여행 소설인 셈이에요. 루카치가 “소설이란 문제적 인간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말한 것을 보고 다시 음미한 적이 있는데, 제 소설이 그래요. 어쨌든 겉으로 큰 사건도 없고 세속적인 재미도 없는 소설이지요.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소설이니까요. 이 소설이 작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어요. 소설에 사건이 없으니까 과거의 소설 기준으로 보면 가르치는 데 어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만 이 소설이 도입됨으로써 어떤 전환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건이 없는 것도 소설이 될 수 있다고 말이에요. 사실 소설의 개념이 달라져야 해요. 이러한 상황에 조금이나마 환기력을 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의 제목 「하얀 배」는 『백년보다 긴 하루』를 쓴 아이뜨마또프의 작품 제목이기도 합니다. 저는 특히 철도 노동자로서 44년간 함께 일해온 까잔갑과 예지게이의 동료애를 그린 『백년보다 긴 하루』를 좋아합니다. 아이뜨마또프의 「하얀 배」와는 어떤 영향관계가 있는지요?
윤후명 : 아이뜨마또프는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로 글을 쓴 작가이지요. 그의 「하얀 배」는 헤어진 부모를 물고기가 되어 만나러 가는 것을 꿈꾸는 소설이지요. 저는 그 소설에서 큰 도움을 받은 건 없어도 이식쿨 호수를 배경으로 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는 있었지요. 이와 같은 수법은 흔히 있는 것이지만요.
맹문재 : 다음으로는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둔황의 사랑」에 대해서 여쭈어보겠습니다. 이 소설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북청 사자놀이, 강령 탈춤, 금옥, 공후(箜篌), 비천상, 혜초, 석굴암, 둔황(敦煌) 등등 옛날의 인물이나 벽화나 악기나 놀이나 지명 등의 소재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특별히 의도한 바가 있는지요?
윤후명 : 처음에는 「돈황의 사랑」이었어요. 돈황은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예요.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제가 소설을 쓸 때만 해도 잘 모르던 곳이었지요. 제가 돈황을 찾은 것은 의도가 있었어요. 흔히 작가로 데뷔할 때까지는 좋은 소설을 써야 하는데, 데뷔하고 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잘 쓰는 것만으로는 힘들어요. 따라서 다른 사람이 쓰는 것과는 달라야 해요. 달라야 존재 가치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그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예요. 뒤샹이 전시회를 할 때 기존의 작품이 아니라 변기를 갖다 놓은 것이 그 한 모습이지요. 달라야 한다는 것, 이것이 매우 어려운 점이지요.
소설가가 되고 나니 우리 문학의 무대가 좁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외국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시대였잖아요. 그래서 일단 무대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무조건 넓혀서는 안 되고 한국 문화와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실크로드를 연결 고리로 잡은 것이에요. 지금도 신라의 무덤에서 실크로드를 통해 들여온 유물이 나오지요. 혜초가 거기에 갔다는 기록도 나와 있어요. 신라의 혜초 스님이 쓴『왕오천축국전』은 돈황에서 발견되었어요. 세계 3대 여행기 중 하나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중요한 기록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와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는 장소로 실크로드를 잡은 것이에요.
제가 출판사에 다닐 때 실크로드 등 역사서 전집을 담당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읽어봐서 연결시킬 수도 있었어요. 지금 우리나라의 국립박물관에 돈황의 유적이 상당히 있어요. 돈황의 유적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세계에서 많지 않아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인 탐험대가 가서 뜯어온 것이에요. 그런데 일본이 망하면서 못 가지고 간 것이지요. 정말 세계적인 보고입니다. 이러한 면들로 제 소설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에는 사자가 없는데 북청사자놀음이 있잖아요. 인도에서 들어온 것이에요. 이처럼 실크로드는 문화의 원류예요. 그 여러 사례들을 모아 한 편의 문화인류학적 소설을 쓰고자 했지요. 소설의 무대를 넓히고 또 과거의 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것을 쓰자는 저의 의도가 들어 있는 작품이에요.
맹문재 : 둔황은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둔황은 중국 서역 쪽에 있는 고대 불교 유적지로 굴을 파서 만들어 놓은 절이 1,000개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요. 유적 중에서 특히 소개해주시고 싶은 것이 있는지요?
윤후명 : 다 공개는 안 되었어요. 불교의 유적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무역을 하던 곳의 가운데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여러 문화, 여러 요소가 다 있어요. 옛날의 문화를 합쳐놓은 것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지요.
맹문재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윤후명 : 우선 서정시학에서 시집이 나올 예정이고, 러시아로 번역된 『둔황의 사랑』이 6월 즈음에 나와요. 올해는 이번 미술 전시회 하느라고 화집도 냈고, 육필 시집도 냈고, 그리고 소설집 『꽃의 말을 듣다』도 냈네요. 이전의 소설집이 『새의 말을 듣다』였는데, 다음 소설집은 『돌의 말을 듣다』로 할 생각이에요. 그게 언제일는지 모르지만요.
맹문재 : 여러 가지로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좋은 시와 소설과 그림을 많이 보여주세요.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